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제

드물게 대한제국 고종 황제를 재위 당시의 연호를 따 광무제라고도 한다.[1]


후한의 역대 황제
현한 1대 경시제 유현16대 세조 광무제 유수17대 현종 명제 유장
372px-Han_Guangwu_Di.jpg
묘호세조(世祖)
시호광무황제
(光武皇帝)
유(劉)
수(秀)
문숙(文叔)
출생지남양(南陽) 채양현(蔡陽)
사망장소낙양 남궁
아버지유흠(劉欽)
생몰기간음력B.C. 6년 ~ A.D. 57년(63세)
재위기간음력A.D 25년 ~ A.D. 57년(32년)
전한, 후한 통틀어서 역대 최고의 능력자라고 평가되는 군주.
한나라 유씨가 낳은 희대의 먼치킨.[2]
중국사 위대한 성군 중 한 명.
특히 중국사의 위대한 황제로 손꼽히는 한무제는 물론 당태종이나 강희제도 후계자 문제나 말년의 실책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데 광무제는 후계 문제도 잘 넘어갔고 창업 군주가 흔히 타는 토사구팽 테크도 타지 않아서 크게 흠 잡을 만한 곳이 없다.

1 소개

중국 고대 국가인 후한의 첫 황제이자 한나라의 16대 황제. 이름은 유수. 기원전 6년에 태어나 서기 57년에 붕어하였다. 재위기간은 서기 25년부터 57년.

비록 전한의 황족이 특권을 상실하기는 하였지만 전한과 후한은 나라 이름도 같고 국성(國姓)도 같았다. 단지 왕망 때문에 잠시 끊어져서 전/후로 나누어 부르는 것 뿐이다. 그래서 광무제 또한 왕조를 새로 세운 게 아니라 다시 일으킨 황제로 여겨서 묘호가 세조이고 대수도 16대로 세었다.

1.1 혈통

본래 한미한 전한의 방계 황족, 정확히는 경제의 막내아들이자 무제의 이복동생인 장사왕 유발의 후손이다.[3] 어린 시절부터 행동이 신중하고 격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전설에는 춘추전국시대 때 나라 시황제의 조상 양공이 잡지 못한 장끼(숫꿩)가 달아나다가 그의 고향 남양군() 근처에 앉았고 그대로 돌이 되었다. 그 돌꿩을 그 일대 사람들이 사당에 모셨는데 그 덕분인지 훗날 유수는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4]


1.2 청년기

청년 시절에는 장사를 하면서 태학에서 공부를 할 비용을 마련했다고 한다.

큰형 유연과 작은누나 유원의 남편 등신, 그리고 채소공(蔡少公)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데 도참을 배운 채소공이 장차 유수가 천자가 되리라고 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광무제보다 훨씬 유명하고 권세 있는 인물인 국사공 유수가 있었다. 누가 “국사공 유수 말입니까?”라고 하자 광무제는 “제가 아니란 법은 없잖습니까?”라고 했고, 연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뒤집어졌다. 사실 국사공 유수의 원래 이름은 유흠(劉歆)으로, 그도 비슷한 도참을 듣고 스스로 천자가 될 꿈을 품고 개명한 건데, 국사공은 나중에 왕망 제거 계획에 함께했다가 들통나서 자살했고 황제가 된 건 광무제였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도 국사공을 유흠이라고 하지 유수라고는 잘 안 부른다.

1.3 기의

왕망신나라가 적미(赤眉)의 반란으로 붕괴위기에 처하고, 각지에서 군웅들이 일어서자 유수도 한나라의 회복을 명분으로 하여 유연(劉縯, 유인이라고도 한다)과 함께 군대에 참가했다. 이때 말이 없어 를 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고 하며, 사람들은 침착한 행동으로 명망이 높았던 유수가 나서자 신뢰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이때는 아직 지도자는 아니었고 형 유연의 부하였으며, 유연은 녹림병·신시병과 함께하여 어느 정도 세력을 얻은 후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을 추대하고 그의 신하로 활동하고 있었다.


1.4 곤양대전

왕망은 급히 왕읍, 왕순으로 하여금 각지의 정예병사 43만 명을 모아서 곤양으로 향하게 한다. 성을 지키던 녹림군은 9천 명에 불과했다. 왕망의 부대가 새카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많은 장수들이 철수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대 적군을 피해서 도망치면 마침 완성을 공격하던 주력부대가 적군의 앞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이에 유수는 여러 장수를 설득하여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리도록 하고, 그 자신은 13기를 이끌고 밤을 틈타 성을 탈출하여 언현, 정릉으로 가서 구원병을 모집한다. 왕읍, 왕순은 압도적인 병력을 과신한 탓에 부하로부터 완성의 포위를 푸는 것이 중요하니 곤양의 수비군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자는 건의를 따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나, 쉽게 함락하지 못하였다.[5]

6월 초하루 유수는 근 1만 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왔다. 유수가 직접 지휘한 선두부대의 1천여 명은 왕망의 군대와 4, 5리 떨어진 곳에 진을 펼쳤는데, 왕순은 병력 수천 명을 보내어 공격했다. 유수는 선두에서 칼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천 여 명의 적을 죽이고 왕망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후 유수는 완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성은 물론 왕망의 군영에도 퍼뜨렸다. 이에 성내의 수비병들은 사기를 얻었고 왕망의 군대는 사기가 흔들렸다. 이어서 유수는 3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비밀리에 곤수를 건너 왕망의 군대 측면과 후방으로 우회하여 강습, 왕망군의 본진을 강습한다. 왕읍과 왕순은 바로 각 부대에 위치를 사수하게끔 명령하고 스스로 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응전하였다. 양군이 격전을 벌이는데 유수가 이끄는 정예부대가 용맹하게 싸워서 왕읍, 왕순의 군대는 열세에 몰리는데, 각 주둔병은 왕읍이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여서 구원하러 가지 못했다.[6] 결국 왕망군의 중심부는 붕괴되고 왕순이 전사했다. 이 마당에 곤양의 수비군까지 출성하여 적군을 공격하니 왕망의 군대는 협공에 당황하여 도망을 치다가 폭우가 내려서 불어난 강물에 물에 빠져죽은 자가 만 명이 넘었다. 결국 왕읍은 겨우 수천 명만을 데리고 겨우 낙양으로 도망쳤다. 과장이 섞였다 해도 40만을 칭할 수 있었던 대군이 고작 1~2만 명의 군사를 이기지 못하고 전멸당한 것이다!

열세의 형세를 역전시키고 적은 수로 수십 배의 적군 주력을 섬멸시킨 곤양대전을 대학자 왕부지는 후에 이렇게 평가했다.

"한번의 전투로 종묘를 온전하게 지키고 곧이어 천하의 광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광무제는 정말 불세출의 인물이다."

또한 마오쩌둥은 1936년 [중국 혁명의 전략 문제] 및 1938년 [논지구전]에서 두번이나 남양에서 작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기고 약한 병력으로 강한 병력을 이긴 곤양대전을 언급한다.


1.5 견제

얼마 지나지 않아 경시제는 유연과 유수가 황제의 자리를 놓고 그와 쟁탈할 것이 염려되어 부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연을 죽일 구실을 찾아 결국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수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여 유현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즉시 완성(宛城, 현재의 허난성 난양시)으로 달려가 유현에게 죄를 청하고, 형 유연이 죽어 마땅할 죄를 지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형이 죽었어도 그는 형 유연을 위해 상복을 입지도 않고 평소와 같이 늘 먹고 마시며 유유자적하게 담소를 즐기면서 전혀 상심해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곤양대전의 상황을 물으면, 그는 그것이 모두 장수와 병사들이 힘써 싸운 결과이지 자신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는 이불 속에 누워서 형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무자비한 유현을 원망하였다. 이러한 유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지 못한 유현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중용하지는 않고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에 임명하였다.

왕망이 망하고, 유현이 집권하여 다시 한나라(현한)가 세워졌으나 유수는 그 명성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위험 인물로 취급되어 당시 다른 군벌인 왕랑이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화북 지방을 평정하도록 보내진다.

소수의 병력으로 여러 군벌이 난립하는 화북으로 보낸 것은 사실상 사지로 보내려는 조정의 의도였지만, 유수는 동마, 청독, 대동, 우래, 녹림, 신시 등의 세력과 여러 차례의 싸움 끝에 화북지방을 평정하여 자신의 기반을 다지고 아직 반란을 계속하고 있던 적미(赤眉)군과 회담하여 그들을 복속시켜 자신의 군대에 편입했다. 그리고 낙양을 근거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거병한지 10여년 만에 각지의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고 천하를 평정했다.


2 후세의 평가

훗날 제갈량조식과 논쟁하면서 쓴 글에서, "한나라 고조의 개국공신들은 흔히 광무제의 개국공신들보다 능력이 높다는 평가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무제가 너무나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에 공신들의 능력은 부족하지 않지만 능력이 부각될 만한 위기상황이 적었던 것 뿐이다."라고 했다.(…)[7] 조식은 제갈량에게 왜 당신 능력은 그렇게 돋보이냐고 물어봤어야 했다

이러한 광무제의 공신 중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면 베트남을 원정한 마원. 이 사람은 '노익장' 고사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또한 '운대 28장'이라 하여 훗날 당태종의 능연각 24공신처럼 광무제를 도와 나라를 세운 28명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광무제의 명참모인 등우와 동료들과 공적 다툼을 할 때마다 큰 나무 뒤로 숨어버려서 '큰 나무 장군(대수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던 풍이가 있다. 하지만 마원은 운대 28장에 들어가지 않는데 이유는 광무제의 며느리 마황후가 공신들이 득세할 것을 염려해서 황제한테 부탁해서 그런 것.[8]

일설에는 초한지삼국지에 비해서 광무제가 별로 부각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너무 엄친아이라서 비현실적이고 재미가 없어서라는 설이 있다.(…)[9] 사실 동한연의라는 소설이 있기는 한데 별로 유명하진 않다.

다른 황제들이 소득도 없는데 쫀심 때문에 무식하게 유지했던 요동군 등 조선의 주둔병력들을 계속 골을 썩이느니 포기하는게 좋다고 해체한 것을 보면 대인배+현실적인 군주다. 그렇지만 낙랑군은 재장악한 군주기도 했다. 정확히는 당시 왕조(王調)라는 인물이 당시 한나라에서 보낸 태수를 살해하고 혼란하던 한나라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독립하려 들자, 현지인들이 간을 보다가 진압군에게 순응한 것.[10] 삼국사기의 기록을 이 시점에 대입해서 이때 낙랑군을 점령하고 있었던 고구려까지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오늘날 학계의 연구에 다르면 대개 부정된다.[11]

한나라를 재건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전한과 후한의 사회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다. 국가에서 민간에 할당하던 부역의 양도 크게 줄었고, 징병제이던 군사제도 역시 모병제로 바뀌었다. 관료 체계 역시 여러 직책이 폐지되고 간소화되었다.

또한 노비 해방령을 여러 차례 내리고, 노비를 함부로 살해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매인법과 약인법을 발표하여 노비 매매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다만 동아시아 최초로 노예제를 폐지시켰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노비 해방령을 내린 인물은 유방이고, 최초로 노비제를 폐지한 인물은 왕망이다. 광무제는 노비를 해방시키고 이들의 권리를 신장시키기는 했지만 노비제를 폐지하지는 않았다.[12]


3 비판

광무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보통 후세에 우환이 되는 실책을 하나 남겼다는 것을 꼽는다. 바로 호족 견제의 실패가 바로 그것이다.

광무제는 본래 남양 출신의 호족으로 그가 세력을 일으킨 남양지역은 비옥한 토지로 인해 많은 호족들이 성장하고 있었고, 그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도움을 준 이들은 대부분 서한시기에 중앙권력에서 밀려나거나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키운 대토지 소유 호족들로 등우, 경감, 두무 등의 공신들 역시 이런 남양호족 출신이었다. 즉 후한 정권은 시작부터 어느 정도 호족 연합정권의 색채를 띄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광무제는 호족에게 강경한 정책을 쓰지 못하였다. 실제로 건무 15년 광무제는 경지와 호적의 조사를 실시했으나 이 과정에서 부정 조사가 일어나 광무제가 관련자들을 처벌하였지만 하북 지역에서 이에 반발한 호족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이 사건은 구양흡과 장급 등의 일부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 그쳤으며 이후 다시는 재조사를 하지 않았다.[13]

이리하여 후한의 호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를 바탕으로 소작농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으며, 후한 말기에는 사실상 이러한 호족들은 중앙 관리를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게 되어 환제 대에는 호족들이 우리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그 횡포가 극에 달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후한 정권의 지방 통제력은 크게 약화된다.[14]

다만 후한의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호족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후한 멸망의 원인은 호족보다는 외척환관의 전횡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보면 광무제의 손자인 장제의 무능함과 그의 황후였던 장덕황후(章德皇后) 두씨의 전횡 탓이 컸다. 본래 장제에게는 유경(劉慶)이라는 태자가 있었는데, 장덕황후는 이 유경의 어머니인 송귀인을 모함해 죽여버리고 유경마저 폐태자 시켜버린다. 이후 장제가 죽자 조정의 실권은 장덕황후와 그녀의 오빠인 두헌(竇憲)에게 넘어갔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화제는 환관을 중용하여 두헌을 제거한다. 그러나 화제가 26세의 나이로 급사하자 다시 권력은 외척인 등씨(鄧氏)에게 넘어갔으며, 이후 후한의 역사는 외척과 환관의 다툼으로 점철되어 버린다.[15]

게다가 호족 문제는 당대에는 그리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전한 때에만 하더라도 호족 견제책은 여러 대에 걸쳐서 차례대로 행해져 왔으며, 호족의 힘이 강성할 때에는 황제조차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게다가 전한 때 실시한 향거리선제의 영향으로 지방의 호족들은 인재를 선발하는 인사권마저 틀어쥐고 있었고 이것 역시 전한 후기 호족의 세력이 강해지는데 한몫을 하였다. 애초에 전한을 멸망시키고 광무제와 싸웠던 그 왕망만 하더라도 지나치게 호족을 견제하다가 역풍을 맞고 각지의 반란으로 사망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고, 광무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왕망과 반대로 호족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16][17] 즉 광무제 때의 호족 정책은 단순히 광무제 본인의 관대함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그보다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큰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광무제의 문제점은 도참 사상을 과도하게 추종했다는 것이다. 환담은 도참 사상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다가 죽었고, 정흥은 도참 사상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했으며, 가규는 도참에 나온 글에 주석을 달음으로써 후대를 받았다.[18] 문제는 이후 후한 사회에 참위설이 널리 퍼지면서 이 사상이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과 맞물려 황건적의 사상을 뒷받침하거나 장로와 같은 사이비 종교가 세력을 키우는 데 일조를 했다는 것이 나중에 문제가 된다.

또한 광무제가 노비를 해방한 것은 사실이나 모든 노비가 해방된 것은 아니었고, 이후로도 노비의 매매는 계속되었다.[19]


4 관련 일화들

젊은 시절 황제의 행렬 앞에서 화려한 집금오[20]를 보고,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라고 했다. 후에 황제가 되고 이름난 미녀였던 음려화를 아내로 얻었다.

비록 음려화가 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 황후는 곽성통이 됐으나, 광무제는 음려화를 전쟁터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총애를 했고, 후에 음려화가 아들을 낳고(훗날 명제, 광무제한테는 4번째 아들이 된다.) 곽 폐황후가 이를 질투하자 이를 구실로 황후를 음려화로 교체했다. 이때 태자도 장남 유강에서 음려화의 아들 명제로 바뀌었다. (다만 이건 어머니가 폐위됐음에도 계속 태자자리에 있던 걸 부담스러워한 유강의 태자 퇴위 요청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곽씨 가문 및 곽 폐황후 소생 자식들을 모조리 죽인다거나 하진 않고 적절히 대접해 주었다. 황후에서 폐하긴 했어도 대우 자체는 황후 수준을 유지했다고까지 한다. 음려화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살아서 황태후가 됐고 죽어서는 광렬황후란 시호를 받았으며 광무제의 능에 합장되었다.

자식은 모두 11남 5녀. 이 중 폐황후 곽성통은 5남 3녀를 낳았고 광렬황후는 5남 1녀를 낳았다. 광무제의 후손 중 영제, 소제, 헌제 등의 황제들을 제외하고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이 2명이 있는데 바로 광무제의 6대손인 유우와 또다른 후손 유엽이 있다. 유우의 5대조가 곽 폐황후의 소생이자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 유강(劉彊)인데 원래 황태자였으나 어머니가 폐후가 되었고 광무제의 넷째아들이자 이복동생으로 음려화의 소생 명제에 밀려 황태자를 내주었다. 유엽은 광무제의 7남이자 유강의 동복형제였던 부풍질왕 유연(劉延)의 후손이다.

왕망을 멸하고 중원 지역이 거의 평정되었을 즈음, 광무제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농서 진(秦) 지방의 외효와 촉(蜀) 지방의 공손술만이 남게 되었다. 신하들은 이 두 지방을 하루 속히 토벌해야 한다고 간했으나, 광무제는 "중원은 이미 평정된 지 오래이니, 그들은 이제 문제시될 게 없소(度外視)"라며 느긋하게 대처하였다. '도외시(度外視)'는 이러한 광무제의 말에서 유래된 단어. 참고로 2014년 11월 16일 도전 골든벨의 마지막 문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최후까지 남았던 여학생은 이 문제를 맞추지 못했다.

지역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저항하고 있던 최후의 적 공손술을 격파하기 전에, 뤄양의 후한 황궁에는 아직 황제의 집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광무제는 집기를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성도에 모두 만들어져 있으니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촉 지역의 중심지[21]로 공손술이 황궁을 짓고 있었으니 공손술을 격파하고 모두 빼앗아 오면 된다는 의미다. 오오. 이 때 유수가 한 말이 득롱망촉(得隴望蜀). '농 땅을 이미 얻었는데 촉 땅을 바라고 있다'라는 말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표현한 고사성어가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범인들에게나 해당될 뿐 정작 고사성어 장본인인 광무제는 바로 이듬해에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했고, 이걸 실패한 예는 사마의를 씹은 조조가 있다.[22][23]

후에 황제가 되었을 때 과거 글공부 같이 하던 친구인 엄광을 찾아서 후하게 대접하고 옛날 얘기를 같이 했는데, 그가 옛날에 하던 것처럼 자신을 막대하고 자면서 다리를 올리고 레슬링 기술을 걸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근데 나중에 웬 떠돌이 별(객성)이 황제의 별을 범하는 것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온 점성관에게 "친구인 엄광이 내 배 위에 다리를 올리고 자서 그렇다." 하고 허허 웃고 돌려보냈다. 함석헌은 이것을 보고 엄광에게 권력에 주눅들지 않는 들사람(야인野人...)의 기개가 있다고 평했지만 옛 인연을 잊지 않고 한결같이 대한 광무제의 대인배스러움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광무제의 누님인 호양공주의 일화도 유명하다. 그녀의 일화에서 조강지처라는 말이 유래했다.
  1. 중국은 명나라 이후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한 황제당 연호를 하나만 정해 쓰는 제도)를 썼기 때문에 명·대 황제들을 연호로 부르는 관례가 정착됐다. 대한제국의 경우 존속 기간이 짧은 데다가 조선에서 이어지기 때문에 잘 쓰진 않지만 마찬가지로 일세일원제였기 때문에 연호를 따서 고종을 광무제, 순종을 융희제라고도 한다. 물론 대한제국 고종을 뜻하는 광무제의 '광무'와 달리 후한 광무제의 '광무'는 사후에 정해진 시호다.
  2. 한나라의 먼치킨하면 대부분의 대중들이 떠올릴 한무제는, 단지 겉으로만 먼치킨 같아 보일 뿐이지 실상은 매우 문제점이 많은 군주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3. 출생에 관련하여 경제가 어느날 밤 황후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 했는데 하필 황후가 생리 기간이어서 당희라는 궁녀를 로테이션 해줬다고 한다. 겨우 하룻밤인데 별일 없겠지 하고 벌였던 불장난인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4. 원래 까투리(암꿩)과 장끼가 한 쌍으로 있었는데 양공이 암꿩을 잡자 돌꿩으로 변했다. 어떤 사람이 돌꿩 한 쌍 중에서 암꿩을 잡으면 천하의 패권을 잡고 숫꿩을 잡으면 왕이나 황제가 된다고 했는데 양공이 암돌꿩을 잡아 사당에 모시니 나중에 후손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예언이 적중되었다. 숫돌꿩도 남양 근처의 사람들에게 잡혀 사당에 모셔졌고 후에 그 지방 황족 유수가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열국지에도 잠시 나온다.
  5. 이때 왕읍과 왕순이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있다. 유수를 목 빠지게 기다리던 곤양성의 장수들은 물량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려 했으나, 힘으로 반란군을 눌러버리겠다는 생각에 취한 왕읍 등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상에 맙소사
  6. 당시 왕망군 수뇌부의 지휘능력과 작전 수준이 개판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절대 우세에 있는 병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했다면 유수를 포위하여 적병의 바다에 고립시키고 압살할 수 있었던 것을, 사령관급 인사가 다른 부대는 대기시킨 채 직접 본대를 이끌고 적의 강습부대와 정면 대결을 하다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7. 중국사에서도 적과 아군의 사정도 적당히 생각을 해주면서 전쟁을 하는 황제는 광무제가 유일하다. 하나의 예로 유림이라는 사람이 광무제에게 적미군이 황하 동쪽에 진을 치고 있으니 재빨리 수공 작전을 쓰면 이들을 전부 물고기 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그런 잔인한 방법은 쓰지 않겠다면서 거절한다. 그러면서도 천하를 여유롭게 제압했다. 위기에 몰렸던 적도 있는데, 시종일관 여유롭게 해결한다.
  8. 이외에도, 마원이 사후에 그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이들의 모함으로 작위가 잠깐 추탈된 일이 있던 것도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9. 실제로도 비현실적이다. 더구나 당시 적수들이 그렇게까지 약한 것도 아니었는데, 뭔가 역경을 겪는 것 같지도 않고 심지어 봐주기까지 하는데 너무 허무하게 이긴다.
  10. 이 왕조라는 녀석은 후한서의 왕경전(王景傳)에서 등장한다. 여기에 따르면 이 양반을 낙랑의 토착인이라고 하며, 한나라에서 파견한 태수인 유흔(劉憲)을 살해하고 자립해서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한 인물이다. 이 '토착인'이라는 용어며 왕조의 출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개 고조선의 주민 혈통이나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한화(漢化)된 인물로 본다. 토착인이라는 용어는 대개 그 지역의 이민족 토착 세력을 지칭하지만 성씨가 중국식이라는게 그 증거. 아마 이러한 배경을 믿고 처음에는 중국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를 제거하고 자립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토착 세력들은 이놈이 영 아니라고 보았는지 아니면 바짝 진격해 오는 후한군에게는 안 될 걸로 보았는지 뒤치기 당하고 5년만에 진압되었다.
  11. 이 부분은 보충 설명이 필요한데, 흔히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설화로 알려진, 대무신왕이 점령한 '낙랑국'은 대체로 함흥-원산만 일대인 동옥저에 위치했던 소국으로 보지만, 후한군이 낙랑군과는 수복했을 때에 이 지역은 이미 낙랑군으로부터는 분리되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낙랑군을 완전히 점령한 적은 없다는 것. 이러한 얘기가 나온 이유는 삼국사기에서 기원후 44년경 고구려가 점령한 '낙랑'을 후한에게 빼앗겼다는 기사가 등장하기 때문이었다(대무신왕 27년조). 그러나 이 기사는 일종의 착종이다. 이것은 고구려본기에서 그 이전 기사(기원후 32년)에 '낙랑'이라는 어떤 정치체제를 고구려가 점령하였다고 나와있으며, 이것을 삼국사기 찬자가 중국의 낙랑군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점령해서 멸망시킨 낙랑군이 후한 때 멀쩡하게 등장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가 일단 점령-후한의 광무제에게 빼앗김 이라는 구도를 세웠던 것이다. 본래 이 기사에서 '진짜 사건'은 이어지는 '후한과 고구려가 살수(청천강)에 경계로 삼았다'였으나, 이에 대한 부연설명으로서 '(한나라에게 점령했던 청천강 이남의 낙랑군 지역을 빼앗겼기 때문에) 살수로 국경을 삼았다'라는 기사가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하고 후한은 적어도 낙랑군을 놓고 다툰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영역이 확장돼 살수 이북까지 진출했다거나, 후한이 기원후 44년까지 살수 이남의 낙랑군의 체제 재정비를 완료했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 근래 학계의 설명. 현재 국내 학계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대무신왕대에 낙랑군 본토인 평양은 가본 적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고학 자료는 물론이고, 사료상의 교차 검증으로도 고구려가 대무신왕대에 낙랑군을 완전 점령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 낙랑공주의 '낙랑국'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북한 학계 및 남한의 일부 연구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므로 완전히 틀린 이야기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요즘에는 증거가 안 나와서인지 잘 안 하지만...)
  12. 출처:자치통감, 후한서 광무제본기
  13. 출처:자치통감, 진한사,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14. 출처:정론, 사민월령
  15. 출처:후한서, 자치통감
  16. 왕망은 왕전제(王田制)라 하여 호족의 토지 소유을 규제하였으며, 육관(六莞)이라 하여 소금과 철에 세금을 매기는 등 급진적인 정책으로 호족들의 큰 반발을 샀고 이는 대규모 반란의 원인이 된다. 출처:진한사,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17. 왕망의 패망이 호족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광무제와 경시제의 집안인 남양 유씨부터가 남양의 유력 호족이며, 광무제의 외가인 번씨 역시 남양의 대지주였다.
  18. 출처:자치통감
  19. 출처:자치통감
  20. 한나라 때 대궐문을 지키던 벼슬
  21. 현재 쓰촨성청두로, 성도(省都)이기도 하다.
  22. 물론 조조가 사마의의 말을 들었다 해도 촉을 점령했을지는 의문이 간다. 당시의 촉을 장악한 유비는 안정적인 기반이 생기자 한창 포텐 터지고 있던 시기였고 한중공방전에서 조조를 격파하는 등 그 위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정사를 보면 알겠지만 유비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중국사 먼치킨 조조가 자신의 맞수로 인정한 난세의 효웅이다.
  23. 또한 조조 입장에서는 일전에 급하게 공격했다가 호되게 패했던 적이 있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