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4~1916. 미국의 여성사업가이자 더불어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구두쇠.
1 일생
1834년 11월 21일, 미국 매사츄세츠주, 뉴베드포드에서 당시 엄청난 부자인 고래잡이 선주의 딸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 이름은 헨리에타 헤티 라빈슨으로 집안은 유태인 집안이었다. 부모에서 조부모까지 매우 엄격하게 아끼며 재산을 모아왔던 터에 어린 그녀도 이런 걸 보고 배웠다. 두 살 때부터 어머니 건강이 나빠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8살이 되자 헤티는 심부름으로 받은 용돈 5센트를 모아 은행에 저축하기 시작했고, 13살에는 집안 사업 가계부정리를 맡았다. 외할아버지의 응석으로 자라난 그녀는 고집이 셌다. 10살에 초등학교를 나오고 15살에 보스턴에 있는 사립학교에 재학했으나 가까운 친구가 없었고 그녀가 키운 개들이 평생 가장 가까웠는데 이때부터 지독한 구두쇠로 이름이 자자했다고 한다.
21살에 그녀는 9만 달러라는 거금을 유산으로 상속받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 다른 형제,자매,친척들과 원수지간이 되었는데 750만 달러라는 막대한 재산에서 겨우 9만 달러밖에 못 받았다고 그녀가 반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55년 당시 9만 달러라는 재산은 상당한 돈이었기에 그녀의 불만은 먹히지 않았고 집안 사람들과 죽을때까지 원수로 지내게 된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터지자 채권에 투자하고 뉴욕 월가로 진출하며 돈을 계속 늘려갔다. 그러던 그녀에게 한 숙모가 2백만 달러 유산을 자기에게 준다고 약속했다가 자선단체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나자 유산찾기 소송을 제기했다. 5년간 소송비 15만 달러를 들여 결국 50만 달러를 받아냈다. 하지만 또 다른 숙모 엘리자베스가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유언장까지 조작하여 숙모가 남긴 3백만 달러 유산을 가로채려다가 유언장 조작이 걸려서 되려 벌금형을 한가득 당했다.자세한 건 밑에 서술.
그녀는 젊은 남자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자기의 재산을 탐내는 것으로 해석하여 주의경계를 하다가 30세 초에 에드워드 그린을 만나 결혼했다. 에드워드 그린은 20년간 동양과 무역으로 재산을 모으고 있었기에 그녀는 마음에 들어했지만 결국 돈이 중요했던 헤티는 결혼계약서를 작성하여 자기 재산을 철저히 보호하는 조치를 취한 후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도 거액이지만 19세기에는 더 엄청난 거액인 무려 3140만 달러씩이나 가지고 있음에도 사고로 무릎뼈가 부러진 아들 제임스의 치료비 150달러를 아끼고자 무료 병원만 찾다가 그런 병원을 찾지못하자 집에서 대충 고쳤다.하지만 열흘 가까이 놔둔 다리가 썩어들어가 파상풍이 심해진 끝에 결국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하는 일로 세계 최고 구두쇠란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일생을 보면 책 몇권이 나올법할 정도인데 최근에는 묻지마 돈만 벌면 다야~ 그녀의 행적을 찬양하는 책자까지도 나왔으나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왜 그런가 하면 벌여놓은 짓이 범죄도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헤티 그린 실제 모습. 살아생전에도 늘 검은색 옷만 입었는데 세탁비를 아끼고자 입었고 아이들에게도 검은 옷만 입혔다. 이러다보니 동네 아이들은 늘 검은 옷만 입는 마녀라고 그녀를 보면 겁먹고 달아나기 일쑤였고 아들 제임스는 커서 검은 옷만은 잘 입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릴적에 검은 옷만 입다보니 아이들에게 마녀 집안이라 놀림당했던 아픔이 있었다고 치를 떨었다.
종교는 일절 거부감을 보였고 평생 기부도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돈은 9만 달러였는데 그걸 50여년에 걸쳐 1000배 늘렸다는 점은 엄청나다.
그러나 그녀가 돈을 벌면서 벌인 이야기들을 대충만 소개해도 엄청났다...
1.1 전설이 된 구두쇠 짓
- 세금 안 내려고 50여년을 집도 없이 싸구려 호텔에 그것도 억지쓰면서 숙박비 덜 내면서 여러 곳을 오고가며 살았고, 재고로 남은 식빵 조각들이나 항상 찬 오트밀 죽만 먹었다. 하루에 밥먹는데 쓰던 돈은 늘 15센트(현재가치 약 14달러)였다고 한다.
- 우표 값으로 2센트를 더 받았다고 가게 앞에서 밤을 새가면서 기다렸다.
- 결혼 당시에도 남편에게 자기 재산은 별도로 관리하며 남편이 파산하면 이혼한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고 결국 남편이 사업실패로 파산하자 주저않고 이혼했다.[1] 그러나 아이들만 그녀가 맡았는데 아들 제임스가 다릴 다치자 150달러 치료비 아깝다고 결국 아들 다리를 자르게 했다. 더 무서운 건 아들 한 다리를 잃고도 그 목발 비용까지 싸게 살려고 별짓 다하여 제임스는 어머니를 혐오했고 평생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 에드워드가 1902년 병으로 다 죽게될때 맡아서 병수발도 맡긴 했다. 물론 병원은 안 갔다고...
- 딸인 실비아만 해도 자기 재산 노리고 청혼했다고 여겨서 결혼 조건으로 딸아이 상속권 안 받는 이들에게 결혼 허락했다. 그래도 사위에게 5만 달러를 줬다.
- 그녀는 부스러진 쿠키를 포장 없이 떨이로 싸게 샀다가 빈 상자를 5센트에 되팔고 고양이가 먹을 값싼 우유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푸줏간에서 쇠고기 뼈를 얻어다가 개밥을 만들어줬다.
- 고리대금업도 했는데 고리대금의 융자를 주기 전에 차용자들 신원조사를 철두철미 조사했고 원금 및 이자 납부 날짜를 정확히 기록했다. 한번은 200달러의 빚을 받기 위해 수천 마일을 추적했다.
- 돈을 아끼느라고 겨울에도 더운물을 쓰지 않고 난방 없이 살았다고 이웃들은 증언했다. 추운 겨울날에는 바깥에 버려진 헌 옷들을 모아다가 그걸로 덮어서 추위를 견뎠다고 한다.
- 숙모이던 엘리자베스 여사가 죽자 그녀에게 있던 재산 300만 달러(참고로 당시! 헤티 그린은 4000만 달러가 넘는 재산이 있었음!)를 차지하고자 가짜 유언장을 쓰고 진짜 유언장을 빼돌렸다가 걸렸다. 숙모네 식구들에게 쌍욕 난타당하면서 연방법원에게 10만 달러 벌금형 판결을 당하자 안내려고 발악했지만 안 내면 갈수록 벌금이 올라간다는 말에 주변 사람들은 그녀는 자기 팔다리가 잘려지는 듯한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결국은 냈다고 회고했다.
- 송사에 걸리자 고소자들을 피하여 가족과 함께 영국에서 살면서도 계속 미국 채권을 사들이고 투자하면서 대박을 거뒀다. 당연하지만 영국에서도 짠순이 짓은 그대로였다.
- 그 밖에 각종 세금 탈세에서부터 주변 인물들 재산 차지하고자 여러 위법행위를 시도한 덕분에 월 가 마녀(Witch of the Wall Street)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 저러고도 당시에는 82살 장수를 누렸다. 건강비결에 대하여 질문을 받으면 그녀는 양파를 통째로 불에 구워 먹을 뿐이라고 대답했다고. 그녀가 살아있을때도 기자들이 붙어서 기사거리로 잘 다뤘는데 그러다보니 그녀가 잘가는 시장이나 여러 가게도 기자들이 찾아가 그녀에 대하여 질문하면 다들 터무니없이 값을 깎는 여자라고 치를 떨었다고 한다.
2 최후
이러니 사업상 교류하는 사람 빼곤 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돈빌리고자 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
당연하게도 자식들은 크자 죄다 독립하여 어미를 무시하였고 그녀에겐 위안이라면 집에서 홀로 온갖 주식 관련 문서를 보면서 돈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벗은 오로지 개 뿐이었다. 하지만 위에 나오듯이 그 개들에게도 푸줏간에서 내다버린 뼈만 먹였을 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는 탈장으로 고생했으나 수술비 150달러를 아끼기 위해 수술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수차례 중풍으로 휠체어를 타고 고생하던 끝에 1916년 7월 3일, 우유값을 덜 내고자 도매상인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갑자기 쓰러져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유서조차 쓰지 않았기에 결국 그녀의 엄청난 재산은 두 자식에게 세금만 빼고도 각자 3800만 달러씩 분배되었다. 참고로 그녀가 남긴 재산은 9500만 달러로 1916년 당시 값어치는 현재 액수로 160억~170억 달러 정도인데 원으로 환산하면 무려 17~18조원이 넘는 돈이 된다.
참고로 2007년 포브스지 선정 세계 역사 100대 부호 순위에서 16위까지 차지했으며 20세기 중순까지 1000년동안 여성으로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사업가였다.
거액을 상속받은 아들 제임스는 평생을 사치스럽게 살아갔다. 돈이 넘치는데도 그 돈 때문에 다리를 하나 잃은 아픔을 잊어버리고자 보트, 요트, 고급자동차, 집, 빌딩 등 마구마구 쓰다가 갔음에도 평생 돈이 부족한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적어도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걸 잊지않고 장애인 기부 및 자신처럼 다리가 없어서 의족을 쓰는 사람들을 위한 의족연구기금 및 가난해 의족을 사지 못하는 이들에게 의족을 사서 기부하는 일은 열심이었다고 한다. 딸인 실비아는 겨우 130만 달러 재산을 빼고 나머지 재산을 기부하여 도서관 및 온갖 사회시설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물론 130만 달러로도 당시 충분히 평생을 부족함없이 살 큰 돈이긴 했다.
3 옹호와 비판
그녀에 대하여 옹호하는 주장은 당시에는 여성 경제인, 사업가가 제대로 활약할 수 없던 여성차별 시대라는 걸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해티그린은 남성부호들 보다 많은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지독한 자린고비로 살았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불리한 배경에서도 재산을 저렇게 늘린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지만 범죄도 마다하지 않고 친아들 다리까지 잘라가며 돈을 악랄하게 아낀 점은 도저히 옹호하기 어렵다는 게 대세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사실 아들의 상처는 그 당시에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병이였기에 의사가 치료를 포기했고 결국 발을 자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아이들에게 몇 백달러 씩을 주면서 도와주거나 수많은 돈들을 빈민들을 위해서 꽤나 기부했다는 것도 밝혀져서 무조건 까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옹호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짠돌이 짓은 해티그린의 성장과정에서 문제 때문이라고도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해티 그린은 어릴 적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지독한 컴플렉스가 있었으며 남동생이 사망하자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어떤 사치도 허락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수단방법 안 가리고 돈벌고자 유언장 조작같은 공문서 위조라든지 결국은 범죄를 저질러 가며 돈을 모은 점, 이미 수천만 달러 돈이 있음에도 다른 친척 수백만 달러 재산 다 먹으려고 아주 발악하던 걸 보면 욕먹을 수 밖에 없다.
4 문화에서
엘러리 퀸이 쓴 소설 <할멈이 살고 있는 곳> There was an old woman ."에 나오던 엄청난 구두쇠이지만 신경질적인 요소를 덧붙여 고소를 남발하던 점으로 확 다르다) 여부자인 코넬리아 포트가 바로 헤티 그린이 모델로 쓴 소설이다. 참고로 이 책자는 수수께끼의 038사건이란 유치한 제목을 달고 해문출판사에서 해적 중역판으로 나온 바 있다.- ↑ 그러나 반전이 있는데 사실 남편의 사업은 파산한게 아니었다. 즉, 파산으로 위장한 거다. 왜냐고? 이 인간이 하도 돈돈거려서 진절머리가 나서 파산했다 속이고 이혼한거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되자 헤티 그린은 길길이 날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