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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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후한의 장군


馬援

대장부가 뜻을 품었다면, 마땅히 곤궁해졌을 때에 더욱 굳세어지고, 늙어서는 더욱 건장해져야 한다.

(大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BC 14 ~ AD 49)

중국 후한명장이자 개국공신. 노익장의 대명사.

<후한서> 마원전에 의하면 조사의 후손이라고 한다. 조사가 마복군이란 호를 받아 후손이 마씨를 칭했다고 하지만 아마 상당수는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남만맹획을 복종시키는 칠종칠금 일화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초의 조상으로 유명하다.[1]

산서성(陝西省, 산시성) 흥평현(興平縣, 싱핑형) 북동지방의 우부풍(右扶風, 유푸펑) 마능(茂陵, 마오링) 출생. 자는 문연(文淵).

본래 전한 이래 명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큰 뜻을 품고 영특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형인 마황이 죽자 제를 치른 후 형수를 편하게 받들었다.

이후 부풍군(扶風郡) 독우관(督郵官:감찰관)이라는 벼슬을 하다가 명을 받들어서 죄수들을 압송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죄수들이 고통에 못 이겨 애원하자 마음이 약해져 이들을 풀어두고 자신은 북방으로 달아나 버렸다.

마원은 북방에서 목축에 종사하였는데, 원래 부지런하고 성실한 마원이라 금세 가축은 수천마리가 되었다. 그는 그 돈으로 주위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와주어 신망을 얻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은 다 떨어진 가죽 옷을 입고 소박한 식사를 하였다. 모세?

그러면서 항상 친구에게 말하기를 "대장부라는 자는 뜻을 품었으면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며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는 '대장부위자 궁당익견 노당익장(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이었는데 여기서 유래된 말이 바로 노익장이다. 또 "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면 수전노일 뿐이다"라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빈객(賓客) 수백가(數百家)를 포섭하여 세력을 얻었다. 왕망(王莽)의 부름을 받고 한중랑태수(漢中郞太守)가 되었고, 이어서 군벌인 외효(隗浴) 밑에서 벼슬을 했다. 외효는 지방에서 할거하던 군웅 공손술(公孫述)과 손을 잡기 위해 마원을 파견하였다. 헌데 정작 만나본 공손술은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어서 마원은 크게 실망하게 된다.[2]

대충 인사를 하고 돌아가던 마원은 우연히 광무제를 만나게 된다. 광무제는 마원을 높이 여기며 예절을 다해 대접했고, 각 부서를 데리고 다니면서 혹여 조언해줄 것이 있는지 물었다. 이러한 대접에 감동한 마원은 외효에게 돌아가지 않고 광무제 옆에 눌러 앉게 된다.

태중대부(太中大夫),이어서 농서태수에 마원은 감숙성(甘肅省, 간쑤성) 방면의 (羌) · (氐) 등의 외민족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운다.

그 후 광무제는 마원을 복파장군(伏波將軍)에 임명하고 남방을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교지에서는 두명의 여자 자매인 쯩자매가 반란을 일으켜 세력이 막강하였다. 이 지역은 지금의 베트남으로 남월이라고도 불렀다. 쯩짝(徵側) 쯩니(徵貳) 자매는 메 린을 수도로 삼아서 사실상 인근 지역 전부를 점령하고 4년간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국가나 마찬가지였고, 흔히 쯩 여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3] 마원은 이를 진압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그는 하노이 부근의 낭박(浪泊)까지 진출하여 그곳을 평정하였다.

이렇게 말하면 단순해 보이지만, 마원은 반항하는 군소부족의 촌장이나 부락장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다 잡아족치고, 그 가족들은 한나라 본토로 강제 이주까지 시켰다. 이걸로 부족해서 문화적인 면에서 남월의 전통적인 체계를 파괴하고 한의 문화와 제도를 이식하여 직접 통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둔전을 설치하여 휘하 병사들을 그 땅에서 정착하게 하는 방식으로 토지 소유를 새롭게 재편하여 토착 지배계급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대신 한에서 파견된 행정 관료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형태를 완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방식은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지만[4] 결국 베트남을 중국문화권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스스로 언급한 '작은 공'의 실체이다.

교지를 평정하고 낙양으로 돌아온 그에게 수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다. 그 속에는 현명하기로 유명했던 맹익(孟翼)도 있었는데, 그도 판에 박힌 인삿말을 하자 마원이 말했다.

"나는 그대가 남다른 충고의 말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남과 똑같은 인사만 한단 말인가. 옛날 (나와 같은 직위인) 복파장군 노박덕(路博德)이 남월(南越)을 평정하고 일곱 군(郡)을 새로 만드는 큰 공을 세우고도 겨우 수백 호(戶)의 작은 봉토를 받았다. 지금 나는 별로 큰 공을 세우지도 못했는데 작은 공에 비해 상이 너무 크네. 아마 큰 공을 세우려면 동남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기라도 해야 할 듯하다. 이대로 영광을 오래 누릴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대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는가?"

맹익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자 마원은 다시 말했다.

"지금 흉노오환(烏桓)이 북쪽 변경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들을 정벌할 것을 청하리라. 사나이는 마땅히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야만 한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 장사를 지낼 뿐이다.(以馬革嚸尸還葬耳) 어찌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그 후 그는 서기 45년 이후부터 육순의 나이로 북방의 흉노오환의 토벌에 활약하였다. 이후에는 남방의 무릉만이들을 토벌하러 출정하였으나, 열병 환자가 속출하여 고전하다가 진중에서 병들어 죽었다.

시호는 충성(忠成). 그의 딸은 명제의 황후가 되었고, 장제의 생모 가귀인사촌자매처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복파장군 둘을 가리키는 이복파사(二伏波祠)는 마원과 노박덕을 가리키는 말로 삼국지연의 덕분에 마원이 복파장군인 것은 알려져 있는 편이다.

수호전의 스핀오프 작품인 수호후전에서 섬라국의 왕으로 나오는 마새진이 마원의 후예로 설정되었다.

2 중국 남송의 화가

馬遠
1160년/1165년?~1225년?

중국 남송화가/대조(待詔). 호 흠산(欽山). 이당(李唐), 유송년(劉松年), 하규(夏珪)와 더불어 송실(宋室) 남도후(南渡後)의 4대가로 불렸고 하규와 같이 남송 후반기의 원체산수화(院體山水畵)를 대표한다. 7인의 화원화가를 배출한 화단의 명족(名族)출신이다. 가학을 전하는 한편, 스스로 한 기치(旗幟)를 세우고 산수 · 인물 · 화조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의 집안은 산서성(산시성/山西省) 운성현(원청현/運城縣)의 하중(허중/河中) 출신으로, 북송 말기의 마분(馬賁) 이래 마원(馬遠)의 아들 마인(馬麟)에 이르기까지 7인의 화원화가를 배출한 화단의 명족(名族)이다. 이당을 사사하였다고는 하나, 가학(家學)에 의한 화풍형성의 성과가 현저하여 원인(院人) 중 독보적인 존재였다.

가학을 전하는 한편, 스스로 한 기치를 세우고 산수 · 인물 · 화조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의 산수화의 붓 처리는 엄정(嚴整)했다. 초묵(焦墨)을 사용하여 수석(樹石)을 만들고, 지엽(枝葉)은 구륵(鉤勒)으로 그리고, 암석은 방경(方硬) · 대부벽준(大斧劈皴:산과 돌의 파리脈理, 음양의 향지(向背) 등을 표현하는 데 쓰는 화법)을 써서 널찍한 풍경을 그려내는 일은 드물었다.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의 정상과 절벽의 각부(脚部)를 나타내지 않고 가까운 곳의 산이 하늘까지 닿았으며 먼 곳의 산이 오히려 낮아서 '변각(邊角)의 경(景)', '잔산잉수(殘山剩水)'라고 말하여 '마일각(馬一角)'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산수의 자연을 묘사한 이당과는 달리 거기까지 도달한 사실(寫實)을 발판으로 산수의 작은 부분을 잡아 형식을 구성함으로써 정취를 빚어낼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구도는 긴밀하고 묘사수법은 간결하게 정리되어 윤곽선이 강조되었다.

그의 진필이라는 확증이 있는 작품은 없으나 정가당(靜嘉堂)의《우중산수도(雨中山水圖)》는 전마원화(傳馬遠畵) 중 일품(逸品)이다. 마원의 화풍은 원(元)의 손군택(孫君澤)을 위시하여 · 대에 후계자가 많고 외국에까지 전해져 그곳 중국화형성에 기여했다.

아들 마인은 이종(理宗:재위 1224∼1264)시대의 화원지후(畵院祗侯)로서 가학(家學)을 잘 전하였으나 부친인 마원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신마인(臣馬麟)'의 낙관이 있으며 1254년작으로 추정되는《석양산수도(夕陽山水圖)》, 그의 작품으로 전해오는《매화소금도(梅花小禽圖)》가 있다. 그러나 원대(元代)로 들어서면서 마씨(馬氏)의 화풍은 점차 형식화되었다.

3 봉신연의의 등장인물

이쪽은 한자가 馬元.

고루산 백골동 석기낭랑의 제자로 본래는 서방에서 도망친 야차다. 새빨간 피부에 곰보자국이 선명한 얼굴, 8척에 육박하는 키에 사람 해골로 만든 염주를 걸고 있으며 사오정? 콧구멍에선 숨을 쉴 때마다 불꽃이 흘러나오는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은나라 태자 은교가 하산하면서 신공표에게 달기요괴라는 진실을 듣고 은나라의 편에 서서 주나라와 전쟁을 하는 시기에 등장한다. 당시 은교는 하산하면서 등용한 마선이라는 장수의 용맹을 크게 믿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마선은 사실 불꽃의 정령인 염정(焰精)으로, 연등도인의 동부인 영취산 원각동에 있는 등잔에 깃들어있던 불꽃이었다. 조요감으로 마선을 비춰 이를 알게 된 양전위호가 연등도인에게 알려 마선은 등잔으로 돌아가게 되고, 신공표는 대신 마원을 보내준다.

그 외모답게 초반부터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다. 마원의 도술은 주문을 외우면 등에서 거대한 손이 뻗어나와 상대를 움켜쥐거나 내동댕이 치는 도술인데, 첫 희생양은 맹호대장군 무영이었다. 무영을 등 뒤의 손으로 움켜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 친 후 몸을 찢어 심장을 날로 삼키는 실로 고어한 장면을 보여준다. 또한 나타건곤권을 맨몸으로 받아내거나, 자신의 다리만을 노리고 공격하는 토행손을 등 뒤의 손으로 잡아 내동댕이 치는 등(지행술을 구사할 수 있는 토행손은 물론 무상했다.) 곤륜측을 괴롭힌다.

도저히 격파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지자 양전은 설사약(...)을 먹인 염소를 자신으로 둔갑시켜 일부러 양전에게 잡아먹히게 한다. 이에 폭풍설사에 시달리게 된 마원은 함부로 전투에 나오지 못하고, 강자아는 이때 전력으로 방안을 모색한다.

마침 이때 도망친 야차의 기운을 쫓아 찾아온 빨리도 찾아온다 준제도인과 접인도인은 마원을 유인해달라 부탁하고 이에 강자아와 무왕이 진문에서 마원을 도발해 유인해낸 다음 숨어버린다. 빈손으로 돌아가던 중 마원은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되고, 아기를 제일 좋아하는(물론 음식으로) 그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인가로 찾아가 여인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잡아먹으려 하지만 여인은 양전의 변신이었고, 아기는 돌멩이었다. 양전이 준제도인의 부적으로 마원의 손을 봉하니, 준제도인과 접인도인이 나타나 야차의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내린 후 서방으로 데려간다

이후 서방에서 천룡팔부의 야차직을 맡게된다.

봉신연의(만화)에서는 태공망과 조공명과의 전투에서 조공명의 부하 중 하나로 등장한다. 정체는 보패인간으로 본래는 나약한 청년의 모습이었으나 마개조되어서 괴물이 되었다. 마원 자신도 마개조된 자신을 비관해서 자기를 죽여달라고 할 정도.상대했던 나타는 그 자신도 보패인간인데다 인질이 나타의 어머니여서 같은 보패인간이라는 동질감으로 인한 전의 상실+ 마더콘(...)으로 인해 고전했으나 결국 나타의 승리, 봉신당했다.

4 천랑열전의 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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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의 후지기수중 가장 유망한 5인을 꼽는 무림오성(武林五星)중 한명으로, 석전웅과의 계약관계로 인해 주인공과 적대하는데 때문에 성격은 악역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지식, 정정당당하다. 별칭이 권신이다. 무공또한 권신이라는 별명답게 권법위주.

실력자체도 매우 뛰어나, 무림오성중 3명을 쓰러트린 연오랑을 핀치로 몰아넣는다. 이후 연오랑이 폭주하자, 연오랑에게 폭주는 짐승같은 힘이니 무인의 긍지를 버리는 행위라는 이치를 깨닫게 해준 참된 무인이다. 이후 연오랑이 폭주를 풀고 자신의 힘만으로 다시 마원과 결투. 끝없이 강해지는 천랑의 재능으로 인해 마원과 호각지세로 싸우다 결국, 절벽으로 떨어짐으로써 마원이 연오랑에게 승리한다.[5]

이후, 신룡문의 제자인 이연비를 제거하고자, 오왕의 두 시녀를 데리고, 급습하게 된다. 당시 신룡문의 인원들로는 마원을 상대할수 없었으나, 내상에서 회복한 월하랑이 진(眞)청사검을 들고 마원과 싸운다.[6] 그리고 10성 공력을 사용하여 상대함에도 점차 밀리다가, 오왕인 모용비에게 도움을 받는다.

결국 작 후반에 천산신검을 버리고 천산유정검을 익힌 월하랑에게 절명한다. 슈퍼계인 나우(만화)에서는 공력이나 무공에 더해 '무공에 대한 깨달음'만 있으면 몇갑자 공력차이를 순식간에 극복할 수 있다는 설정인데, 천랑열전은 리얼계적인 면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마원은 정석적인 무인이며 무공에 대한 깨달음을 어느정도 얻은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무공실력이 받쳐주지 못하여 패한다. 그래도 죽을 때 명상에 든 자세로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은 점과 연오랑에게 최종보스인 모용비보다 정신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은 것이 위안.
  1. 마등이 그의 후손으로 언급되고, 아시다시피 마초는 바로 그 마등의 아들이다.
  2. 여기서 수식변폭(修飾邊幅)이 유래했다.
  3. 대항해시대 4 동남아시아 패자의 증표로 등장하는 '츈차크의 왕관'의 츈차크가 바로 쯩짝이다.
  4. 그리고 이 방식이 중국이 이른바 남만의 이민족을 관리하는 수법의 전형이 되었다. 심지어 이민족 대응정책을 온건하게하여 익주 남부를(베트남은 아니다.) 복종시켰다는 촉한도 후일 수차례나 크고 작은 반란을 겪었다. 베트남사를 보면 알겠지만 이런 강압적 방법은 영락제 지배기 때 절정을 달한다.
  5. 천랑의 재능자체가 개사기 능력이라 폭주를 풀고난후 다시 붙을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진다고 언급한다. 연오랑이 떨어진 이후에는 조금만 늦었어도 자신이 당했을거라고(…)
  6. 청사검은 한번 부러지면 본체가 드러나는 칼이다. 자신이 상대한 섭정이 연오랑을 상대하는 자는 마원이라 말해준다. 그리고 이후 이연비 일행의 조사와 여러가지 정황으로 연오랑이 마원에게 죽은줄 착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