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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역대 황제 | |||||
16대 세조 광무제 유수 | ← | 17대 현종 명제 유장 | → | 18대 숙종 장제 유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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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현종(顯宗) | |
시호 | 효명황제(孝明皇帝) | |
연호 | 영평(永平, 58년 ~ 75년) | |
성 | 유(劉) | |
초명 | 양(陽) | |
휘 | 장(莊) | |
생몰기간 | 28년 6월 15일 ~ 75년 9월 5일 | |
재위기간 | 57년 3월 29일 ~ 75년 9월 5일 |
明帝
광무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8년, 생모인 광렬황후 음려화(당시는 귀인)가 원씨에서 유양을 낳았다. 유양은 10살에는 춘추를 읽어서 그에 능통했고 아버지 광무제에게 재능을 사랑받았다. 39년, 유양은 동해공으로 봉해졌다. 41년 곽황후가 제멋대로 하는 성격이어서 광무제에게 소외당했고, 결국 광무제는 곽황후를 폐해 중산태후로 하고 음귀인을 황후로 삼았다. 같은 해, 광무제의 아들 가운데, 황태자 유강을 제외한 9국공들을 작위를 왕으로 격상시켜 유양은 동해왕이 된다.
유양에 있던 이복형인 유강은 어머니 곽황후가 폐해졌기에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말하였다. 43년에 광무제는 결국 이를 허락하여 황태자 유강은 동해왕이 되었다. 그리고 광무제는 유양을 황태자로 옹립시킴과 동시에 유양의 이름을 장으로 바꾸었다.
유장은 박사 환영을 스승으로 삼았고, 상서를 배웠다.
57년 광무제가 죽고, 황태자인 유장이 즉위했는데, 이때 유장의 나이가 30세였다. 명제는 아버지의 시정 방침을 계승한 정책을 실시했지만, 외교면에서는 광무제의 소극적인 정책을 고치고 한무제가 진출한 서역 지방에 적극적인 진출을 하기 위해 반초를 내보냈다. 그 결과 반초는 장건과 함께 서역 지방을 개척한 인물이 된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도 이 당시라고 하며, 당시의 각종 칙령 및 발굴 결과를 통해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는 설이다. 다만 이 당시의 불교는 도교와 연관돼 중국인에게 이해된 듯하다.
또한 명제는 정신없는 정국을 많이 안정시키고 빈민구제, 농업진흥 등을 해서 후한의 전성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마황후(馬皇后)[1]도 현명했다. 그 예로 명제는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마씨가 이를 보고 감옥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며 명제에게 여러 차례 시정을 권했다. 그러자 명제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풀어주고 그 후로도 마황후과 자주 상의해서 일을 처리해나갔다. 또한 마황후는 붙임성이 좋았고, 평소에 포목 옷을 입었으며 치마를 입어도 호화로운 장식은 하지 않은 검소한 인물이었다. 마황후는 외척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몹시 경계해서 명제 3년에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남궁의 운대에 걸게 했을 때에도 개국공신인 자신의 아버지를 제외시켰다.
이렇게 명제는 내정과 외정을 강화하다가 75년에 병으로 인해 48세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