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스

1 중세의 방패

Pav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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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전쟁에서 궁병이나 쇠뇌병들이 사용한 장비로 일종의 방패. 저기 방패 가운데에 있는 툭 튀어나온 부분은 말뚝을 땅에 박고 쉽게 고정시킬 수 있게 만들어진 홈이다.

1.5m가량 되는 대형 방패로 무게도 재질에 따라서 최소 4kg, 무거우면 8kg에 육박한다. 쇠나 나무, 가죽 등의 소재로 만들어져 있다. 게임의 영향인지 요즘은 그냥 '대형 방패의 일종' 정도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한데, 방패는 맞긴 하지만 절대 손에 들고다니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사용법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 병력배치를 하며 말뚝을 이용해 제자리에 고정시키는 것. 요컨데 이동식 장벽에 가까운 물건으로 크고 무거운데다가 제자리에 고정시켜서 써야 했기 때문에 일단 설치한 파비스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다시 움직이는건 거의 불가능했다.

궁수나 쇠뇌병들이 화살을 쏜 후 재장전을 하는 동안, 파비스 뒤로 숨어서 엄폐하는 것이 주된 용도였다. 특히 쇠뇌는 장전시간이 엄청 길기 때문에 그 긴 시간동안 노출되어 있다면 적의 궁수의 반격으로 100% 사망인지라, 파비스는 필수 장비였다.

백년전쟁 도중 아쟁쿠르 전투크레시 전투에서는 프랑스 지휘관들이 파비스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노바 쇠뇌병들을 무리하게 전진배치 시켰다가 장궁병들의 우월한 연사속도에 패퇴,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사례[1]도 있는 만큼, 쇠뇌병과 파비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15세기 중, 후반의 헝가리를 통치한 마티아슈 1세가 파비스를 보병용 무기로 채택한 예도 있는데, 물론 보병에게 엄청나게 큰 방패를 들고 싸우라고 시킨 게 아니라 보병들을 궁병과 총병들을 보조하는 용도로 쓰려 한 것. 즉 궁병과 총병이 당시 헝가리의 주적으로 기병이 강력했던 오스만 제국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수세에 몰리면 파비스를 장비한 보병들에게로 퇴각하고, 원형으로 다닥다닥 붙어 선 보병들이 파비스를 이용해 즉석 방벽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좋았는지, 이 무렵의 헝가리군은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꽤나 좋은 성적을 거뒀다[2].

참고로 중세 시대 사람들 키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라 현재 남아있는 유물들은 현대인이 쓰기에는 좀 작은 편이다. 사진의 인물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대신 현대에도 비슷한 용도로 쓰이는 물건이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만든 대인 방패를 비롯해서 간편하게 설치할 수 있는 방패 몇가지가 시판되고 있는 상태.

서양과 비슷하게 봉건영주들에 의한 합전이 대세였던 중세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카키타테(掻盾)라는 지지대 일체형 거치식 대형방패가 사용되었던 바 있다. 또 조선에도 장방패라 부르는 설치식 방패가 있었다.

현대에 파비스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는 물건으로는 바디 벙커가 있다. 방탄소재로 만들어서 전신을 총격으로부터 어느정도 보호해줄 수 있는 이동식 장벽으로, 방호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량이 수십kg에 달하지만 아래에 바퀴가 달려있어서 파비스와는 다르게 움직이면서 사용이 가능하다.

2 앙신의 강림의 등장인물

아르만 제국의 기사이며 제 2군단장이다.

별명은 신창.

노아부 제국의 헤이호나 신성제국의 테오도르 공작에 비하면 포스가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세계관 최강자 중 한 명이다.

별명대로 창을 잘 쓰며 왼손에 단창, 오른손에 장창을 들면 세상에서 창으로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는 무적의 창수이고 그보다 뛰어난 창수는 역사적으로도 암흑 기사 듀모넴 뿐이다.
시르온 또한 창을 연마해서 귀창으로 불렸지만 듀모넴이 현신하지 않은 본연의 실력으로는 파비스의 창술에 비할 수 없다.

과거 노아부 제국에서 아르만 제국에서 하도 신창, 신창 하니까 한번 어떤 놈인가 떠보려는 의도로 오그스카 산맥을 넘어 노아부 전사들이 도발해온 적이 있다. 그들은 파비스가 폐관 중인 틈을 노려 부하들의 목을 베고 보란 듯이 그것을 땅바닥에 일렬로 쭉 늘어놓고 사라져버렸다. 전부 합쳐서 100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분노한 파비스는 단신으로 열 자루의 창을 짊어지고 노아부로 쳐들어가 똑같이, 아니 일반 병사급 부하를 잃은 아르만과는 달리 같은 숫자의 전사급을 찔러 죽이고 돌아올 정도의 막강한 실력을 자랑했다.

아르만 제국의 노아부 침공작전에 술라와 함께 자신의 2군단을 이끌고 참전했으나 노아부 총사령관 알 마잘리의 수공에 휘말려 2군단이 전멸 당하자 술라의 친위대인 남해의 네 마녀에게 술라를 반드시 살려서 아르만으로 데려가라는 마지막 명령을 남긴 뒤 죽을 생각으로 노아부의 대군에 단신으로 돌격한다. 이때 3백여명의 전사와 2천여명의 병사, 그리고 적의 총사령관인 알 마잘리까지 죽인 후 자신도 죽었다.

사후 그의 시체는 효수되어 노아부에 걸려졌으며 아르만에서는 영웅이 되었고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1. 이때 프랑스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무슨짓을 했는지 이해를 못했는지, 피해를 견디지 못한 쇠뇌병들이 파비스 챙기러 아군 진영으로 돌아오자 그걸 무단으로 후퇴했다고 몰아서 처형하기까지 해댔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프랑스의 대패.
  2. 다만 마티아슈 시대의 헝가리군은 거의 대부분 '검은 군대' 라는 용병대로 이루어졌는데, 당대 유럽에서 최고로 많은 용병대(전성기 시대엔 2만 8천 명이었다)를. 그것도 상비군으로 둔다는 건 비용이 엄청나게 깨지는 일이었다. 결국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며 중과세로 일관한 마티아슈가 죽고 연약한 왕이 즉위하자 헝가리의 귀족들은 용병대를 해산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그후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