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ration Hailstone
헤일스톤 작전 | ||
[1] | ||
날짜 | ||
1944년 2월 16일 ~ 1944년 2월 17일 | ||
장소 | ||
트럭 제도 | ||
교전국 | 미군 미국 | 일본군 일본 제국 |
지휘관 | 마크 미처 | 고바야시 마사미 |
결과 | ||
일본군의 중태평양 상실 | ||
전력 | 정규항공모함 5척 경항공모함 3척 전함 7척 기타 군함 40여척 항공기 약 590기 | 순양함 5척 구축함 8척 기타 군함 5척 상선 50여척 항공기 350기 |
피해규모 | 정규항공모함 1척 피해 전함 1척 피해 항공기 25기 손실 40명 전사 | 순양함 3척 침몰 구축함 4척 침몰 기타 군함 3척 침몰 상선 32척 침몰 항공기 270기 손실 |
트럭 제도(지금의 추크 제도) |
1 개요
태평양 전쟁 중 1944년 2월에 미국 해군이 2일에 걸쳐 일본 해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던 트럭 제도를 공습한 작전이다. 흔히 헤일스톰(Hailstorm)으로 착각되나 정확한 이름은 헤일스톤(Hailstone)이다.
이 공습 이후로 일본 해군은 중태평양의 거점을 버리고 필리핀과 팔라우로 밀려나게 된다.
2 원인
1943년 과달카날에서의 승리 이후로 일본군이 방어 태세에 돌입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주도권이 미국에게로 완전히 넘어오게 되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공세에 돌입한다.
과거 41년과 42년에 일본군이 남방작전에서 했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미군이 섬 하나를 점령하고 다음 섬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남쪽에서는 미 육/해군이 연합작전을 펼치며 밀고 들어오고, 북태평양에서는 해군이 천천히 일본 제국을 죄어오는 방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로 타라와 환초에서 타라와 전투가 벌어졌다. 이 경로에는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자 방어선의 중핵이었던 트럭 제도가 있었다.
2.1 트럭 제도
트럭 제도는 개전 때부터 바다가 대부분이었던 태평양에서 일본군에게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42~43년까지는 전함 야마토 및 여러 항공모함들을 비롯한 수많은 주요 일본 해군 군함들이 이곳에 정박해 있었다. 일본 해군이 과달카날에서 패하기 전까지 태평양에서 작전을 벌이는 많은 일본 해군 함정들의 보급 기지로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트럭 제도에는 상당한 규모의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본군의 항공기들이 미 해군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만큼 이곳은 일본군에게 매우 전략적인 위치였으며, 동시에 미군에게는 탁월한 공습 목표이기도 했다.
비록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 43년부터 항공모함이 쏟아져나온 미국의 고속항모부대의 존재로 기지가 이미 위험에 쳐했다고 판단한 일본군이 43년 10월 말부터 대부분의 주력 함정들을 본토와 팔라우 등지로 후퇴시켰기 때문에 이렇다 할 주력함들은 없었지만, 대규모 상선단과 몇 척의 군함들, 그리고 몇백 기에 달하는 항공기들이 남아있었다.
3 공습
공습을 가하는 미 해군의 급강하 폭격기 편대 |
1944년 2월 16일에 트럭 제도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미 해군 함정들의 포격을 시작으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미 해군의 최신예 항공모함인 에식스급 항공모함 4척 및 기타 경항공모함들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트럭 제도를 맹공습하기 시작했다.
항공모함이 공습을 맡는 동안 다른 수상함 및 잠수함들은 퇴각로에 배치되어 아가노급 경순양함 1번함 아가노, 가게로급 구축함 마이카제 등을 격침시키기도 했다.
72여기의 F6F 헬캣 전투기들이 기타 급강하폭격기 및 뇌격기들이 안전한 공습을 할 수 있도록 먼저 트럭 제도에 도착했다. 이들을 포착한 50여기의 일본군 전투기들이 나와 상대하여 4기의 헬캣이 격추되었으나, 이미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숙련된 파일럿들을 상대해 낼 수는 없었고, 사실상의 학살극이 벌어졌다.
이들이 제공권을 확보하자, 곧이어 뇌격기들이 밀고 들어와 항공유 저장고와 비행장 등을 폭격하고, 급강하폭격기들이 상선들 및 군함들에게 공격을 가하면서 피해를 입혔다. 16일 하루동안 엔터프라이즈 하나가 날린 폭탄만 900톤에 이를 정도로 맹공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6일의 공습이 끝나자, 이번에는 일본군이 역으로 다수의 G4M 폭격기들을 이용하여 야간에 미 해군을 공격했다. 비록 공격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네 척의 에식스급 항공모함 중 하나였던 USS 인트레피드가 어뢰에 피격당해서 11명이 전사하고 이후 수리를 위해 진주만으로 돌아가야 했다.
17일에는 또다시 트럭 제도에 3차례의 공습이 가해져 더 큰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17일 이후 대부분이 작전을 끝내고 철수하였으며, 보급로가 끊긴 트럭 제도는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고립된 상태로 남았다.
4 결과
트럭 제도가 공습당하자, 대본영은 마셜 군도 등 중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버리기로 결정하였으며, 이후 이들 섬에는 보급 및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후에 미군이 상륙작전을 펼치는데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트럭 제도의 공습으로 일본군은 200여 기가 넘는 항공기를 잃었으며,순양함 3척,구축함 4척,수송선 37척 총 22만톤이 2일만에 격침당하는 피해를 보았으며 격침된 수송선 중엔 방어를 증강하기 위해 내려오던 일본군 52사단 병력도 있었는데 9천명이 있던 이 선단의 수송병력중 7천명이 해저에 수장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
이 공격에 경악한 일본 해군은 라바울에 있던 항공대를 트럭으로 급히 모았지만 이들 또한 2개월후 다시 찾아온 미군의 공격으로 손실된다.
또한 라바울에 있던 항공대의 철수로 인하여 항공 엄호가 불가능해진 관계로 인하여 라바울에서 이뤄지던 수상함을 통한 수송 임무 또한 2월 20일에 유즈키와 미나즈키가 가부부 지역에 대한 수송을 끝으로 막을 내렸으며 이들 구축함이 팔라우로 돌아가면서 이후 라바울에 구축함 이상의 일본해군의 수상함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트럭 제도에서의 성공은 라바울의 무력화를 가져옴과 동시에 미군 고속항모전단의 대규모 공격의 시작이었다. 트럭 제도의 공습을 마친 미군은 이후 4월말까지 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캐롤라인 제도,홀렌디어를 공격하였고 트럭을 다시 공격해 확인사살하였다. 같은시기 인도양에 파견된 사라토가 또한 인도네시아 지역을 공격하면서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 전쟁은 일본 제국의 철저한 몰락으로 이어졌다.- ↑ 미국 항공모함의 함재기에게 공격을 받는 일본군 수송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