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幹會
신간회 강령과 규약 |
1 개요
일제강점기인 1927년 2월 15일에 조직된 좌우연합 사회운동 단체.
안재홍, 이상재, 김병로,오화영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홍명희, 허헌 등 사회주의자들이 합작한 좌우연합 독립운동 단체다.
2 배경
중국에서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당과 사회주의 단체인 공산당이 1차 국공합작(쑨원과 마오)을 맺게 되고 이러한 현실 속에 세계 코민테른 협회는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단결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반도에서 조선 민흥회가 결성되고 정우회 선언을 통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가 합작해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취지를 발표했고[1] 이에 따라 좌파와 우파가 결합을 하여 신간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3 전성기
이 단체는 합법 단체로 전국적으로 여러 지회 지부를 두었으며, 최고 절정기때는 회원 수가 4만 명에 육박했었다.
신간회는 순회 강연단을 조직하여 전국으로 강연을 하러 다녔고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고 갑산 화전민 항일 운동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수재민 구호 활동을 펼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후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개최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간부만 44명, 총 90여명이 구속되는 대대적 사건이 터진다.
4 해소
이 사건 이후 최린과 송진우 등 자치론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들어온다. 본래 신간회는 합법 단체인 까닭에 일제 당국의 탄압하에서 기대한 만큼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때문에 광주학생운동 이후 자치론 주장하는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참여하면서 삐꺼덕 거리기 시작... 김병로로 대표되는 새 지도부가 이들과 협력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일체의 기회주의를 배격한다는 신간회의 창립이념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신간회가 저 방침을 내놓은 계기가 민족개조론이 나오고 최린의 천도교 신파와 송진우와 김성수 등이 자치주의로 틀려고 한다는 것에 사회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공통된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계기였는데, 이후에 자치운동과도 손을 잡을 것이면 신간회의 존재의의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후 자치성향과 타협주의가 더 강해진 상태로 유지되었다면, 아마 그 이후의 신간회는 독립운동단체라고 불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침 대륙에서 장제스가 1차 국공합작을 깨트리고 공산당을 토벌하기 시작하자 세계 코민테른 협회는 사회주의자는 민족주의자들과 타협해서는 안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따라서 신간회 내부의 사회주의자들[2]은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아 해소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제의 해산시도[3]에, 중앙지도부는 일제의 집회금지로 인해서 지회와는 별개로 설립한 동시에 사회주의 세력은 거의 배제된 상태로 출범했고, 노조에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해졌던 지회들은 중앙지도부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보였다. 이들을 타협시킬 수 있는 정통성 있는 기존지도부는 모조리 일제에 투옥되어 있는 상황[4]. 내부분열이 심하게 터져버리고 지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세력은 해소후 재창단을 주장,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지회가 점점 늘어나서 중앙집행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931년 전체대회가 열렸고 격론 끝에 투표를 한 결과, 해소후 재창단 쪽이 더 많은 표를 받으면서 스스로 해체, 그리고 재창단 시도를 하지만 일껏 해소된 신간회를 다시 창단하게 내버려둘리가 없는 일제가 재창단 행사를 방해하면서 진짜로 없어진다.
4.1 해소의 책임론에 대하여
워낙에 신간회의 의미가 크다보니 누구 때문에 엎어졌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상단에도 적혀 있지만 워낙에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 일단 가장 흔하고 우파쪽 주장은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은 사회주의자가 주도해서 해소했다 라는 것. 좀 과격한 입장에서는 노농에 대한 이념침투를 과신해서,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좌파마저 배제시키고 신간회를 먹으려고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반대쪽 주장은 당연히 자치론으로 기운 지도부 때문에 해소되었다라는 것.
사실 양자 모두가 책임이라면 책임이고, 의도라면 의도이지만 해체의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 일제의 노력.
- 일제는 초기 협력관계의 매개가 된 지도부를 모두 구속하고 신간회가 해소될 때가지 구금상태를 유지하였으며, 연락할 방법마저 막았다. 또한 해소후 재창단도 가능할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신간회 해소를 위한 전국집회를 허용했다. 애초에 신간회의 새로운 지도부가 민족주의계 일색이 되었고, 지회와 유리된 것은 일제가 집회를 금지해서 중앙집행부가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신간회가 해소한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니까, 이건 집회를 허용해서 모이게 해준 것이다. 물론 다음날 재창단을 한다고 다시 집회를 하려고 하니, 이번에는 허용하지 않고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키는 것으로 재창단을 틀어막았다. 이 때문에 신간회 해소에 있어서 일제는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서 해소를 하지는 않았으나, 신간회가 무너지게 되는데 여러모로 개입했던 정황이 분명하다.
5 의미
일제시대하 합법적 독립운동 단체이며 한국내에 존재한 최대규모의 독립운동 단체[5]였으며, 가장 대표적은 좌우연합단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 단체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일제가 개입을 했건 유도를 했건 결국 좌우익의 분열로 인해서 자진해소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물론 일제시대하의 합법적 단체라는 점에서, 규모가 커지는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동시에 한계성도 뚜렷하였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사실 사회주의자들의 책임, 그것도 외부의 지령을 강조하는 것도 합법적인 틀에서만 존재해서 일제에 타협할 여지가 근본적으로 존재했던 신간회 자체의 한계성에 대해서 좀 얼버무리려는 경향도 있으니 말이다.
한국근현대사의 '한국의 독립운동' 분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 ↑ 당시 민족주의자는 두개의 노선으로 나뉘어졌는데 하나가 일제와 타협하는 타협적 민족주의파, 즉 기회주의자들 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일제에 저항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이었다. 정우회 선언은 어디까지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단결을 촉구한 선언이었다.
- ↑ 대표적인 인물로 강기덕을 들 수 있다.
- ↑ 일제는 합법적 단체가 존재하면 그 단체만 관리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창단을 허용했는데, 그 규모가 상상이상으로 커지고 기껏 허용한 단체를 다시 불법화 할 명분을 찾지 못해서 어떻게 해산 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 ↑ 이들의 대부분은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불문하고 해소를 반대했다.
- ↑ 상해 임시정부는 이 시기 굉장히 세력이 축소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