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내전의 성패를 결정지은 전투. 사실상 로마 공화정은 여기서 끝났다고 봐도 된다.
1 개요
파르살루스 전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벌어진 내전의 최후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는 전투로, 기원전 48년 8월 9일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큰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격파한 카이사르는 사실상 이 시점부터 내전의 승리자로 설 수 있게 되었다.
2 전투 전야
내전 발발 이후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해군력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그리스 방향으로 이동, 대규모의 군대를 편성하게 된다. 해군력에서의 열세로 인해 당장 그리스로의 출격이 불가능했던 카이사르는 로마 입성 이후 집정관에 선출되어 자신의 법적 지위를 확보한 이후 지금의 스페인 지역에 해당하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평정하여 폼페이우스가 구성한 범 지중해적인 포위망의 한 귀퉁이를 무너뜨리게 된다.
그와 비슷한 시점, 때마침 폼페이우스의 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사령관 비불루스가 열병으로 사망하면서 잠시 그리스 일대에 대해 펼친 폼페이우스의 저지망에 구멍이 뚫리게 되었고 이 틈을 타 카이사르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에 상륙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여전히 해군력에서 압도적인 열세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카이사르는 보급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폼페이우스의 보급 거점인 디라키움에 대해 포위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디라키움 공방전은 사실상 폼페이우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이 전투를 기점으로 공세의 주도권은 폼페이우스에게 넘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포위를 풀고 테살리아 지방으로 이동하는 카이사르를 폼페이우스는 추격했고, 결국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사실상 양 군의 모든 것을 건, 로마 공화정의 미래를 건 한판 승부가 벌어지게 될 것 이었다.
3 양 진영의 규모 비교
- 폼페이우스 진영
- 중무장 보병 4만 5천명
- 기병 7천기
- 카이사르 진영
- 중무장 보병 2만 2천명
- 기병 1천기
수적으로는 폼페이우스가 압도적인 우세를 가졌다. 역사상 로마군이 자신들보다 몇 배 많은 병력을 가진 적들을 이긴 적은 많으나 이번에는 이미 망치와 모루 전술을 익숙하게 습득한 로마군과 로마군이 싸우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2배 넘게 차이나는 보병 전력도 문제인데 7:1 수준의 압도적인 기병 전력 열세는 절망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카이사르측에게 유리했던 것은 카이사르와 휘하 군대는 얼마전까지 오랜 전쟁을 치르며 경험을 쌓아 대부분이 고참 정예병이었으나 폼페이우스군은 지휘관 폼페이우스부터가 전투지휘에서 손을 땐지 오래되었고, 휘하 군대도 경험이 극도로 부족했다는 점이었다.[1]
4 전선 배치
폼페이우스는 좌익에 기병을 집중 배치했고, 중무장 보병을 크게 3분하여 좌익에 한때 카이사르의 휘하에서 싸웠던 1군단과 3군단(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지휘)[2], 중앙부에 시리아 주둔군(메텔루스 스키피오), 우익(아프라니우스 혹은 렌툴루스)에 킬리키아 주둔군과 로마 식으로 훈련된 히스파니아 용병들을 포진시켰다. 좌익 끝에는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6400기의 기병이 집결해 있었다.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 형태의 배치라고 할 수 있겠다.
카이사르 역시 비슷한 편성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우익은 푸블리우스 술라[3]의 10군단, 좌익은 안토니우스의 8, 9군단, 중앙은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맡았다. 단 우익의 경우 술라는 명목상의 지휘관 이었고, 카이사르가 10군단과 함께 전투 내내 그곳에 머물며 중요한 전술적 결정을 직접 내렸다. 절대적인 기병 전력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고참병 2천여 명을 따로 분리해 별동대를 편성했고, 기병과 경보병을 결합해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차단하고자 시도했으며, 이 시도는 회전에서 제대로 먹혀들게 되었다.
5 회전
8월 9일 카이사르의 선제 공격으로 전투에 불이 붙었다. 카이사르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대가 폼페이우스군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포진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에 폼페이우스는 돌격하지 말고 대기하고 있다가 먼 거리를 질주해 와 지친 카이사르군을 요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군 보병대는 폼페이우스의 부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돌격을 잠시 멈춘 후 전열을 가다듬어 돌격을 재개했다. 폼페이우스의 계획은 여기서 일단 한 번 어그러졌다.
어쨌든 당시 지중해 최고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카이사르군 중무장 보병의 맹공이었지만, 수적으로 월등히 앞서는 폼페이우스군의 보병대는 그 돌격을 그럭저럭 받아낼 수 있었다. 여기서 폼페이우스는 승부수를 던진다. 폼페이우스는 7천여 기에 이르는 대규모 기병대를 돌격시켜 거대한 망치를 휘둘렀다. 이 전략 자체는 정석에 충실한 것으로, 폼페이우스의 상대가 평범한 지휘관이거나 카이사르의 의중을 파악은 못해도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만큼의 경험이 있었다면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기병들의 수준은 낮은 편이었고, 카이사르는 이걸 이용해 투석병을 기병 뒤에 태워 도발하는 전술을 사용한다. 경험이 부족하고 수준 낮은 폼페이우스 기병들은 그 도발에 넘어갔고, 그들이 카이사르 기병을 따라잡을 즈음 별동대 2천 명이 매복하고 있다가 폼페이우스 기병들을 기습하면서 아비규환에 빠졌다. 물론 수가 많아서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보병을 지원하는 일은 실패하게 된다.
그 다음 카이사르는 기병대와 예비대를 동원해 폼페이우스군의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서 포위섬멸을 위한 진형을 형성하고, 그 다음 공격을 개시했다. 결국 폼페이우스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후퇴하게 된다. 그나마 카이사르의 병력이 부족했고, 폼페이우스 군대를 자기 병력으로 끌어들여 상비군으로 삼으려는 그의 의도로 인해 전멸은 면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군의 전사자는 2백여 명, 폼페이우스군은 1만 5천여 명 또는 6천여 명이 전사하고[4] 2만 4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카이사르의 압승이었고, 내전은 사실상 이 시점에서 종막으로 다가들게 된다.- ↑ 다만 폼페이우스 휘하에도 갈리아 전쟁 때 종군한 카이사르의 군대가 있긴 했다.
- ↑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 당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휘하 군단을 크라수스 휘하에 파견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를 카이사르가 독박(…)을 쓴 셈이 되었다. 과거 폼페이우스의 군단 편성 권한을 빌려 편성한 군단을 폼페이우스가 파견한다고 선언한 것.(…) 결국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을 빼앗긴 셈이 되었다. 물론 이 군단들은 폼페이우스가 꽉 틀어쥔 돌이 되었다.
- ↑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조카
- ↑ 전자는 내전기의 기록, 후자는 폴리오의 기록을 인용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