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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피의 에이스였던 삼성 시절.
한화로 와서 먹튀로 각성!!
한화 이글스 No.37 | |
배영수(裵英洙 / Young-soo Bae) | |
생년월일 | 1981년 5월 4일 |
출신지 | 대구광역시 북구 |
학력 | 칠성초 - 경복중 - 경북고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2000년 신인드래프트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2000~2014) 한화 이글스(2015~현재) |
2004년 한국프로야구 MVP | ||||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 → | 배영수(삼성 라이온즈) | → | 손민한(롯데 자이언츠) |
2004년 한국프로야구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
정민태(현대 유니콘스) | → | 배영수(삼성 라이온즈) | → | 손민한(롯데 자이언츠) |
2004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올해의 선수 | ||||
심정수(현대 유니콘스) | → | 배영수(삼성 라이온즈) | → | 손민한(롯데 자이언츠) |
2004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 ||||
정민태(현대 유니콘스) | → | 게리 레스(두산 베어스) 다니엘 리오스(KIA 타이거즈) 배영수(삼성 라이온즈) | → | 손민한(롯데 자이언츠) |
2013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 ||||
장원삼(삼성 라이온즈) | → | 배영수(삼성 라이온즈) 크리스 세든(SK 와이번스) | → | 앤디 밴 헤켄(넥센 히어로즈) |
2005년 한국프로야구 탈삼진왕 | ||||
박명환(두산 베어스) | → | 다니엘 리오스(두산 베어스) 배영수(삼성 라이온즈) | → | 류현진(한화 이글스) |
2004년 한국프로야구 승률왕 | ||||
정민태(현대 유니콘스) | → | 배영수(삼성 라이온즈) | → | 오승환(삼성 라이온즈)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5번 | ||||
정회열(1999) | → | 배영수(2000~2014) | → | 타일러 클로이드(2015) |
한화 이글스 등번호 37번 | ||||
앤드류 앨버스(2014) | → | 배영수(2015~) | → | 현역 |
목차
- 1 개요
- 2 선수 생활
- 3 투구 스타일
- 4 이야깃거리
- 5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푸른 피의 에이스
송은범을 뛰어넘는 역대급 먹튀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의 야구명문 경북고를 졸업했고, 역대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중 가장 많은 승수를 챙긴 선수이다. 대표적인 별명으로 삼성 시절의 푸른 피의 에이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전에서 30년 발언으로 비록 오해지만 한국에서 밉상으로 찍힌 스즈키 이치로에게 빈볼을 던져 얻은 배열사가 있다.[1] 또 한때는 "초절정미소년배영수"에서 따온 CMB로 삼성 팬들 사이에서 불린 적도 있다. 그리고 슬러거 유저 한정으로 배포크[2]란 별명도 있다.
물론 못할 때에는 얄짤없이 배영구,[3] 더 내려가면 배민폐, 패영수, 배0승으로 격하되며 심할 경우엔 패왕[4]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다만 아래 이야기거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배영수의 부진 원인이 06시즌의 역투다보니 삼성 팬들에게는 이래저래 아픈 손가락이라 부진한 성적에 비해 옹호를 정말정말 많이 받았었다. 삼성을 디스하고 언론플레이를 시전하며 한화로 이적 후에는 그런거 없지만.
성적과 컨디션에 상관없이 영쑤라는 별명도 자주 쓰인다.
2014년 12월 3일 2명의 선발 용병과 윤성환, 장원삼이 선발로 4명의 선발이 확정 된 삼성에게 5선발 자리는 선발 유망주에게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고,[5] 지속적으로 더 많은 출장 기회를 얻고 싶었던 배영수는 삼성에서 한화로 FA 이적한다.
이후 한화에서 먹튀로 각성한 배영수를 보고 푸른 피의 에이스라는 별명이 새삼 재조명받았다. 혹자는 삼성의 첩자라고 하기도.
2 선수 생활
2.1 프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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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시절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았으며[6] 1999년 11월, 팀 고졸 역대 최고 계약금인 2억 5천만 원을 받고 입단했다.
2.2 삼성의 간판 에이스: 입단 후~2006 시즌
그 유명한 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 당시의 모습.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입단한 그는, 이듬해인 2001년부터 13승을 거두며,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며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특히,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기록했던 3년 연속 2점대 평균자책점은 2000년대 극심한 타고투저 속에서 거둔 기록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7] 2006년 시즌엔 8승 9패로 비록 10승을 달성하진 못했다 하더라도, 팔꿈치 부상을 가진 상태로 평균자책점 2.92(...).[8][9] 아니, 이게 사람인가?
2004년 17승 2패, 평균 자책 2.61로 다승과 승률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선발 투수로는 14년 만에 정규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특히 한국 시리즈 4차전에서 10이닝을 노히트 노런 달성 기세로으로 던졌으나, 연장 11회초 권오준에게 마운드를 내주며 노히트 노런 기록도 무산되고 말았다. 경기는 연장 12회까지 가서 시간 제한[10]에 걸려 무승부로 끝났고, 그의 10이닝 노히트 노런은 달성이 실패 되고 말았다. 안습
2.3 비극의 시작: 2006년 팔꿈치 부상
배영수는 2006년 결국 팔꿈치 통증을 호소한다. 그리고 선뚱은 그런 그를 위해 등판을 늦추거나 하다가 시즌 말미에는 불펜진에 합류시켰다. 한국시리즈에서 2승 1세이브 1홀드를 기록한 배영수(이긴경기 모두 등판)였으나, 경기 후에는 팔꿈치가 안 펴지고 경기에 나서기 전에 진통제[11][12]주사를 맞아야 할 정도로 그의 팔꿈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결국 한국시리즈 후에 토미존 수술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보통 선수들이 팔꿈치 인대가 늘어나거나 일부 손상된 상황에서 수술을 받는데에 비해, 배영수의 팔꿈치는 아예 끊어진 상태로 조브 클리닉 역대 최악의 상태였다고.
수술 소식을 들은 박찬호는 배영수에게 "(재활기간)1년 생각해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게다가 배영수는 선천적으로 간수치가 높아 예정보다 2달 가량 늦게 수술했다. 하지만 당시 감독은 박찬호의 말을 씹어버렸는데...
2.4 예상보다 빠른 귀환: 2008 시즌
수술 후 2007 시즌은 재활로 보냈는데, 회복이 빠른데다 팔꿈치 통증이 없어 당초 예상보다 빠른 2008 시즌 전에 복귀했다. 평균구속은 130대 후반으로 떨어지고, 변화구 위주의 피칭을 하게 되었지만 9승 8패 평균자책 4.55로 부상당했던 선수의 복귀 시즌 치고는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회복되지 않는 구속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한 해였다.#
2.5 우려가 현실로.....: 2009 시즌
잃어버린 10km로 표현하는 그의 구속을 2009 시즌 들어서도 되찾지 않자 자신감을 잃어버렸고, 성적마저 나빠지자 결국 5월, 1승 7패의 상태에서 계투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6월 11일에는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7월 초 다시 1군에 합류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자, 결국 8월 18일에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다.#
2009년 최종성적은 23경기 75⅔이닝 1승 12패 평균자책 7.26.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때 배영수는 야구를 그만두려고 했었다. 하지만...#
2.6 희망고문: 2010 시즌
2009 시즌 말 구속 회복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내용으로 다시 한번 설렘을 줬다.[13]
그리고 2010년 4월 7일 344일만에 승리투수가 되었다. 정말 눈물의 감격. 이 기세를 몰아서 2010년 4월 13일 LG 트윈스전에서도 승리투수가 되었다.
위에 나온 기사와 달리 실제로 구속은 회복되지 못했고,[14] 예전처럼 묵직한 구위를 앞세운 삼진쇼는 보여주지 못하지만 속구를 버리고 기교파 투수로 거듭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강타선을 보유한 두산, SK와의 대결 내용에 따라 완벽한 부활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듯하다.
4점대 후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전성기 시절보다는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지만, 최고 구속이 140km/h에 육박하면서 점차 구위를 회복하는 중이었다.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고, 아직 나이도 만 서른이 안됐으니 제 2의 전성기를 기대할 법했다.[15]
2010년 7월 15일 선발로 나온 경기에서 김상수가 클러치 실책을 두 번이나 하자 '상수야 상수야' 이름 두 번 부르고 괜찮다고 고개 한 번 끄덕이고 다시 돌아가는 대인배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2010년 8월 22일 경기에서 구원등판해 2⅔이닝동안 무실점 투구를 하며 전광판에 146km를 찍고 시즌 6승을 챙겼다. 진짜 잃어버린 구속 10km를 드디어 찾는 것인가...!
2010년 최종 성적은 31경기 119⅔이닝 6승 8패 1세이브에 평균자책 4.74를 기록.
팀이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지던 2010년 10일 1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8:7로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던 8회말 2사 3루 상황에서 7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⅓이닝 17투구수 2K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이 스코어 8:7로 이겨서 배영수는 이날 세이브를 따냈으며, 이 경기에서 거의 전성기급 구속인 최고 구속 147km/h, 포크볼은 140km/h까지 찍어서 삼성 팬들은 다시금 희망을 보았다.
배영수는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8⅓이닝 5피안타 4사구 5사사구 5K 3실점 3자책점 평균자책점 3.24, 1패 1세이브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배영수는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1경기 4⅔이닝 4피안타 3사사구 3K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3.86, 1패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배영수는 2010년 포스트시즌 9경기 중 4경기에 등판하여 13이닝 9피안타 8사사구 8K 5실점 5자책점 평균자책점 3.46, 2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2.6.1 2010년 말 일본 진출 시도
2010 시즌을 끝으로 FA가 되는데, 한신 타이거즈에서 배영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으나, 한창 좋았던 시절의 배영수만 알고 있는 한신 스카우트 말이나 당시 배영수의 상태를 보면 그저 찌라시에 불과할 가능성이 99%. 그리고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스카우터가 배영수의 피칭을 보기도 했다. 과거 배영수의 가능성을 보고 이런 관심을 보이는 듯.
결국 삼성에서의 잔류를 포기하고 일본프로야구 진출을 시도 중이라고 밝혔다. 영입에 가장 적극적인 팀은 야쿠르트 스왈로즈[16]와 한신 타이거즈가 있으나 투수진이 전체적으로 강력한 야쿠르트보단[17] 비교적 약한 편의 한신으로 갈 확률이 높았다.[18] 더구나 타격 면에선 한신이 야쿠르트보다 좋은 편.
마침내 결정된 곳은 야쿠르트로, 등번호까지 결정되었을 정도로 계약이 거의 다 되었는데 메디컬 테스트 결과 B형 간염 보균자라는 이유로 계약이 결렬되었다고 한다.[19] 이걸 계기로 배영수는 'B형수', 'B영수'란 별명을 얻었다. 안티들은 배영수가 대구출신이고 간염 보균자다 보니 상어를 염장하여 구운 경북 대구 음식인 돔배기에 빗대 '돔배영수'(...)로 부르기도 한다.[20]
결국 삼성과 FA계약을 체결했다. 2년간 옵션 포함 총 17억원으로 계약 조항에 해외진출을 원하면 조건없이 보내주는 조항이 있다고.
2.7 끝나지 않는 희망고문: 2011 시즌
4월 10일 SK전과 4월 17일 두산전, 4월 23일 넥센전에서 승리함으로써 3연승을 거두었다. 삼성팬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5월 1일 한화전에서 8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고도[21] 팀 타선이 1점 밖에 내지 못해 패전투수가 되었다. 가뜩이나 삼성타자들이 부진한데다가, 한화 선발투수가 류현진이었는지라... 지못미. 본인은 최선을 다해 던졌기 때문에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날 경기는 철저히 투수전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5시에 시작해 7시반에 끝나는 기염을 토했다. 타 구장엔 5회말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곳도 있을 정도로.
5월 말까지 좋은 성적을 기록하나, 6월부터 다시 부진하기 시작해 7월 말까지 다시 기나긴 부진이 시작된다. 이 기간에만 승리 없이 3패... 평균자책점도 3점대 중반에서 5점대 중반까지 상승하고 만다.
그렇게 계속된 부진에 늪에서 헤매이다가 8월 7일 사직 롯데 전에서 7이닝 1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를 기록하며 77일만에 승수를 추가하였고, 명투구를 선보여 팀을 위닝 시리즈로 이끌어냈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으로 이기던 2011년 10월 28일 인천 문학 경기장에서 열린 SK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 팀이 1:2로 지고 있던 8회말에 등판하여 정근우에게 안타, 박재상에게 희생번트, 최정에게 유격수 땅볼 진루타를 허용, 2사 3루에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다음 투수인 권혁이 임훈을 운 좋게도 3루수 라인드라이브로 잡아내어 이닝을 끝낸 덕분에 배영수의 실점과 자책점은 없었다.
한국시리즈에서 10이닝 노히트노런 달성을 실패했던 선수가 세월이 흘러 지고 있는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3타자만 상대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배영수의 이날 성적은 ⅔이닝 15투구수 1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이날 경기가 배영수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기가 되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했다.
2.8 에이스의 귀환: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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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6일 7년만의 10승 투수에 오름과 동시에 개인 통산 100승을 기록한 경기에서. |
에이스의 재림
해당 항목 참조.
2.9 9년만의 다승왕 복귀, 그러나…: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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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 구단 체제 이후 최초로 8개 구단 상대 승리투수가 된 경기. 그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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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에서 |
에이스라 하기에는 성적이 모자라지만 삼성 선발진의 한 축으로 꾸준히 뛰면서 2004년에 이어 또다시 공동 다승왕을 수상했다.
해당 항목 참조.
2.10 서로 상처만 받은 FA: 2014시즌
2014년 6월 25일, KBO 통산 120승 달성 |
준수한 5선발로 활약했으나 시즌 후 FA 협상장에서 삼성으로부터 최초 2년, 최종 2+2년을 제시받고 우선협상이 결렬됐다. 무옵션에 바로 가치를 보장받은 동갑 윤성환이나 백업인 조동찬보다도 못한 대우에 실망하고 "기회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FA시장으로 나갔다.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던 팬들은 지역 신문에 배영수를 위한 광고를 걸기도 했다.
결국 한화로 확정. 3년 21.5억의 값으로 결정됐다. 그 과정에서 직원이 안지만, 윤성환 등의 계약을 하는데 배영수를 1시간 동안 멍하니 기다리게 했다고 한다. 배영수 '길었던 1시간' 그리고 한화행. 하지만 작성한 기자가 기자인 만큼 걸러서 볼 필요가 있는 기사다. 그리고 이런 수법은 필요없어진 직원을 모멸감을 줘서 제발로 나가게 할 때 쓰이는 흔한 수법이라 온전히 실수라고 보는 것은 순진한 시각이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저녁에 경산볼파크에 왔다가 허탕치고 10시에 불러서 다시 나갔다고 하니, 1시간이 아니라 몇시간씩 방치되었다고 주장했다. '한화행' 배영수 "광야에서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안현호 단장은 '전부 1~2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마지막 협상이고 시간이 촉박해 개별적으로 약속을 잡을 상황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때 한화의 김성근 감독이 전화를 걸어 왔고 단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직접 찾아가서 성의를 보인 한화 이글스로 데뷔 후 14년만에 팀을 이적하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 “영수야, 야구 오래해야지”… 배영수 “예, 감독님.”
배영수가 삼성을 떠날 수 밖에 없던 이유라는 기사에서 정리된 바에 의하면, 연간 금액으로 따지면 삼성과 한화가 제시한 액수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했다. 또한 일부의 루머와 달리 배영수는 "내가 구단 측에 선발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협상 과정에서 수치심까지 느꼈다고. 배영수 CBS 인터뷰 전문 참조. 팬들이 지역신문에 낸 광고를 보고 너무 감사하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인터뷰 내용은 이틀 전 그가 한 "누구도 원망 안한다. 정말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오해는 없다"라는 발언과는 배치되는 내용이라 그 사이에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배영수는 8승 6패 ERA 5.45, 윤성환 12승 7패 ERA 4.39.
한국시리즈 배영수 3⅓이닝 3실점, 윤성환 2승 13이닝 2실점이다.
12월 15일 보상선수로 정현석이 지명되었으나 선수 개인 사정과 삼성 프런트의 실책으로 인해 결국 연봉 300%의 보상금으로 바뀌었다. 자세한 내용은 정현석 항목 참고.
2.11 삼성이 버린 투수는 줍지마라: 2015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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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한 짤 요약.gif |
32경기 4승 11패 1홀드 방어율 7.04
송은범과 함께 (심지어 대구원정을 피하고도) 훌륭한 먹튀로 거듭난 시즌. 그래도 주운 것 중 하나는 터졌잖아
더불어 그렇게 부르짖던 많은 기회는 불펜알바로 원없이 부여받게 되었다. 30경기 넘게 뛰셨으니 만족하셨겠죠
송은범은 시즌 막판에 불펜전환이라도 해서 얼마정도 밥값은 해줬는데 이분은 불펜 전환을 해도 먹튀 확정.
2.12 129Km 속구 던지는 21억 투수 : 2016년
FA 2년차에 속구 구속이 130km/h도 안나오는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먹튀
어떻게 FA 2년차에 시즌 한경기도 출전을 안하냐 영쑤 드라이포트[23]
한화팬들 : 헤이 영쑤 플리스 퍼킹 돈 두 댓!!!
2015 시즌 후에 팔꿈치 뼛조각 수술을 받았다. 예정되는 복귀 시점은 5월이였으나, 재활이 지지부진하면서 결국 2016년 시즌을 말아먹을 것으로 전망되며 먹튀가 확정되었다. 관련 기사
재활이후 5월 20일 경희대와의 3군 경기에 등판했는데, 당일 경기에서 2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그런데 속구 최고구속이 131km/h, 평균구속이 129km/h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 기사
6월 14일 소프트뱅크 3군과 한화 2군간 교류전에서 3⅔이닝 1실점 했다. 관련기사. 이날도 역시 속구 구속이 130km/h도 안나왔다. 우완의 유희관
6월 21일 기아 2군과 경기에서 4이닝 7피안타 5실점(2자책)했다. 일단 1회 선두타자부터 2루타를 뻥뻥 맞은데다가 1루수의 수비 실책이후 희생플라이, 2루 땅볼로 2아웃을 잡고 연속 장타를 맞으며 1회부터 3실점. 강판된 후 구원으로 올라온 안영명이 4이닝 1피안타 무실점을 깔끔하게 막은 것과 대비가 될 지경.
1일 저녁 급작스럽게 1군으로 콜업되었다. 속구 구속이 140km를 넘어섰다는 소식을 들은 김성근 감독이 송은범, 안영명이 빠진 투수진에 합류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슬럼프를 이겨낼 경우 실낱같은 가을야구에 대한 희망고문이라도 기대할만 했으나... 한번도 등판하지 못하고 1군에 등록된지 4일만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올해 배영수의 문제는 잃은 구속 문제와 더불어 앞으로 제구력 위주의 피칭을 해야 하는데 유희관과 다르게 제구와 구위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이다. 당장 피홈런이 많은 것은 물론 피안타율과 피장타율이 각각 3할대, 4할대 후반인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투수 본인의 자신감을 잃었다. 은퇴 드립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2군 최종성적은 7경기(5경기 선발, 2경기 구원등판), 2패(선발 1패, 구원 1패), 승률0.000, 28.2이닝, 39피안타(1피홈런), 6볼넷, 2사구, 13탈삼진, 23실점, 17자책, 피안타율 0.331, QS 1회, WHIP 1.640
이번에 미야자키 교육리그에 참여했는데, 성적이 좋지 않으면 사실상 내년에 기회는 없다고 보면 될 듯하다.[24]
고무적인 것은 교육리그에서 구속이 144km까지 상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의 유임이 점쳐지는 기사가 나오는 중이라 그냥 드러누우라는 (...) 반응도 많다.
3 투구 스타일
2004년에는 10이닝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뻔 하거나, 2005년에는 최다 이닝 4위 등 완투 능력이 있었고, 2006년에는 팔꿈치 통증에도 불구하고 선발, 불펜을 오가는 등 연투 능력도 있었지만 지금은 옛말이 되었다.
전성기였던 2006시즌까지는 평균 140대 중반, 최고 153km/h의 속구,[25] 140 초반대의 슬라이더, 130 후반대의 스플리터[26] 세 가지의 구질로 타자를 윽박질렀다. 투구 스타일만 보면 딱 존 스몰츠의 다운그레이드버전.
팔꿈치 부상 이후에는 대개 10km/h씩 구속이 줄었다. 이 때문에 나온 말이 잃어버린 10km. 이 때문에 예전처럼 타자와 정면승부하기보다는 변화구 등으로 맞춰잡는 스타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속구는 평균 130대 후반으로 줄었지만, 특이하게도 슬라이더는 130대 초중반대로 속구와 몇 킬로 차이나지 않는다. 구속이 줄어든 시점에서 그나마 다행인 부분.
원래 던지던 3개의 구종 외에도 부상 이후로 서클체인지업, 싱커[27]를 추가했고, 2011 시즌에는 커터 추가도 시도했다.# 이외에도 2008년 포스트시즌 때는 너클커브를 던졌으며,# 2013년 8월경에는 너클볼까지 선보였다.#
팔꿈치 부상 후로 기복이 많이 심해졌다. 잘 던지는 날에는 호투, 컨디션 안 좋은 날에는 엄청나게 털리는 경향이 많아졌다. 유독 그가 나오는 날에는 실책이 좀 잦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라 그렇게 흔들릴 투수는 절대로 아닌데도 그런 경향을 보이는 건 좀 미스터리... 과거의 스터프를 잃고 제구력에 의존하는 투수가 된지라 조금만 흔들려도 민감해진다는 분석이 있다.
4 이야깃거리
4.1 야구 내
- 펠릭스 호세와 빈볼로 얽힌 악연으로 유명한데, 2001년 9월 18일 마산 롯데전에서 호세에게 빈볼성 투구로 볼넷을 준 뒤 후속타자인 얀에게 또 다시 빈볼성 투구를 계속 던져[28] 허리를 맞추자 얀이 분노, 심판이 말리고 있는 사이 1루에서 분노한 호세가 달려와 주먹으로 때린 사건이다.
입단 첫 해에는 세이콘한테 죽빵을 뒤지도록 강타당했다. 그래서 그런지 호세한테 그렇게 쳐맞고도 멀쩡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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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영쑤!! 돈 두댓!이, 이것이 흑형인가.그 사건 이후 제가 야구를 잘하게 되었습니다[30]
- 그리고 이후 배영수가 성적이 좋아지자 호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참교육자"라는 말과 함께 그의 죽빵을 강타한 펀치는 "참교육"으로 불렸다. 타팀 팬들이 자기 팀의 못하는 선수를 보고 죽빵을 때려달라면서 "참교육 한 번만 시켜주세요"라고 말한다. 장난인 줄 알았지만 방망이까지 들고 나와서 온몸으로 거부했던 신승현이 그렇게 됨으로써 완벽한 "참교육자"가 되어 버렸다.
- 2013년 8월 8일 대구 한화전에서 선발 등판해 6⅔이닝 동안 3실점으로 틀어막고 승리를 추가하였는데, 이로써 배영수는 통산 112승째를 따내 김시진이 삼성 라이온즈에서 현역 시절 기록했던 111승을 뛰어넘어 삼성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투수로 이름을 올렸다.
- 2006년 WBC에서 스즈키 이치로에게 던진 공은 아예 해설이 일부러 맞춘 것 같다고 대놓고 말했지만, 그때 한창 30년 발언 덕에 이치로에 대한 반발심이 들끓을 때라 '열사' 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환영받았다. 그리고 당시 구대성과 짜고서 일부러 맞춘 거라고 후에 밝혔다.#
- 이러니저러니 해도, 21세기에 들어선 후 삼성은 2014년초를 기준으로 7회 우승 중 6회가 배영수가 데뷔한 후 달성한 것이고, 이승엽이 떠난 2000년대 중반의 삼성의 최대 흥행카드이기도 했다.
- 2015년 5월 27일 4회에 KIA 4번타자 브렛 필에게 몸쪽공을 던졌으나 타자가 피했고, 5번 최희섭이 피하자 한번 더 시도해 엉덩이를 맞혔다. 6번 이범호도 몸쪽공을 피하자 더 깊게 던져서 옆구리를 맞혔다. 이범호를 심판과 포수가 말리지 않았다면 마운드에서 만날뻔.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갔던 사건. 이범호는 교체되어서 병원에 갔으나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한다.
-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추측하자면 전날 몸에 맞는 공으로 핵심 타자 김경언이 4주 이상의 진단을 받았고, 당일경기 3회에 이용규가 다리에 공을 맞는걸 보고 복수를 한것이다.
그날 승리 투수는 배영수그 결과 다음날 최희섭과 이범호는 선발로 못나왔고, 대타로 2명 다 나왔으나 2명 다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후 안그래도 온갖 부상을 다 달고 사는 최희섭은 부상이 악화되었다고 기사화 되었고,[32] KIA와 한화의 사이가 나빠졌다. 중심 타자 3명에게 5개의 몸쪽 깊은 공을 던진건 심했다는 평.
4.2 야구 외
- 정수근과 묘하게 외모가 닮았다. 그 덕분에 예전에 부산 원정을 갔을때 부산 사람들에게 정수근으로 오해받아 싸인요청까지 받았다고 한다. 본인은 정수근으로 오해받은 덕택에 밥을 공짜로 얻어먹게 되어서 좋았다고. 그 때문에 한때 붙었던 별명이 배수근
그런데 정수근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 이대호처럼 어린시절이 상당히 불우했던 선수 중 하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이혼해서 도망치고 할머니와 누나가 함께 돌봐줬다고 한다. 그러나 2005년 4월 2일 롯데와의 시즌 개막전 때 완봉승을 챙기는 날 임종하셨다고 한다. 이 날 경기할 때 모자 챙 안쪽에다 '할머니 생각'이라고 써놓았다.
- 삼성팬들은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의 팔꿈치를 희생해가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배영수에게 영구까방권을 부여해주었다. 이후 토미존 수술 후유증으로 극도의 부진으로 빠졌을때도 비난의 목소리 하나없이 묵묵히 배영수를 지지해주었다. 2012년 배영수의 부활은 3년동안 영구까방권을 사용해준 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삼성팬이라면 배영수를 절대 까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 그럼에도 배영수를 깐다면 '올림픽 금메달 이후에 야구 보기 시작한 뉴비' 취급을 당했다. 다만 2014년 FA 협상에서 보인 모습 때문에 상황이 다소 달라져 신규 팬이든 올드 팬이든 배영수를 더 우선시하는 팬과 삼성을 더 우선시하는 팬들로 갈려 까방권도 퇴색되고 있다.
- 2010년 12월 19일에 탤런트인 규휘(본명 박성희)와 결혼하여 현재까지 딸 2명을 낳았다. 딸바보 등극.
- 1981년생으로 2011년 기준 만 30살이지만, 워낙 어릴때부터 활약했던 것과 함께 손민한, 박명환과 더불어 2000년대 우완 3대 에이스로 불렸던 것 때문에 노장 이미지가 있다. 그가 등판했던 4월 23일 넥센전의 선발투수는 그와 동갑이자 같은 해에 프로입단한 김성태였는데, '베테랑 배영수와 신예 김성태의 선발대결' 이라는 방송 멘트가 나오기도. 심지어 어떤 팬은 그에게 배영수 선수 이제 40살 가까이 되었지요라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지못미. 본인도 이에 불만이 많아서, 기자들에게 제발 자기 이름 앞에 '베테랑', '노장'이란 단어를 쓰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노장이 아닐 뿐 베테랑은 맞지만.
- 개인통산 100승 달성 후 인터뷰에서 고마운 사람으로 가족 다음으로
참교육자 호세배우 박재정을 언급했다.배영수와 호세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인가 보다경북고 동문으로 박재정이 1년 선배인데, 박재정이 배영수 결혼식 사회를 봐줬을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 2013년 3월 30일 두산과의 개막전에서 오재원과 김현수에게 만루홈런을 맞는 개만두를 시전하였는데 그 다음 등판인 4월 7일 NC전에서 "개만두 아십니까. 저, 개만두 됐습니다. 개만두!"라고 기자들한테 말하면서 웃었다고 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배영수의 멘탈이 어떠한지 잘 알 수 있는 일화 중 하나.
그리고 깨알같은 선배 박찬호의 디스까지#
- 배영수 아줌마,[33] 배영수 이모, 꽹가리 이모 등등의 별명으로 불리는 유명한 팬이 있다.[34]
직관팬들은 시끄럽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항상 배영수 유니폼을 입고 와서 꽹가리를 두들기며 응원하는 중년 여성으로 예전에는 김실을 응원하셨으며, 이 후에는 아들이 배영수와 동갑이라서 배영수를 응원했다고 한다. 삼성팬들에게 워낙 유명인사였던 지라 2014년 7월 29일 경기에서는 삼성 구단에서 이 배영수 이모를 시구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날 경기는 차우찬이 핵폭발 하면서 패배... 이 분은 배영수 이적 후 김상수로 갈아타셨다고 한다.이젠 상수아지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0 | 삼성 라이온즈 | 25 | 45⅓ | 0 | 2 | 0 | 0 | 0.000 | 6.75 | 59 | 9 | 24 | 32 | 36 | 34 | 1.765 |
2001 | 35 | 169⅔ | 13 | 8 | 0 | 0 | 0.619 | 3.77 | 169 | 11 | 97 | 96 | 82 | 71 | 1.521 | |
2002 | 22 | 81⅓ | 6 | 7 | 0 | 0 | 0.462 | 5.53 | 94 | 13 | 48 | 63 | 55 | 50 | 1.684 | |
2003 | 30 | 163⅔ | 13 | 5 | 0 | 0 | 0.722 (5위) | 4.51 | 174 | 11 | 84 | 99 | 85 | 82 | 1.534 | |
2004 | 35 | 189⅔ (3위) | 17 (1위) | 2 | 0 | 0 | 0.895 (1위) | 2.61 (3위) | 163 | 6 | 85 | 144 (4위) | 65 | 55 | 1.250 | |
2005 | 31 | 173 (4위) | 11 | 11 | 2 | 1 | 0.500 | 2.86 (2위) | 148 | 10 | 59 | 147 (1위) | 61 | 55 | 1.133 | |
2006 | 32 | 157⅓ | 8 | 9 | 0 | 4 | 0.471 | 2.92 | 142 | 13 | 47 | 133 | 56 | 51 | 1.144 | |
2007 | 1군 기록 없음 | |||||||||||||||
2008 | 27 | 114⅔ | 9 | 8 | 0 | 0 | 0.529 | 4.55 | 127 | 15 | 41 | 71 | 59 | 58 | 1.439 | |
2009 | 23 | 75⅔ | 1 | 12 | 0 | 0 | 0.077 | 7.26 | 106 | 18 | 29 | 40 | 73 | 61 | 1.692 | |
2010 | 31 | 119⅔ | 6 | 8 | 1 | 0 | 0.429 | 4.74 | 136 | 11 | 45 | 64 | 69 | 63 | 1.446 | |
2011 | 25 | 103 | 6 | 8 | 0 | 1 | 0.429 | 5.42 | 127 | 5 | 33 | 47 | 67 | 62 | 1.495 | |
2012 | 26 | 160 | 12 | 8 | 0 | 0 | 0.600 | 3.21 | 159 | 7 | 42 | 89 | 64 | 57 | 1.238 | |
2013 | 27 | 151 | 14 (1위) | 4 | 0 | 0 | 0.778 (2위) | 4.71 | 193 | 9 | 52 | 101 | 83 | 79 | 1.530 | |
2014 | 25 | 133⅔ | 8 | 6 | 0 | 0 | 0.571 | 5.45 | 171 | 14 | 44 | 111 | 87 | 81 | 1.571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15 | 한화 이글스 | 32 | 101 | 4 | 11 | 0 | 1 | 0.267 | 7.04 | 124 | 21 | 53 | 56 | 93 | 79 | 1.61 |
2016 | 1군 기록 없음 | |||||||||||||||
통산(16시즌) | 426 | 1938⅔ (현역 1위) | 128 (현역 1위) | 109 | 3 | 7 | 0.540 | 4.35 | 2092 | 173 | 783 | 1293 (현역 1위) | 1035 | 938 | 1.42 |
역대수상 | |
연도 | 수상내용 |
2004년 | 정규시즌 MVP 골든글러브 투수부분 수상 |
완투, 완봉기록 | ||
연도 | 완투 | 완봉 |
2003년 | 1완투 (8위) | 0완봉 |
2004년 | 4완투 (1위) | 2완봉 (1위) |
2005년 | 2완투 (3위) | 1완봉 (2위) |
2012년 | 2완투 (5위) | 0완봉 |
2014년 | 1완투 | 0완봉 |
통산 | 10완투 | 3완봉 |
- ↑ 모바일 게임인 게임빌 프로야구/2011에서도 배영수의 이름이 배열사로 나온다.
- ↑ 이거 때문에 배영수가 정통포크를 던질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배영수의 포크는 반(半)포크성으로 스플리터에 가깝다. 떨어지는 각도는 적지만 스피드는 빠른.
- ↑ 왠지 모르게 순박해보이는 외모에 이름이 비슷하기도 해서인지 평상시에도 애칭으로 배영구라고 불리는 일도 있다.
- ↑ 말 그대로 敗王. 특히 1승 12패를 기록한 2009년이 절정이었다. 이 사람 때문이라는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그 때 배영수는 야구를 그만두려고 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 ↑ 배영수의 성적 자체가 선발확정시켜 줄 정도로 좋은 편이 아니었고, 장원삼과 윤성환 둘 다 30줄을 훌쩍 넘겨 언제 노쇠화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5선발 육성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선발을 육성하지 못한 것의 부작용은 2015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으로 주전 투수들이 이탈하자 바로 나타났다.
- ↑ 애초에 당시 대구상고의 에이스였던 장준관이 1999년 대구 개막전 시구자로 나서며 이미 1차지명은 장준관으로 정해져 있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장준관이 계속 슬라이더 위주의 피칭을 했던데다 지명을 앞두고 계약금을 올리고자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삼성에선 배영수로 선회했다.
그리고 장준관은 모 팀으로 드래프트 지명이 되는데... - ↑ 하지만 2006년은 극도의 투고타저.
- ↑ 2007년 윤석민, 2008~2009년 봉중근, 2012년 류현진의 원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팀 타선 지원을 받지 못했다. (2006년 득점지원율 0.97) 무려 1점도 되지 않는다!
- ↑ 뻥뻥 터지던 삼성의 타선은 이상하게도 배영수가 등판하던 날엔 버로우탔다. 문제는 현재까지도 그런다는 거. 그러나 2013년 드디어 타선지원을 받게 되는데 이번에는 평균자책점이...
- ↑ 당시에는 경기 시작 후 4시간을 넘기면 새 이닝을 시작할 수 없게 했다. 결국 2004년 한국시리즈는 역대 한국시리즈 중 제일 길게 간 시리즈였고, 무승부가 제일 많은 시리즈가 되었다.
- ↑ 흔히 대포주사라고 알려진 데포메드롤. 이 주사는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박철순도 맞은 적이 있다.
- ↑ 그런데 대포주사에는 스테로이드 계열의 물질인 메틸프레드니솔론이 포함되어 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분류되는 일반적인 약쟁이들이 즐겨찾는 계열은 아니나 소염효과가 강력해서 치료목적으로 자주 이용되던 약물이다. 하지만 염증이 자연스럽게 치유되면서 가라앉는게 아니라 부상이 그대로 남은채로 염증만 가라앉기 때문에 선수의 몸을 망가뜨린다. 그때문에 현재는 금지되어있다.
- ↑ 정말 구속회복만 된다면 삼성은 선발 걱정할 문제가 없으니...
- ↑ 안 되는 경우와 되는 경우의 비율이 절반 정도? 자세한 건 토미 존항목에서 수술 부분을 읽어 보도록. 임창용이 특이한 경우.
- ↑ 08, 09 시즌과 비교해봤을 때 피홈런 개수가 준 것이 결정적으로 보인다.
- ↑ 임창용의 야쿠르트행을 주선했던 매니저와 만났다고 한다.
- ↑ 주요 선발진으론 이시카와 마사노리(13승 8패), 사토 요시노리(12승 9패), 타테야마 쇼헤이(12승 7패), 무라나카 쿄헤이(11승 10패) 등이 있고 주요 불펜진으론 마츠오카 케니치(34홀드), 마스부치 타츠요시(20홀드), 오시모토 타케히코(16홀드), 임창용(35세이브) 등 리그 수준급의 투수가 넘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주전경쟁 하기가 영 쉽지 않을 것이다.
- ↑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다. 최소한 선발로는 쿠보 요시모토(14승 5패), 제이슨 스탠드릿지(11승 5패)가 있고 불펜진으론 쿠보타 토모유키(28홀드), 니시무라 켄(14홀드), 후지카와 큐지(28세이브)가 있다. 어딜가든 쉽지않다.
- ↑ 원래 배영수는 선천적인 이유로 간 수치가 높다고 한다. 그것때문에 2006년 시즌끝나고 수술을 미룬것.
- ↑ 기존 위키는 돔배기가 상어를 삭힌 경상도 음식이라 하였으나 주로 경북 대구 지역서 염장한 상어고기를 구워 주로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이다. 돔배기는 경북 영천이 유명하다.
- ↑ 장성호에게 맞은 투런홈런도 실투가 아니었을 정도로 좋은 볼을 던졌다.
- ↑ 참고로 저 식빵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후 본인은 삼진이라 생각하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려했으나 주심이 삼진을 잡아주지 않아 구운 것이다.
- ↑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악의 먹튀로 유명한 대런 드라이포트 역시 5500만 달러에 FA 계약을 한 뒤 첫해부터 먹튀급 성적을 내었고, 2년차에는 완벽하게 드러누우며 시즌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 ↑ 애초에 이 나이에 교육리그에 간다는 것 자체가 박정진처럼 마지막 기회로 찾는 경우 말고는 없다.
- ↑ 특히 속구는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테일링이 걸렸을 정도.
- ↑ 잡는걸 보면 스플리터가 맞다. 배영수 본인도 스플리터를 던진다고 한다.
- ↑ 혹은 투심, 각 기사마다 다름
- ↑ 훗날 배영수가 말하길 당시 슬라이더가 손에서 빠지는 바람에 그런 거라고 해명했다. 호세는 벤치에서 사인도 있고 해서 계속 몸쪽으로 던진 거고.
- ↑ 배영수가 마운드에서 날아갈 정도로 세게 맞았다. 이후 공 집어던지려다 참았다고.
- ↑ 배영수가 나중에 참교육 사건에 대해 직접 설명하면서 실제로 했던 말이다.
- ↑ 그리고 호세는 그해 KBO 역사에 남을 성적을 올리고도 '폭행사건으로 깎인 이미지'+'투표단의 용병 차별'로 여러모로 본인보다 성적이 떨어지는 타자들에게 밀려서 MVP와 골든글러브 수상에 실패했는데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배영수와 같은 삼성 소속이었다.
- ↑ 결국 이 부상을 당한 후 최희섭은 다시는 1군으로 올라오지 못한 채 은퇴하고 말았다.
- ↑ 현지 대구쪽의 삼성팬들이 부르는 애칭은 영수아지매.
- ↑ 원래는 김실의 팬이어서 실이아줌마라고도 불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