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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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NAEVS POMPEIVS MAGNVS.

본명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생몰년도 BC 106~48.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천재일 수도 있었던 군인. 잘 나가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엮여서 안 좋은 꼴 보더니 비육지탄의 고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뒤 비참히 죽는다. 그의 아들 역시 이름이 같기 때문에 보통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붙인 별명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Magnus)[1]로 부른다. 그래서 이 항목명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인 것으로, 의미는 '大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1 등장

그의 아버지는 BC 89에 집정관을 지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Gnaeus Pompeius Strabo).[2] 폼페이우스가 18살일 무렵, 로마는 동맹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로마는 아직까진 형식적이나마 로마라는 도시 국가였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도시 국가와의 동맹형태였다. 로마에 자발적으로 복속한 국가, 애초에 형제국이었던 국가, 정복 후 항복한 국가 등 차등 대우가 있기는 했지만 결속력은 매우 좋았고, 그 유명한 천재 전술가 한니발 바르카조차도 그 결속력 앞에 고배를 마셔야 했다.[3]

포에니 전쟁 동안 로마 시민병과 같이 피를 흘리며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 동맹은, 부의 공평한 분배를 거부한 원로원의 병크 폭발로 내전의 불씨를 갖게 된다.

그라쿠스 형제호르텐시우스 법을 동원하여 당시 문제가 됐던 라티푼디움을 개혁하는 법안을 상정함과 동시에, 로마 동맹국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자는 법안도 민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당시 국유지였던 북아프리카의 대농장을 사실상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었던 원로원파의 반발로 암살당하고 개혁은 실패하고 만다.

기원전 91년, 이번에도 호민관이었던 드루수스가 로마 시민권의 분배를 다시 상정하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사 다시 암살당하고 만다. 그러자 로마 동맹은 그동안의 분노가 폭발하여 드디어 들고 일어나 내전이 발생하게 됐다.

똑같은 전술과 똑같은 군 체제를 갖고 있는 동맹시 전쟁에 로마는 국운을 건 총력전으로 대응했지만, 고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삼촌뻘 되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등 쟁쟁한 장군들이 모두 투입되어 있었고 심지어 은퇴한 것으로 여겨졌던 마리우스까지도 등장한다. 이 중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버지인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도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아버지와 함께 참전한다.

18세의 나이였지만 그는 군단 전체에서 카리스마적인 인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분노한 군단병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효과적으로 제지하는 등 지도력과 통솔력을 보여 술라 등 당대의 정치인들에게 주목받게 된다.

2 이레귤러

동맹시 내전이 끝나고 술라가 원정을 가 있는 사이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를 장악, 술라파를 숙청한다. 아버지는 내전으로 죽었지만 아직 어린 폼페이우스는 숙청에서 살아남아, 83년 술라가 원정을 끝내고 돌아오자 마리우스파 공격의 선봉에 선다. 술라가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폼페이우스는 3개 군단을 이끌고 왔는데 이것으로 술라와 많은 이들이 놀란다. 이 3개 군단은 아버지 폼페이우스가 동맹시 전쟁 때 이끌던 이들을 물려받은 것으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군단의 사병화가 얼마만큼 심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즉 군대가 사령관이 죽으니 사령관의 아들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인데, 이 군대가 정부군인 것을 감안한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다만, 본질적으로 따져보자면 로마의 군대는 본래부터 '로마 정부'가 조직한 것이 아니라, '무기를 들 능력'이 있는 '자유 시민'들이 스스로의 재력으로 무장을 하고 시민의 대표인 집정관 아래에 결집하여 구성된 것이다. 그런데,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이 '무장'을 갖추는데 필요한 능력이 몇몇 장군에게 쏠리게 되었다. 이들이 폼페이우스 가문이 자비로 편성한 군단이라면 충분히 '폼페이우스 가문의 소유'라고 볼 수도 있게 된다.[4]

폼페이우스는 이 군단을 지휘하는 것을 술라에게서부터 허락받고 술라 편에서 싸운다. 술라는 폼페이우스의 뛰어난 결단력과 전투 수행능력을 보았고, 때문에 자신의 딸을 폼페이우스와 혼인시킨다.[5]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이 술라의 승리로 끝나자 술라는 폼페이우스에게 시칠리아로 도망간 마리우스파의 처리를 맡긴다.

폼페이우스는 2년간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고 잔인하게 마리우스파를 숙청했고[6] 이로 인해 십대 백정이라 불리며 비난과 칭찬을 동시에 받았다.[7] 마그누스라는 별칭도 이때 붙는다.

기원전 77년 술라가 죽은 해에 레피두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는데, 레피두스가 에트루리아 시민들의 반란에 동조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폼페이우스가 진압하게 된다.

이전에 술라는 자신의 군단병에게 땅을 주기 위해 이탈리아 도시들의 땅을 몰수하였는데[8] 이에 불만을 품은 에트루리아 시민들이[9]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집정관들이 군단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이때 집정관으로서 출진한 레피두스는 엉뚱하게도 이들 반란군과 합류하였고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군대를 맡겨 맞서게 하였고 폼페이우스는 레피두스 군을 격파하고 로마를 지켜낸다. 레피두스는 사르디냐 섬으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죽는다.

반란이 정리되자 로마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군을 해산하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폼페이우스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 군대로 스페인에서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겠다고 대답한다. 세르토리우스는 킨나파의 일원으로 킨나 정부 때 법무관 자격으로 스페인의 총독을 지내다가 킨나가 죽고 술라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대로 스페인에 눌러앉아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를 구성한 것이었다. 이때 세르토리우스는 이를 진압하러 온 로마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으며 그 뒤 원로원을 만들고 화폐를 주조하는 등 이미 스페인의 왕처럼 굴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레피두스를 격파한 시점에서 로마군은 퀸투스 메텔루스 피우스[10]에게 군단을 맡겨 세르토리우스를 상대케 하였는데 세르토리우스는 메텔루스를 상대로 우세를 점해 이미 남쪽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스페인을 점령한 상태였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병으로 스페인의 메텔루스를 도우러 가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의 제안은 스페인이 고전하는 상황에서 타당하긴 하였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폼페이우스가 지금껏 로마 공직을 단 한 차례도(!) 겪은 적이 없는데다 29세밖에 안되는 풋내기라 로마 군단의 지휘권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법이 그렇다, 법이. 한니발을 패퇴시킨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조차도 이 법 때문에 여러 번 형식적으론 다른 집정관 휘하의 쫄병(…)으로 종군했던 적이 있었다. 특히 술라가 로마를 뒤엎은 다음 공화정을 강화하겠다고 민중파의 씨를 말린 뒤 엄격한 나이제한을 만들었는데 술라가 죽자바자 즉각 뒤엎어 버리는 것은 시기적으로 너무 일렀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외에 대안이 없던 것은 사실이었고 이미 폼페이우스에게 레피두스를 막으라고 군단병을 맡긴 것 자체로 원로원 스스로 술라의 법을 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요구대로 그를 스페인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들도 체면을 차려야 했으므로 집정관 대리라는 직함으로 어떻게든 체면을 차린다.

폼페이우스는 곧바로 스페인에서 세르토니우스와 싸웠는데 세르토니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상당하였는지 2년간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막상막하로 버틴다. 폼페이우스가 가져온 물자가 상당한데다 스페인의 부족들을 훈련시켜 당대 최강의 무장수준을 갖춘 로마군을 상대해야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선전인 셈이었다. 이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 추가의 물량공급을 요청해야 했다. 그러나 세르토니우스는 물량의 차이 때문에[11] 점점 밀리고 말았고 마침내 부하에게 암살당함으로써 5년만에[12] 스페인 진압이 완료된다.

이때 이탈리아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로마의 코앞인 베수비오 화산에 터잡고 있었다. 로마는 처음엔 이를 산적떼 소탕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법무관에게 맡겨 처리하려고 하였는데 두명의 법무관이 3-4천씩 이끌고 갔다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빡돌은 원로원은 정식으로 군단병을 편성해 두 명의 집정관에게 2개 군단씩 주어 출동시켰다.

스파르타쿠스는 집정관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갈리아 지역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7만의 무리와[13] 함께 북상하고 있었던 스파르타쿠스의 군을 집정관 렌툴루스가 막았고 스파르타쿠스는 이를 정면으로 공격해 렌툴루스의 군을 격파한다. 그뒤 뒤이어 쫓아오고 있었던 집정관 겔리우스의 군을 공격해 이를 격파해버린다.

두 집정관이 박살나자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일당들은 방향을 바꿔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을 약탈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남하하던 것을 수석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가로막는다.[14] 로마의 최고 부자였던[15] 크라수스는 원로원에게서 받은 돈에 자신의 사비를 보태 8개 군단을 편성한 뒤 이들을 쫒아왔다. 두 개 군단을 이끌던 집정관들과는 달리 8개 군단이나 되므로 스파르타쿠스군은 숫적인 우세를 점할 수 없었고 따라서 스파르타쿠스 군은 격파되고 그는 전사함으로써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진압된다.

이때 스페인의 원정을 마무리지은 폼페이우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는 것에 욕심냈으므로 매우 빠른 속도로 로마로 귀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프스 국경에 진입했을 때 크라수스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잔당들이 달아난다는 첩보를 포착했고 이들을 추격해 5-6천여 명 정도를 전사시킨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스파르타쿠스의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고 선언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주장을 인정하였고 폼페이우스에겐 스페인 원정의 공 + 스파르타쿠스 반란 마무리를 겸해 개선식을 거행케 하였고 크라수스에겐 오베이션이라는 개선식보다 한 단계 아래의 군사퍼레이드를 하게 한다. 이로써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적대감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군공을 폼페이우스가 훔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하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집정관에 출마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크라수스도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집정관에 출마하겠다고 하였고 이 둘은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버틴다. 이에 원로원은 이를 허락하였고 따라서 이들은 그 다음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3 전성기

기원전 70년 집정관에 선출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었던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하는데 이는 원로원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병들의 몰표로 당선된 호민관 가비니우스를 앞잡이로 내세워 각종 특혜를 법으로 통과시킨다.

이 시기 지중해엔 해적이 날뛰고 있었다. 이 당시 로마의 통제력이 약해졌었고[16] 또한 다른 동방의 국가들은 로마에게 얻어터진 이후로 힘이 없었다. 따라서 해적들이 판을 치면서 로마에 수입되는 곡물들마저 위협받자 이를 해결하길 원했던 것이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원전 67년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제안한 법률이 걸작이였다. 폼페이우스에게 모든 지중해와 지중해 해안선의 50마일 이내를 관할하는 권한을 주고 임기를 3년간 주자고 한 것이었다. 로마는 여지껏 군사지휘권을 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준 적이 없었다. 모든 장군들은 그들이 관할한 영역이 있었으나 폼페이우스는 제한 없이 모든 지중해를 관리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로마의 생사여탈권을 폼페이우스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그 이유는 폼페이우스의 군사지휘권의 규모가 다른 장군들을 압도하였고 또한 모든 선단을 장악하게 되므로 다른 장군들의 해양 보급라인도 폼페이우스가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이것을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로마 시민들이 워낙 해적 소탕을 갈망하였고 폼페이우스의 인기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이 법안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3년의 임기를 가진 해적 소탕을 단 3개월만에 일소하는 포스를 보였다. 그는 지중해를 전체를 13개의 구획으로 분할하였고 이를 자신의 장교들에게 각각 맡겨 해적들을 한 곳으로 몰아붙였고, 그 뒤 실리키아라에서 집결한 해적들을 한번에 일소함으로써 지중해 전체를 깨끗이 청소한다. 이때 해적 소탕 방법의 전술은 일단 기본적으로 직접적인 소탕을 피하고 항구를 점령한 후 물과 식량 보급을 끊고, 이 짓을 반복해 해적의 움직임을 쉽게 노출시켜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제압을 성공한 것이다.

3년의 임기 중 폼페이우스가 사용한 임기는 1년밖에 안되었으므로 아직 2년이 남아있었다. 이때 호민관 매닐리우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이 남은 임기를 사용하여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를 제압하게 하자고 제안하고 이는 민중의 환영을 받는다.

미트라다테스는 술라와 싸운 바로 그 미트라다테스로 원로원의 막장 행각에 로마가 붕괴해가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에 치밀한 계획으로 로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르메니아를 포섭하고 중동권의 승인 반 묵인 반을 등에 업고 게릴라 장기전과 소모전으로 로마를 동쪽에서 무너트리고 있던 강자였다.

이때 동방엔 이미 루쿨루스가 파견되어 미트라다테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루쿨루스는 기원전 74년에 부임하여 무려 7년에 걸쳐 미트라다테스와 전쟁을 벌였었다. 그는 휘하의 5개의 군단을 활용하여 미트라다테스의 침략을 격파하였고 도망가는 그를 뒤쫒아 폰투스를 공격하였으며(기원전 71년) 대승한 그는 아르메니아에 도망가서 아르메니아 왕인 티그라네스와 동맹을 맺은 뒤 함께 쳐들어온 이들 연합군을 상당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술로 격파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하지만 뒤이어 이 두 왕을 쫒아 아르메니아의 영토로 진입한 루쿨루스에게 로마 군단병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전리품의 배분 문제로 불만을 품었으며 또한 오랜 전쟁으로 지쳤기 때문에 그리 한 것이었다.[17] 이들은 싸우길 거부하였는데 로마군에 내분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들은 미트라타테스는 소수의 정예군을 이끌고 폰투스 영토로 슬그머니 들어가 반란을 선동하였다. 이런 소동 때문에 루쿨루스는 퇴각을 하였고 이러는 동안 미트라다테스가 폰투스 내의 젤라라는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 본부를 공격해 점령하게 된다. 이 때문에 루쿨루스는 폰투스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되는 바람에 자신의 속주로 되돌아간다. 7년에 걸친 미트라다테스 전쟁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5년 임기를 부여받았고 로마 속주로 아시아에 부임하여 루쿨루스로부터 지휘권을 양도받는다. 이때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는 말다툼을 하였고 루쿨루스는 지휘권을 양도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를 사냥개가 쓰러뜨린 사냥감을 낚아채는 새라며 비난했고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의 탐욕을 비판했다. 사실 폼페이우스의 공적들을 이런 식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 유행이였다. 폼페이우스의 스페인 정복도 그의 전임자에 의해 많은 부분이 진척된 것을 폼페이우스가 마무리 지은 것이며[18] 또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의 잔당이 알프스를 넘어 북상하려는 것을 폼페이우스가 처리한 뒤 이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 그리고 루쿨루스가 거의 다 해놓은 동방 원정을 폼페이우스는 단지 마무리 지으면 되는 것 등등을 포함하면 이러한 비난을 듣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마무리를 짓는 것 역시 중대한 책무이며 결코 쉽지 않은 일이므로 폼페이우스의 업적이 작다고 평가절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휘권을 양도받은 후 본격적으로 미트라다테스 6세를 토벌하기 시작한다. 루쿨루스가 철수하긴 하였으나 그가 폰투스와 아르메니아 두 왕국의 군대와 재산을 거의 전부 소멸시켜 놨기 때문에 꽤나 수월한 작업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보다 두 배나 많은 군단병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루쿨루스보다 더 편안하게 진압할 수 있었다. 그는 파르티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 아르메니아를 돕지 말라고 하였고 이 약속을 받아낸다.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도 폼페이우스 쪽에 붙기로 결심하고 미트라다테스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이렇게 외교적으로 마무리 지은 뒤 폼페이우스는 폰토스 왕국으로 진입하였고 미트라다테스는 이를 저지하려고 북서쪽의 국경으로 나왔으나 금세 격파당하고 폰토스를 버리고 달아난다.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와 달리 이를 추격하지 않았고 놔둔 채 폰투스의 영토 정리 작업에 착수한다.

미트라다테스는 자신이 모아놓은 재산을 모두 털어 군대를 다시 편성해 폰투스에 진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한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로써 30년에 걸쳐 집요하게 로마에 저항한 용감한 왕이 드디어 죽게 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를 진압하라는 임무만 받았을 뿐이나 그는 시리아까지 진격하여 팔레스티나의 하스몬 왕조와 셀레우코스를 합병해 버린다. 이는 월권행위이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두 왕조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로마가 안먹으면 파르티아가 먹을 것이라며 정당화 하였다. 하지만 더 큰 동기는 폼페이우스가 그의 군사적 성취를 더 돋보이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4년 뒤인 기원전 62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미트라다테스의 폰투스 왕국, 셀레우코스가 가진 시리아 영토와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속주가 된다. 폼페이우스가 그동안 정복한 국가의 수는 저 두 왕조외에 자잘한 왕조까지 합쳐 14개나 되었다. 이런 영토의 확장으로 인해 폼페이우스는 로마에게 엄청난 수입을 안겨주었는데 로마의 일년 예산이었던 2천만 세스테르세스가 3천400만 세스테리우스로 증가하게 된 것이었다.

이때 원로원은 집정관이었던 키케로가 카탈리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소동을 처리한 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가 임기를 마치고 그의 군대와 함께 귀국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에 원로원과 시민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그 이유는 폼페이우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원로원과 로마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그와 그의 군대의 규모와 그들이 보유한 동방의 전리품들을 포함하면 로마는 그들에게 맞설 능력이 없었던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이때 마음먹으면 로마를 점령한 뒤 제 2의 술라가 되어 최고 권력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란디시움에 상륙한 폼페이우스는 모두를 놀라게 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군단을 바로 해산해 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폼페이우스가 정치적인 야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거나 혹은 원로원이 로마를 다스려야 한다는 술라의 신념을 추종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폼페이우스는 어떠한 정치적인 움직임을 시도하지 않았고, 단지 원로원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처리한 동방의 일을 승인해주고 또한 군단병에게 토지를 배분해 주길 원했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시기하였고 또한 그가 군대를 해산하였으므로 그에게 겁먹지도 않았다. 폼페이우스의 요청은 지극히 합리적이였고 또한 그가 정부를 뒤엎지 않는 것만으로도 원로원은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부패하고 근시안적인 원로원은 단지 인기 높은 폼페이우스의 체면을 구기는 것에 집중하였던 것이었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의 요청은 무려 3년 간이나 결정되지 않고 시간을 끌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거느렸던 대규모의 군단병은 모두 실업자 신세였으며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저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폼페이우스가 개편한 동방은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카토를 위시한 로마 원로원은 이것을 개의치 않았다. 결국 이러한 원로원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출현을 낳아 이들을 자폭하게 만든다.

4 제 1차 삼두정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당시 반 술라파의 아이콘쯤 되는 사람으로,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순 있겠지만 일단 친 원로원파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항명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 전까진 정치적으로든 여자 후리기든 넘치는 끼를 주체 못하는 탕아 정도였지만, 반 술라파 중에 그나마 살아남은 게 어디야.(…)

그러나 카이사르는 알게 모르게 정치적인 업적을 조금씩 쌓아왔다. 사실 동료 정치가들 중에선 매우 성공적인 편이였다. 그는 안찰관을 맡으면서 거대한 규모의 서커스와 검투 경기를 개최하여 로마 시민의 인기가 매우 높았으며 법무관의 자격으로 총독으로 부임해선 지금의 포르투갈 지역에 해당되는 곳을 군사를 이끌고 제패하기까지 한다. 훗날 갈리아 지역을 제패한 것을 보면 야만족을 제패하는 솜씨는 아마도 타고난 듯…. 참고로 카이사르가 제패한 갈리아 지역은 이탈리아 반도보다 더 넓다….

또한 30대의 나이에 이미 종교 최고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건 라틴어로 폰티무스 막시무스라고 불리는 것으로 종신직이였다. 중대한 실권은 없으나 그래도 명함에 찔러넣기에 이보다 근사한 것은 없는데, 이것은 종교의 최고 책임자라는 타이틀의 무게 때문이였다.

하지만 이런 출세가도를 달리면서도 카이사르 뿐 아니라 동시대의 인물들은 전혀 카이사르의 출세가 빠르다고 여기지 않은 듯 한데…. 이는 폼페이우스가 워낙 괴물같은 속도로 이미 출세로 얻을 수 있는 영예란 영예는 다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카이사르는 옵티무스라 불리는 원로원 기득권 파가 득세하는 원로원 내에서 민중파(파퓰라리) 출신이였다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고 때문에 스페인에서의 총독 임기가 끝난 뒤 귀국하여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나 원로원의 강한 견제를 받아 당선이 불확실 하였다. 이 위기를 해결하고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하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전과를 안고 로마 장군이 한 번 해도 영광이라는 개선식을 세 번이나 했지만, 자기 휘하 병사들에게 제대로 봉토 한 번 지급해주지도 못하는 안습한 상황이었다. 원인은 역시 당시의 國K-1이었던 로마 원로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연합은 서로에게 이득이였는데 카이사르는 집정관 선거와 그 이후의 정치활동에서 폼페이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확실한 표와 무력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그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집정관을 원로원 내에 두게 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당시 상공업과 중산층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크라수스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들 계급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

크라수스가 이 두 연합에 끼어든 과정을 살펴본다면 당시 로마는 세금을 정부가 거두는 것이 아닌 징세업자[19]에게 맡겼었다. 이들 징세업자들은(정확히 말하면 기업) 로마 정부에게 그들이 거둘 수 있는 세금의 최대 양을 제시하였고 이들 중 가장 높은 징수액을 제시한 징세업자를 로마 정부가 지정하게 된다. 그러면 그 징세업자는 이 액수를 알아서 징수한 뒤 로마 정부에게 납부하고 나머지는 그들이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삼두정치가 구성될 때 이 동방의 징수를 낙찰받은 징세업자들은 동방의 경제가 워낙 안좋아 도저히 로마 정부에게 제시한 양을 납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로마 원로원에게 좀 할인해 달라고 통사정 하였는데 로마 원로원은 매우 완강하게 이것을 거부하였다. 크라수스는 이 일에 상당히 깊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두 정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담한 것이었다.

이들은 여기에 키케로를 가담시키려고 유혹하였는데 이는 키케로는 당시 로마의 대표적은 석학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케로는 이것을 야합이라고 생각하여 가담을 거부한다.

이렇게 삼두 정치가 형성되자 카이사르의 집정관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카이사르에 대해 카이사르빠 시오노 나나미는 돈을 너무 많이 빌려준 크라수스가 이제 둘 다 망할 위기에 처하니까 카이사르의 돈셔틀이 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사실 전도 유망한 젊은이에게 부호가 돈을 대주면서 후원하고, 대신 그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당시 로마에 꽤나 있는 일이었다. 카이사르가 빚쟁이 탕아 취급받기는 했지만 이미 꽤 젊은 나이에 안찰관이나 최고제사장을 지내면서 원로원으로부터 어, 쟤봐라? 위험한데? 취급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결정적으로 크라수스는 로마 제일의 부호이자 역사에 남을 대부호이며, 카이사르에게 돈을 많이 빌려줬다고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크라수스가 망하니 뭐니 운운하는 건 논할 가치도 없는 우스운 이야기다. 크라수스가 당시 보유한 재산은 로마제국 전체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규모였으니 대부호라는 표현만으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 2008년 포브스 지에서 현재 가치로 환산한 크라수스의 개인 재산은 약 1,700억 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당시 로마의 풍조는 카이사르와 비슷할 정도로 빚을 진 젋은 정치가가 비일비재하였다. 가령 카탈리나의 음모를 주도한 카탈리나도 카이사르와 비슷한 규모의 빚을 지고 있었으며 훗날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활약한 쿠리오라는 호민관은 카이사르보다 더 젋은 나이에 카이사르 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 로마의 선거가 돈질로 승부가 나는 경향이 횡행했기 때문이며[20] 때문에 야심찬데다 유망한 젊은이들은 빚더미에 허덕인 것이었다.

사실 카탈리나가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것도 그가 집정관 선거에서 두 번씩이나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키케로가 그를 탄핵할 때 시정잡배처럼 묘사하나 실은 꽤나 능력있는 인물이었으며 실제로도 매우 아슬아슬하게 집정관 선거에서 3등으로 탈락하였다.[21] 이로써 빚으로 유지한 그의 출세길이 파탄이 난 것이었다.

이는 카이사르도 마찬가지라, 그가 최고제사장 선거에 나섰을 때 선거에서 지면 집에 돌아오지 않겠노라라고 말했던 것은 낙선은 곧 정치적 종말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당시 로마 정치인들의 상황은 빚더미에 앉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카이사르가 특별하게 취급받아 채권자가 돈셔틀이 되는 상황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라는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당대에 그보다 더 잘나간 인물은 드물다.[22] 여기에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에게 빌려준 돈은 크라수스 재산의 일부에 불과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최고 제사장에 오른 전도 유망한 젊은이였으며 크라수스에게 카이사르는 돈을 얼마를 빌려가든 여전히 쓸만한 말이었다. 즉 크라수스와 카이사르는 어느 일방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과 자금을 주고 받는 공생 관계였다.[23]

원래부터 인기가 많았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지지까지 받자 어렵지 않게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에게 토지를 주기 위한 법안을 내놓았다. 이때 폼페이우스가 동원한 유권자들은 폭도로 변했으며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비불루스는 거부권을 행사하려다 폭도들로부터 목숨을 잃을 뻔했다. 카토의 경우 목숨걸고 연단에 올라 반대 연설을 하려 했으나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이 연단에서 끌어내린 뒤 내쫒아 버렸다.

그 이후 비불루스는 폭도들을 피해 사실상 집정관 직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카이사르가 모든 직을 수행하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해당되는 연도를 집정관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따라서 원래 그 해당되는 연도를 비불루스와 카이사르의 해라고 불러야 했는데 로마 시민들은 비불루스가 아무런 영향력을 못갖게 된 것을 풍자하여 율리우스와 카이사르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약조였던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해주는 문제와 징세업자들의 세금 계약 문제를 해결한 뒤 자신의 임기 이후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집정관으로 밀기로 하고, 자신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한다.[24]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부임한 뒤 수도에 남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 대해 원로원은 이간질을 하였고 이것이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다. 애초에 앙숙이었던 둘은 원로원이 조금만 손을 써주자 금세 동방 속주의 지배권을 놓고 서로를 격렬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걸 눈치챈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중 겨울철에 이탈리아로 내려와 폼페이우스와 회담을 가져, 폼페이우스에게 동방 대신 스페인의 총독 직위를 제시하면서 불안한 삼두관계를 다시 묶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갈리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는 카이사르의 인기는 사실상 폼페이우스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명망이 높아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지 기반인 민중의 지지와 군대의 지지 둘 다 밀려가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25]

결정적으로 균형을 잡아줘야할 크라수스가 본격적으로 일을 말아먹기 시작한다. 크라수스는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돈이나 만지작 거리면서 잉여짓을 할 거라고 예측한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의 기대를 모두 벗어난 짓을 펼쳤다. 바로, 파르티아 원정. 애초에 크라수스가 시리아 따위의 부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훗날 크라수스보다 군사적 재능이 훨씬 뛰어났던 안토니우스마저 나중에 실패하고 만 원정길을, 크라수스가 성공할 리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래도 병력은 제대로 건져서 돌아왔지만 크라수스의 원정은 재앙 그 자체였다.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은 궤멸당했고 크라수스도 전사했다.

삼두정치의 한 축이 무너지게 된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폼페이우스는 결정적으로 원로원파로 넘어간다.[26] 이로서 삼두정치는 붕괴되고 두 영웅 간의 대결의 승자만이 후대의 지배자가 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5 내전과 최후

폼페이우스는 이미 60줄에 접어들었고 그가 동방원정을 성공시킨 뒤 군사를 해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그다지 큰 욕심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카이사르와 대조되었으며 따라서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 점차 호의적이 된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옵티무스의 핵심 멤버였던 스키피오를 장인으로 삼았고 이로써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그 뒤 로마에 식량보급이 지연되는 문제가 생기자 원로원이 밀어줘 단독 집정관이 된 폼페이우스는 적극적으로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법안을 상정했다.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곧 끝나는데 집정관 재선은 약 한 달 후였고, 그 기간동안 카이사르는 반쯤 허용되지만 사실은 불법으로 군대를 지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원로원에서 노려, 집정관을 재선하고 싶으면 군대를 해산하고[27]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하라는 법안을 상정한 것이다. 물론 민간인 신분이라 신변 보호 능력이 없는 카이사르에게 무슨 짓을 할 계획이었는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카이사르는 자신 휘하의 호민관을 등용시켜 계속해서 불리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호민관은 집정관과 같이 합법적인 거부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결국 완전히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폼페이우스와 자신이 군대를 동시에 해산하고 그 뒤 군대없는 총독의 신분으로 집정관을 입후보 하겠다라는 상당히 온건한 제의를 해온다. 이 제안은 폼페이우스와 미쳐버린 옵티무스파의 집정관들이 펄펄뛰면서 반대해 결국 무산된다.[28] 특히 폼페이우스가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자신의 장인을 통해 원로원의 결심을 촉구하고 밤에는 원로원 의원들을 불러모아 훈계성 질책과 격려, 그리고 10개 군단의 군사력을 과시하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침내 원로원은 최종 궁극 오의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 호민관의 거부권과 신변 보호 권리를 무시하고 법안을 통과시켜버렸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된 카이사르는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루비콘강을 건너 쿠데타를 일으킨다. 폼페이우스는 처음엔 북상해서 카이사르와 이탈리아에서 싸우려고 카푸아에 2개 군단을 머물게 하고 로마시 인근에서 징집을 시도하였고[29]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의원들은 몇개의 대대를 이끌고 수비하기 위해 루비콘 강 인근에서 주둔하였다. 그런데 이탈리아 주민들은 모두 카이사르 쪽으로 붙길 원하였고[30] 따라서 북쪽에 주둔한 폼페이우스 쪽의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계속 탈영하거나 항복하는 등 연쇄적으로 분쇄된다. 마침내 이탈리아 주민들이 모두 카이사르를 지지하고 있음을 파악한 폼페이우스는 브린디시움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를 탈출하게 된다.[31]

하지만 폼페이우스 측에 남아 있는 속주도 많이 있었다. 겨우 갈리아, 북아프리카, 본토 이탈리아만 가지고 있던 카이사르에 비해서 배후 세력에서는 아직은 그렇게 나쁠 것은 없는 입장이었다. 여전히 폼페이우스에게 충성을 바치는 부하들이 많이 있었고, 많은 로마 원로원 의원이 폼페이우스를 따라 망명을 했기 때문에 정통성 면에서도 카이사르에게 그렇게까지 꿀리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속주민들은 이탈리아인들과는 달리 로마인이라는 정체성이 없었으며 따라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제패에 대해 이탈리아 반도 내의 로마 시민권자들처럼 높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들은 동맹시 전쟁과도 거리가 먼 속주민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과거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폼페이우스를 지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특히 폼페이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안간 데가 없을 정도로 로마 전역을 누볐는데 스페인에서 세트라니우스 진압을, 아프리카에서는 민중파 소탕을, 그리스, 아시아 지역에서는 미트라다테스 원정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집트역시 폼페이우스가 동방원정군을 보내 파라오의 즉위를 도와주었다. 즉 카이사르를 지지한 이탈리아와 카이사르가 10년 간 총독 노릇을 한 갈리아 지역, 그리고 직접 제패한 갈라아 중부와 북부를 제외한 나머지 속주는 모두 폼페이우스에게 어느 정도 신세를 진 상황인 것이었다.[32]

게다가 동방에서 군대를 끌고 와 이탈리아를 점령하는 예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술라가 해냈으며 훗날 베스파시아누스도 성공하였으니...

하지만 이는 7년 간 갈리아 원정을 치룬 카이사르 휘하의 백전노장들에 비해서 폼페이우스의 부대는 정규 군단이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실전 경험이 적었다.[33] 게다가 입이란 입은 다 데리고 이사갔기 때문에 지휘계통이 잘 정리되질 않았다. 원로원 의원들은 정통성 확보라는 면에서는 폼페이우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그리스에서 이것저것 간섭해대면서 폼페이우스를 괴롭히게 된 것이다.

폼페이우스가 갖고 있던 최대의 장점은 강대한 해군력과 우월한 보급선이었다. 카이사르의 해군력은 거의 없는 수준이라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에 상륙하는 데만도 죽을 고생을 하는데 폼페이우스는 그런 거 없이 여유로웠다.

폼페이우스는 기본적으로 맹장이라기보단 견실한 타입으로, 해적 소탕 시절부터 보급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보급선 확보와 해군력의 우월함은 개전 초기, 적극적으로 승부수를 던져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려 한 카이사르의 패착,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폼페이우스에게 미소를 보내준다.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카이사르가 거의 2배 가량 되는 폼페이우스를 억지로 포위한 이 전투는 여러 모로 말이 많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포위가 됐음에도 해군력으로 계속 무리없이 보급선을 꿰찬 폼페이우스의 승리를 불러왔다.

카이사르는 패배하긴 했지만 군대는 온전했고, 폼페이우스를 흔들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대를 크게 돌려 그리스 서쪽으로 진군해 보급로를 유린했다. 폼페이우스야 최대한 싸움을 피하면 보급에서 유리한 자신이 이길거라는걸 알고 있었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속전속결을 바랐다. 폼페이우스 자신의 우위도 상당 부분 원로원의 명분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폼페이우스도 대회전을 준비하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사령기지 안엔 로마의 옵티무스라 불리는 원로원의 기득권 층의 핵심 인물이 모두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득권 중의 기득권, 즉 대대손손 로마를 떠받쳤던 핵심 귀족 출신들이 대다수였고 폼페이우스는 비록 그들의 써클 안에 받아들여지긴 하였으나 노부스 호무스라 불리는 신참자 출신이였다. 이들은 로마 시내의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 졌으므로 엄격한 군율과 폼페이우스의 지시를 받아야하는 군단 생활에 상당한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들에게 전쟁을 조속히 마무리 지으라는 압력을 수도 없이 받았으며 이것은 폼페이우스가 거스르기 힘든 압력이였다. 여러 정황상, 폼페이우스가 계속 전투를 질질 끌면 당시 군량이 바닥나 식물 뿌리까지 캐서 먹어야 했던 카이사르 군은 이기기 힘든 상황이였다. 폼페이우스가 자유롭게 지휘하였다면 아마 이길 수 있는 기회가 명백히 포착될 때까지 몇 년이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50대 50의 도박같은 회전으로 그를 내몬 셈이였다.

결국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는 그 다운 정석적인 방법으로 카이사르에 맞선다. 정면을 로마 군단병이 상대하는 사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기병을 동원해 측면을 친다는, 고전적이고 정석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다만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질량을 이용해 기병을 일익 배치해서 한꺼번에 카이사르 측면을 쓸어버리려는 전술을 계획했다. 물론, 기병력이 우월한 상황에선 그 무엇보다 강력한 전술이긴 했지만 파르살로스 평원은 7,000이나 되는 기병이 활동하기엔 그렇게 썩 넓은 평원은 아니었다.[34]

카이사르는 기병 전력의 열세를 알고 있었기에 강을 좌측에 두고 포진해서 상대 기병의 이동을 우측으로 한정한 다음, 최정예 보병을 동원하여 기병을 각개격파한다는 임기응변으로 폼페이우스의 기병전력을 완전히 봉쇄하는데 성공한다. 폼페이우스 기병부대가 충분히 속도를 내서 돌격력을 확보하기 전에 카이사르 최정예 보병부대가 긴 창을 들고 폼페이우스 기병부대를 저지했고, 경험 부족에 다수의 귀족으로 구성된 폼페이우스의 기병부대는 카이사르의 보병이 창으로 얼굴을 찌르려 들자 급속히 움츠러 들었다.[35] 그 무렵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보병 부대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부대가 전열 교체를 유기적으로 이루어내며 수적 열세의 피해를 줄이는 사이, 폼페이우스의 기병부대를 구축해낸 카이사르의 기병대와 정예부대가 측면을 잡고 들어오자 폼페이우스의 보병은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카이사르는 자신의 보병 중에 일부를 후방에 내내 대기시키고 있었고 카이사르의 기병이 폼페이우스 보병의 측면을 공격할 때 이들도 기동하여 폼페이우스의 다른 측면을 협공하였다.

이를 본 폼페이우스 자신도 가장 먼저 전장에서 물러나면서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야말로 개털린 이후 재기를 위해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꾀임에 넘어간 부하의 배신으로 나일강변에서 칼빵을 맞아 요단강 익스프레스에 탑승하고 말았다. 폼페이우스는 죽기 전에 토가를 뒤집어 쓰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그 고통을 참아냈다. 하지만 패기 넘치던 전성기에 비해 덧없고 쓸쓸한 인생이었다.항우가 강동으로 가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이런 지저분한 꼴을 안 당했으니 잘한 일인가

이후 그의 목은 승자를 환영한다는 뜻으로 이집트 왕가가 카이사르에게 보냈으나 카이사르는 기뻐하긴 커녕 오히려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렸고[36] 결국 그가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탁하여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세력을 박살내버리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37]

여담이지만 중년 이후로 추정되는 본문의 안습한(…) 조각상 사진과는 달리 젊은 시절에는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였다고….

이 때문인지 몰라도 먼나라 이웃나라라든가 기타 8, 90년대에 나온 학습만화세계사[38] 같은 책에서는 내내 젊은 미남장수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심지어는 실제로는 폼페이우스보다 6살이나 연하인 카이사르가 중년으로 등장하는데 그보다 젊게 등장하고 카이사르에게 존대를 하는 충공깽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으며, 이 때문에 이런 학습만화들로 처음 로마사를 접한 사람들은 실제 역사를 접하기 전까지 폼페이우스를 젊은 꽃미남 장수의 대명사, 혹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아, 카이사르보다는 나이가 젊었던 장수로 잘못 알고 있었기도 했다.(…)[39]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를 아내로 맞았던 사실을 보고 '사위가 당연히 장인보다 나이가 적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묘사를 했던 것인지?

6 평가

카이사르만 없었더라면 폼페이우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장이자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던 위대한 인물로 남았을 것이다. 경쟁자였던 카이사르와 비교해보자면 폼페이우스는 장군으로서의 활약에 비해 정치적 감각이 떨어지고 결국 대결에 패해 몰락했다.

내전 이전까지 폼페이우스가 장군으로서 남긴 활약상은 카이사르보다 뛰어나면 뛰어나지 뒤지지는 않았다. 로마 역사 전체를 놓고 비교해도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했고, 압도적인 작전으로 보기 좋게 킬리키아 해적들을 제압했다.

수십 년 간 로마를 집요하게 괴롭혀왔던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테스의 숨통을 끊었으며, 파르티아와의 우호관계를 수립해 로마의 동방 정책의 기틀을 놓았다. 전후처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와 시리아(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일대를 완전한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다.

정책 면에서의 감각도 상당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 소탕 과정에서 사로잡은 해적들에게 땅을 주어 정착시켰는데, 이후 이 도시들은 소아시아 지역의 경제 회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파르티아와의 우호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로마의 오리엔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첫 번째 인물이기도 하다. 폼페이우스가 세운 기본 방침은 사산 조 페르시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원로원에게 계속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동방원정을 마친 뒤 원로원에게 어떠한 확약을 받은 바 없이 군단을 해산함으로써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의 속주편성안, 고참병 퇴직금 문제를 승인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또한 이를 로마시민들이 불만족스럽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동원하여 평민집회를 통제한 뒤 원로원과 대결하는 수완을 발휘하지도 못하였다. 3년 뒤에 비로소 그는 이런 수순으로 그의 요구를 관철시키는데 실질적인 지휘는 삼두정 하의 카이사르가 한 것을 본다면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수완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삼두정파를 지휘하였던 것은 로마 인근에 머물던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갈리아 전쟁을 위해 자리를 비운 카이사르였다. 당시 호민관에 선출된 뒤 폭력단을 조직해 평민집회를 장악한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전혀 협조적이지 않았고 카이사르의 말만 들었고 또한 원로원이 클로디우스를 막기 위해 밀로를 매수하였을때도 그는 손놓고 있었다. 결국 로마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으나 폼페이우스의 존재가 이것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 남았지만 원로원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조금씩 되찾아오는 것을 방관하였다. 결국 상황이 심각해지자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가 나섰고 그는 루카회담을 열어 다시 정국을 삼두정이 되찾아오게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폼페이우스는 그가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 그런데 애초부터 폼페이우스가 이렇게 카이사르에게 끌려다닐 위상과 입지가 아예 아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카이사르가 삼두정의 실질적인 리더같이 행동하게 된 것은 역설적인 일이었다.

훗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사이가 벌어진 것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입지를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그를 대신하였고 갈리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이 확실시되자 군사적 평판에서마저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능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일인자로서의 자신을 입지를 누군가가 대체하는 것을 참을 수 없이 불편하게 여겼으며 때문에 그는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카이사르와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대결을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폼페이우스는 군사적으로 대결하길 원하였다. 카이사르가 쓴 내전기를 참고하면 폼페이우스는 그 누구보다도 카이사르와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원하였는데 이는 골수 원로원파였던 카토나 역시 골수 원로원파였던 전직 집정관 마르켈루스조차 반대하였던 극단적인 조치였다. 아무리 폼페이우스가 그의 군사력과 그의 군사적 능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하더라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보인 군사적 능력 또한 매우 비범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카이사르에겐 10년에 걸친 갈리아 정복을 해낸 8개 군단이 고스란히 휘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폼페이우스의 이러한 판단은 상당히 의아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 의원들을 거의 협박해 얻어낸 원로원 최종권고의 시기 역시 상당히 적절해 보이지 않는데,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3월 1일에 끝나고 최종권고는 1월 초에 발발하였으므로 원로원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때 논의가 벌어졌을 땐 로마는 비무장 상태였고 카이사르에게 통보를 할 시간적 여유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카이사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최후통첩을 할 이유가 없었다. 위의 토의에서 원로원 의원 중 하나가 우선 원로원을 지킬 군단병을 모집한 뒤 다시 토의에 붙이자는 제안을 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루비콘에 1개 군단과 함께 주둔한 상황이면 그가 즉각적으로 남하할 것이라는 것이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데도 폼페이우스는 바로 최종권고를 선포하게 함으로써 결국 싸움없이 이탈리아를 허무하게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뒤 곧이어 벌어진 카이사르와의 대결에서 폼페이우스는 스페인을 내주고도 그리스에서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해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승전을 제대로 이용하지도 않은 채 그는 곧바로 회전을 벌여 격파당하고 그 결과 몰락하게 된다. 카이사르의 내전기를 보면 폼페이우스는 패주하면서 내가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게 틀림없다라고 한탄을 여러 번이나 하였다는데 그 말대로 당시 군량보급이 힘든데다 디라키움의 패배로 인해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인 그리스 도시들도 모두 등돌려 고립된 카이사르군에게 회전을 걸은 것은 중대한 실책이었다. 당시 두 장군은 당대의 명성이 매우 높은 명장들이였고 또한 내전의 경우 전투의 승패에 따라 도시들이 입장을 결정하게 되었으므로 폼페이우스의 디라키움에서의 승리는 카이사르군을 더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디라키움 공방전으로 인해 폼페이우스가 애초에 생각했던 지구전에 더 적합하게 판이 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갑작스럽게 회전을 건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가 그의 병력의 우세를 믿었다고는 하나 카이사르의 군대는 11년에 걸친 전투를 통해 갈리아, 스페인 정복의 업적을 이룬 정예병력이었으므로 사기가 높았고 전투기술이 매우 뛰어난 병력이었다. 카이사르군의 전투력의 우수함은 카이사르가 쓴 내전기를 보면 자세히 나오는데 히스파니아 전쟁에서 카이사르 휘하의 9군단은 폼페이우스의 군단병들을 상대로 골짜기로 내몰려 포위당한 상황에서 5시간이나 호각으로 버티면서 최후엔 언덕을 기어올라 공격해 적병을 격퇴한 뒤 유유히 빠져나갔다. 또한 디라키움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포위한 상황에서도 폼페이우스군을 수차례에 걸쳐 격퇴하고, 어느 진영에서는 250명의 병력이 2만 명의 폼페이우스 군대의 맹공을 네 시간이나 버팀으로써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파라오가 카이사르가 머무는 자택을 습격하였을 때 그의 휘하에 있었던 단 3천의 병력이 파라오의 2만여 병력의 공격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때 파라오의 병력 중 로마 군단병이 다수 포함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전투력은 매우 뛰어났었던 것이다.

이런 카이사르의 병력과는 달리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가 이끈 병력은 실전이 처음인 병사들이 대다수였다.[40] 이들의 경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폼페이우스가 겨울캠프를 차린 뒤 혹독히 훈련시켰다고는 하나 이 정도의 훈련으로 갈리아에서 8년간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데다 그 이후 내전에 꾸준히 참여한 막강한 정예인 카이사르 군의 전투기술을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다.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단병 역시 포위에 강한 로마군의 편제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카이사르군이 측면을 친 것만으로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가 없다. 카이사르의 내전기에 따르면 그가 보유한 3열의 군대가 공격하자마자 폼페이우스 군은 급격히 무너졌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결국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측면을 공격당해 당황한 가운데서도 한동안 버텼으나 3열의 고참병[41]이 1, 2열의 병사를 교체해 들어오자 이 고참병들의 전투력에 폼페이우스 군이 밀려 그대로 끝장난 것임이 분명하였다. 이를 본다면 위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병력의 전투력의 차이가 승부에 기여한 면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파악하는 것은 총사령관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가 이 점을 충분히 고려치 않은 채 병사들을 회전으로 몰은 것은 총사령관으로써 경솔했다고 말할 수 있다.[42]

이렇게 회전을 걸은 판단착오를 둘째 치더라도 이때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보여준 폼페이우스의 전시작전 역시 의구심을 자아내는데, 카이사르군에게 지나치게 단순하고 정석전인 전술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폼페이우스가 기병전력으로 측면을 쳤다는데 카이사르의 군단병은 의외로 기병의 측면 공격에 대응하는 경험이 풍부하였다. 갈리아 전쟁 초기에서도 헬베티 족이 측면을 급작스럽게 치고 들어왔고, 베르셍게토릭스 역시 기병이 대다수인 갈리아 병력을 이끌고 와 보병이 대부분인 카이사르 군의 측면을 치고 들어왔다. 이러한 상황을 카이사르군은 재빠른 대응으로 해결하였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렇게 측면을 기병으로 습격당한 상황에 대한 경험이 있었던 카이사르의 고참병들이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측면을 치고 들어온다 하여 우왕좌왕하다가 급격히 무너지는 것은 예상하기 힘들다.

기병의 측면돌격은 정석적이고 그렇기에 약점도 없고 사실 그 정도 병력이면 누구나 쉽게 선택할 작전이었기 때문에 작전을 선택한 것은 이해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다. 폼페이우스는 기병을 통한 우회작전을 노렸지만 기병들은 돌격이 실패하자 너무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한 차례 돌격이 막히자 우회기동도 없이 후속 부대부터 전부 전장을 이탈했다. 7천의 기병대 중에서 다시 본진에 합류해서 재정비하는 움직임도 없었고 폼페이우스는 그 무너지는 기병을 재조직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전장 상황에 맞추어서 대응해야 하는 야전지휘관으로써는 실격인 셈.[43] 전략가로서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기병이 통제되지 않고 전투의지도 없이 붕괴된 것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달리 파르살루스 회전까지 약 20년동안이나 전쟁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는데, 이것이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폼페이우스는 그가 가진 정치력의 결여, 그리고 훗날 카이사르와의 대결을 군사적으로 하고자 하였던 호승심, 그리고 여러 차례 보여준 여러 판단 착오등으로 인해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여 몰락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분명 카이사르를 상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군이었고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군을 보기 좋게 격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내전 상황에서 보여준 약간의 판단 착오들은 카이사르라는 걸출한 장군을 상대로는 중대한 손실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폼페이우스는 몰락하고 공화정 말기의 역사적 승자는 카이사르가 되었다.

  1. '大 폼페이우스'라는 뜻. 참고로 술라와 폼페이우스가 살았던 시대에 사용되었던 상고 라틴어식으로는 마그누스가 아니라 '망누스'라고 부른다.
  2. 스트라보는 가문명이 아닌, 외모 덕분에 붙은 별명이다.(사팔뜨기라는 의미)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이름이 모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3.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고배를 마시고 죽었다.
  4. 물론 군단을 편성할 권리가 주어진 적이 없으므로 이 점은 불법에 가깝지만.
  5. 폼페이우스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는데, 때문에 이혼하고 술라의 딸과 결혼한다. 그 뒤 술라가 죽고 술라의 끔찍한 정치적 숙청에 대해 단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술라의 딸과 이혼하고 다른 유력 집안과 결혼한다. 폼페이우스는 훗날 카이사르의 딸과도 결혼하는데, 즉 폼페이우스는 정치적 입장을 바꿀때마다 결혼을 하였으며 역사학자들은 폼페이우스가 6번은 확실히 결혼했고 8번까지 한 것은 아닌가라고 추측하고 있다.
  6. 폼페이우스의 인격 문제를 떠나서, 술라는 정적을 절대 용서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정도 되는 인물이나 겨우 살아남지, 그 외는 어리든 미미하든 씨를 완전 말려버리는 잔혹함을 보인다. 카이사르는 무르게 용서하는 통에 훗날 암살당했다고 시오노 나나미는 기술하지만, 그럼 정적들을 다 학살해야 했단 말이니 이 마초빠의 말은 반만 받아들이기로 하자. 게다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이들은 카이사르의 최측근이라 불릴만한 이들이 다수였고 정적이라 불릴만한 이들은 카이사르 암살과 거리가 먼 곳에 있었다.
  7. 여기서 조금 첨언하자면, 폼페이우스가 숙청을 끝내고 돌아오자 술라에게 개선식을 요구하는데, 술라는 악명이 높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폼페이우스 휘하의 군단병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 로마시 외에서 무력 시위를 감행하고, 로마 내 시민들도 개선식같은 먹음직스러운(…) 축제의 개최를 요구했다. 결국 개선식을 수행.
  8. 군단병에게 땅을 주기 위해 애꿎은 시민들의 땅을 몰수한 것으로 이는 술라의 안하무인인 성격을 보여주는 한 예였다. 군단병의 정착지는 주로 새로 정복한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는 방식을 쓰는데 술라는 자신의 군단병을 자신의 근처에 두기 위해 이탈리아의 로마 시민에게서 땅을 몰수한 것이었다.
  9. 에트루리아는 로마를 끼고 있는 티베레 강 북쪽의 지역으로, 로마와 아주 오랬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지역이었다. 이 시대엔 이미 로마와 같은 나라라는 취급을 받은 도시들이였는데 술라는 이들에게서 땅을 몰수해 군단병의 정착지를 건설한 것이었다.
  10. 그는 마리우스의 파트로네스이자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했던 메텔루스의 아들이었다. 마리우스가 메텔루스에게 집정관 선거를 위해 군대에서 제대해 줄 것을 허락하자 메텔루스는 20세였던 자신의 아들이 선거에 나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롱했는데 이 아들이 바로 여기 나오는 메텔루스 피우스이다.
  11. 로마는 당시 지중해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포에니 전쟁 때보다 더 부유하였다. 포에니 전쟁 때 쌍벽이었던 카르타고조차 로마의 물량에 밀린 것을 감안한다면 한줌밖에 없는 자원으로 싸워야했던 세르토니우스의 패배는 필연적이었다.
  12. 기원전 77년부터 73년까지
  13. 처음엔 30여 남짓의 산적떼가 7만으로 불어난 것이었다.
  14. 로마의 법상 집정관의 바로 아래 직위가 법무관이었다. 그래서 두 집정관이 격파되자 수석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나섰다.
  15. 당시 로마는 지중해 최강국이었다. 그 로마에서 최고 부자였던 크라수스의 재산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16. 지루한 내전을 벌였었고 뒤이은 정국 불안정
  17. 문제는 이 루쿨루스라는 작자가 돈맛을 알았는지 당시 로마보다 훨씬 풍요롭던 동방을 약탈하고 나서 군단병들에게 뿌리질 않고 착복했다. 지휘관은 대저택이 셀 수도 없이 많은데 군단병은 뭐 전리품도 없고 감동도 없고 빡쳐서 작전 수행 거부를 외쳐버리는 바람에…. 그런데 사실 이것도 정확히 말하면, 루쿨루스는 당시 기축통화인 은화는 충분히 나눠줬다. 루쿨루스가 진짜 불만을 산 이유는 장기적인 동방 통치를 위해 그리스인과 척을 지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그리스계 도시를 약탈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가 부하들의 불만을 산 것. 루쿨루스는 보물 많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티그라노케르타의 약탈은 허용했으므로 사실 이러한 비판도 과장이 있다. 여기에 루쿨루스는 동방에서 속주민들에게 유리한 세제 개혁, 이자율 제한, 도시 보조금을 시도했다가 제대로 찍혔다. 여기에 개인적인 앙금이 있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병사들을 선동했다. 안팎으로 파국을 맞은 루쿨루스는 군사 반란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미트라다테스 6세는 이 때 총반격을 감행해서 그 동안 잃은 걸 거의 다 복구한 상황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고 전성기 폰토스의 군사력은 술라와 루쿨루스가 박살을 내놔서 복구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루쿨루스는 어거지로 지휘권을 빼앗긴 이 때의 충격으로 서서히 맛이 가기 시작한다.
  18. 특히 스페인 반란군의 지휘자 세르토리우스는 탁월한 게릴라 지도자였다. 폼페이우스도 혼자 덤볐을 때는 세르토리우스에게 탈탈 털리기도 했다가 메텔루스 피우스의 지원을 받은 뒤에야 세르토리우스를 물리쳤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는 여전히 로마군을 괴롭혔으며 세르토리우스가 암살당한 뒤에야 스페인의 안정이 가능해졌다.
  19. 성경에서 말하는 세리.
  20. 물론 당시엔 선거 관리 위원회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고 뇌물로 유권자 매수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21. 집정관 선거는 대략 10명 정도가 붙는다. 3등이면 매우 유력한 후보라는 의미인 것이다.
  22. 카이사르는 당시 빠른 속도로 출세한 것으로 여겨진 키케로보다 각각 2년씩 빨리 공직에 선출된다. 키케로 항목 참고.
  23. 물론 이 때 카탈리나를 변호하다가 좆망 직전까지 몰릴 뻔한 카이사르를 끝까지 후원한 크라수스도 어느정도 그에게 우호적이였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군사적 경험을 아들에게 쌓게할 목적으로 보낸 것이긴 하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아들을 보내 종군케 했고 카이사르도 후원자의 아들이 가진 재능을 총애하여 '젊은 크라수스', '청년 크라수스'로 부르며 총애했다고 한다.
  24. 로마법상, 총독은 집정관 혹은 법무관을 한 번 역임한 자가 갈 수 있다. 크라수스를 동방(정확히는 시리아) 총독을 시켜주려면 어쩔 수 없이 집정관을 한번 거쳐야 한다.
  25.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당장 내칠 만큼 잘나간 건 아니었지만, 7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사실상 갈리아를 평정한 카이사르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전과를 올리면서 모두를 놀라게 한 건 사실이다. 분파는 조금 다르지만 갈리아의 골족들은 여러 번 로마의 국운을 위협한, 아주 강대한 세력이었다. 물론 카이사르 때 되면 갈리아의 양대 부족인 아이두이와 아르베르니가 싸우다가 둘다 큰 피해를 입고 그 전까지 듣보잡 취급하던 수에비족에게 공물을 바치는 등, 둘 다 좆ㅋ망ㅋ 직전까지 간 상황이긴 했지만 여전히 무시못할 세력이었다.
  26. 이는 카이사르의 딸이었고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가 세상을 떠난 탓도 컸다.
  27. 사실 술라,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같은 애들도 다 무시해서 그렇지, 원칙대로라면 로마 국내에 총독이나 집정관이 무장 해제하지 않은 군대를 끌고 오는 건 명백한 불법이고 반역죄 급의 대죄다. 허용되는 경우는 개선식 뿐. 그나마도 개선식 전까지는 로마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28.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졌으면 독재관 카이사르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며 원로원 주도의 로마는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29. 흔히 마리우스 이후 모병제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으나 공화정 시대에도 징병은 유지되었다. 단 마리우스 개혁 이전과 큰 차이가 있었는데 마리우스 개혁 이전엔 순수히 중산층인 병사들을 징병하였으나 개혁 이후엔 무산자 계급을 중심으로 징병한 것이었다.
  30. 이것은 동맹시 전쟁 여파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주민들은 고작 50년여 전까진 라틴 시민권자였고 동맹시 전쟁으로 인해 로마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이때 로마와 전쟁을 치러 감정이 악화된데다 로마 시민권을 받은 이후로도 그들에 대한 차별은 계속되어 로마시의 기존의 시민들보다 매우 적은 수의 선거구를 수여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책 때문에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전이 발발하였고 마침내 술라가 이겼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차별적 정책은 그대로 확정된다. 카이사르와 옵티무스와의 대결에서 카이사르는 마리우스 계열의 민중파이고 옵티무스는 술라파이므로 이탈리아 북부 주민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 붙고 싶어하였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완료하자마자 원로원이 카이사르를 파멸시키겠다고 나선 것이니 로마 시민들인 이탈리아 주민들이 이것을 곱게 볼 리 없었다.
  31. 이때 시오노 나나미는 이탈리아에서 싸웠어야 했다는 드립을 선사하는데 당대 전쟁영웅인 폼페이우스가 시오노 나나미보다 식견이 낮을 리 없다.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를 떠난 것은 이탈리아 전체가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상황에서는 더이상 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므로 타당한 판단이었다.
  32. 이것만 봐도 당대 폼페이우스가 어떤 인물인가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33. 폼페이우스는 백전노장답게 겨울캠프를 차려 이들을 빡세게 훈련시켰다.
  34. 명백히 승리해야하는 중대한 대전에서 카이사르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전술을 폼페이우스가 구사한 것을 본다면 폼페이우스는 본래 스키피오나 한니발, 카이사르같이 번득이는 군사적인 재능으로 멋진 승리를 쟁취한 뒤 이를 바탕으로 전쟁을 이끄는 재능을 가진 장수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폼페이우스의 많은 업적은 스페인 정복이나 해적 소탕, 동방 정벌과 같이 주로 잔당을 소탕하는 임무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은 것이고, 파르살로스 회전과 같은 중대한 회전을 치른 경험이 알고보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을 본다면 그의 군사적 재능은 과대평가된 면이 없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방식의 재능은 그의 동방원정의 전임자였던 루쿨루스가 가지고 있었다.
  35.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 실린 이야기. 다만 이게 왜곡이라는 이견도 있으니 참조할 것.
  36. 카이사르가 옛 사위이자 한때 삼두정치의 동맹이었던 그의 죽음을 슬퍼했을지, 아니면 악어의 눈물이었을지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37. 사실 진짜 계기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미약했던 클레오파트라를 후원해서 이집트에서 뭔가 뜯어내보려는 거였다. 물론 클레오파트라에 푹 빠져버린건 그 다음 일이고.(…)
  38. '계몽사'같은 출판사에서 20여권짜리 등으로 펴냈던….
  39. 그리고 여담으로, 능인에서 발간했던 "세계 역사 1000년"에서는 위와는 달리 폼페이우스를 카이사르보다 더 나이 많아보이게 그렸다.
  40. 카이사르는 테살리아로 건너가기 전에, "나는 군대가 없는 지휘관과 싸우러 간다."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이는 그런 상황을 정확하게 꼬집은 것이었다. 여담으로 카이사르는 스페인에서 우수한 군대를 보유했던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아우스와 싸울때는 "지휘관이 없는 군대와 싸우러 왔다."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41. 로마군의 편제상 3열에는 가장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력이 포진하였을 것이다.
  42. 사실 폼페이우스 휘하에도 폼페이우스의 동방원정에 함께했고 훗날 문다 회전에서 전멸한 제1군단이라든지 카이사르 휘하에서 전향한 13, 14군단 같은 정예부대가 있긴 했다. 하지만 1군단은 폼페이우스의 리즈 시절에 활동했던 부대를 다시 편성한 거라 너무 평균 연령이 많은데다가 오랜만에 실전에 투입된 부대였고, 13, 14군단 등은 카이사르의 정예부대 중 갈리아 전쟁 1년차부터 투입된 9, 10군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라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43. 이는 좀 다르게 해석해볼 여지도 있다. 기병대는 한 번 돌격이 저지당하면 순식간에 그 기세를 잃는다.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파르메니온이 이수스에서 해낸 기병 지휘나 칸나에에서 한니발 휘하의 하스드루발의 기병 지휘처럼 수준 높은 기병 지휘를 하려면 지휘관의 높은 역량과 우수한 기병이 필요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수스에서 페르시아의 중무장 기병대가 파르메니온의 그리스 기병대를 상대하다가 갑자기 앞을 막아선 폴리스 출신 호플리테스 지원병 때문에 순식간에 그 기세를 잃어버린 점을 감안하면 폼페이우스의 오합지졸 기병대가 순식간에 붕괴된 건 폼페이우스의 자질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당연하지만 다리우스의 페르시아 기병대가 폼페이우스의 기병보다는 훨씬 정예부대였다.) 물론 그런 기병대를 믿고 승리를 기대했다는 잘못은 변하지 않지만. 어찌 보면 폼페이우스의 진짜 잘못은 피아간의 힘의 차이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전면전을 걸었다는 전략적 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