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영구결번 | ||||
1 | 2 | 4 | 19 | 20 |
피 위 리즈 | 토미 라소다 | 듀크 스나이더 | 짐 길리엄 | 돈 서튼 |
24 | 32 | 39 | 42 | 53 |
월터 앨스턴 | 샌디 코팩스 | 로이 캄파넬라 | 재키 로빈슨 | 돈 드라이스데일 |
2015년 4월 6일 매직 존슨과 함께한 라소다옹. 아직도 정정하시다.
이름 | 토머스 찰스 "토미" 라소다 (Thomas Charles "Tommy" Lasorda) |
생년월일 | 1927년 9월 22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펜실베니아 주 노리스타운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45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PHI) |
소속팀 | 브루클린 다저스 (1954~1955)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1956) |
지도자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3루코치 (1973~1976)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감독 (1976~1996) |
프런트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단장대행 (1998)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토미 라소다 | |
헌액 연도 | 1997년 |
헌액 방식 | 베테랑 위원회(Veteran's Committee) 선정 |
1 소개
내 몸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배영수?[1]
LA 다저스의 전설적인 감독이자 명장으로 선수 시절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뛰었다. 프런트로서는 다저스의 단장을 1년 역임한 후, 부사장까지 올랐다. 현재는 은퇴한 상황. 하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한 편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약했다. 이탈리아계다.[2]
2 일대기
현역 시절 경력은 별볼일없다. 마이너리그에서는 최다 탈삼진 기록도 세우면서 제법 괜찮게 던지는 왼손 투수였다고 하지만, 정작 메이저리그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통산 성적이 4패, 평균자책점 6.48에 그쳤다. 사실 마이너리그에서는 특히 다저스의 산하 구단인 몬트리올에서 맹활약하면서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정도였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제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할 말이 없다. 1960년 한 선수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다저스에서 마이너로 강등당한 후 방출당하면서 현역 은퇴를 하게 됐는데, 그 선수의 이름은 샌디 코팩스다. 그래서 '코팩스같은 명 투수만이 자기를 밀어낼 수 있었다'고 농담한 적도 있다.
이후 다저스의 스카우트와 마이너리그 코치를 거쳐 1973년 메이저리그 코치로 합류했다. 그리고 1976년 23년간 감독을 지낸 월터 알스턴 감독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어 감독으로 부임했다. 감독으로 다저스에서 엄청난 업적을 일궜는데, 다저스에서만 20년을 집권하면서 통산 1,599승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PO에 자주 진출했고, 꾸준히 전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20년 간 집권하면서 7번 PO에 올라갔고, 이 중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만들었다. 1981년에는 뉴욕 양키스를 제압했고, 1988년에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꺾었다.
당시 구단주였던 피터 오말리는 FA 영입보다 신인 중용을 더 중시했던 타입이었는데, 그에 맞춰 라소다도 신예들을 중용하면서 꾸준히 팀 전력을 강화시켰다. 이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신인왕을 모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독식하는 결과를 만들었던 것에서 잘 증명된다. 전력에 비해 월드시리즈 우승이 너무 적다는 평도 있지만, 지금과 달리 와일드카드가 없고 오로지 지구우승만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던 시기라 지금보다 플레이오프 진출이 어려웠던 시절에 감독을 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깝게 PO에 못 올라간 적도 많으니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장 지구 2위를 차지해 PO 진출에 실패한 것만 다섯 번이다. 다시 말하면 감독생활 20년 동안 12년을 지구 1위 아니면 2위였다는 얘기다.
다만 투수 혹사는 진짜 쩔었던 감독. 오렐 허샤이저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같은 선수들은 그때 기준으로도 정말 무식할 정도로 많이 던졌고, 이 때문에 전성기가 상대적으로 짧게 끝났다. 말년에는 다소 꼰대 기질도 엿보였는데, 현장 감독 때는 아주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후에 다저스 원로로서 세이버메트리션 출신으로 빌리 빈의 보좌역을 지냈던 단장 폴 디포데스타와 갈등을 빚는 것에서 잘 드러났다. 결국 라소다 쪽이 이겨서 PDP는 쫓겨나게 되었다.[3] 대신 선수들을 믿고, 기를 살려주는 것에는 탁월한 감독이다. 대표적으로 오렐 허샤이저가 도망가는 피칭을 하자 불독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자신감을 키워준 것이 유명한 일화.
다저스 감독 은퇴 후에는 1997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고 감독 시절 등번호였던 2번이 다저스에서 영구결번되었다. 2000년에는 2000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다저스에서 꾸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4], 다저스의 원로로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참고로 박찬호에게 메이저리그 데뷔 기회를 줬던 인물이자 박찬호를 후원했던 인물 중 한 명. 박찬호의 양아버지로 통했다.[5].
3 쇼맨십
말이 엄청 많고, 입담이 좋아서 떠벌이라는 별명이 있다[6]. 덕분에 상당수의 명언들을 남겼다. 라소다가 남긴 명언의 특징은 스스로가 골수 야빠로서 관련 팬들이 공감하게 하는 말이 많다는 것이다.
- 일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다[7].
- 나의 몸 속에는 푸른 피가 흐른다. [8] (I bleed Dodger Blue) 다저스를 상징하는 푸른색 이야기다.
- 이긴 날에는 이겨서 행복해 많이 먹고 진 날에는 슬퍼서 많이 먹으며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되면 실망해서 많이 먹는다.[9]
- 아무리 잘 하더라도 3게임을 하면 한 게임은 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못하더라도 한 게임은 이기기 마련이다. 나머지 한 게임에서 순위는 갈린다[10].
근데 3게임 중 한 게임 이기는 것도 버거워하는 팀이 있지 - 투수는 투구 횟수가 아니라 뺏어낸 아웃 카운트로 급료를 받는다.
- 내가 가장 기쁠 때는 게임에서 이겼을 때이고, 두번째로 기쁠 때는 게임에서 졌을 때다.[11]
- 나는 더블헤더를 좋아한다. 유니폼을 더 오래 입고 있으니까.
명언 제조기일 뿐만 아니라 쇼맨십도 남달랐다. 다저스의 철천지 원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원정경기를 갔을 때 일인데, 경기 전 치어리더 복장처럼 입고 그라운드에 나가 자이언츠의 선수들은 물론 팬들을 약올리는 행동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다저스-자이언츠 라이벌리는 험악해서 자칫 잘못하다가 신변에 위협을 당할 수도 있었으나 자이언츠 팬들은 라소다 감독이라 저러려니 하고 넘어갔다고.
최근에 쇼맨십은 2001년 올스타전에서 3루 코치로 코치박스에서 서 있었는데 게선생의 파울타구에 스쳐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졌다. 자칫 위험할 수 있었으나 라소다의 쇼맨십을 알고 있는 선수들이 헬멧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2011년에는 시즌 막판 84세 생일에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홈경기에서 명예 감독으로서 돈 매팅리와 함께 팀을 지휘했고 다저 스타디움에 모인 팬들에게 생신축하 노래를 듣기도 했다. 1996년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유가 심장 부분의 이상이었고 체형만 보면 흔히 얘기하는 오래 못 살 체형이지만 나름대로 건강관리의 비법이라도 있으신지[12] 정말 장수하시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4 가족사
아들 중 1991년 AIDS 합병증으로 사망한 토미 라소다 주니어가 동성애자였다고 알려졌으나 이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암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지도했던 메이저리그 최초의 현역 커밍아웃 동성애자[13]인 글렌 버크가 아들과 친하게 지내자 대노했다고 글렌 버크는 자서전에서 밝혔지만 라소다는 이에 대해서도 부인하였다.[14]- ↑ 이건 대부분의 파란색 옷을 입는 구단의 레전드들이 하는 말이다. 배영수, 라소다 뿐만 아니라 양준혁도 이런 말을 했고, 강기웅은 현대로 트레이드되려 할 때 이 말을 하면서 극구 반대했고, 결국 트레이드하자마자 은퇴했다.
이상훈도 트레이드 직후에 은퇴하진 않았는데!! - ↑ 그래서 스페인어를 하는 중남미 출신 선수들과 이탈리아어로 더듬더듬 의사소통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유럽축구 돌아가는 꼴에 익숙하다면 딱히 어색한 부분은 아닌데, 이 두 언어는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제한적으로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 ↑ 이 과정에서 살짝 피해본 선수 중 한명이 바로 최희섭. 컨택은 떨어지지만 선구안과 파워에 가능성을 보였던 최희섭을 데려온 것이 당시 다저스 단장 PDP인데 현장과 프런트 사이에 괴리가 커지고 결국 PDP가 쫓겨나면서 최희섭도 새됐다. 물론 이런 건 정말 부수적인 이야기고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의 실력이 모자라서였지만.
- ↑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감독 퇴임한 1996년 구단 부사장, 1998년 단장, 1999년 총괄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다저스 구단주가 바뀐 뒤에는 그야말로 온갖 잡다한 일을 다하는 특별 고문이 되었다.
- ↑ 박찬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감독에서 물러나서 부사장, 단장직을 역임하던 상태였다. 구단에 왈가왈부하는 과거 인사 정도의 위치가 아니다.
- ↑ 이쪽에서도 레전드인 요기 베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요기 베라 정도 되면 야구의 범위를 넘어서서 명언 제조기로 통하니 아쉬워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 ↑ 종목 명만 바꾸면 모든 팬들의 명언이 된다. 실제로 여러 곳에서 돌려 쓰인다.
- ↑ 한국 야구팬들에게는 양준혁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는 토미 라소다의 인용이다.
- ↑ 소싯적 어떤 메이저리거는 라소다와의
식샤식사 자리를 9이닝 완투 경기에 비유했다. 왜냐하면 그러고 나서 5일은 쉬어줘야 해서(...) - ↑ 실제로 3연전 시리즈인 경우 2승1패로 끝나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다. 시즌 전체로 봐도 승률이 6할이면 리그 전체 1위를 다투고, 4할이면 꼴찌를 다투게 된다.
- ↑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은 명언 중 첫번째를 보라.
- ↑ 사실 2012년에 한번 심근경색이 오셔서 위험했다. 근데 의사가 식단조절 좀 하라고 하자 '스파게티를 못 먹느니 걍 죽지 뭐'라고 받아쳤다고(...)
- ↑ 독립리그나 마이너리그에서 뛰다가, 또는 은퇴 후에 커밍아웃한 사례가 있긴 있으나 현역 메이저리거로는 유일무이한 사례다. 2016년 기준으로 가장 최근 사례는 2015년 밀워키 브루어스 마이너리거 데이브 덴슨이 커밍아웃한 일이 있는데, 덴슨은 이후 40인 로스터에 진입했다.
- ↑ 결국 버크는 라소다 감독과 다저스 프런트의 압박에 마음고생만 하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자기보다 현격히 못하는 선수를 대가로 트레이드되었지만 역시 홀대받다 은퇴해야 했다. 1995년 AIDS 합병증으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