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오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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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濱口 雄幸
생애 : 1870년 5월 1일 ~ 1931년 8월 26일(61세)
재임기간(피격 이전) : 1929년 7월 2일 ~ 1930년 11월 14일(27대)
재임기간(시데하라 기주로 권한대행) : 1930년 11월 14일 ~ 1931년 3월 10일(권한대행)
재임기간(피격 이후) : 1931년 3월 10일 ~ 1931년 4월 14일(27대)

역대 일본 총리
26대 다나카 기이치27대 하마구치 오사치28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는 일본 제국 쇼와시기의 일본 재무 관료, 정치가이다. 품계는 정2품,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勲一等旭日桐花大綬章, くんいっとうきょくじつとうかだいじゅしょう)을 받았다. 호는 공곡(空谷).

일본 제국 대장대신(29대, 30대), 내무부장관(43대), 내각 총리 대신(27대), 입헌 민정당 총재 등을 역임한 당시 일본의 주요 정치가 중 한명. 근엄한 풍채 덕에 '사자 재상' 이란 별명이 있다. 장기간 성실한 재무관료 생활을 하였고 총리로서는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등에 업고 대중국 평화외교와 금해금, 런던 해군 군축조약 참가 등 강력한 긴축경제를 추구하였으나 대공황에 직면하면서 좌절한 인물.

2 생애

도사국 나카오카군 오대산(현재의 고치현)의 임업을 하는 집안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름은 유키오(幸雄)로 지어졌지만 그의 아버지가 출생신고하러 갈 때 가면서 술을 마셔대다보니 관청에 도착했을땐 만취상태라서(...) 이름을 앞뒤 반대로 기입한 게 관청에 수리되어 오사치(雄幸)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고치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도쿄제국대학(도쿄대학) 법학과로 진학, 1895년 졸업한다. 대학 동창회가 나중에는 정치 네트워크로 발전했다고.

이후 대장성으로 들어가 전매국 장관, 재무 차관등을 지냈고 1915년 입헌 동지회에 입당, 중의원 의원직에 당선된 대의원이 된다. 가토 다카아키 내각의 재무 장관,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의 내무 장관을 맡았다.

입헌민정당 초대 총재가 되어 장작림 폭살사건의 책임으로 내각 총사퇴를 한 다나카 기이치를 뒤이어 내각 총리 대신으로 취임. 강력한 긴축과 대중국 평화외교를 내걸고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등에 업어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였다. 전 일본은행 총재인 이노우에 준노스케를 재무 장관으로 가용하여 금해금을 단행함과 동시에 와카쓰키 레이지로 전 총리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일본측 특명 전권대사 수석대표로 임명한다. 이전의 해군 군축 회담에서는 모두 해군 출신 장성들이 수석대표가 되었으나 하마구치 오사치는 아예 순수 정치가인 와카쓰키 레이치로를 수석대표로 밀어넣고 자신이 해군대신 사무섭행이라는 형태로 해군대신의 사무를 일시 담당하는 형태로 지원, 해군 강경파와 야당인 입헌 정우회의 반대를 모두 뿌리치고 조약을 채결하였다. 재무관료로서 잔뼈가 굵은 하마구치 오사치는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미국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본의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어도 영국, 미국 양국의해군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거기다 1차대전 이후 장기간의 적극재정이 심각한 정경군 경제유착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강력하게 긴축정책을 유지하여 일본의 경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대공황이라는 경제충격에 직면하여 하마구치가 추구하던 강력한 긴축정책은 사태를 더 심하게 약화시켰으며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민생을 압박하고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대공황과 금해금은 어찌되었든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하던 하마구치 내각의 지지도를 크게 추락시켰으며 이상황에서 밀어붙인 해군 군축조약 채결은 결국 야당과 해군의 격렬한 반대를 사 '통수권 간범문제'를 야기한다. 당시의 일본 법제상 군통수권이 공식적으로는 덴노에게 귀속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것은 해군 군령부(군축 조약에 반대하는 일본 해군 함대파가 주류를 이뤘다)에게 맡겨져 있었는데 하마구치 내각이 이들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해군 조약을 채결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조약 채결 후 국방의 안전을 선언한 것은 월권이자 천황의 통수대권을 침범하는 행위라는 주장. 해군 함대파가 처음 제기한 이 주장에 당시 야권이던 입헌 정우회와 우익 세력들이 합류하여 대정부질문까지 던졌던 것이다. 이는 해군 군축조약에 대한 열렬한 대중적 지지 앞에서 함대파였던 가토 히로하루 당시 군령부총장이 사임하고 조약파 제독이 후임 총장으로 임명되고 이후 추밀원에서도 원로인 사이온지 긴모치등의 찬성으로 조약이 가결되면서 마무리되었으나, 뒤이은 암살 사건의 이유가 된다.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총리는 도쿄 역에서 덴노의 통수권을 침범했다면서 그에게 총격을 가한 우파 청년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에 맞는다.[1] 즉시 도쿄 제국대학 병원으로 이송되어 장의 30%를 적출하는큰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가 입원한 중에는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이 임시 총리 대리를 맡았다. 상처가 호전되면서 1931년 1월 21일 하마구치 총리는 퇴원하였으나 야당인 정우회의 등원 요구를 받았고, 3월 10일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중의원에 등단, 11일에는 귀족원 회의에도 참석하였으나 이게 무리가 되어 다시 상처가 약화, 4월 4일 재입원하고 5일 수술을 받으면서 총리직 속행 불가능을 인정하고 사퇴하였다. 이후 완치를 위해 요양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차도가 없어 8월 26일 결국 사망한다.

3 비고

일본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요정정치나 사전교섭을 통한 타협을 배제하고 정면으로 정국을 풀어나간 정치인 중 한명. 그리고 그것이 먹혔던 것은 강력한 대중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는 이전까지의 군비팽창과 전쟁기조에 반대하는 정치가나 군인들이 여럿 있었지만 하마구치 오사치처럼 완고하고 강직하게 밀어붙인 인물은 없었다. 그점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1. 이후 1933년에 사형판결, 34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 1940년 11월에 가석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