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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송진우#
(1922년 3월 18일 중앙고보 제1회 졸업기념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송진우, 왼쪽에서 첫 번째는 김성수.)
1 개요
宋鎭禹, 1890년 5월 8일 ~ 1945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정치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호는 고하(古下).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2 본문
1915년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친구인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였다.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으며,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하여 이후 30여 년 간 사장,고문,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이 사람이 사장시절에 추진한 대표적인 계몽운동이 브나로드 운동. 그래서 동아일보의 창업자는 김성수이지만 동아일보의 사상적 바탕을 이루는 사람은 바로 송진우라고들 한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이후로 동아일보가 정간되자 책임을 지고 사장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동아일보는 점점 일본과 타협하는 노선을 보이게 되었으며 종국에는 학도병 권유문을 뿌리는 등 친일 대표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때 김성수 등과 함께 자치론을 주장하여 여론의 비난을 받은 적도 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총독부의 협력 요구를 수 차례 거절했다고 한다.[2]
8.15 광복 직전인 1945년 8월 11일 총독부 측에서 경기도지사 이쿠다(당시 70세 노인네였다)를 통하여 조선의 자본가, 지주, 명사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송진우를 접촉하여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줄 것을 요청했으나 송진우는 중경의 임시정부 봉대(奉戴)와 연합군의 승인을 이유로 대면서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3]. 그러나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1957년 8월 <국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송진우에게 치안의뢰 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중략..) 또 한국에서는 내가 처음에 송진우씨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으나 송씨가 거부했기 때문에 여씨를 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나 그것은 잘못으로 내가 송씨 및 안재홍,장덕수씨를 만난 것은 종전 전 총력 연맹에 협력을 요청한 일이 있지만 그들이 깨끗이 거부하여 왔기 때문에 나도 그들의 신념을 이해하여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전후 송씨와 안씨에게 교섭한 일은 없다.
8.15 광복 후 여운형 등이 주동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맞서 우익세력을 규합하여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수석총무가 되었다. 이 때부터 송진우는 진보진영에서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까이는 첫 스텝을 밟기 시작하는데, 애초에 한민당이 막판에 일본에 굴복한 언론인들, 자본가, 지주, 기득권 세력(이들을 줄여서 극단적으로 친일파라고도 하는 것 같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당이기 때문에 민중과 상당히 괴리되어있었고, 이러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이들은 친미를 내세워 미군정에 적극 협력, 그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세력을 확장해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민당의 특성을 말하자면, 한민당 인사들은 대부분 미국유학파들로 상당한 실력가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를 옹호하였으며 조선민족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어 이들을 개조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이것이 이들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 친일로 전향한 이유)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유산계급에 속했고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자들에게 당한 게 많았기에 사회주의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한반도 사정을 전혀 몰랐던 미군정은 영어를 잘하는 이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듣고 사회주의를 탄압하였다.
사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당시 서울지역 우익의 대표격인 고하를 찾아가 좌우를 망라하는 조선민족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자고 지속적으로 협력을 요구하였고 열심히 설득했다. 그러나 고하는 "경거망동을 삼가라,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소리만 하면서 여운형의 제안을 끝끝내 거절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태도를 보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이 있지만, 이는 당시 송진우가 보기에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이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므로 그럴바엔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하는편이 낫다고 보았기 때문도 있고, 여운형이 과거 고려공산당 활동에 몸 담았던 전적이 있어 공산주의자라고 판단했기 때문도 있다. 여운형이 동아일보의 라이벌 신문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으므로 자존심상 라이벌이 운영하는 조직인 건준 아래로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4]
(1935년에 최송설당 [5]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최송설당 여사(앞쪽)가 축하하러 온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과 자리를 함께한 사진인데, 확실히 둘이 그렇게 친해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여운형은 1947년[6] 고하의 집을 나오는 길에서 괴한들에게 두들겨 맞는(...) 테러를 당하여 사실상 결별하게 된다. 이 때문에 건국준비위원회는 서울지역 우익의 불참, 박헌영 계열 좌익세력의 주도권 장악으로 좌익성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7]
뒤이어 그는 미군정 뿐만 아니라 뒤이어 환국한 이승만 및 임시정부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임정 중심의 국가를 세우는 데에 도움을 주었고 속간된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비록 사회주의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긴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는 민족의 실력 및 문화 양성과 민주주의라는 원칙을 고수하였던 상당한 원칙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그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본격적으로 몰락하게 된 것은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전해졌을 때 반탁운동에 신중을 기하라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때부터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신탁통치가 결정이 되었고, 미국은 반탁 소련은 신탁을 주장하였다"는 식으로 양측 입장을 완전히 바꿔 사전에 오보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터트렸는데, 이에 대해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이면서도 반탁을 주장했던 임정 요인들과 의견을 달리하였다.
당시 송진우의 입장은 강준식의 《적과 동지》에 이렇게 묘사되어있다.
강병순: 찬탁을 주장하셨다는 소문은 사실입니까?
</br>송진우: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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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강:좌익이 퍼뜨린 낭설인가 봅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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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송:임정은 짚신 감발을 하고 다니면서라도 반탁하겠다고 하는데. 반탁하는 건 좋지만 군정과 충돌하는 건 피하는 게 좋다고 했더니 백범이 화를 내면서 고하는 찬탁파냐고 묻더군. 아마 그런 얘기가 와전된 것이겠지. 조선을 신탁관리 아래 둔다는데 나라고 찬탁을 주장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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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강: 글쎄, 그러셨겠지요.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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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송: 허지만 백범은 차제에 정권을 인수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이게 도무지 현실정치를 무시한 얘기란 말이야. 군정이 저렇게 터억 버티고 있는데 정권을 인수하겠다고 나오면 군정과 부딪칠게 뻔한 이치 아닌가. 아무리 생각이 간절해도 앞뒤를 좀 재가며 일을 해나갈 줄 알아야지. 이건 숫제 모험을 하려 드니 도대체 어떻게 뒷감당을 하겠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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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강: 듣고 보니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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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송: 역사를 상고해봐도 조선인은 개개인이 우수한데 비해선 집단전략에 능하질 못해. 정신은 고귀하달 수 있지만, 가령 기미년 운동을 돌이켜봐도 독립하겠다는 감정과 기분만 앞섰지 그에 부수되는 여러가지 전략이 없어. 그저 만세 부르다 많은 양민만 희생시키고 끝났거든. 물론 그로 인해 상해임정이 서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운동들이 시작된 점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민중운동의 결과론이고, 적어도 3.1 운동을 추진했던 지도부의 정치능력만큼은 빵점이었단 말이야. 전국적으로 만세의 불길을 질러놓는 덴 성공했지만, 그 다음 즉 일본의 무력제압에 대처할 방안은 아무 것도 없어. 그저 태화관에서 선언문 낭독하고, 경찰에 자진신고한 것밖에 더 있는가. 내 말은 이번 반탁운동도 그런 식이 되어선 곤란하다, 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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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임정은 거리시위의 여세를 몰아 정권을 인수하겠다지만 적어도 지도부가 그런 무모한 계획을 추진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정권을 달란다고 그럼 가져가시오 하고 내놓을 군정이 어디있겠나. 응해오지 않을 때의 대비책도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방법을 신중히 고려해보자고 했던 건데, 백범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나더러 찬탁파냐고 묻더란 말이야. 원,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야. 쯧쯧.
하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일제강점기의 상처가 덜 가신 민중들과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것이었고 반탁을 강력히 주장하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발언은 모두가 현실적이고 사실인 것은 맞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은 그의 생각만큼 느긋함을 요구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신탁통치안이 내려진 이후 국내의 세력은 오로지 친탁이냐 반탁이냐의 두 세력만 존재할 뿐, 그 외의 어떠한 입장도 용납되지 않았다. 더구나 송진우는 당시의 상황이 해방이 되고 난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뿐 아니라 신탁통치안에 나왔던 자주적 통치능력을 갖추기까지 당분간이란 항목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8]. 여기서 "당분간"이라는 기간은 연합국측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라 그 기한이 언제까지인지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반탁측에서 내놓았던 의견 즉 사실상의 또다른 식민통치라는 점이라는 것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임정 대표격인 김구의 큰 반감을 사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9] 한현우에게 암살당하였다[10][11]. 한현우는 일당들과 새벽에 종로구 원서동 저택에 들어와 13발의 총탄을 난사하였고, 송진우는 총알 6발을 맞고 즉사하였다.
여담이지만 그는 당시 목소리가 멋진 남자에 손꼽혔으며, 억양에 악센트가 없고 근엄하고 중후하기로 이름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어 악센트가 세지 못한 것으로 유명했다. 가령 光化門(광화문) 550番(동아일보 사옥의 주소다)이라고 부를 때 「고까몽」할 것을 「고가뭉」하고 또 「私し 宋鎭禹ですが」라고 전화 받는걸 보면 「와따시 송징우데스가」하고 첫자부터 마즈막 「데스가」에 이르기까지 줄곧 고저장단없이 그냥 주욱 말했다고 한다.
암살당했지만, 1935년에 새해를 맞아 광산부자 최창학과 함께 황해도 신천 온천으로 드라이빙하다가 차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져 죽을 뻔했다 살아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차 바퀴가 아카시아 나무에 걸려서 살아나서 전치3주에 그쳤다고 한다.- ↑ 3.1 운동에 연루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자료
- ↑ 그러나, 한편에서는 '송진우도 친일파'라면서 1934년 '조선대아세아협회'라는 총독부 관제단체에 명의있다는 것과 일제강점기 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에 명의있다는것 등을 근거로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딱 잘라 말하자면 송진우는 친일파가 아니다. 먼저, 1934년 '조선대아세아협회'라는것에 대해 해명하자면, 이 단체에는 12명의 친일파 거두와 방응모, 여운형, 송진우 등 15명의 조선인의 명의가 있다. 이는 '신문사 사장 직함'으로써 피할 수 없었다고 봐도 좋다. 왜냐하면 당시는 '신문사 경영' 자체가 민족운동인 시절이었기 때문이었고, 신문사를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운동 양성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문사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 도용 또는 이용되는 것을 묵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해석하면 될거다. 그리고, 1945년 일제강점말기에 '조선언론보국회'에 그의 명의가 있는 것도 그 시기를 고려해야봐야하는데, 이 시기 송진우는 거의 모든 활동을 일체 그만두고 칩거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재홍, 홍명희, 여운형같이 명의 도용 당했다고 해석하면 될거다.(송진우는 총독부로부터 무슨 협력의 대가로 받은 급부가 없다. 대개 일반적인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지위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협력한 반대급부'를 받는 게 당연했으니깐) 반면, 그의 평생 동지격인 김성수 경우는 중일전쟁때부터 라디오 시국강연 등 나섰던 기록이라든가 총독부로부터 반대급부(재산)을 받았다는 것도 있고...
- ↑ 이 주장은 1946년 한민당원 김준연이 동아일보사설란에 기고한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보수세력에서는 '여운형 치안권 이양 이전 송진우가 먼저 총독부로부터 치안권 의뢰받았다.'는 주장을 사실인거 마냥 정리하고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한 전말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서중석이 저술한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 p199 부분 참조하길 바란다.
- ↑ 참고로 일제강점기에도 조중동 경쟁이 있었다. 당시 3대 신문이었던 방응모의 조선일보, 송진우의 동아일보,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의 회사 확장, 잡지발행 경쟁은 "3증경쟁"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 ↑ 영친왕의 보모이자 김천고등학교 설립자
- ↑ 송진우가 1945년 12월에 암살당했는데 연도의 오류로 보인다. 수정필요
- ↑ 박헌영도 그렇고, 송진우가 좀더 개방적인 자세를 취해 여운형의 협력을 받아들였다면 좌우대립이 한결 완화되어 통일 국가 수립이 한층 앞당겨 졌을거라는 가정도 있다. 해방 전후사 연구해본 사람들은 민중세력인 여운형과 유산자 및 기업가를 대변하는 지식인 송진우가 결별하지 않고 연대했더라면 남한정국이 완전히 달라졌을거라는 얘기를 한다. 송진우와 결별한 여운형은 지주, 자본가들과 연대가 되지 않자 자연히 정치적 자원을 생산현장의 노동자들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따라서 당시 노동자세력을 대변하던 극좌파 박헌영 세력과 손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 참조.
- ↑ 실질적으로 밝힌 기간은 5년이다. 그것도 5년간 통치한다라고 했다.
- ↑ 가장 짧은 기간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2시간 만에 암살당했다.
- ↑ 한현우는 백의사 소속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한현우의 진술에서는 송진우 암살 이후에 김구와 이승만이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백의사와 김구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때문에 송진우 암살 배후는 백범이라는 의혹이 있다.
- ↑ 한현우는 46년 뒤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 정책수석으로 내정되었다가 사퇴한 전병민의 장인임이 알려져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