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찐 불독 멋진 리즈시절
이름 | 오렐 레너드 퀸턴 허샤이저 4세 (Orel Leonard Quinton Hershiser IV) |
생년월일 | 1958년 9월 16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뉴욕 주 버펄로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79년 드래프트 17라운드 440순위 |
소속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83-199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5-1997)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98) 뉴욕 메츠 (1999)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0) |
1988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 | |||||
스티브 베드로시안 (필라델피아 필리스) | → | 오렐 허샤이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1] | → | 마크 데이비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1988년 월드 시리즈 MVP | ||||
프랭크 비올라 (미네소타 트윈스) | → | 오렐 허샤이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 | 데이브 스튜어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1988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 ||||
사회에 봉사하는 선수들[2] | → | 오렐 허샤이저 | → | 그렉 르몽 |
1 개요
"제구가 전혀 되지 않으며, 직구 구속도 수준 이하인데다, 커브도 제대로 던지지 못한다. 투구폼도 불규칙해서 폭투를 자주 만든다. 정신력도 의문스럽다. 이 선수를 보고 있으면 허전한 느낌마저 든다."
ㅡ 1979년, ESPN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오렐 허샤이저에 대해 쓴 내용[3]
열심히 노력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면 보통사람에게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내가 바로 그 증거다.[4]
ㅡ오렐 허샤이저
전 메이저리그의 선발 투수. 스크류볼을 던지다 장렬히 산화한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의 뒤를 이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을 이끈 에이스. 우리에게는 다저스에서는 선배로서,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투수코치로서 박찬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별명은 불독 (Bulldog).
통산 성적은 18시즌 동안 204승 150패, 3.48 ERA, 3130.1이닝, 2014K, K/9 5.79, BB/9 2.89, K/BB 2, HR/9 0.67, 68완투 25완봉을 기록했다.
2 현역 시절
2.1 초기
뉴욕주 버펄로 출신으로 처음에는 아이스 하키 선수였으나, 고등학교에 와서 야구를 시작한다. 그 후 오하이오에 있는 볼링-그린(Bowling-Green) 주립대학에 진학해 투수로 활동. 1979년에 드래프트로 다저스에 가게 되는데, 드래프트에서 뽑힌 라운드와 순위나, 위에 나와있는 당시 쓰인 스카우팅 리포트에서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렇게 기대받는 유망주는 아니었다.
2.2 다저스 시절
허샤이저는 마이너리그에서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1983년부터 메이저리그에 발을 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 놈의 새가슴이 심해서 정면승부를 잘 하지 못하자, 당시 다저스의 감독이었던 토미 라소다가 허샤이저를 따로 불러 "타자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나운 불독이 되어라"는 뜻에서 허샤이저에게 불독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우리로 치자면 감독이 새가슴 루키 투수에게 '싸움닭'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셈이랄까.
라소다의 멘탈 관리 효과가 뛰어났는지, 허샤이저는 중간과 선발을 오간 1984년을 거쳐 1985년 붙박이 선발로 19승 3패를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어 1986년에는 14승, 1987년에는 16승을 거두더니, 1988년에는 23승 8패와 2.26의 평균자책점으로 사이 영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1988년에는 5경기 연속 완봉승을 포함한 메이저리그 신기록인 5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운다.. 종전 최다 기록자는 다저스의 선배 돈 드라이스데일로, 5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우던 그 순간 중계부스에 해설로 나와있던 돈 드라이스데일은 기록 달성에 성공하자 바로 중계부스를 박차고 나와 후배 허샤이저를 안아주며 축하했다.
그리고 허샤이저를 비롯한 주축 선수들의 활약으로 다저스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는데, 상대는 TLR이 이끄는, 마크 맥과이어와 호세 칸세코 콤비 (일명 다이나믹 듀오) + 데니스 에커슬리를 주축으로 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하지만 허샤이저는 그런 거 없다는 듯이 2차전과 5차전에서 완봉/완투승을 거두며 팀을 월드시리즈 챔피언으로 이끈다.
그러나 1989년에는 옆동네 천사네만큼이나 타선이 안습해지면서 15승 15패의 초라한 성적을 냈고 1990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1991년 시즌 중반까지 1승밖에 거두지 못한다. 그 후 1992년 10승, 1993년 12승, 1994년 6승을 끝으로 허샤이저는 다저스를 떠나게 된다.
2.3 부활과 은퇴
허샤이저는 그렇게 다저스를 떠나 1995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을 한다. 그 때 허샤이저의 나이는 벌써 36세였고, 그나마도 부상으로 26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했는...데도 16승 6패의 성적을 거두면서 불꽃을 태운다. 게다가 90년대 후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누구나 아는 강팀. 단지 뉴욕 양키스가 더 무시무시해서 그렇지 팀은 1995년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했고 허샤이저는 여기서 MVP 타이틀을 따, 양대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타이틀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이건 메이저리그 최초 기록.
클리블랜드에서 1996년에는 15승, 1997년에는 14승을 거둔 허샤이저는 1998년 배리 본즈가 있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11승을 거둔다. 그리고 1999년에는 뉴욕 메츠로 팀을 옮겨 13승을 거두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999년 시즌이 끝난 뒤, 허샤이저는 친정팀 다저스와 마이너리그 1년 계약을 맺고 돌아와, 2000년 41세의 나이로 은퇴하게 된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텍사스 레인저스의 단장 보좌를 거쳐,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선수시절 드라마틱하게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었던 때문인지 은퇴 후에도 투수의 피칭 연구를 열심히 했던 허샤이저는 NPA(National Pitching Association)의 애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그의 연습방법이 그의 이름을 딴 허샤이저 드릴로 불릴만큼 투수 연구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FA로 텍사스에 왔다가 텍사스를 멸망시키고 먹튀 위기에 놓인 후배 박찬호를 비롯해 여러 새싹들을 키웠다. 그러나 2005년 투수코치에서 물러났고, 2013년 현재 ESPN의 객원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한때 다저스 인수전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첫 심사에서 광속탈락. 2007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을 얻었으나 여기서도 광속탈락. 2014년부터는 다저스 자체 중계 채널 '스포츠넷 LA'에서 원정 경기 해설 및 주요 방송 패널을 맡고 있다.
은퇴 이후 한때 포커 대회에 자주 나가곤 했다고 한다.
4 플레이 스타일
힘세고 강한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불독'이라는 별명과는 달리 파워피처는 아니었다. 대신 허샤이저는 투심과 정상급 싱커볼로 땅볼을 유도하는 스타일이었고, 텍사스에서 후배들에게 땅볼 유도에 주력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무척 더운 알링턴 구장의 특성상 플라이볼 타구가 쭉쭉 뻗어나가 장타로 연결되기 일수라서...)
5 이야깃거리
-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였던 1985년,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 최초로 미국(해외)에 전지훈련 캠프를 차리는데, 허샤이저는 자기 타석에서 한창 리즈시절을 달리던 김시진을 상대로 홈런을 때린다. 나중에 김시진이 삼성의 에이스라는 것을 알고는 미안해했다고.
- 한화 이글스의 에이스였던 정민철이 선수시절의 대부분을 달았던 등번호 55번은 허샤이저를 본받겠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 톰 글래빈 만큼은 아니었지만 타격에 일가견이 있었다. 위에서 김시진의 볼을 홈런으로 친 것도 그렇고, 1993년에는 무려 0.356의 타율 (다저스 투수들 중에선 최고타율)을 기록하며 실버슬러거 상을 탄다.
-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이던 1998년, 배리 본즈가 친 400호 홈런볼을 관중이 낚아채 본즈한테 사인을 받으려고 갔는데, 본즈는 없었고 허샤이저가 대신 관중에게 갔다. 허샤이저는 그 홈런볼을 관중한테 돈을 주고 사서 본즈에게 넘겨주었고, 본즈는 감동한 나머지 400호 홈런을 칠 때 낀 장갑을 허샤이저 아들에게 준다.
- 2013년 10월 16일 NLCS 5차전에서 시구를 하였다.
그리고 시구 버프 받은 다저스는 그날 승리했다.시구때 공을 받아준 선수가 스킵 슈마커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훈훈한 뒷사연이 있었다.#
5.1 박찬호와의 인연
90년대 초반에 다저스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다저스로 온 박찬호와 여러가지로 인연이 있던 선수였다. 1994년 박찬호 입단식 때 선수 대표로 박찬호를 맞이했으며, 박찬호가 허샤이저를 단짝친구처럼 따랐다고 한다. 다만 허샤이저는 박찬호가 입단하고 몇년 지나지 않아 다저스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팀원으로썬 오래 함께하지는 못했다.
이후 둘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선수와 코치 신분으로 재회하게 된다. 이 당시 박찬호는 부상과 구위 저하로 인해 먹튀로 전락한 상황이었는데, 타자친화적인 구장을 홈으로 쓰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의 투구 방식을 이어가면 답이 없다고 판단한 허샤이저는 박찬호를 투심 패스트볼을 바탕으로 한 땅볼 유도형 투수로 전향시키려 했다. 허샤이저는 텍사스의 전임 투수코치였던 "독재자" 오스카 아코스타[5]보다 능력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코치였고, 박찬호 역시 재기를 위해 허샤이저의 지시를 이행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끝내 박찬호는 재기하지 못했고, 결국 최악의 먹튀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 채 텍사스를 떠나고 만다.- ↑ 그리고 다저스에 소속된 선발 투수가 다시 사이 영 상을 따기까지는 23년이나 걸렸다. 2011년 클레이튼 커쇼 (21승 5패)가 그 주인공.
- ↑ 야구의 데일 머피, 농구의 Rory Sparrow, 골프의 Patty Sheehan, College football의 Chip Rives, 하키의 Bob Bourne, 육상경기의 Judi Brown King와 Kip Keino, 미식축구의 Reggie Williams
- ↑ 사실 저렇게 못 던져도 "커브만큼은 발전 가능성은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앞뒤 맥락을 따지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커서 여기에 따로 적진 않았다.
- ↑ 위에 나온 스카우팅 리포트의 내용처럼 커리어 초반 허샤이저에 대한 미덥지 않은 시선과 그러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루어낸 성과들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 맞는 말이다.
- ↑ 국내에서는 박찬호의 투구폼과 훈련 방식을 무리하게 바꾸려다가 박찬호를 몰락시킨 주범 중 하나로 알려진 코치지만, 정작 박찬호와 아코스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아코스타가 해임된 이후 박찬호는 그의 지도 방식을 긍정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