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저스 선수 시절 |
현재 모습 |
이름 | Fernando Valenzuela Anguamea |
생년월일 | 1960년 11월 1일[1] |
국적 | 멕시코 |
출신지 | 소노라주 나바호아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79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자유계약 |
소속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80 ~ 1990) 캘리포니아 에인절스(1991) 볼티모어 오리올스(1993) 필라델피아 필리스(1994) 샌디에이고 파드리스(1995 ~ 1996) |
1981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신인왕 | |||||
스티브 하우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스티브 색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1981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 | |||||
스티브 칼튼 (필라델피아 필리스) | → |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스티브 칼튼 (필라델피아 필리스) |
1 개요
LA 다저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멕시코 출신의 메이저리그 선수. 멕시코 출신 선수들의 영웅이자 멕시코에서 건너온 미국 이민자들의 영웅으로 1980년대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던 투수다. 그리고 사실상 스크루볼러의 종언을 고한 투수이기도 하다.
통산 성적은 173승 153패 3.54 2074삼진 (113완투, 31완봉승)
2 초년 시절
12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멕시코 야구 리그에서 뛰기 시작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17세. 이 모습을 본 LA 다저스의 스카우트 마이크 부리또[2]는 어린 나이지만 괜찮은 구위와 특히 스크루볼을 빼어나게 구사하는 모습을 보고 도박을 결심한다. 보유권을 가진 원 소속팀에게 12만 달러를 지급하고 그를 영입한 것. 이 때만 해도 그가 어떤 선수가 될지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80년에 잠시 메이저리그의 맛을 봤는데, 이 때도 17.2이닝 동안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면서 2승을 거두면서 돌풍을 예고했다. 하지만, 막상 1981년 시즌 개막과 함께 LA 다저스의 제 4선발로 낙점되었을 때만해도 그가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는 무시무시한 돌풍을 몰고 오리라는 짐작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그를 개막 로스터에 넣은 토미 라소다 감독까지도.
3 페르난도마니아
그 돌풍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데뷔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는 것에서 출발해 내리 8연승. 놀랍게도 여덟경기 모두 9이닝을 다 던졌고[3] 그 중 무려 다섯 번이 완봉승이었다. 여기에 3연속 완봉승까지. 이 기간 동안 그가 기록한 평균자책은 0.50.
독특한 투구폼에 마구에 가까운 스크루볼을 구석구석 찌르면서 타자를 제압하는 이 왼손잡이 투수의 돌풍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당장 그의 야구 카드는 매진되었고, 매 경기마다 관중으로 가득찼을 정도. 나이 21세의 어린 나이에 순박한 눈망울을 지닌 선수의 위력적인 투구에 많은 이들이 경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이 무렵부터 증가하는 멕시코 계열 이민자들이 모두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보기 위해 야구장을 찾으면서 그가 소속된 LA 다저스는 재키 로빈슨의 영입 이후, 흑인 관중 유치에 성공하며 대박을 터뜨린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데 성공했다. 비록 그가 이 폭풍같던 8연승 이후 약간 주춤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리그 도중에 일어난 파업 탓도 있기 때문이었고, 위력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특히 LA 다저스의 역사적인 라이벌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먼저 4점을 내주고도 끈질기게 버티면서 완투, 팀의 5:4 승리를 이끌고 자신은 완투승을 따내면서 먼저 2패를 기록하고도 내리 4연승으로 LA 다저스가 뉴욕 양키스를 누르고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파업으로 인해 전/후기 단축시즌으로 치뤄진 1981년의 정규시즌 성적은 192.1이닝 13승 7패 2.48. 완투가 11번이었고, 이 중 완봉승이 8번이었다. 이 돌풍으로 인해 빚어진 신조어가 바로 페르난도마니아(Fernandomania)다. 신인왕은 당연했고, 신인으로는 역사상 최초로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그 이후엔 아직까지도 메이저리그에서 신인왕과 사이 영 상을 동시에 탄 선수는 없다.
4 엘 토로(El Toro)
신인 시절의 미친 활약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뒤로도 마이크 소시아와 배터리를 맞추면서 팀의 주축 투수로 맹활약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6시즌동안 매년 250이닝 이상 던지면서 팀을 위해 정말 죽어라 던졌다. 다만 그 결과에 맞는 승수를 챙긴 적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우승 이후, 썩 강한 전력까지는 아니었는지, 아니면 이상하게 그가 나온 경기에서 타선이 터지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래도 이 시기 동안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최고 투수 중 한 명임에는 분명했다. 1986년에는 21승을 거두면서 사이영 상 2위에 오르기도 했고, 팀을 위해 정말 죽을 힘을 다해 헌신했다. 많은 이닝을 던지기 때문에 당연한 거기도 했지만, 매년 10완투 이상을 해 냈고, 특히 1986년에는 무려 20완투를 기록하기도. SI에서 뽑은 1980년대 최고의 좌완 투수에 압도적 득표로 선정되었다. (최고의 우완투수는 잭 모리스)
엘 토로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황소라는 뜻인데, 정말 황소처럼 우직하게 던졌다.
5 버림받다.
그러나 매년 250이닝 이상 던지는 혹사와 몸에 다소 무리가 가는 독특한 투구폼, 여기에 야구의 구종 중에서도 몸에 무리가 간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크루볼[4]이 주무기인 페르난도의 몸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988년 팀이 7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 때 플레이오프에서는 제대로 뛰지 못하면서 이탈했다.
1988년 시즌 후반부터 다저스는 그야말로 오렐 허샤이저 원맨팀에 가까울 정도로, 허샤이저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시즌을 보냈는데, 그 유명한 6게임 연속 완봉 포함 59이닝 무실점 기록과 함께, 7차전까지 혈투를 벌인 챔피언십 시리즈의 대활약으로 MVP, 월드 시리즈 역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불리던 당대 최강팀 오클랜드마저 허샤이저의 위력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져버렸고, 대선배 샌디 쿠팩스가 보여준 퍼포먼스에 못지않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렇게 허샤이저의 맹활약 때문에, 포스트시즌에서 그동안 다저스와 리그의 대투수로 군림하던 발렌수엘라의 공백을 느끼지 못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불운이었다. 이는 곧 페르난도의 효용성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점차 평균자책이 나빠지고, 성적이 좋지 못하자 1991년 스프링캠프 도중 다저스는 그를 방출한다. 문제는 방출 과정. 방출 자체야 프로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시즌 개막 직전에 그를 버리면서 팀을 구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은 것. 간신히 여름이 되어 애너하임 에인절스에 입단했지만,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실력 발휘가 되기는 그른 일이었다. 또, 정말 몸 상태가 좋지 않기도 했고.
결국 그 뒤로는 저니맨의 길을 걸었다. 받아주는 메이저리그 팀이 없을 때는 멕시코리그로 돌아가서 뛰기도 했는데, 이 생활을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불꽃을 태운 것은 고국인 멕시코와 가까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이 시즌 13승 8패 3.62의 성적을 거두면서 최후의 불꽃을 태웠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메이저리그 커리어는 접어야 했다.
그렇다고 야구를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어서 나이 44세인 2004년부터 2시즌 정도 멕시코리그에 다시 선수로 뛰고 했다.
1991년 버림받은 기억 때문에 한 동안 LA 다저스와 인연을 끊었다. 방출된 후, 1999년 LA 다저스에서 다시 그를 스프링 캠프에 초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와 다저스의 화해는 2003년 다저스의 스페인어 전용 라디오 해설자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이뤄졌다.
6 이모저모
(선수 시절, 라소다 감독과 함께)
혹사와 스크루볼 구사 때문에 전성기가 일찍 저문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만일 그의 나이가 정말 알려진 것보다 5살 정도 많은 것이 사실이라면 말 그대로 나이에 따른 노쇠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다. 즉 25세에 데뷔해서 30대 중반에 쇠퇴한 것이기 때문에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로 보면 되는 것. 나이가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토미 라소다 감독 아래서 무식하게 혹사 당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타격 실력이 괜찮은 선수였다. 실버슬러거도 두 차례 수상했고, 통산 10홈런 84타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수비 실력도 결코 나쁜 편은 아니라서 한 차례 골드글러브를 탄 경력이 있다. 롱런했더라면, 부상이나 그런 문제가 없었다면, 혹은 갑작스런 방출로 인해 심리적인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더 크게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기에는 그 자신이 무리한 후유증이 너무 크기는 했지만.
영어를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이 호흡을 맞췄던 포수 마이크 소시아는 스스로 스페인어를 익혔다고. 토미 라소다 감독은 연봉 협상에서도 강경한 면모를 보인 발렌수엘라를 두고 처음으로 익힌 영단어가 million이라고 했다(...) 어떤 기자는 우리 시대 최고의 투수 두 명이 모두 영어를 못한다고 하기도 했다. 이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거부한 스티브 칼튼을 빗대어서 한 말이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는 일찌감치 탈락했다. 하지만 멕시코 국적을 가진 선수 중에서 그보다 더 많은 승리를 거둔 선수는 없다.
다저스와 안 좋게 결별하고 지금 화해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다저스에서 열렬하게 활동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하튼 그의 등번호 34번은 공식적인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지 않았는데도 다저스에서는 어떤 선수에게도 지급되지 않고 있다.
2006, 2009,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멕시코 대표팀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2013년 류현진이 LA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발렌수엘라와의 '닮은꼴' 선수로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꽤 많은 부분이 비슷하긴 하다. 둘 다 좌완 투수이며, 데뷔 첫해(류현진의 경우 한화이글스 시절인 2006년 해당)에 리그 정상에 오를 정도의 탁월한 성적을 거두었고, 다소 비만해 보이는 체형의 선수였다. [5] 거기에 결정구가 좌완임에도 불구하고 우타자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스크류볼/서클 체인지업 이라는 점까지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다. [6] 물론 다저스 내에서의 위상이나 메이저리그에서의 업적은 비교하는 게 이상한 거고.
덤으로 팬들에게 사인을 해 줄 때엔 절대 스윗스팟[7]에는 사인을 안 해준다고 한다. 무조건 다저스 로고 아래[8]내지는 커미셔너 서명 아래 공간에만 해 준다고. 자신의 사인볼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일부러 이렇게 해 주는 듯 하다. [9]- ↑ 1960년 11월 1일 생으로 알려져 있기는 한데, 사실 이 나이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 5살 정도 더 위라는 설도 있지만, 이 또한 확인된 것도 아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1960년생. 나이에 대한 논란이 생긴 것은 루키 시절 그의 나이에 대한 질문에 데뷔해인 1980년 기준으로 20세가 맞는데, 그 보다 더 많다고 답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 ↑ 이 스카우트가 발굴한 선수 중에는 2013년 LA 다저스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야시엘 푸이그도 있다.
그런데 데뷔시즌이 커리어 하이일줄은 - ↑ 딱 한 경기가 10회 연장전까지 벌어져서 8연속 완투는 아니다.
- ↑ 스크루볼러의 원조인 전 뉴욕 자이언츠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좌완투수 칼 허벨은 야구선수를 그만둔 40대 이후에도 왼팔이 안으로 구부러지지 않을정도로 심하게 비틀려있었다.
- ↑ 단 체격 자체는 188~189 센티미터인 류현진이 180 센티미터 정도였던 발렌주엘라보다 더 크다.
- ↑ 류현진의 체인지업은 해외 스카우터가 '스크류볼' 로 분류하기도 했었을 정도로 스크류볼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스크류볼은 절대 아니다.
- ↑ 공 가운데. 즉, 메이저리그 공인구로 치면 커미셔너 서명이 들어가는 곳.
- ↑ 다저스 로고볼 기준.
- ↑ 실제로 메이저리거 사인볼의 경우는 메이저리그 공인구 여부, 파란 볼펜 사용 여부, 스윗스팟에 얼마나 정가운데에 사인이 되었는지, 그리고 친필사인 인증서 여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고 한다. 스윗스팟에 사인이 되지 않은 공은 일찌감치 가치면에서는 광탈. 진짜 자신의 사인볼을 소장하고 싶은 팬들이 보고 싶어서였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