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온지 긴모치

역대 일본 총리
10대임시겸임11대
이토 히로부미사이온지 긴모치가쓰라 다로
11대12대13대
가쓰라 다로사이온지 긴모치가쓰라 다로
13대14대15대
가쓰라 다로사이온지 긴모치가쓰라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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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찌가 아니다
리즈시절 음악가 같다 원피스얼음 쓰던 해군 대장 닮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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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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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모습이 제일 유명하다.

西園寺(さいおんじ) 公望(きんもち) / 1849.12.6. ~ 1940.11.24.

묘하게 이승만을 닮았다.

"이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들은 다다미 위에서 죽지 못한다. 그 각오를 해둬라." - 1940년 9월. 죽기 2달 전.

일본의 12, 14대 총리. 교토 출신으로 집안부터 대대로 태정대신을 해먹던 덴노 조정의 유서깊은 공경대부 명문가 출신. 공가 가운데서도 쿠세이카(九清華) 일족에 해당하는 집안들의 하나로, 좌, 우대신과 다이나곤 직을 돌아가면서 먹어치우는 집안이다. 관백 직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고셋케(五攝家)에 비하면 격이 한 단계 처진다.

하여간 이 덕분에 유신 후 화족 중 두번째로 높은 계층이던 세이카게(清華家)는 후작 작위에 서훈되었고, 이후 사이온지 가는 긴모치의 대에 이르러 공적을 인정받아 1920년에 공작가로 승작했다. 아흔 살이 넘게 살면서 개막장이 되어가는 일본 꼴을 보며 상당히 슬퍼했고, 못볼 꼴을 다 봤다 죽어가면서도 일본의 내일을 염려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은 "도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いったいこの国をどこへもってゆくのや)"였다고. 트롤러들 때문에 암걸려 사망한 실제 케이스

막장이었거나 할 말도 못했던 당시 일본의 지도부와 달리, 꼬장꼬장한 성격으로 덴노들에게조차 쓴소리를 늘어놓던 위인이라고 한다.[1] 2.26 쿠데타 당시 살해 대상이었으나 귀족에 국가 원로였던지라 헌병들이 집 앞을 지켜서 살아남았다.

젊은 시절에 10년에 걸쳐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경력이 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제정에서 프로이센에 털려 파리 코뮌이 성립되기 직전이었는데, 코뮌 성립 뒤에도 계속 머물러 자유주의사회주의를 공부했다. 그리고 나서 귀국 뒤 신문사에 입사해 정부를 공격하는 일을 처음 했다... 당시 메이지 유신에 끼었던 소수의 공경출신 인사들 가운데 하나인 산죠 사네토미[2]이와쿠라 토모미[3]는 공경집안들 가운데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집안출신인 사이온지[4]하라는 정치는 안하고 신문사의 기자질이나 한다고 분통을 터뜨린 끝에 신문사 사장과 담판지어서 사이온지를 강제해직시킨 뒤 관료직으로 밀어넣었다는 못 믿을 이야기가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박식했으며, 당시 일본 지도부보다는 깨어있던 양반이었다고 한다.

첫 임기 때 대한제국의 국권침탈에 많이 일조했다. 통감체제 하로 두는 한일신협약을 날인했고, 군대도 완전히 해산시킨 사람이 이 양반과 그의 상관 이토 히로부미의 작품.

1908년 총선에서 정우회 소속으로 승리했지만 경제 문제를 못 풀어 얼마 뒤 끝내 총사퇴했다. 그럴 만하게도, 민간에서 경기회복의 일환으로 요구하던 러일전쟁의 전비조달로 올라간 세금을 못 내렸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경기불황이 러일전쟁의 전쟁차관까지 겹치면서 일어나니...

1911년 2차 임기 시절에도 경제 문제로 애를 먹었는데, 이걸 알지만모르는 육군해군에서 부대신설과 함대건조를 위해 무턱대고 예산을 요구했다. 끝내 열받은 사이온지가 거절했는데, 이걸 빌미로 육군대신이 사임하자 후임을 못 구하고 좌초[5]. 원로였지만 총리 시절에는 낙제점으로 물러났다.

위의 임기표를 보듯이 1900년대 초반의 일본총리직은 가츠라 타로(桂太郞)와 사이온지가 돌려막기식으로 역임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을 세게 받은 일본군부 내 쵸슈 강경파의 카츠라와 조정원로 가문의 온건파 사이온지가 서로 실각할 때마다 총리에 올랐기 때문. 이 때문에 이 시기를 가리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케이엔(桂園)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스쿨데이즈에서 그들의 성을 따다가 만든 캐릭터가 바로 사이온지 세카이카츠라 코토노하다. 저 악연으로 얽힌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게임 루트에 따라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밥먹듯이(…) 나온다.

1920년대 이후 군부가 비대해지면서 무모한 팽창정책으로 치닫자, 일본의 미래를 매우 걱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셋케 집안의 기대주로 꼽히면서 젊은 시절 자유주의 사상을 내보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으나, 정작 그는 수상을 하자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사이온지의 기대를 박살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이 고노에 항목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사족으로, 젊은 시절 사립 리츠메이칸 학교를 창설했지만 1년만에 정부가 폐교시킨 흑역사가 있다. 오늘날의 리츠메이칸 대학은 리츠메이칸 학교가 폐교한 지 30년 만에 교육부장관 시절 그의 비서이자 친구의 아들이기도 한 나카가와 고쥬로가 세운 교토법정대로 출발한 대학이다.
  1. 애시당초 어렸을 때부터 연배가 비슷한 메이지 덴노와 친했다. 그러니 아랫세대인 다이쇼쇼와도 사이온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2. 청화가로 공가 중에서는 오섭가 다음 랭킹이다. 산죠 사네토미 정도라면 메이지 유신 관련 인물들 중 가장 금수저급에 해당한다.
  3. 공가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듣보 집안이었다.
  4. 산죠 가문과 사이온지 가문은 둘 다 청화가에 해당한다.
  5. 2차대전 패전 때까지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원칙적으로 현역 장군들이 맡았다. 따라서 정부 정책에 불만이 있으면 장군들이 대신직을 일제히 거부해서 내각을 강제로 무너뜨리곤 했다. 즉 군부의 지지가 있어야 정권을 지킬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