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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풀네임 | 도밍고 펠릭스 안두하르 호세 (Domingo Félix Andújar José) |
생년월일 | 1965년 5월 2일 |
출신지 |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도밍고 |
포지션 | 우익수 |
투타 | 우투양타 |
소속팀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1988~1990)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1990~1992) 캔자스시티 로열스(1993년 ~ 1995년) 롯데 자이언츠 (1999) 뉴욕 양키스(2000) 롯데 자이언츠(2001)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2002~2003) 롯데 자이언츠(2006~2007)[1] 푸에블라 페레츠(2007) 랭커스터 반스토머스(2007) 링컨 솔트독스(2007) 캘거리 바이퍼스(2008) 샤움버그 플라이어스(2009) |
역대수상 | ||||||
1999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
2001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장타율 | ||||||
2001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출루율 | ||||||
보유 기록 | ||||||
한국프로야구 한시즌 최다 볼넷[2][3] | ||||||
한국프로야구 한시즌 최고 출루율[4][3] |
"난 부산갈매기의 가사는 모른다. 하지만 노랫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2007년 KBSN과의 인터뷰 中
헤이, 영쑤! 돈 두 댓!(Hey, Yeong-ssu! Don't do that!)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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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26일, 인터뷰 끝나고 팬들에게 하트를 날리는 호세.
검은 갈매기
롯데 자이언츠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이자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타자 중 한 명이었지만 약물 복용으로 그 커리어를 걷어찬 약쟁이
진정한 참교육자
전 롯데 자이언츠의 외국인 선수이자 참된 교육자. 롯데 팬들 사이에서는 검은 갈매기라 불리웠다. 사건사고가 많았지만, 롯데 팬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다. 명실공히 롯데 자이언츠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기억되고 있으며 한국프로야구에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된 이후로 '최고의 외인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항상 후보에 올라가는 선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를 떠난 이후 멕시칸리그에서 금지약물 복용이 적발되어 약쟁이가 되는 바람에 그의 거둔 성적의 신뢰성에 금이 가고 말았다. 게다가 적발 시기가 한국프로야구를 떠난 지 약 2개월 후에 벌어진 일인지라(출처) 한국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동안 금지약물을 복용한 거 아니냐고 의심할 여지가 있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한국에서 시구를 하는 등 비슷한 사례인 다니엘 리오스에 비해 까이는 정도가 덜하다.
1.1 선수 시절
오클랜드 시절 | 세인트루이스 시절 |
1984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 자유계약으로 입단해 1988년 데뷔했으며 1990년 오클랜드에서 풀타임 우익수로 데뷔했다가 윌리 맥기 트레이드[5]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해서 윌리 맥기의 자리를 그대로 차지하고 1991년부터 주전 우익수로 나섰다. 그리고 1991년 세인트루이스의 5번타자로 3할 타격에 많은 2루타를 쳐내며 올스타에 뽑혔다.
사진도 흑백이라 영정사진 같다. 모 선수가 평하길 눈과 이빨만 보인다. 카더라
1992년 시즌을 마치고 캔자스시티 로열즈로 트레이드되어 우익수로 뛰었지만 점점 기록을 내지 못하며 1995년 시즌 이후로는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나름대로 10홈런 가량과 15~20개의 도루정도는 기록했었으며, 커리어하이 3할 1푼정도도 쳐줄 정도로 나름대로 인지도도 있었던 선수였었는데, 1995년 이후로 메이저리그를 떠나 멕시칸 리그와 독립리그에서 활동하다가 1999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로 마이클 길포일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1999년 인상깊은 활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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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롯데의 클린업 트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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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슬림한 호세 |
그리고 다시 메이저리그로 진출,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였다가 그다지 많은 출장을 하진 못하며 다시 2001년 롯데로 복귀, 대활약하다가 다시 메이저리그 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진출하지만(이 과정에서 이중계약설로 인해 구설수에 올랐다) 마찬가지로 방출, 멕시코 리그나 도미니칸 리그를 전전하다 2006년 잠시 롯데에 귀환해서 다시 예전만큼 활약을 했지만 훈련중 부상으로 2007년 초에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당했다.[6]
1999, 2001 시즌에는 주로 우익수를 봤으며, 2006년 시즌 이후로는 나이도 있고 해서 주로 지명타자로 출장했다. 희귀한 우투양타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한경기에 양타석 동시 홈런을 기록한 선수이다.[7]
2 롯데 방출 이후
롯데 방출 이후 멕시코 리그로 갔으나, 이번에는 약물 복용이 들통나서 방출, 본인이 참교육당했다. 캐나다 캘거리의 독립리그 팀에서 뛰다가 2009년 시즌에는 Northern League 라는 독립리그에 있는 Schaumburg Flyers 라는 팀에서 뛰었다. 09시즌에 타율 9위, 출루율 2위를 기록했다.
3 한국에서의 선수생활
제이 데이비스나 타이론 우즈, 클리프 브룸바 같이 오랫동안 한국에서 뛰면서 꾸준한 성적을 낸 것은 아니나 그가 KBO리그에 있는 동안만큼은 타 팀팬들에게 절대적인 공포감을 심어주는 선수였다. 당시 투수들은 호세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고의성 짙은 볼넷을 내주기 일쑤였다. 특히 최전성기인 2001년은 볼넷 127개로 역대 단일시즌 최다 기록으로, 이는 그가 이 시즌에 때린 안타 123개보다도 많다. 이 덕분에 출루율 0.503을 기록, 원년 프로야구 백인천의 0.502를 경신하여 역대 최고 출루율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여기에 장타율 또한 0.695로 리그 1위! 그래서 이 당시 롯데 자이언츠는 호세만 야구한다라고 까였으며, 호세만 상대 안하고 다른 선수 상대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만연했다... 거의 부산 본즈. 흠좀무 한국 프로야구 1만번째 홈런, 한 경기 좌우타석 홈런, 1999년 플레이오프 대 삼성전에서의 대활약 등 롯데팬들에게는 아주 짙은 인상을 남긴 선수. 단일 시즌의 존재감이라면 전성기때의 이승엽 및 심정수, 타이론 우즈등을 능가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MVP는 받지 못했는데 2001년 배영수 참교육 사건으로 외국인 선수차별까지 받아서 mvp투표에서 기자들이 투표안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했다. 이는 2003년 이승엽vs서승화 주먹혈투이후 이승엽이 심정수를 이기고 MVP를 받은것과 매우 비교된다. 2001년 MVP투표에서 1위가 신윤호2위가 이승엽이였는데. 2차투표에서 신윤호가 패배하면서 MVP는 이승엽이 받게된다. 투수에게 졌다면 그러려니 하는게 타자에게 MVP를 뺏기다니.. 이건 외국인차별이야!
특히 1999년 기적적인 7차전에 묻혔지만 플레이오프 5차전은 호세가 가장 만화같은 모습을 보여줬던 경기였다. 삼성이 1차전 승리후,3,4차전까지 이기며 롯데가 1승 3패로 1경기만 더 지면 끝나는 상황. 그리고 맞이한 5차전에서 롯데가 5:3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9회말을 맞게되었다. 당시 최고의 마무리였던 애니콜 임창용을 맞아 롯데는 2루타와 볼넷으로 무사 1, 2루의 찬스를 만들었으나 4번타자 마해영이 삼진을 당하고 호세가 타석에 들어섰다.[8] 벤치에서는 호세를 고의사구는 아니지만 볼로 빼면서 안되면 볼넷으로 내보내고 다음타자를 상대하자는 사인을 내보내게 된다. 임창용의 공이 2볼까지의 상황이 가게 되고 다음 공도 볼이었다. 기다리면 걸어 나갈수 있는 상황에서 호세는 헛스윙을 하였고 다음 공에도 헛스윙을 하였다. 마치 승부를 보자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임창용의 빠른공을 받아쳐서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플레이오프에서의 끝내기 홈런을 쳐서 6:5 승리를 이끌었다. 벼랑끝 상황에서 롯데를 살린 이 홈런으로 결국 롯데는 6차전과 7차전까지 3연속으로 6:5로 승리하여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4 기타
2001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던 호세는 '하리수 문신'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해 8월 한창 인기를 끌던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에 반해 팔뚝에 '사랑해 하리수 호세'라고 새긴적도 있었다. 사실은 문신이 아니라 그 당시 화제였던 하리수의 이름을 롯데 선수들이 매직으로 쓴 장난이다. 펠릭스 호세 -> 하리수 호세.. 근데 기자들이 하리수 문신을 했다고 오버...
호세가 홈런을 치거나 롯데가 승리를 거두는 날에 부산광역시의 유흥가는 매우 떠들석해지며, 일명 "호세 효과"라 불리는 유흥주점을 중점으로 긍정적인 경제적 효과를 내기도 하였다. 익명의 제보에 따르면 유명한 집창촌을 몇 바퀴 돌면서 사람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손을 흔들며 보답하기도 했단다. 훗날 본인이 회고하기를 부산에서 내 돈 내고 뭐 사먹은 적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부산에는 호세한의원이라는 한의원이 있다. 진짜 있고, 사직 야구장 옆에 있으며 어원은 이 항목의 인물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받은 상들은 전부 유흥주점 등에 공짜로 주었다고 한다.[9]
2001년 롯데 자이언츠의 원정 유니폼 하의가 회색이었는데 원래 유니폼 대신 2000년 입었던 뉴욕 양키스의 원정 유니폼 하의를 양해를 얻어 입고 뛰었다.
롯데에 있었을 적에 조경환은 호세가 롯데를 떠난 후 급격하게 성적 부진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2002년 7월에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
메이저리거도 겪었고, 대한민국에서도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어가서인지 조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도 부러움을 받던 인물이기도 했다. 2000년 초반 그가 대한민국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기자들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그의 집을 취재했었는데, 200평이 넘는 넓은 집과 역시 넓은 마당, 수영장까지 갖추고 자동차도 4대나 있으며 경비원과 메이드들까지 고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래서 도미니카에선 야구 잘하면 출세한다는 것이라는 거겠지.
아들인 도미닉 호세. 1993년생으로 플로리다 주에 있는 보카랜턴 고등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2011년에 열린 신인 드래프트 때 LA 에인절스가 15라운드(총 465위)에서 지명했지만, 입단을 거절한 후 스탠퍼드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뉴욕 양키스에 24라운드에서 지명했다. 주 포지션은 외야수.
2013년 6월 26일에 열리는 롯데 자이언츠의 1999 이벤트를 기념해 사직 야구장을 방문, 시구를 한다는 카더라가 떠돌았다.넥슨 프로야구마스터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이 알려지면서 더욱 팬들의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에 대해 부산MBC 야구해설위원이 아직 확정 아니다라고 글을 남기며 사람들의 궁금증을 증폭하는 중. 그리고 6월 26일 시구를 위해 입국한다고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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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영쑤, 아임 백! 롱 타임 노 씨! 야구팬들은 참교육을 시킬 아이들이 많아졌다고 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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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하의실종 바지색이 살구색 일 뿐이다. 애초에 진짜 하의실종이면 흑색이어야 한다
최효석(둠씨) 부산MBC 야구 해설위원에 의하면 배영수와 신승현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한번 만난 제자는 절대 잊지 않는 참교육자 링크
그래서 응원가가 전교조 노래패 - 참교육의 함성으로 이라 카더라...
5 사건 사고
성격이 불같고 망나니로도 유명했지만 롯데 팬들,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정성스럽게 사인해 줄 정도로 친근했다고 한다.
은근히 삼성 라이온즈와 악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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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의 기운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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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빠던이라 카더라
대구아재 : 호세! 출출하제? 여기 라면 한사발 무그라!!
펠릭스 호세 : 대구아재요! 고맙수다! 방망이 가져가소!
역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99년 롯데 자이언츠 VS 삼성 라이온즈 플레이오프 7차전 대구구장에서 호세가 홈런을 친 이후 정신나간 삼리건 관중들이 컵라면을 비롯한 여러가지 이물을 투척했으며 열받은 호세는 야구빠따를 대구 관중들에게 던졌다. 이 사건은 10년 후, 꼴리건의 레이저 포인터 사건을 비호할때 인용된다. -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항목의 동영상 참조.
물론, 호세는 퇴장을 당하고 선수단도 물러서려고 하다가.... 이후 롯데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삼성을 쓰러트리고 1999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호세 본인은 이후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는 롯데 팬과 삼성 팬, 특히 배영수에게는 절대 잊지 못할 그것을 시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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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참교육의 현장
헤이! 영쑤! 돈 두댓!!
그 사건 이후 제가 야구를 잘하게 되었습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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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2001년 마산 삼성전에서 배영수가 자신을 빈볼성 공을 던져 볼넷으로 거르고 후속 타자로 나온 얀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지자 1루에서 빛의 속도로 달려와서 참교육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린 사건[11]이라든가, 헤이 영쑤![12] 2006년 문학에서 SK 와이번스 신승현과의 결투(?)에서 보여준 일련의 행동(이 과정에서 최태원 코치와 공필성 코치의 살신성인이 나중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도 호세의 불같은 성격을 뒷받침해주는 일화로 남아 있다. 그가 타 구단 선수들을 상대로 벌인 일대의 호세 무쌍은 아직도 야구 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배영수에게 죽빵을 날린 이 사건 이후 배영수의 에이스 포텐이 터진 사실이 주목받으면서 배영수에게 날린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야갤에서 참교육이라는 찬양(?)을 받게 된다. 더욱이 호세의 참교육을 거부한 벤클에서 달아난 신승현이 이후 추락하면서 호세는 야갤에서 완전히 참교육자가 되어 버렸다.(...)
결국 이 사건으로 호세가 출장 정지를 먹으면서 시즌을 마감하자 우용득 당시 롯데 감독 대행은 더 이상 가용할 수 없게 된 호세를 1군에서 말소하고 2001년에 입단한 어느 신인 내야수를 1군에 처음으로 등록하였는데, 이 선수가 훗날 "조선의 4번 타자"가 되는 내야수 이대호다.
최고의 시즌인 2001년에는 배영수 폭행 사건 때문에 고작 117게임(499타석)에 출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율 0.335, 36홈런, 102타점, OPS 1.198(!), 출루율 0.503의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해 기록한 OPS와 출루율은 각각 KBO 역사상 단일시즌 3위(1위는 에릭 테임즈 의 1.288, 2위는 원년 백인천의 1.237), 1위의 기록이기도하다. 하지만 이런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폭행 사건으로 인해 MVP도 골든글러브도 받지 못했다. 참고로 당시 지명타자로 골든글러브를 받은 양준혁과 호세의 스탯을 비교하자면
양준혁 : 타율 0.355 / 출루율 0.449 / 장타율 0.510 / OPS 0.959 / 14홈런 / 92타점 / 12도루 / 80볼넷
호세 : 타율 0.335 / 출루율 0.503 / 장타율 0.695 / OPS 1.198 / 36홈런 / 102타점 / 7도루 / 127볼넷
양준혁이 못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타율, 도루를 제외한 모든 스탯이 호세가 우월하기 때문에 폭행 사건의 영향+외국인 차별로 골글을 못탔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다만 나중에 약물 복용이 밝혀지면서 위 스탯이 원래 실력으로 낸 성적이 맞는지 신뢰할 수 없게 되버린게 문제.
6 역대 성적
- 타자기록[13]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장타율 | 수상 |
1999 | 롯데 자이언츠 | 132 | 462 | .327 | 151 | 29 | 3 | 36 | 122 | 93 | 12 | .636 | 골글 |
2001 | 117 | 367 | .335 | 123 | 20 | 2 | 36 | 102 | 90 | 7 | .695 (1위) | - | |
2006 | 122 | 415 | .277 | 115 | 21 | 0 | 22 (2위) | 78 | 59 | 3 | .487 | - | |
2007 | 23 | 86 | .256 | 22 | 4 | 0 | 1 | 12 | 5 | 0 | .337 | - | |
통산 | - | 394 | 1330 | .309 | 411 | 74 | 5 | 95 | 314 | 247 | 22 | .586 | - |
역대수상 | |
연도 | 수상내용 |
1999년 | 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
- ↑ 2007시즌 도중에 퇴출됐다.
- ↑ 127개
- ↑ 3.0 3.1 2001년
- ↑ 0.503
- ↑ 이 트레이드가 유명한 것은, NL소속 세인트루이스에서 AL소속 오클랜드로 리그 이동을 했는데 그해 내셔널리그 타격왕을 윌리 맥기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 ↑ 그리고 롯데는 대수비(?!) 외국인 선수 에두아르도 리오스를 영입했다.
- ↑ 그 뒤로 서동욱도 기록했다.
- ↑ 당시 호세가 심각한 타격부진에 빠져 있어서 호세가 5번타자를 맡고 있었다.
- ↑ 골든글러브인것 같은데 이 링크의 게시자는 선물받았다고 하고 어느쪽이 맞는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롯데 수석 트레이너의 인터뷰에 따르면, 골든글러브 상은 호세가 사실 잊어버렸거나 도난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골든글러브 사건 이전에도 호세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팬들 호응에 응대해주는 사이 종종 자기 물품을 도난당하기도 했다고. 이 인터뷰에서 수석 트레이너는 골든글러브를 유흥주점에 공짜로 주었거나 선물했다는건 루머라고 일축하였다. 뭐 진실은 호세만이 알겠지만.
- ↑ 실제로 배영수가 참교육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직접 한 말이다.
- ↑ 당시 배영수가 얀을 맞추고 껄렁거리는 모션을 취했기 때문에 호세가 아니더라도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을 것이다.
- ↑ 7월달 김명성 감독의 급사로 팀이 흔들리는 와중에, 이 사건으로 호세마저 잃으며 롯데는 4위와 불과 1.5게임차의 아쉬운 8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꼴데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후 기나긴 암흑기가 도래한다. 정말 2001년은 롯데 자이언츠에 마가 낀 한해였다.
- ↑ 한국에서의 성적만 기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