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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洞爺丸(とうやまる)
일본에서 운행하던 기차 수송 연락선. 홋카이도에 있는 토야코라는 호수에서 이름을 땄다. 2차 대전 중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연락선이 죄다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되거나 항행불능이 되어, 여러 척의 연락선을 건조하였는데 토야마루도 그 중 한 척이었다. 4천 톤급 선박으로 1947년에 만들어져서 아오모리에서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를 연결하는 여러 페리들 중 하나였지만, 아래에 있는 사고 한 건 때문에 네임드가 되었다.
2 토야마루 침몰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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洞爺丸事故
2.1 사고 당일
1954년 9월 26일, 그 날도 토야마루는 아오모리에서 승객들과 철도차량 몇 량[1]을 실어서 츠가루 해협을 건너 하코다테에 도착했다. 그리고 혼슈로 내려갈 열차와 여러 승객들을 실어서 출항을 할 계획이었으나...
2.2 태풍의 습격
문제는 그 날 태풍이 츠가루 해협을 덮칠 예정이었다는 것. 그래서 오후 3시경 토야마루는 이 날 운휴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비가 퍼붓고 파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오후 5시. 이 때 비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도 잦아들었다. 이는 태풍의 눈에 하코다테가 들어가다 보니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낮아진 것이었지 태풍이 물러간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는 이날 오후에 하코다테가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상 예보와도 딱 맞아떨어졌다.[2]
2.3 출항... 그리고...
그리고 승무원들은 결국 출항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이 때부터 망해 가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으니... 태풍이 다시 강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시 하코다테 앞바다에는 많은 비가 내렸고 그만큼 바람과 파도가 강해졌다. 하지만 그런 거 개의치 않고, 그저 태풍이 물러갔다는 기상예보만 믿고, 토야마루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렇게 18시 39분, 토야마루는 승객과 승무원 1309명을 태우고 하코다테 항을 떠나서 아오모리로 항행을 개시했는데, 너무 기상상태가 악화되자 19시 01분, 토야마루는 하코다테 외항에 잠깐 정박해서 바다 상태를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닻을 떨어뜨렸지만......
2.4 최후
태풍으로 인해 미칠 듯이 빨라져 있던 유속으로 인해 닻이 고정되지 않았다!. 뒤이어 파도가 배를 강타했고, 갑판이 낮은 페리[3]의 특성상 바닷물이 그대로 갑판을 넘어서 증기 추진이던 엔진실까지 물이 들어갔다. 결국 동력을 잃게 된 토야마루는 3시간 넘게 하코다테 항 일대를 표류 했다. 그 와중에 선장은 하코다테 인근 나내 해변으로 피항하려고 했지만 엔진이 꺼진 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 22시 26분, 토야마루는 SOS를 쳤지만 너무 늦었고, 단 17분 후인 22시 43분, 침몰하고야 말았다. 타고 있던 승객과 승무원 1309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150명. 무려 1159명이 저 세상으로 갔다. 사망자들 중에는 선거 유세를 위해 자신의 선거구로 갔던 유력 정치인을 비롯해서 홋카이도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도 소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잘못된 기상 예보로 용궁길로 간 배가 토야마루호 한 척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세이칸을 왕래하는 (열차)화물선 수 척이 침몰되었고 여객선인 토야마루에서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와서 그렇지 이들 배의 승무원 사망자만 해도 무려 227명이었다.
2.5 사고의 여파
일본판 타이타닉이 따로 없을 수준의 대참사로, 일본 사회는 그야말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옆동네에서 벌어진 전쟁 덕분에 달러가 많이 흘러들어와서 어느 정도 경제의 기틀을 잡고 슬슬 앞으로 전진하던 시기였는데, 이 사고로 인해서 엄청난 심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새로운 배를 건조하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 대타로 세이칸 항로에 투입된 연락선은 부관연락선으로 투입되었던 게이후쿠마루(경복환)였다. 게이후쿠마루는 1960년대까지 세이칸 항로에 투입되었고, 퇴역 후에는 하코다테에서 선상호텔로 재활용되다가 해체되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세이칸 터널의 굴착이 결정되었고, 1988년 결국 세이칸 터널은 완성되어서 더 이상 유사한 사고가 벌어질 일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오모리와 하코다테를 오가는 페리는 아직 남아 있다. 카페리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아오모리나 하코다테 양쪽에서 매일 15회(!) 운항. 다만 홋카이도로 여행가는 대다수의 철도 동호인들을 포함한 외국의 여행자들은 JR패스를 이용해서 열차로 홋카이도로 진입하거나 비행기로 바로 삿포로로 찾아가는 편이지, 이렇게 아오모리에서 배로 올라가는 경우는 드물다.
세이칸 연락선 운항 마지막 날[4] 의 아오모리역 풍경. 참고로 영상에 나온 핫코다마루는 아오모리역 근처에 가면 보존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 ↑ 당시 세이칸 터널은 계획만 되어 있던 단계였다. 그래서 당시 도호쿠 본선을 따라서 도쿄에서 아오모리까지 운행한 후, 아오모리 역에서 연락선에 기차를 실어서 하코다테로 건너가서 하코다테에서 다시 삿포로로 올라가는 식으로 열차가 운행했다. 지금의 아오모리역과 하코다테역이 바다 방면의 두단식 승강장을 취한 이유는 이것이다.
- ↑ 이 시절에는 인공위성이 없었고, 통신사정도 좋지 않아서 태풍의 눈을 정확히 확인하기 힘들었다.
- ↑ 애초에 철도차량을 실어나르기 위해서 이 배의 갑판은 정말로 낮았다. 해수면에서 겨우 몇 십 cm 가량만 높았을 뿐이었다. 구형 카 페리에서도 이런 경우가 종종 보인다.
- ↑ 1988년 3월 13일. 당일에 세이칸 터널이 개통했다. 어떤 의미로는 희비가 교차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