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악

韓基岳

1898∼1941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동아일보조선일보 편집국장, 신간회 발기인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1898년 강원도 원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명오(明五), 호는 월봉(月峰)이었다.

191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이승복(李昇馥)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연해주, 동경 등을 옮겨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이시영·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도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곧 법무부 위원에 선임되어 입법활동에 참여하였다.

그 뒤 귀국해 중앙학교에 근무하다가 동아일보 창간에 동인으로 가담하였다. 1921년에는 동아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하였다.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 한국청년운동을 위한 핵심 기구를 설치, 운영하도록 기초를 닦았다.

또한,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공제(共濟)'를 발간했다. 1924년 7월 동아일보의 정치부장, 경제부장과 편집국장직을 맡아 일제의 탄압 일변도 정책에 대해 규탄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동시에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에는 시대일보(時代日報)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다. 이해에 월간 '개벽' 잡지가 항일민족기사로 인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자, 송진우·민태원과 함께 사이토 총독을 찾아가 항변, 해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개벽'지는 그 다음 해인 1926년 폐간이 되고 말았다.

1927년 2월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필봉으로 민족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5년부터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하였고, 이 학교의 감사로도 재직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