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학 학력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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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入學 學力考査

1 개요

1981년부터 1992년까지, 즉 1982학년도[1]부터 1993학년도까지 시행되었던 전국 규모의 대학입학/교육 적격자 선발 시험이다. 필기시험 320점에 체력장 20점을 합하여 340점 만점으로 구성되었다. 1982학년도부터 1987학년도까지는 선시험 후지원, 즉 먼저 학력고사를 본 후 그 점수 가지고 대학을 지원했으며[2] 1988학년도부터 1993학년도까지는 선지원 후시험, 즉 먼저 지망대학을 지원한 다음 학력고사를 봐서 당락을 결정했다.[3] 당시에는 대입 모집군이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었는데[4] 선시험 후지원 시절에는 11월에 1회 시험을 본 후 그 점수로 전기, 전기에 탈락하면 후기에 지원했으며 선지원 후시험 시기에는 대입 지원이 먼저이고 채점이 대학에서 진행되다 보니 그에 따라 학력고사도 전기(12월)와 후기(다음해 1월) 2번 시행되었다. 보통 후기 시험이 전기 시험보다 난도가 더 쉬운 편이였다.

인문/자연계(문/이과)구분이 폐지된 제7차 고등학교 교육과정[5]이 시행된 2002년 이전에 시행되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계열별 분리가 이루어졌다.

선지원 후시험 시절에는 원서 접수 마감일이면 오후 6시부터 각 방송사들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각 대학 학과별 지원 현황 및 경쟁률을 보도하는 특집방송을 내보냈다. 때문에 이 시간대에 주로 방송되는 만화영화나 어린이 프로그램도 결방되어 어린이 시청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학력고사 시험 당일이면 시험이 치루어지는 대학 앞에서는 수험생 말고도 수험생의 학부모들, 모교 출신 수험생들을 응원하러 나온 해당 대학 재학생들, 학부모들과 함께 수험생들의 합격을 기도해 주러 나온 목사나 스님, 합격 기원 엿이나 찹쌀떡을 팔러 나온 잡상인 등이 몰려들어 한바탕 북새통이 벌어지곤 했다.

2 유래와 역사

한국의 대학입학시험제도는 1969년에 크게 변화하였다. 1969학년도부터 대학별 본고사 이외에 국가에서 실시하는 대학입학예비고사를 실시하게 된 것.[6] 이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대학별 시험을 볼 자격을 줬다.[7] 첫 시험은 1968년 12월 19일에 실시됐다. 당시 체력장 20점 포함 340점 만점체제로 고교에서 이수되는 대부분의 과목을 포함한 사지선다형 출제는 학력고사시절로 그대로 이어졌다. 10.26사태 이후 전두환이 집권하고 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전두환의 사회개혁작업의 하나로 실시된 과외금지와 맞물려서 당시 망국병이라 일컬어지던 고액 그룹과외의 이유였던 대학별 본고사 (수학과 영어)를 금지하고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전형을 하는[8] 이른바 7.30조치를 1980년 7.30일에 발표했다. 전국민적 충공깽. 이 때 처음으로 고교내신성적이 대학입시에 반영되게 되었다.[9] 그러므로 비본고사 세대는 81학번이 최초.[10] 이렇게 되어 80년대 한국 대학입시의 키워드가 되는 눈치작전[11]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암기위주의 입시를 보완한다는 취지로 1986학년도에 처음으로 대학별 논술시험이 실시됐다.[12] 그러나 1988학년도에 선지원후시험제로 개편되면서 논술은 2년 만에 폐지됐다. 과목수가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1987학년도 부터 9과목으로 줄었다. (과목항목 참조)

1988학년도부터 선지원후시험제로 바꾼 이유는 지나친 눈치작전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자 정부가 해결책이랍시고 내놓았던 것인데 막판 눈치작전만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애꿎은 학생들만 피해를 봤다.[13] 이 때 유행한 신조어가 "고득점 재수생". 즉 체력장포함 300점 이상을 받고도 서울대등에 합격하지 못하고 재수를 하게된 인원이 세자릿수(혹은 네자리수)로 폭증하는 현상이 시작됐다.[14]

3 과목

(학년도 기준)
1981년[15]~1983년: 총 14과목. 국어,수학,외국어(영어를 포함해 응시하고자 하는 외국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16]) 비롯 한문, 국사, 국민윤리, 정치경제, 기술(가정), 공업(가사), 사회과목 4과목, 과학과목 택일 (문과기준) 등 사실상 내신산정 과목과 마찬가지.[17]
1984년 문과와 이과에 각각 국어 II와 수학 II 추가[18]. 총 15과목
1985년 문과의 경우 과학 한 과목을 추가하여 물리나 화학 중 한 과목을 반드시 선택하도록하고 추가로 한 과목 선택하게 함. 즉 문과생 99%가 생물을 선택하는 사태 방지. 문과 16과목. 이과는 이전과 동일.
1986년 영어를 필수로 하고 제 2외국어를 별도로 시험 치게 함. 따라서 문과는 17과목, 이과는 16과목이 됨.

1987년 시험부터 9과목으로 시험과목이 축소되게 된다. 아래 서술은 9과목으로 축소된, 1987년~1993년의 과목 구분이다.

인문계열은 국어Ⅰ 55점 만점, 국어Ⅱ 20점 만점, 영어 60점 만점, 수학 Ⅰ·Ⅱ-1 55점 만점, 국사/윤리 각 25점 만점이 필수로 지정되었고 사회Ⅰ·Ⅱ, 세계사, 지리Ⅰ·Ⅱ중 택2 각 과목당 20점 만점, 물리Ⅰ, 화학Ⅰ, 생물Ⅰ, 지구과학Ⅰ중 택1 20점 만점, 제2외국어 및 실업 중 택1 20점 만점 등 총 320점+20점(체력장[19])=340점 체제로 구성되었다.

자연계열은 국어Ⅰ 55점 만점, 영어 60점 만점, 수학 Ⅰ·Ⅱ-2 75점 만점, 국사/윤리 각 25점 만점이 필수로 지정되었고 물리Ⅰ·Ⅱ, 화학Ⅰ·Ⅱ, 생물Ⅰ·Ⅱ, 지구과학Ⅰ·Ⅱ중 2개 과목 선택[20] 각 과목당 20점 만점, 사회Ⅰ, 지리Ⅰ, 세계사중 택1 20점 만점, 제2외국어 및 실업 중 택1 20점 만점 등 총 320+20점(체력장)=340점 체제로 구성되었다. 이거 이과 맞어?[21]

이외에도 예체능 계열의 경우 사회, 과학을 하나씩만 선택하고 국어 II가 빠지면서 남는 40점은 자기 전공의 이론시험(음악, 미술, 체육)으로 채워지게 됐다. 당시엔 이런 예체능 학생들을 위해서, 지금은 과학만 있는 하이탑에 음악, 미술도 있었다.

그래서 인문계와 자연계는 국, 영, 수가 190점, 기타과목이 130점, 예체능계는 국, 영, 수가 170점, 기타과목이 150점인 체제다. 제2외국어와 실업 중 하나 선택이 가능한데 일부 대학은 제2외국어를 치를 학생만 지원 가능했다. 당시에는 원점수를 그대로 적용했으니 자기가 배운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낫겠지만 지금처럼 표준점수제를 도입했다면 당시 고등학생 중 소수만 배웠던 중국어나 스페인어에 응시자가 몰렸을지도.

4 시간표

1982-1986

교시계열시험 과목배점
1교시공통국어Ⅰ
한문Ⅰ
50
남자기술20
공업, 상업, 농업, 수산업 중 1개 선택20
여자가정20
가사20
2교시공통국사25
국민윤리15
정치·경제15
수학Ⅰ50
3교시공통영어, 독어, 불어, 중국어, 일본어, 서반아어 중 1개 선택50
4교시인문계사회문화15
세계사15
국토지리15
인문지리15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 1개 선택15
자연계물리15
화학15
생물15
지구과학15
사회문화, 세계사, 국토지리, 인문지리 중 1개 선택15
320
공통체력장20
총계340


1987-1992

교시계열시험 과목[22]배점
1교시공통국어Ⅰ(한문Ⅰ 포함)55
국사25
2교시인문계수학Ⅰ, Ⅱ-155
사회Ⅰ·Ⅱ, 지리Ⅰ·Ⅱ, 세계사 중 2개 선택20+20
자연계수학Ⅰ·Ⅱ-275
사회Ⅰ, 지리Ⅰ, 세계사 중 1개 선택20
예체능수학Ⅰ, Ⅱ-155
사회Ⅰ, 지리Ⅰ, 세계사 중 1개 선택20
3교시공통영어60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23], 일본어, 에스파냐어,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가사 중 1개 선택20
4교시공통국민윤리25
인문계국어Ⅱ20
물리Ⅰ, 화학Ⅰ, 생물Ⅰ, 지구과학Ⅰ 중 1개 선택20
자연계물리Ⅰ·Ⅱ, 화학Ⅰ·Ⅱ, 생물Ⅰ·Ⅱ, 지구과학Ⅰ·Ⅱ 중 2개 선택[24]20+20
예체능음악, 미술, 체육 중 1개 선택40
물리Ⅰ, 화학Ⅰ, 생물Ⅰ, 지구과학Ⅰ중 1개 선택20
320
공통체력장20
총계340

1993

교시계열시험 과목[25]배점
1교시공통국어(한문上 포함)55
국사25
2교시인문계일반수학, 수학Ⅰ55
(정치·경제, 사회·문화)[26], (한국지리, 세계지리)[27], (세계사). ( ) 묶음 중 2개 선택20+20
자연계일반수학, 수학Ⅱ75
(정치·경제), (한국지리), (세계사). ( )묶음 중 1개 선택20
예체능일반수학, 수학Ⅰ55
(정치·경제), (한국지리), (세계사). ( )묶음 중 1개 선택20
3교시공통영어60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에스파냐어,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가사, 정보산업 중 1개 선택20
4교시공통국민윤리25
인문계문학·작문·문법20
과학Ⅰ上[28], 과학Ⅰ下 [29], 과학Ⅱ上[30], 과학Ⅱ下[31] 중 1개 선택20
자연계물리(과학Ⅱ上 포함), 화학(과학Ⅱ下 포함), 생물(과학Ⅰ上 포함), 지구과학(과학Ⅰ下 포함) 중 2개 선택[32]20+20
예체능음악, 미술, 체육 중 1개 선택40
과학Ⅰ上, 과학Ⅰ下, 과학Ⅱ上, 과학Ⅱ下 중 1개 선택20
320
공통체력장20
총계340

시험은 4지선다형 시험였고 폐지 직전 몇 년 동안은 주관식 문항이 만점의 30%를 차지하였다.[33] 학력고사의 출제는 중앙교육연수원 평가관리본부에서 담당하다 중앙교육평가원을 거쳐, 1992년 마지막 해에는 국립교육평가원에서 담당하였다.

한편 전문대학에 진학할 때에도 별도의 학력고사를 치뤄야 했는데, 시험 과목은 계열 구분 없이 국어, 수학, 영어, 국사 , 국민윤리 5과목이었다.

교시계열시험 과목
1교시공통(필수)국어Ⅰ(한문Ⅰ), 국사
2교시공통(필수)수학Ⅰ, Ⅱ-1, 국민윤리
3교시공통(필수)영어

5 비판

사교육을 없애고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한다는 일련의 조치로 도입되었으나, 지나친 암기형 문항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험생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의 학업성취도 검사에 지날 뿐 대학 교육 적격자를 선발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는 비판에 부딪치자 1987년부터 미국의 SAT를 본 따 학력고사를 대체하기 위한 대학입학 적성검사의 연구.개발이 진행되었으며 1990년부터 1992년 7차례에 걸친 실험평가를 통해 1993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행되자 폐지되었다.

6 여담

동점자가 나올 경우 재학생이 재수생에 우선하며, 연소자가 연장자에 우선한다.
만일 동점자가 같은 나이일 경우 국민윤리 점수가 높은 자가 우선하며, 국민윤리 점수도 같을 경우 국어, 국사 순으로 나간다.

1991학년도 학력고사 수학이 역대 최고로 어렵게 출제[34]되어 당시 55점 만점이었던 문과 수학에서 반만 맞으면 서울 법대를 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1989학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난이도가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던 와중에 일어난 사태였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게 나온 문제라도 70년대 본고사 수준의 문제보다는 쉬웠다고 한다. 즉 학생들이 (요즘도 그렇지만) 학교나 학원등에서 출제경향을 익히는 것이 결국 입시공부이기 때문에 비슷한 패턴과 난이도의 문제에는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데 듣도보도 못한 스타일의 문제가 출제되면 학생들이 당황을 하던 것이다. 문제 자체만 놓고 보면 대학별 본고사수준에는 못 미쳤다.[35]

7 사건사고

7.1 92학년도 후기 대입학력고사 문제지 유출 사건

92학년도 후기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하루 앞둔 1992년 1월 21일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보관중인 학력고사 문제지 포장 박스 겉면이 뜯겨져 있는 것을 경비원이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조사 결과 문제지가 각 교시별로 한 부씩 없어진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교육부에서는 부랴부랴 전국 각 대학에서 보관 중인 문제지를 긴급 회수하여 파기하는 한편, 1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후기 대입 학력고사를 2월 10일로 연기했다. 이 사건으로 21일로 예정된 예비소집을 위해 올라와 있던 수험생들은 헛걸음을 치고 되돌아가야 했고, 22일 학력고사 실시와 함꼐 연금 상태에서 풀려날 예정이었던 학력고사 출제위원들은 20일을 더 붙잡혀서(?) 문제를 다시 출제해야 했다. 결국 많은 수험생들 및 출제 위원들은 2월 2일~5일로 이어지는 구정 연휴에도 쉬지 못하고 수험 공부 및 문제 출제에 매달려야 했고, 후기대 입시 관계자들 역시 합격자 발표 예정일인 2월 15일까지 불과 5일 안에 입학 사정을 끝마치고 합격자를 발표해야 했기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또한 전문대 입시도 예정된 2월 19일에서 1주일 연기되는 바람에 전문대 입시 관계자들도 불과 3일이라는 촉박한 시간 안에 입학 사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덤으로 많은 대학들이 편입학 시험을 취소, 연기해야 했다.
한편 이 사건의 여파로 당시 교육부 장관 윤형섭이 경질되고, 후임으로 조완규 서울대 총장이 임명되었다.
경찰 수사 결과 범인은 당시 야간 당직을 맡고 있던 경비원으로 밝혀졌다. 해당 경비원은 평소 알고 지내던 교회 집사의 딸이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으로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며 정작 시험지는 해당 수험생에게 전달하지 않고 바로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8 역대 수석

학년도성명점수출신 고교진학 대학
1982원희룡332제주제일고서울대 법학과
1983홍승면339고려고서울대 법학과
1984황덕순
장순욱
송병호[36]
332경성고
영신고
김천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법학과
서울대 의예과
1985이미령336미림여고서울대 물리학과
1986이준걸
오석태
332경성고
숭실고
서울대 물리학과
서울대 경제학과
1987김영룡
김동균
332동래고
단대부고
서울대 전자공학과
서울대 물리학과
1988정성태
이일완
331충렬고
서초고
서울대 물리학과
서울대 전자공학과
1989이종진325대신고서울대 화학공학과
1990양신호333대구고서울대 경제학과
1991한확325목포덕인고서울대 컴퓨터공학과
1992이학호[37]336양정고서울대 물리학과
1993민세훈339가락고서울대 법학과

전부다 서울대인건 안비밀[38]
어렵다 보니 만점이 없다

9 같이 보기

  1. 1969학년도부터 전해인 1981학년도까지 실시됐던 예비고사가 이름만 바꾼 것이다. 유래항목 참조.
  2. 현 수능 정시모집과 비슷하다.
  3. 대입 수험생 입장에서는 사상 최악의 입시제도로 불리운다. 자신의 객관적인 실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모의고사 점수나 내신성적 등의 '감'에 의해 대학 지원 후 학력고사를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의고사 전국 1등, 수학,과학 올림피아드 한국 대표 등의 극상위권 수험생도 시험 당일 컨디션난조가 있으면 떨어질수밖에 없다. 수시도 없었고 복수지원도 없었던 시기라서 전기에 단 1회의 지원이 실패하는 경우 피해가 꽤 컸다. 실제로 신지원 후시험이 처음 시행된 88년 최상위 수험생이 대거 탈락하는 바람에 이들이 재수를 한 89년에는 전국 수석과 서울대 자연계 수석, 고려대, 포항공대, 가톨릭의대 등의 수석을 재수생이 석권하였다. 학력고사 역사상 재수생이 전국 수석을 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4. 몇몇 대학은 전후기 분할 모집을 실시하기도 했다.
  5.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6. 따라서 이전까지는 본고사란 말 자체도 없었다. 대학입학시험은 곧 대학별 국영수시험을 의미했으니까.
  7. 1969년 1월 4일자 동아일보의 사설에 따르면, 총 응시자 11만 2천여명 가운데 대학 총 정원의 1.5배수인 6만 1천여명을 합격시켜 합격율은 50%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컷오프는 340점 만점에 210~220점 정도였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예시는 통과만 하면 그만이고 본고사만으로 전형을 했으나 정부의 압력으로 점차 예시의 반영비율을 올리다가 서울대의 경우 79학년도에 50%까지 상승하게 되었다. 78년도에 처음 생긴 전문대는 교대(당시 2년제)와 함께 본고사 없이 예시와 내신으로 전형을 했다.
  8. 애당초 학력고사가 예비고사의 과목별 배첨 체계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지나치게 많은 과목이 포함되어 암기위주의 입시공부가 시작되는 안좋은 전통을 남겼다. 다만 현재의 수능 체제에서는 과목수가 줄어서 비수능 과목을 등한시하는 고등학생들이 많아졌고 미국 SAT I 과 현재 한국수능의 과목수를 비교해봐도 그 영향을 알 수 있다. 사실 윤리나 국사는 물론이고 사회나 과학등의 과목은 대학에서 공부를 따라갈 머리가 되는지 측정하는 "대입전형"의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9. 당시 경기고등 입시명문고 학생들은 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업받는 날보다 시내 학원에서 본고사공부를 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동급생끼리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 당시 형식적이던 고교내신성적반영비율이 7.30조치 이후 두자리수 퍼센트로 상향됐다.
  10. 81학년도까지는 예비고사란 이름을 유지했고 총정원 1.x배수 컷오프도 있었다. 82학년도부터 학력고사란 이름을 사용하고 1.x배수 컷오프제 폐지.
  11. 토토와 매우 흡사하다. 한번 본 시험점수를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베팅을 해야했다. 누구나 최대의 배당금을 노린다. 전공적성따위 개무시는 기본.
  12. 이 논술시험이 종국에는 본고사제를 복원하려는 대학측의 로비의 결과인지 교육당국의 진보적인 정책이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나 당시에 출제문항은 2010년대식의 논술을 빙자한 문제풀이식 본고사가 아니었고 순수하게 작문을 하는 것이었다.
  13. 학과 지원자가 입학정원에 미달하여 경쟁률이 1 이하인 경우 나중에 받을 학력고사 점수와 관계없이 사실상 자동 합격되지만 경쟁률이 높을 경우 기본적으로 불리한데다 선지원 후시험의 특성으로 인해 실제 점수에 따른 하향지원은 애초에 불가능했고, 모의고사 성적 등 만을 지원의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어 수험생의 시험 전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잘 모르겠다면 자기 점수를 모르고 지원부터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14. 도미노식으로 선배학년이 한학년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 셈.
  15. 예비고사 마지막해
  16. 이 때문에 몇몇 학생들이 영어를 선택하지 않고 점수 획득이 쉬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17. 사실상 고교 거의 전 과목
  18. 이건 81학년도~83학년도에서는 이과도 수학 II 시험을 안치뤘다는 흠좀무한 얘기. 이는 80학년도까지는 수학 II가 본고사에서 다뤄졌기 때문이다.
  19. 윗몸일으키기, 100미터 달리기, 멀리던지기, 오래달리기 (남자는 1km (2.5리), 여자는 800m (2리)였다.), 턱걸이 (남)/매달리기 (여) 등이 있었다.
  20. 단, 물리와 화학 중 최소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 즉, 생물·지구과학 선택은 불가했고 물리·화학 모두를 선택하는 것은 가능했다.
  21. 국사/윤리가 합 50점이다 보니 이과 과목인 수학,과학 총점보다 국,영,사회계열 과목 총점이 더 많다.
  22. 4차 교육과정
  23. 당시는 한중수교 이전(대만과 수교시절)이라서 문자는 정체자, 발음부호는 주음부호와 한어병음방안 병기
  24. 물리, 화학이 반드시 포함되 선택되어야 했다. 즉 생물-지구과학 조합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
  25. 5차 교육과정
  26. 과거 사회Ⅰ,Ⅱ 체제에서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을 심도에 따라 분류해서 Ⅰ,Ⅱ 체제로 편집한 것을 분야별로 헤쳐모여 두 과목 체제로 개편
  27. 한국지리는 지리 일반에 대해서 다루던 과거의 지리Ⅰ 중에서 지리 이론 대부분과 지리Ⅱ을 구성하는 지지학 중에서 한국지리에 해당하는 부분, 세계지리는 과거의 지리Ⅰ 중 지리이론 일부분과 지리Ⅱ의 지지학 중 세계지리에 해당하는 부분의 조합이다.
  28. 이전 체제에서는 생물Ⅰ에 해당
  29. 이전 체제에서는 지구과학Ⅰ에 해당
  30. 이전 체제에서는 물리Ⅰ에 해당
  31. 이전 체제에서는 화학Ⅰ에 해당
  32. 물리 또는 화학이 반드시 하나 이상 포함될 것. 즉 생물-지구과학 조합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
  33. 20점 만점인 경우 객관식 14문제와 주관식 3문제(각 2점)으로 출제
  34. 당시 93학년도를 마지막으로 학력고사를 폐지하고 본고사가 부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본고사 스타일로 수학 난도가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학교나 수험가에서 예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뜬금없이 일본 역대 본고사 문제집이 출간되기도 하고 한국일보에서는 고난도 수학 문제를 특집으로 엮어서 제공한 것이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본 시험에서는 발상 자체가 어려운 문제도 있었지만 단순한 문제조차도 어이없을 정도로 숫자 계산이 복잡하게 출제되어 시간 부족으로 더 곤란을 겪었다. 그탓에 순수 수학 전공이 아닌 공학 전공 교수가 출제(공대에서는 시험 시간에 계산기를 지참한다)한 탓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출제 난이도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게 제기되었고, 이후 92~93학년도 수학 시험은 역대급으로 쉽게 출제되고 만다.
  35. 물론 70년대식 본고사도 그 출제 경향에 익숙해지면 해볼만한 것 이었다고 한다. 결국 한국의 입시공부란 출제경향에의 적응기
  36. 탤런트 송윤아의 큰 오빠
  37. 관련기사 관련기사
  38. 의외로 자연계 수석이 의대로 진학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는 자연계 수석이 의대로 진학할 경우 장학 혜택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