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토니우스

1 소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트란퀼리우스
Gaius Suetonius Tranquillus
(69년 - 130년 이후?)

흔히 수에토니우스로 불리며 본 위키 로마사 관련 항목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자 가장 많이 까이는(...) 인물. 그리고 항목도 늦게 만들어졌다

2 생애

히포 레기우스[1] 출신으로 아버지 수에토니우스 라에투스는 로마 내전기에는 오토를 따랐고,[2] 69년 비텔리우스와의 전투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였던 소(小)플리니우스[3]와도 친분이 있었으며[4] 소 플리니우스를 통해 당시의 황제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와도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기 112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황후 사비나에게 불경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해임되었고, 이후 다시 공직을 맡았다는 기록은 없다.

3 저서

수에토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 때 몇 번이나 비서관(秘書官)과 공문서관(公文書館)의 감독 업무를 맡았고, 덕분에 로마 관보 같은 공문서 기록들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그것을 토대로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 열전》은 대체로 하드리아누스의 치세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며, 수에토니우스의 친구에 의해 서기 119년에 정무총감 가이우스 셉티키우스 클라루스(Gaius Septicius Clarus)라는 인물에게 헌정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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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시작으로 제정(帝政)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도미티아누스에 이르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11명의 황제[5]를 다룬 《황제열전》은 로마사를 다룬 교양 서적이나 위키 사이트에 작성된 항목들에 많이 인용되어 등장하고 있다.

대중에 알려진 로마의 이미지 형성에 《황제열전》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당장 유명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고 외쳤다거나, 암살 당시 죽기 직전 중얼거렸다는 "브루투스, 너마저도(Et tu, Brute)..."라는 명대사도 《황제열전》에 나온 "내 아들아, 너도냐?(καὶ σὺ, τέκνον)"라는 대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이 있다(수에토니우스의 저서를 제외하면 이런 발언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카이사르가 실은 간질을 앓고 있었다는 설도 이 사람의 기록.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은 연대기 순으로 사건을 나열하면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어떠어떠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에 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있다 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다던가,[6] 이 사람이 태어날 때 무슨 일이 있었다던가, 계보가 어떻게 된다던가, 자신이 그 내용을 어디서 인용했는지에 대해서 적고, 이후의 어떤 황제들에 대해서든 일관된 순서로 경력과 공적(일화에 가깝기는 하지만)을 적고 있으며,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작정하고 쓴 역사서라기보다는 대중용으로 저술한 역사 이야기집 같은 느낌이 든다. 덕분에 읽으면 재미있기는 하다.

다만 나무위키의 모든 항목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수에토니우스 본인이 심각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안티였다는 점.[7] 수에토니우스 본인이 로마에서 비서관이나 공문서 관련 공직을 맡았고 로마 관보를 조사해 황제들의 행적을 조사했기는 했지만, 애초에 수에토니우스가 살았던 시기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백 년 쯤은 후대였던 데다 수에토니우스 본인도 자신이 조사한 공문서 기록 외에 세간에 떠도는 소문, 가십거리들을 주워 모아서 실제 사실인 양 같이 기록해 놨다는[8] (심지어 일부는 자기창작을 넣었다고도) 비판을 받고 있다. 위키러들 가운데 극단적인 경우는 《황제열전》이나 그 저자 수에토니우스를 두고 남자 시오노 나나미, 로마판 동인남이라고 부르기도.

《황제열전》의 한국어 번역은 1998년에 풀빛미디어에서 펴낸 《풍속으로 본 12인의 로마황제》(전2권)와 2009년에 다른세상(출판사 이름이다)에서 펴낸 《열두명의 카이사르 - 고대 로마 역사가가 쓴 황제 이야기》가 있다. 전자는 《갈리아 전기》나 《타키투스 연대기》의 역자(중역)로 알려진 박광순이 번역한 것이고(《황제열전》의 경우는 중역인지 직역인지 추가 바람) 후자는 로버트 그레이브스[9]의 영역본을 조윤정이 중역한 것.나무위키에서 해당 관련 항목을 만든 사람들의 경우는 후자를 많이 참조한 듯 싶다.

예수에 관해 언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예수/역사 항목 참조.

《황제열전》 말고도 고대 로마의 명사들에 대한 《명사열전(De Viris Illustribus)》을 남겼는데, 현재는 그 중 「문법가열전」 「웅변가열전」 및 「시인열전」의 일부만이 전한다. 한국에는 2013년에 한길사에서 《로마의 문법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안재원.
  1. 지금의 알제리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인 안나바로 튀니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2. 내전 당시 갈바를 암살하고 황제가 된 오토를 지지해 라인 강 서쪽에서 비텔리우스의 군단을 격파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와 씨족이 같다. 다만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추가 바람.
  3. 삼촌인 대(大) 플리니우스와 구분해 소 플리니우스로 불리며, 79년 8월 24일에 벌어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삼촌과 함께 폼페이 멸망의 순간을 가까이서 직접 목격하고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편지로 증언한 인물이다. 그 날 함께 폼페이 최후의 날을 목격했던 삼촌 대 플리니우스는 미세눔 함대의 사령관으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피난민을 구조하다 화산 폭발과 함께 뿜어져 나온 유독성 가스에 질식해 순직했으며, 저서로 《박물지》를 남겼다.
  4. 플리니우스는 수에토니우스가 이탈리아의 조그만 부동산을 구입할 때도 미혼에 자식이 없던 수에토니우스에게 면세 특권(이 특권은 보통 아들을 세 명 둔 아버지에게 인정되었다고)을 인정해주도록 당시의 황제 트라야누스와의 사이에서 주선에 나서주기도 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도 110년부터 112년까지 소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 속주와 폰투스 속주의 프로콘술로 부임할 때에 함께 갔다.
  5. 카이사르까지 포함하면 12명. 카이사르 본인은 생전에 종신독재관(딕타토르)였지 황제였던 적은 없다.
  6. 칼리굴라의 외모에 대해서 "칼리굴라는 염소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너 사형'이라고 외칠 만큼 싫어했다"고 적어 놓기는 했지만 실제 남아 있는 칼리굴라의 조각상을 보면 그렇게까지 기괴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수에토니우스의 지나칠 정도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혐오감을 엿볼 수 있다. 칼리굴라 항목 참조.
  7. 덤으로 공화정의 옹호자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는 역사가 타키투스와도 동일.
  8. 예를 들어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하렘을 조성해 놓고 온갖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겼다거나 죽을 때 칼리굴라와 관련된 에피소드 등. 이에 대한 비판은 티베리우스 항목 참조. 틴토 브라스 감독의 영화 칼리굴라도 이러한 수에토니우스의 왜곡된 저술을 따라 기본 스토리가 전개된다.
  9.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