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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5년에 개교한 대한제국의 전문대학. 순수하게 우리 민족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적 대학교육기관이다.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2 역사
2.1 초기시절
1905년 대한제국 탁지대신이었던 충숙공 이용익 선생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반도에 세워진 근대적 대학교육기관 가운데, 우리 민족의 힘으로 만들어진 대학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1]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은 고종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며 '널리 사람다움(인간성, 人間性)을 열어 이루게 한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2] 전라남도 보성군과는 정말 하등 상관이 없다. 보성전문의 초기 모표와 교기가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한 이화장(李花章)을 사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며,[3] 직원 봉급도 흡사 왕립학교처럼 왕실의 내탕금에서 지급하였다.[4]
이용익이 보성전문학교를 세우면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이 학원에서 배움을 받는 준재 여러분은 나라와 겨레를 이끌 독립과 자주를 이룩하기 바란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그저 외국어의 습득에만 급급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신문화의 창조를 위해 모든 분야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이에 법률경제 등의 새 학문을 닦아야 한다.
실제로 보성전문학교가 처음 설립될 당시의 학과 구성은 법과(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와 상과(현 경영대학, 정경대학 경제학과)의 2개 학과였다. 학과구성만 보더라도 조선의 전통 인문학이 아닌 서구 근대 실용학문을 계수하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취지가 드러난다.
보성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은 신해영이었는데, 고종시대에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가 1906년에 펴낸 '윤리학 교과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진정으로 받들어 높여야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지적인 용감이니, 의무를 완전히 하고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여서 어떠한 곤란을 만난다 할지라도 굽히고 꺾이지 아니하고, 마침내 처음의 뜻을 이룸은 과연 참으로 받들어 높여야 하는 진정한 용감의 기운이니, 사회의 행복과 진보는 이런 부류의 용감한 사람이 져야 할 바가 많은 것이다.
윤리학 교과서임에도 불구하고 용감함에 대한 강조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초대 교장의 이러한 사상을 보더라도, 보전 학생들은 이미 초창기부터 심히 터프하고 강직한 캐릭터로 양성되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교사(敎舍)는 처음에 서울 박동(현재의 수송동)에 위치한 관립 한성 아어(러시아어)학교의 건물을 빌려 사용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다가 1906년 아어학교에 이웃한 김교헌(金敎獻: 조선시대 문신,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대종교 제2대 교주)의 기와집 200여간을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현재 조계사 터이기도 하다.
2.2 일제 강점기
충숙공 이용익이 항일운동을 하다 1907년 일제의 첩자에 의해 원통하게 숨지고, 1910년 국권이 상실된 후 교주 이종호와 보성중학 교장 노벽린이 해외 망명길에 오르면서 보성전문은 졸지에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하고 만다.
그러자 천도교의 의암 손병희 선생이 보성전문을 인수하였다. 당시 천도교회는 민권운동의 가장 강력한 보루였으며, 이미 10여 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천도교 총부는 1911년 들어 보성전문의 경영을 맡으면서 학감이던 윤익선을 교장에 임명하였고, 천도교 총부측의 최린은 중학교 교장대리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보성전문은 동학을 계승한 민족종교인 천도교 계통의 학교로 새롭게 자리매김하였다.[5] 그러나 천도교는 보성전문을 종교계 학교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부 미션계 학교처럼 교학의 목적을 자기 교파의 교리에 얽매려 하지 않았다.
천도교의 금전적 지원이 가능해지자, 여태 사용하던 기와집을 허물고 신식 교사를 새로 지었다. 1918년에는 수송동에서 낙원동 교사로 이전하였고, 여기서 보전 교주와 보전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3.1 운동이 일어났다.[6] 1922년에는 송현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3.1 운동의 여파로 손병희가 사망하고, 천도교 조직이 궤멸적 타격을 입자, 그 후유증으로 보성전문학교도 위기에 처하였다. 1919년초까지만 해도 보성전문에서 총 26명의 학생이 졸업하였으나, 3.1 운동 당시 워낙 많은 보전 학생들이 구속되고 퇴학 당하다보니 1920년에는 졸업생 숫자가 11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1920년 교장에 취임한 고원훈은 진주의 부호 김기태(金琪邰)에게서 거액의 기부금을 유치하는 등 보전의 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학교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물러났다. 그 후 보전 졸업생이며 유명 변호사였던 허헌이 잠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가 1924년에 물러났고, 그 뒤로도 보성전문의 재정은 계속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929년 세계 경제공황이 몰아닥치자, 보성전문은 재정난에 더욱 심하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2년에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 이사 김병로와 교섭하여 재단을 인수하면서 보전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이미 중앙학원을 경영하던 김성수가 보성전문을 추곡 5천 석의 토지 기부 대가로 인수한 것.
그리고 송현동 교사 6백여 평에 자리잡고 있던 보성전문은 현재의 고려대학교 자리인 안암동으로 1934년에 이전하였다. 1932년 6월 보성전문 제10대 교장에 취임한 김성수가 보전 창립 30주년인 1933년 중앙학원을 통해 안암동 일대 부지 6만 2천여 평을 매수하고, 신 교사를 신축한 것.
이 당시 인촌 김성수의 사재로 건축한 화강암 석조전의 본관과 도서관(현재의 대학원) 건물은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물이라 큰 화제가 되었다. 이 건물은 일제가 1924년에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에 비해 물적인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으려는 조선인의 기개와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대단히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인 가운데 뛰어난 학자들은 일본의 대학에 교수로 임용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보성전문 교수진으로는 아주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예를 들어 안호상, 장덕수, 유진오, 최태영, 김광진, 진승록, 오천석, 손진태, 최용달 등이 그들이었다. 이러한 인재들에게 보성전문은 교수 1인당 1 연구실을 제공하여 일부 일본의 대학보다 더 좋은 연구환경을 제공하였다.
일제시대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성전문밖에 없었다. 보성전문의 교수들은 민족주의적인 정신과 항일의식이 투철하여,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창문을 닫게 하고 우리말로 강의를 하곤 하였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이 끝나면 일본 관헌 몰래 결성한 비밀서클에 모여 우리말로 된 글을 읽고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독립의 꿈을 불태웠다.
그러다가 1944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접어들던 일본이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면서, 보성전문학교는 강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개명되는 굴욕을 겪게 된다.
2.3 고려대학교로의 변환
이미 일제시대부터 보성전문학교는 4년제 대학교에 못지 않은 교수진과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일제의 방해로 4년제 대학교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자, 드디어 보성전문은 1946년부터 4년제 대학교로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보성전문학교는 고려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그 후 고려대학교는 옛 보성전문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3 교풍
민족의 성금으로 세운 학교인 데다, 일단 설립자인 이용익부터 대단한 강골의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일제시대 내내 민족주의와 반골의 기운이 매우 강한 학교였다. 가뜩이나 민족주의적 저항정신이 강했는데 동학농민운동을 계승한 종교단체인 천도교 교단에 인수된 뒤에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당연히 3.1 운동에는 교주, 교장부터 강사, 학생까지 모두가 목숨 걸고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교주 손병희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도 최고 핵심이었고, 3.1 운동으로 구속기소되어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였다. 그의 사위였던 보전 학생 방정환도 그때 고문 당한 후유증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물론 보전 교장 윤익선도 체포되어 고문 당하고 징역형을 선고 받아 복역하였다.
우리나라 어느 학교도 보성전문처럼 이렇게 전교적으로 3.1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특히 3.1 운동 당시 학생 지도부의 핵심은 보성전문 학생 강기덕이었는데, 강기덕은 그 당시 일제에 타협하여 시위를 포기하려 했던 민족대표 33인을 대신하여 파고다공원 앞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분연히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서울역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의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보전 학생들이 그때 일제의 총칼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형무소에 오랜기간 갇혀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보성전문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인종주의적, 소제국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 배타적 폭력주의로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 보성전문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우리 영역을 팽창하려는 강자동일시의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일제시대에 경성제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 엘리트들이 대세에 타협하고 일본문화나 서구문화의 우월함을 받아들이며 "난 보통 한국인과 달라"하고 외칠 동안, 일제의 차별에 맞서고 한국 고유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일본인들에게서 천대 받는 한국민중들과 함께 하겠다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서서 온갖 고난을 짊어지겠다는 의미에서의 대중주의적 민족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주의와 팽창주의를 저지하겠다는 의미에서 평화주의적 민족주의, 저항적 민족주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보성전문 구성원들 사이에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약화되고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화되었다. 일단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민족주의 우파는 일제의 탄압, 회유공작과 내부 분란 등으로 인해(자유시 참변 참고) 거의 대가 끊기다시피 했을 뿐 아니라, 당시 다수의 보전 교수들[7]에 의해 맑스-레닌주의가 수입되어 학생들에게 소개되었고, 일제에 의해 식민조선의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한반도 내에서도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보성전문 출신의 대표적 유명인사인 허헌과 강기덕이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경도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전설적인 남부군 총수 이현상, 강동정치학원 원장을 지냈고 빨치산으로 내려 왔다가 목 없는 귀신이 된 이호제, 쌍룡그룹 창업주이면서 남로당 골수이기도 했던 김성곤 등이 모두 그때의 보성전문에서 배출된 게 우연이 아니었다.
물론 좌익까지는 아니더라도 반골 기질은 이미 보성전문의 교풍처럼 자리 잡았다고 해도 무방하였다. 당시에는 일본인들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면 출세는 말할 것도 없고 생계조차 보장이 안 되는 현실이었지만, 보성전문 출신들은 다른 학교 출신들과 다르게 일본인 앞에서 꼿꼿하였고, 강직하며 바른 말 잘 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일본인뿐 아니라 미국인, 유럽인 앞에서도 추종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줏대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 하였다. 다만 반골 기질과 꼴통 기질은 일부 학생들에게 구분이 잘 안 될 때도 있어서, 예를 들어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했던 유명한 깡패 신마적 엄동욱 같은 이가 보성전문에서 배출되기도 하였다.
3.1 보연전
1925년 5월 30일 조선 체육회 주최로 열린 ‘제5회 전조선(全朝鮮) 정구대회’에서 보성전문 정구팀과 연희전문 정구팀의 대결이 벌어졌다. 이때 양교 선수들이 자교의 자존심을 걸고서 치열하게 경기했을 뿐 아니라 그 응원전 역시 대단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대결은 장안의 화제를 불러모았다. 나중에는 단순한 체육이벤트가 아니라 일제의 억압 속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젊음을 발산하는 하나의 제전(祭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간의 대결은 처음에 정구에서 시작되었지만, 1927년 축구 대항경기가 시작되었고, 1930년 농구 대항경기, 1940년 빙구 대항경기가 시작되면서 점차 종목이 확대됐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들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면서 범민족적인 체육축제, 문화축제로 발돋움했다. 운동경기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특히 응원전이 볼만했는데, 1931년 조선 축구대회에서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이 격돌했을 때, 보성전문은 농악을 반주로 한 응원곡으로 응원한 반면에, 연희전문은 밴드를 중심으로 한 응원곡으로 응원하여 서로 대조를 이루었다.
일제시대에도 '보연전'이냐 '연보전'이냐 하는 명칭 갖고서 말다툼이 있었다고 하나, 그 중 어느 명칭이 더 많이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1925년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보연전은 무려 20년 동안이나 수시로 열렸으며,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간의 운동경기는 당시 양교 학생들만 아니라 서울의 모든 대학생들, 젊은이들, 그리고 시민 대다수가 함께 하는 축제의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세상에 볼거리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보연전이 열리면 양교 학생들만이 아니라 경성법전[8], 경성의전[9], 혜화전문[10], 명륜전문[11]에 경성제대[12] 학생들도 빼놓지 않고 단체로 관람했고, 이화여전, 숙명여전 학생들 역시 보성전문, 연희전문에 다니는 남자친구들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3.2 경성 학생생활 르포르타주
1940년 8월에 발간되어 수십만부가 팔린 '조선 1940'이라는 책[13]에 실린 '경성 학생생활 르포르타주'를 보면, 경성(서울)의 4개 명문대학 학생들의 기질이 묘사된다. 이에 따르면 경성제국대학은 '신사형', 보성전문은 '호걸형', 연희전문은 '청춘 구가형', 이화여전 학생들은 '낙원의 처녀들'이었다.
이 중에서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과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의 학교(학생) 기질을 비교한 대목은 재미있다:
"학교건물이 신촌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 언덕 위에 있어 이화전문이 언덕을 넘어 저편에 로맨틱하게 위치하는 점 등, 지나치게 혜택받은 그들에게 질투가 날 정도다. 연희전문 학생과 이화전문 학생이 사이가 좋은 것은 자연의 이치다.(중략) 그들은 미국학생처럼 행복하다. 청춘을 마음껏 즐긴다."날라리?
"연희가 게이오라면 보성은 와세다나 메이지(대학) 풍이다. 학생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배와 상급생에게 절대복종한다. (중략) 예를 들어 보성전문의 학생이 우연치 않은 일로 학교 밖에서 억울하게 당하거나 해를 보았을 때 학생들은 당장 집단을 이루어 반드시 복수를 한다고 한다. 무서운 학교다."
이걸 보면, 요즘 한국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두 대학의 기질 차이에 대한 평가는 아무리 늦어도 1940년 이전에 그 원형이 존재하였던 셈이 된다. 관련 기사
4 출신 인물
- 허헌 - 김일성대 초대 총장 (법과 1907년 졸업)
- 변영만 - 독립운동가/변호사 (법과 1908년 졸업)
- 남형우 - 임정 법무총장 (법과 1908년 졸업)
- 서상일 - 독립운동가 (법과 1909년 졸업)
- 윤해 - 임정 국민대표회의 의장 (법과 1910년 졸업)
- 김립 - 임정 국무원 비서장 (법과 1910년 졸업)
- 장도빈 - 대한매일신보 논설주필 (법과 1911년 졸업)
- 차상찬 - 한국 잡지언론의 개척자 (법과 1913년 졸업)
- 이병도 - 대한민국 역사학계 태두 (법과 1915년 졸업)
- 이춘숙 - 임정 학무차장 (법과 1916년 졸업)
- 김기전 -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 (법과 1917년 졸업)
- 한기악 - 동아일보/조선일보 편집국장 (법과 1917년 졸업)
- 강기덕 - 3.1.운동 학생대표 (법과 1919년 졸업)
- 방정환 - 어린이운동가 (법과 1918년 입학)
- 김정렬 - 2선 의원/ 변호사 (법과 1926년 입학)
- 이현상 - 빨치산 사령관 (법과 1927년 입학)
- 김용식 - 조선의 축구영웅 (법과 1930년 입학)
- 이원홍 - 제헌의원 (법과 1931년 졸업)
- 김재열 - 변호사 (법과 1932년 입학)
- 유성권 - 3선 의원 (법과 1936년 중퇴)
- 허정 - 과도정부 수반 (법과 1936년 졸업)
- 백남억 - 5선 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윤택중 - 3선 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김성곤 - 쌍용그룹 회장, 국회의원 (상과 1937년 졸업)
- 허정구 - 삼양통상 회장 (법과 1937년 졸업)
- 이호제 - 사회주의 운동가 (법과 1938년 졸업)
- 김학묵 - 한국뇌성마비복지회장 (법과 1938년 졸업)
- 강의석 - 검사/변호사 (법과 1939년 졸업)
- 김세련 - 한국은행 총재, 재무부장관 (상과 1939년 졸업)
- 손기정 -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상과 1937년 입학)
- 정성태 - 국회부의장 (법과 1941년 졸업)
- 김중서 - 대법관/중앙선관위장 (법과 1943년 졸업)
- 김상홍 - 삼양그룹 회장 (상과 1943년 졸업)
- 윤장섭 - 성보학원 이사장 (상과 1943년 졸업)
- 김성집 - 올림픽 역도 동메달 (상과 1943년 졸업)
- 이종욱 - 수원대 설립자 (상과 1943년 졸업)
- 장영순 - 검찰총장/법무부장관 (법과 1944년 졸업)
- 김종경 - 검찰총장 (법과 1944년 졸업)
- 이철승 -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법과[14] 1946년 졸업)
- 이중재 - 6선 의원 (경제과 1946년 졸업)
- 이범석 - 외무부장관 (경상과 1947년 졸업)
- 김일두 - 인권변호사 (법률학과 1948년 졸업)
- 김원기 - 경제부총리 (정치 1949년 졸업)
- ↑ 서울대 측에서는 1895년에 설립된 법관양성소가 보성전문보다 더 빠르다고 주장하지만, 엄밀히 말해 법관양성소는 1년제의 국가관리 양성기관으로서 학문적 독립성을 갖춘 교육기관이라 보기 어렵다.
- ↑ 당초에는 '보통(普通)'이라는 이름이 물망에 올랐으나 고종이 "'보(普)'자는 좋으나 통(通)자는 고전에 '成人之美'라는 말도 있고 문왕의 '成人之德'이라는 말도 있으니 대·중·소학을 모두 보성(普成)으로 고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다.
- ↑ '이화(李花)', 즉 오얏꽃은 마치 일본의 국화문장이나 프랑스의 백합, 랑카스타의 붉은 장미와 같이 당시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배꽃을 가리키는 이화(梨花)하고 헷갈리지 말 것. - ↑ 고려대 홍일식 전 총장은 이와관련 "당초 보성의 설립 의도는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왕립기관으로 설립하려던 의중에서 비롯되었으나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그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며 "만일 보성이 왕립기관으로 육성되었다면 오늘날의 고려대학과는 큰 차이를 보였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 ↑ 당시에는 국가의 교육지원이 거의 전무하였고, 가난한 학생들에게서 등록금을 비싸게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종교재단 등의 후원이 대학운영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보성전문은 천도교, 연희전문과 이화여전은 기독교, 혜화전문은 불교, 명륜전문은 유교의 도움을 받은 게 다 그러한 이유였다.
- ↑ 일단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부터가 보성전문의 수송동 교사 바로 옆에 있는 보성사였다. 보성사는 충숙공 이용익이 설립한 인쇄사다. 여기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대규모 독립시위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보성전문 학생대표 강기덕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리더였던 손병희는 보전 교주였고, 보성고보 교장 최린도 33인의 대표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보성전문 교장이었던 윤익선도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며, 보전 교수 신익희, 보전 졸업생 주익, 윤기섭, 성준용, 재학생 한창환, 오일철, 손재기, 이병헌, 이태운, 방정환, 박용준, 김상진, 이양식, 남위 등도 구속되었다. 이들 가운데 재학생 이태운, 방정환, 김상진 등은 결국 퇴학당하였다.
- ↑ 예를 들어 김광진, 유진오, 최용달 등
- ↑ 현 서울대 법대
- ↑ 현 서울대 의대
- ↑ 현 동국대학교
- ↑ 현 성균관대학교
- ↑ 현 서울대학교
- ↑ 일본 문예춘추사가 발행한 일본어 대중잡지 '모던일본(モダン日本)'은 1939년 11월에 특집으로 조선판을 발행했는데, 일본과 조선에서 30만부가 팔리는 등 대힛트를 쳤다. 그 후 1940년 8월 이 잡지가 조선판 2탄으로 발간한 책이 바로 '조선 1940'이다.
- ↑ 단, 졸업은 보성전문학교 법과가 아닌 정법대학 정치학과로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