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작전

일본어 : 南方作戦(なんぽうさくせん)

1941년 말~ 1942년 중엽에 걸친 일본군동남아시아 점령전.

승리의 과실이 우리의 입안으로 너무나 빨리 들어오고 있소.

-히로히토 천황, 1942년 그의 생일날에

일본 대본영이 남방작전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생각건대 하루 아침의 일이 아니다. …(중략)… 크게 보아 양원한 국시(國是)로 고려해야 할 바 였기 때문이다. - 『청일전사』 제16편 제72장 「남방작전에 관한 대본영의 결심 및 그 병력」 제2초안 [1]

1 배경

일본군의 리즈 시절
전반적인 배경은 진주만 공습의 원인과 일맥상통한다. 중일전쟁으로 인한 계속되는 중국 침략으로 물자난은 가중되었는데 ABCD 포위망으로 전쟁에 필수적인 전략자원인 석유 수급이 어려워진 일본으로서는 석유, 고무와 같은 핵심 전략자원 확보를 위해 서구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를 기필코 획득해야 했다. 사실 진주만 공습은 남방작전을 위한 과정에 불과했지 목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목적인 남방작전보다 과정인 진주만 공습이 더 중요시된 이유는 일본의 동남아 점령을 막을 유일한 군사적 위협이 미 태평양 함대뿐이었다는 데에 기인했다. 1941년 동남아의 유럽세력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인도차이나 반도프랑스 식민정부는 프랑스 침공으로 본국 정부가 독일에 항복한 뒤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주를 막을 수가 없었고, 비시 프랑스는 결국 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어 인도차이나 전역이 명목만 프랑스령인 사실상 일본령이 되어버렸다. 네덜란드는 본토가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고, 버마말레이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힘겹게 본토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 세력과 싸우는 중이었다. 미국의 필리핀 주둔군이 가장 큰 난관이었으나 태평양 함대만 격파한다면 제해권 없는 미군이 필리핀을 방어해내긴 어려웠다. 동티모르포르투갈 세력은 중립국으로써 무기나 팔며 전쟁을 관람하고 있고 본토가 아예 점령당한 프랑스나 네덜란드보다는 낫긴 하지만 말할 필요조차 없고….

어쨌든 일본으로서는 어떻게든 동남아시아 전역을 확보해서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키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일본은 유럽전쟁에 휩쓸린 열강국가들이 프랑스처럼 식민지를 포기할 것이라 기대했고,[2] 아울러 동남아시아를 모조리 장악하면 고립된 중국이 알아서 GG칠 것이라 생각했다. 대본영은 진주만 공습이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를 모조리 석권하는 치밀한 전략계획과 타임 테이블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2 문제점

2.1 일본군

사실 남방작전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진주만 공습이 성공해야 한다는 가장 큰 전제가 무너지면 모든 작전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일본으로선 다행히도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여 첫 고비는 넘겼지만 이제부턴 그보다 더 큰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장, 일본이 점령해야 할 지역이 너무 많았다. 영국의 최전선기지인 홍콩, 영국 동양함대의 기지인 싱가포르, 미국의 서태평양 주요 기지들인 필리핀, , 웨이크 섬, 동남아 최대 석유산지인 보르네오, 여기에 주요 항로를 장악하려면 자바섬과 수마트라섬, 그리고 테르나테섬 등등…. 동남아 유일의 독립국인 태국이 어느 쪽에 붙을지도 미지수였으며, 태국과 인도차이나를 방위하기 위해 버마까지 장악해야 했다.

안 그래도 이미 중국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전쟁 중이었던 일본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 짧게 잡으면 반년 정도만에 이 광대한 지역을 모조리 점령한다는 건 아무리 연합군이 약체화되어 있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홍콩의 영국군만 2만,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만 10만, 필리핀에도 약 15만에서 20만이라는 병력이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제외하더라도 전함 2척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 동양함대가 있었다.

다음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육상병력에 큰 한계가 있었다. 이미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에 100만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한 상태였고, 광활한 중국의 영토 덕분에 전투에서는 승리하고 있었지만 점령지역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현지에서 계속 병력충원을 요청하는 상황인지라 따로 남방작전으로 돌릴만한 병력 자체가 크게 모자랐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일본 자체의 해상수송능력 및 보급능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그나마 일본 육군이 남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병력보다 더 적은 병력만 수송 및 보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단 대본영의 추산으로도 전투병력은 최대 12개 사단정도만 가능하다는 보고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나마 일본 해군은 대부분의 병력과 장비를 동원할 수 있으나, 워낙 작전지역이 넓고 일본 본토등을 수비해야 할 이유도 있으므로 실제 각각의 작전지역에 투입되는 함선은 그렇게 많지 않거나 동원가능기간이 심하게 짧았다.

즉, 일본군은 적은 병력을 가지고 최대한 신속하게 각지에 분산된 연합군을 각개격파하면서 주요 전략거점들을 하나하나 빠르게 점령해 나가야 했다. 때문에 얼마 안되는 일본군 내 소수의 상식인들은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연합군이 다 바보인 줄 아나?와 같은 말을 내뱉으며 일본의 미래를 염려했다.

2.2 연합군

사실 연합군도 제대로 된 준비가 전혀 없었다. 대대적인 침공은 명백했으나 그것이 언제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이뤄질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나마 홍콩이나 필리핀이 최우선 공격목표일 거라고 생각했고 이들 지역에서의 방위전이 준비되었을 뿐이었다.

일단, 연합군은 총병력 자체는 많았으나 넓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산개된 총병력은 의미가 없었다. 넓디 넓은 동남아시아는 공격하는 일본군보다도 연합군에게 더 큰 장애였다. 거기다 대부분이 섬으로 이루어진 동남아시아 지리 상황에서 병력의 재배치도 어려웠고, 그나마 육지로 이어진 지역들도 정글 덕분에 도로나 철도의 부설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병력 재배치가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여기에 더해서 병력의 질도 좋지 않았다. 일단 장비가 구식인데다가 태부족인것은 둘째치고라도, 병력 자체의 훈련상황도 별로 좋지 않았다. 일례로 필리핀에 배치된 군대는 최대 20만이라고 하지만, 미군 2만과 필리핀 스카우트 사단등의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유사시에 소집되는 필리핀 현지민병대로 훈련, 장비, 보급등 모든 면에서 차마 군대라고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필리핀군중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스카우트 사단도 소형 대전차포 몇 문에 소총도 제대로 완비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미군의 경우도 숫자가 부족한데다가 드럼 요새같은 방어시설물과 요새를 제외하면 기본장비외에는 항공력 약간에 경전차 수십대, 기본적인 사단포병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필리핀의 연합군이 일본군과 싸우려는 의지가 가장 높았다는 것이다. 영국이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 배치한 군대의 경우 전차가 단 1대도 배치되지 않았으며, 식민지인 인도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전체의 절반에 육박할 지경이었고, 해당 부대는 정글전 훈련따위는 못받은 데다가 사기까지 팍 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현지 원주민으로 구성된 민병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아직 일본군의 실상을 알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현지 원주민 민병대는 네덜란드를 위해 싸울 의지 자체가 거의 없었다. 이래서는 숫자가 아무리 많아봤자 실제 전투력은 바닥으로 치닫는다.

이런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해권과 제공권이었다. 그런데 미국 태평양 함대는 진주만에 있었을 뿐더러, 그마저 개전 당일에 일본군에게 실컷 맞았고, 네덜란드의 함대는 애당초 보잘 것 없었다. 남은 건 영국 동양함대였는데,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비록 최신예 전함이긴 해도 그게 끝이였다. 동행한 리펄스는 1차대전형 구식 순양전함이었고, 이들을 뒷받침해줄 다른 주력함이나 지원함 세력이 크게 부족했다. 이 시기 영국 해군 주력함대는 다 지중해와 북해에서 독일-이탈리아와 대치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털러 갔다 하더라도 나머지 전력만으로도 이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공권으로 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미국의 경우 필리핀에 P-40 워호크B-17을 배치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두 기종 모두 최종개량형이 아니라 문제점 많은 초기형인데다가 파일럿의 질도 떨어지고, 당장 침공해오는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의 항공세력보다 크게 열세했다. 영국군의 가용 전투기 대부분은 본토와 북아프리카에 있었고, 동남아에 있는건 미군이 공여한 구식 F2A 버팔로 뿐이었으며 수량도 충분치 못했다. 더군다나 항공모함이 1척도 없어 모든 항공 지원은 지상기지의 지원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해당 지역 내의 연합군은 사용 언어부터 달랐으며, 서로 협동 전투나 훈련을 단 1차례도 수행한 적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기와 탄약 등이 호환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해당 지역 내에 있는 연합군의 함대를 모두 모아서 혼성함대를 만들었는데, 통상적인 항해명령도 내리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당장 통역을 담당할 사람도 부족해서 기함에 있는 네덜란드 제독이 명령을 내리면 이걸 영국 순양함으로 통역해서 전달하고, 영국 순양함은 미국 구축함에게 상세하게 설명하는 식으로[3] 명령전달체계가 길게 늘어지는 상황이었으니...

3 전역

3.1 서태평양 도서

개전 초 일본군은 자국령이었던 북마리아나 제도, 일본명 남양 군도와 팔라우를 중심으로 주변의 미국령 도서들을 빠르게 제압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을 제외하면 최서단의 미국령이었던 섬에는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괌 섬에는 미 해병대 1개 중대와 아주 약간의 소형함정만이 있었기에 단숨에 수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제1차 괌 전투)

반면, 동시에 공격을 가한 웨이크 섬에서는 미 해병대의 거센 저항을 받아 1차 공격대는 몇 문 안되는 5인치 해안포구축함 2척이 격침당하고 3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는데도 미군 전사자가 0명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내며 말 그대로 탈탈탈 털렸고, 제6전대의 중순양함 4척과 진주만 공습에서 돌아오는 제국 연합함대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12월 23일에야 간신히 점령했고 그 와중에도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자세한 것은 웨이크 섬 전투 참조. 사실 이 전투는 일본이 남방작전 과정에서 치른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3.2 홍콩

개전이 되기 전에 이미 홍콩일본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된 상황이었다. 일본군중일전쟁의 와중에 이미 광동성 해안지방을 점령했고, 1940년에 구룡 반도와 접한 중국 영토를 모조리 접수하여 영국군과 대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마저 일본군에 넘어가고, 동양함대도 개전 전에 이미 싱가포르로 기지를 옮긴 상태였지만 영국으로선 중국 진출의 요지인 홍콩을 순순히 포기할 수 없었다. 영국군은 주룽반도 북단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13,000여 명의 홍콩 수비대를 편성하였다. 홍콩의 방어에는 또한 캐나다 군 2개대대가 파견되었는데 이는 전임 홍콩 방어 사령관이 캐나다의 육군 및 해군참모총장과의 협의를 통하여 이뤄진 일이였으며 캐나다군이 태평양 전선에 참여한 몇 안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일본군도 홍콩과 인접한 이후로 언제든지 홍콩을 공략할 수 있도록 23군을 편성하고,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성부대로 제1포병사령부를 신설하여 언제든지 홍콩을 공격할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12월 8일, 일본기에 의해 카이탁 비행장이 폭격받는 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홍콩 공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새화된 주룽반도 방어선 돌파는 시일을 들여 차근차근 하기로 했었는데, 어느 똘기충만(…)한 연대에 의해 스케쥴이 크게 앞당겨져 버렸다. 공격을 맡은 38사단 중에서도 후미를 맡은 228연대가 전공에 눈이 멀어 공격을 감행, 원래 다른 연대가 맡기로 한 영국군 방어고지 하나를 와카바야시 도이치라는 장교가 이끄는 1개 중대의 돌격으로 공격 당일에 함락시켜 버렸다.(…) 노발대발한 사단장이 당장 후퇴하라고 지시했으나 연대장은 이를 씹고 추가 공격을 가해 다른 고지까지 함락시켰다.[4]

이를 본 다른 연대들도 자극받아 계획보다 앞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격노한 사단 사령부와는 별개로 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전면공세를 하자고 결론, 포병을 동반하여 방어선을 공략하여 개전 3일만인 11일에 방어선은 완전 붕괴되어 현지인 수비대와 영국 해군수병 몇 만명만이 있었던 영국군은 홍콩 섬으로 후퇴했고, 13일에는 주룽 반도가 완전히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일본군은 주룽반도만 점령하면 홍콩 공략이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홍콩 총독과 수비대 사령관은 홍콩 섬에서 끝까지 싸워보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주룽 반도에서 홍콩으로 이어지는 급수를 끊고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영국 총독은 항복을 거부, 일본군은 도해작전을 계획해야 했다. 홍콩에는 최소 반 년치의 식량과 탄약, 유류가 준비되어 있어서 상륙만 막아낸다면 어떻게든 방어가 가능하다고 수비대는 생각했다. 거기에 수비대 사령관은, 광동성 전역에서 반격을 진행 중이며 길어야 몇 달 이내로 홍콩 주변의 일본군을 뒤치기할 수 있다는 국민당군 사령관의 말을 믿고 있었다. 사실 실제로 중국군은 홍콩의 구원을 위해 9전구의 부대들을 남하시키긴 하였다. 그렇지만 중일전쟁 기간동안 일본군은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화학탄을 사용했기에 중국군의 구원 시도 자체는 실패로 끝났을 확률이 매우 높다.

결국 12월 18~19일 이틀에 걸쳐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도해를 개시하여 상륙에 성공했다. 상륙직후 일본군의 거센 공세에 동부여단이 스텐리 반도로 스스로 철수하면서 일본군은 병력을 자유롭게 운용할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군의 공세가 서부여단이 담당하던 황니천 계곡으로 집중되면서 19일엔 서부여단장이던 로슨 준장이 전사하고 황니천 계곡이 함락되었지만 고속정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일본군의 공세를 간신히 저지하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대담 저수지의 급수시설을 발견하고 급수를 끊어 홍콩은 바로 식수난에 빠졌다.

잔존 수비대 및 영국 해군 수병들 등 영국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악착같이 공격해오며 거점 하나하나를 빼앗기는데다 식수난까지 겹쳐 더 이상의 저항이 어려워지자 결국 25일 크리스마스날 페닌술라 호텔에서 일본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홍콩은 점령 일본군의 야만적인 통치로 말 그대로 조리돌림 당했다. 페닌술라 호텔은 토야 호텔로 이름이 바뀌었고,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거리 이름이나 기타 영어 이름의 거리들은 모두 일본어로 개명되었으며 학교 및 공공장소에서는 영어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 그리고 조선에서처럼 신사 참배를 강요해 빅토리아 피크에 홍콩신사가 들어서기도 했다(나중에 홍콩이 해방된 후 성난 군중에 의해 박살난다.). 홍콩에 거류하게 된 일본인은 과거 영국인의 자리를 빼앗아 1등 국민이 되고 영국인중국인 계통의 홍콩사람들은 졸지에 2류, 3류로 굴러떨어졌다. 아무리 식민지 초기 영국인들이 중국인을 2등 국민 취급해서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 등의 간판이 여러 곳에 있었다지만 아예 이성을 잃은 일본인보다는 나았었다. 홍콩 경찰도 해체되어 일본군 헌병이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서슬 퍼런 공포 정치를 펼쳤다. 일본군은 홍콩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싱가포르가 점령당하자 일본은 똑같은 짓을 했다. 그래서 홍콩은 우리 생각보다 반일 감정이 매우 강하다.

3.3 인도차이나

일제의 침략으로 별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3.4 필리핀

당신은 이제 운이 다했소... 당신의 보급도 이제 반으로 줄어들었소...그러나 당신의 명예와 명망은 높이 사 질 것이오.

- 홈마 중장, 필리핀 전투 당시 맥아더 장군에게

역시 개전과 동시에 필리핀도 공격을 받았다. 사실 필리핀의 미 극동군 항공세력은 개전이 되면 즉시 대만의 일본군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선제 공격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공격에 나서기도 전에 일본군의 맹공을 받고 핵심 항공전력 상당수를 상실해야 했다. 항공기 자체 숫자도 적었을 뿐더러, 일본군의 제로센Ki-43 하야부사를 상대하기에는 P-40 워호크는 역부족이었고, 무엇보다 파일럿의 기량면에서도 아직 미군은 일본군보다 많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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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항공전력으로 미군 항공세력을 괴멸시킨 일본군은 바로 필리핀의 핵심이라 할 만한 루손 섬 상륙을 개시했다. 대만에서 출병한 일본 제14군은 루손섬 북부 아파리 등지로 상륙했고, 12일에는 팔라우에서 출발한 16사단이 방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루손섬 남부 레가스피에 상륙, 북상하기 시작했다. 상륙 단 5일만인 13일에 일본군은 이미 클라크필드까지 진격했고, 남북으로 협격당할 위기에 몰린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전쟁 전에 수립된 계획대로 방어 및 지연전으로 전환하여 본국으로부터의 증원을 기다리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이에 미군은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오픈시티, 즉 무저항도시로 선포한 뒤 포기하고 전 병력을 바탄 반도로 후퇴시켜 최후의 방어전을 개시했다.

1942년 1월 7일부터 시작된 바탄 전투에서 미군은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공격에 소극적이고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유럽식 사고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14군 사령관 혼마 중장이 해임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관동군으로부터 병력과 화기를 증원받은 뒤 대대적인 해상/항공지원까지 받아가며 4월 3일 최후공세를 개시했다. 안 그래도 좁은 바탄 반도에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몰려있던 미군은 보급문제로 허덕이고 있었고, 화력과 병력의 열세 속에 4월 9일 일본군에 항복했다. 맥아더는 바탄 전투 와중에 루즈벨트의 철수 명령을 받고 호주로 탈출했다.

그러나 웨인라이트 중장이 지휘하는 마지막 수비대가 마닐라 만을 감제하는 코레히도르 요새에 은거하여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일본군의 거센 공격 끝에 5월 7일 웨인라이트 중장이 항복함으로서 필리핀 전역은 종결되었다. 자세한 것은 드럼 요새를 참고.

3.5 태국-말레이

마찬가지로 개전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침공했다. 그러나 태국은 이미 개전 전부터 일본으로부터 인도차이나 일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참전을 약속받은 상태였고, 국경수비대와 일본군의 산발적 교전 이후 양측간 교전행위는 종식되고, 일본군의 태국 영토 진주 및 통행권, 군사기지 이용의 권리가 주어졌다.

12월 10일, 영국 동양함대가 말레이 해전으로 전멸당하는 것으로 일본군의 제해권이 확립되었고, 일본군은 육군을 말레이 반도 동해안 곳곳으로 상륙시키며 영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주력부대는 태국 국경에서부터 남하하여 서해안 도로를 따라 남하, 12월 30일에 콸라룸푸르를 점령하고 1월 하순경에 싱가포르를 포위하는데 성공, 끝내 야마시타 토모유키가 영국군 사령관 퍼시벌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더 자세한 것은 싱가포르 전투를 참고.

3.6 동인도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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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수마트라 섬에서 시작해 동쪽의 뉴기니 섬으로 끝나는 남방작전 최대의 하이라이트지만, 워낙 수비하는 네덜란드군의 병력이 적어 큰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일본군에 의한 일방적인 공격과 점령의 연속이었다.

동인도제도 최초의 공격은 12월 15일, 브루나이 상륙으로 시작되었다. 영국령이었던 사와라크(북보르네오)에 가해진 일본군의 상륙은 당연히 유전지대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방어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어 북보르네오의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목표를 점령했다. 24일에는 쿠칭이 함락되었고, 1월 11일에는 네덜란드령 남보르네오의 타라칸에도 일본군이 상륙했다. 이후 24일에 발릭파판이, 2월 10일에 반자르마신이 함락되면서 보르네오 섬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발릭파판 앞에서 미군 구축함전대가 일본 수송함대를 기습하는데 성공, 수송함 3척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하여 개전 후 첫 승전으로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미:마카사르 해협 해전/일:발릭파판 해전) 그런데 이때 격침된 수송선들은 빈 배였다.(…)

보르네오 섬 동쪽의 셀레베스 섬에도 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섬 북단 메나도에 가해진 공격은 상륙전이 아닌 일본군 공수부대에 의한 공중강습으로 태평양 전역 최초의 공수작전이었다.## 1월 11일, 해군육전대 공수부대에 의해 메나도 비행장에 일본군 공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네덜란드군 수비대는 거세게 저항했으나 공수부대에 의한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덕분에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다음날 2차 공수작전, 그리고 첫 공수작전과 동시에 개시된 상륙작전 등으로 일본군의 증원이 연거푸 오자 결국 패퇴, 항복하고 말았다.

어쨌든 메나도를 무사히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발판으로 2월에 티모르 섬과 발리 섬을 공격했다. 티모르 섬에서는 다시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이 와중에 일본은 중립국이었던 포르투갈령 동티모르를 무단으로 침공, 영토사용권을 강제로 얻어냈다. 티모르 침공에 대한 연합국의 공격을 우려한 대본영은 2월 28일, 호주 북단의 포트 다윈을 연합함대를 동원해 폭격하여 남부의 위협을 제거했다.

한편, 말레이 해전 승리로 제해권을 쥔 일본군은 수마트라 섬 최대의 유전지대인 팔렘방을 공격했다. 2월 14일, 일본 육군 공수부대인 제1정진단이 우선 투입되어 비행장과 유전 지대를 공격했다. 이를 막는 방어군은 3,000여 명인데 그중 절반이 현지인 부대로 제대로 된 전력이라 하기에 어려웠고, 나머지 병력 중 1천여 명은 급파된 호주군 병력이라 현지 지리를 잘 몰랐다. 결국 일본군은 이틀에 걸친 공수작전으로 비행장을 뒤이은 육군 상륙부대의 지원으로 유전과 정유시설까지 확보, 동남아 최대의 유전 및 정유시설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메나도 공수전에 투입된 병력은 해군육전대 요코스카지대, 팔렘방 공수전에 투입된 병력은 육군 제1정진단으로 각각 소속이 다른데 이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에 기인한 병림픽(…)의 결과로 서로 자존심싸움 때문에 각각의 공수부대를 운용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남은 것은 자바 섬뿐이었다. 자바 섬 상륙을 막기 위해 ABDA 연합함대가 출격, 2월 27일 일본군 수송선단을 포착하여 공격했으나 일본군 함대가 우루루 몰려오면서 오히려 역관광, 압도적인 전력차 속에서 분전했으나 네덜란드 경순양함 데 로이테르와 자바, 네덜란드 구축함 코르테놀,영국 구축함 엘렉트라와 주피터가 격침당했고 데 로이테르에 승선하고 있던 연합함대 사령관 카렐 도르만이 전사했다.(제1차 자바 해전) 뒤이어 2월 28일에서 3월 1일에 걸쳐 후퇴하려던 연합군 함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미국 중순양함 휴스턴, 오스트레일리아 경순양함 퍼스,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첸이 격침당했다.(순다 해협 해전) 3월 1일 오후, 살아남은 잔존함정에 대한 공격까지 이루어져 영국군 중순양함 엑스터와 구축함 엔카운터가 격침되었고 후퇴하던 미국 구축함 포프도 결국 격침당했다.(제2차 자바 해전) 이를 모두 합쳐서 자바 해전이라고 통칭한다.

이렇게 연합군 함대가 완전히 괴멸되는 틈을 타 일본군은 2월 27일과 28일에 걸쳐 자바 섬의 동서 양쪽에 상륙했다. 동쪽에 48사단, 서쪽에 2사단, 그리고 각 사단을 지원하는 지원부대까지 대대적으로 상륙시킨 일본군은 말레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전거부대와 97식 전차를 투입해 신속하게 진격했다. 물론 이 시점까지 자바 섬에는 연합군이 10만여명 정도 남은 상태였으나, 병력 중 절반이 네덜란드를 위해서는 별로 싸울 생각이 없는 인도네시아 현지주민 민병대였고, 사실상 저항능력과 의지를 상실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지상에서의 저항조차 제대로 못했다. 결국 최후의 거점인 반둥에 집중포화를 얻어맞은 후인 3월 8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일본군의 공격은 뉴기니 접수로 이어졌고, 뉴기니 침공은 1942년 이후 남태평양 전역의 원인이 된다.

3.7 버마

태국이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맺게 되면서 버마 식민지도 일본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문제는 10만에 달하는 영국군 병력이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포로로 잡히고 해상세력도 괴멸되어 버마 식민지를 방위할 제대로 된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원래 일본군은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던 버마를 공격할 계획은 없었지만 필리핀, 말레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뉴기니 등이 생각보다 너무도 쉽게 점령되자 크게 고무되어 1941년 12월 버마 공격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버마에는 1만 4천명의 병력이 방위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식민지군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부대들이었다. 영국은 버마보다는 인도를 사수하기로 방침을 결정하고 버마 방위를 돕겠다는 장제스의 제안도 거부했다. 그러나 막상 버마를 지킬 수 없다는 버마 총독 레지날드 스미드의 보고에 장제스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버마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어떠한 협조도 거부했다. 1942년 1월 일본군의 버마 공세가 시작되자 영국에서 급파된 사령관 알렉산더 해럴드 장군은 버마 사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모든 물자와 시설을 파괴하며 버마 북부와 인도로 후퇴했다. 3월에 버마의 수도 랑군이 함락되었고 주요 거점들이 모두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중국원정군을 지휘하고 있던 조지프 스틸웰 장군은 일본군의 전투력을 얕잡아보고 반격만이 효과적인 버마 방어라고 주장했다. 1942년 3월 일본군이 만달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스틸웰은 휘하 2개 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영국은 중국군을 전혀 돕지 않고 일방적으로 철수해버렸고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결국 스틸웰은 4일만에 패배를 인정했지만 모든 책임을 중국군의 기량에게 돌렸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쑨리런이 지휘하는 중국군 38사단이었다. 중국군 38사단은 포위된 영국군과 민간인들을 구출했고 영국군와 중국군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중국군 38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200사단장 다이안란이 전사했으며 가뜩이나 부족한 장비들도 잃어버렸다. 일본군은 버마를 장악하고 중국-버마 국경을 차단하여 윈난 성을 위협하면서 버마 루트를 차단했다. 장제스는 급히 버마 국경에 3개 사단을 파견하였으나 일본군은 더 이상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4 결과

1942년 5월,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완전히 지배하는 데 성공한다. 태국은 일본의 군사동맹에 가담했고, 나머지 유럽 열강의 식민지들은 일본의 손에 떨어졌으며, 호주와 인도양에서의 위협도 연합함대의 공격으로 제거되었다. 불과 반년만에, 그 넓디 넓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큰 피해 없이 완전히 제패한 것이다. 아무리 연합군의 사정이 열악하다 하더라도 남방작전 기간 내내 일본군이 보여준 모습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급하게 먹은 음식은 체하는 법이라고, 일본은 넓디 넓은 점령지를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할애해야 했으며 열악한 보급역량 상당수도 동남아시아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일본군 특유의 막장 짓거리 + 자원수탈로 인해, 유럽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준 현지인들이 일본을 적대시하고 과거의 지배자들과 협력하여 반일투쟁을 벌이게 되어 투입병력은 더 늘어만 갔다. 동맹국인 나치 독일도 동유럽에서 똑같은 짓을 하더니 과연 유유상종

그래도 일본은 남방작전을 통해 고대하던 석유, 고무 등의 전략자원 수급이 가능해지고 일시적이긴 하지만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1942년 5월은 일본 제국의 최대전성기였으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아무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이 희망하는 협상 대신 전쟁 지속을 결의했고, 일본은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5 주요 인물

  1. 나카츠카 아키라, 『경복궁을 점령하라』에서 재인용함. 태평양전쟁은 물론이고 러일전쟁 전인 청일전쟁 시기의 인식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2. 그런데 사실 비시 프랑스조차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상황이 안 좋으니 일본군의 진주를 허용했을 뿐이지 전쟁이 끝나면 독일을 등에 업고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을 도로 몰아내겠다는 것이 비시 정부의 복안이었다. 실제로 비시 프랑스가 임명한 인도차이나 총독은 비시 프랑스가 망한 1945년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허수아비긴 했지만….
  3. 영국과 미국은 영어를 사용하지만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는 서로간에 어휘의 차이가 약간 있고 군사용어상의 차이도 좀 있어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4. 개전 초기 이런 돌격에 의한 방어선 돌파의 신화는 일본군 육군에 근성론을 더욱 더 불어넣게 되었으나 현지군 중심의 동남아 식민지군에게나 우연히 통했을 뿐이었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부터 일본군 돌격 신화는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며 소멸하기 시작한다. 실제 주룽반도 방어선 돌파의 주역인 와카바야시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같은 짓을 반복하다 전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