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시 전투

Battle of Cré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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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1346년 백년전쟁 초반에 일어난 대규모 전투.

1341년 브르타뉴 계승전쟁이 일어나자 브르타뉴 공작령의 후계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갈등을 빚게 되면서 정전협정이 깨지고 1346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벌어진 전투다. 영국군은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 프랑스군은 필리프 6세가 각각 지휘했다.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에 상륙 응? 하여 캉을 공략하고 파리를 침공했으며 이후 보급의 문제로 플랑드르를 향해 북상했다. 영국군은 가는 곳마다 사정없이 털어먹으며 농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초토화 전술?[1]

한편 필리프 6세는 병력 모으는데 시간이 걸렸던 지라 영국군이 깽판을 치는 동안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나 깽판치고 다니는 것도 더 두고 볼 수 없고 병력도 모았고 해서 영국군을 추격, 8월 26일 크레시에서 영국군을 따라잡는다.

병력은 사료마다 다른데, 영국군은 6 천에서 1만 2천. 프랑스군은 2만에서 10 만으로 나온다. 영국측 자료들은 영국군을 최대한 줄이고 프랑스군을 최대한 늘리며, 프랑스군은 반대로 프랑스군을 최대한 줄이고 영국군을 최대한 늘린다. 영국군은 1만~1만 2천, 프랑스군은 3만~4만 가량으로 보는게 중론. 중기병은 영국은 2,300 에서 3천가량, 프랑스는 2/3 에서 대부분을 중기병으로 본다. 또 프랑스군에는 4~6 천명 정도의 제노바 쇠뇌병들이 있었다. 하여튼 프랑스군이 영국군보다 3~4 배는 많았다.

2 전개

2.1 오게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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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은 크레시 인근 구릉지에 진지를 구축한 채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모든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령했으며 하마(下馬)기사와 보병들을 3개로 나누어 배치했다. 장궁병부대는 역V자의 양익에 배치되었는데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위해 구덩이와 통나무 등등 장애물을 설치했다. 그리고 자신과 측근은 후방의 언덕 풍차에 진을 치고서 전투를 지휘하기로 했다.[2] 흑태자 에드워드는 전방에서 보병대를 지휘하게 했다.


그리고 전투태세를 마쳤을 때 프랑스군이 도착했다.

2.2 어택땅

프랑스군은 고용한 제노바 쇠뇌병을 앞에 세우고 후열에 기사들을 배치했으며 공격의 시작은 프랑스 궁수대의 사격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궁수대가 선빵을 날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곧 쏟아지기 시작한 영국군 장궁대의 화살세례에 그대로 개발살.[3][4]

결국 프랑스 궁수대는 장궁대의 반격에 밀려 후방에 두고왔던 파비스를 가져오기 위해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뒤에 포진해있던 프랑스 기사들은 겁쟁이 쇠뇌수들이 도망간다고 생각하고 이들을 베어버렸다.(…)

2.3 이건 미친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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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수대가 아무 힘도 못쓰고 발리자 후열의 기사들이 공격을 시작했는데, 이들은 궁수대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선발대의 전열을 향해서 그대로 돌격해버렸으니 오히려 아군과 병력이 뒤섞여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장궁수들이 이번에는 기사들을 향해 화살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필 비가 내려서 진창이었던 데다가 양익 장궁수의 사격을 피해 중앙으로 몰려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기사들은 비좁은 곳에서 무기 휘두를 공간도 확보 못하고 지들끼리 버둥거리며 밀치다가 넘어져 압사당하거나 짓밟히기 일쑤였다.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고 그 상황에서도 16차례나 돌격을 시도했지만 프랑스군은 진창과 장애물 때문에 쉽사리 돌파하지 못했고 지원사격을 받는 영국군은 만신창이가 된 기사들을 두들겨 잡았다.

3 결과

망했어요.

프랑스군은 최소 1만에서 3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왕자 11명과 1,200명의 기사가 죽었으며 필리프 6세도 중상을 입었고,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숑 백작 샤를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친부인 룩셈부르크 백작 요한 1세 등 화려한 인사들도 전사했다. 반면 영국군은 150~250명으로 나와있지만 이 통계는 다소 신빙성이 낮고 과소평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적은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크레시 전투는 궁수는 기사에게 무력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깬 전투로 우수한 전술과 통찰력그리고 프랑스군의 병크로 무적에 가까웠던 기사의 돌격을 보병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인 데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약탈 행렬을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했으며 프랑스군은 몇 차례 같은 방식으로 덤볐지만 어택땅이 먹힐 리가 없지. 기껏 모인 병력만 꼴아박기 일쑤.

결국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휴전 협정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 흑사병이 돌았으며 필리프 6세가 사망하고 장 2세가 즉위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1354년 교섭이 결렬되면서 1355년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삽질은 전조에 불과했으니..
크레시 전투에서 죽어간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뛰어든 이들은 지난날의 패배를 만회하기는 커녕, 거의 똑같은 짓을 반복하게 됨으로서 아버지들의 뒤를 따르게 된다.

이에 대해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궁병과 기병으로만 진형을 꾸린 반면, 푸아티에에서는 기사를 앞세우긴 했지만 기병보다 보병이 더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가 정신을 차렸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병과의 구성만 살짝 바꿨을 뿐, 그저 일정 지점에 병력을 꼴아박는 전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병과 구성보다도 전술의 문제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즉 똑같은 짓 한 거 맞다. 본질적인 문제는 병과간 협동의 부재지 병력구성이 아니었다. 얼핏 보면 크레시 전투에서 오로지 병력을 기병 위주로 꾸려서 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에 제네바 쇠뇌수들이 파비스를 제대로 갖추도록 해줬다면 장궁병대와의 사격전에서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후에 기사들이 돌격하기 전에 제압사격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기사들 또한 적정 수로 분견대를 나누어 순차적으로 돌격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프랑스군이 푸아티에에서 보병 위주로 병력을 바꿨다는 것도 잉글랜드의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싸우는 것을 보고 감명받아서(...), 그리고 그래서 크레시 전투에서 이겼는가 싶어서 한 번 따라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쟁쿠르에서는 다시 기병 위주로 돌아갔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추가적으로 프랑스가 잠시 보병 위주의 병력으로 바꾸었다는 점을 들어(사실 그냥 기사들이 말에서 내렸던 것 뿐이지만) 프랑스군이 정신차렸다고 하는데,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에 비해 강점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보면 그저 그것도 병크다.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확실히 앞서는 것은 기병이다. 그 강점을 포기하고 잉글랜드에 비해 그다지 나을 것도 없는 보병 위주로 병력 편성을 바꾼 것이 정신차렸다는 것인가? 차라리 기병의 우월한 기동성으로 주요 거점을 선점함으로써 흑태자를 몰아세우고 평야에서의 전투를 강요하든지, 그도 아니면 잉글랜드군이 진형을 구성하기 전에 들이쳤어야지 자신의 장점을 포기하고 상대의 장점을 따라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4 기타

워렌 엘리스(Warren Ellis)라는 영국의 만화가가 크레시 전투를 소재로 한 그래픽 노블, 크레시(Crécy)를 그렸다.

  1. 원래 중세에는 정규군이고 용병이고 약탈이 일상이었다. 애초에 그 정규군이란 것도 기사+평민+다수의 농노 징집병인지라 이들 입장에서는 약탈이 더 중요했다. 게다가 현대에 와서 왜곡된 기사의 이미지와 달리, 현실에서의 기사는 말타고 다니는 합법적인 강도집단에 불과했다. 나름 존경받았던 성기사들도 실상은 신이 원한다는 광신적 명분을 앞세웠으나 실상은 교적인 이슬람의 영토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우방인 콘스탄티노플을 수도없이 약탈하고 강간하며 방화했던 눈뜨고 볼 수 없는 인간말종들이었다.
  2. 이렇게 영국군은 기병을 말에서 내리게해 밀집한 전형을 자주짰는데 이는 영국군이 비교적 소수였기에 방어적인 진형을 짜는게 유리했고 기병은 방어적인 진형엔 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기병들을 하마시킨 것일뿐 영국 또한 기병의 전력이 매우 우수했다. 그리고 말에서 내린 기병들은 계속 보병으로서 싸운게 아니라 보병으로서의 방어전투를 마치고 다시 본진에 뒀던 자신들의 말에 탑승, 중기병 차지를 감행해 타격을 입힌 뒤 본진으로 귀환하였고 이후 또 다시 말에서 내려 방어진을 짜는등 유동적으로 활약했다.
  3. 이들 제노바 쇠뇌부대는 6일을 내리 걸어오자마자 투입되었다. 원래 필리프 6세는 다음날 싸울 생각이었지만 지휘통제가 안되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에 결국 당일 전투를 시작했다고.. 그나마 파비스는 후방에 있어서 가져오지도 못했다. 이뭐병.
  4. 관통력은 쇠뇌가 더 우수했지만 연사성과 사정거리에서 장궁에게 밀렸다. 또 장궁도 철제 갑주를 관통시킬 수 있는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장궁대는 언덕 위에서 공격하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