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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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忠祠
Hyeonchungsa

1 개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祠堂)이자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 별칭으로 '아산(牙山) 이충무공 유허(李忠武公遺虛)' 라고도 불리지만 실질적으로는 현충사로 잘 알려져 있다.

본래 충청남도 아산군에 속해있던 곳이었으나 1995년 옛 온양시와 아산군이 지금의 아산시로 통합되면서 현재 행정 소재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1598년에 충무공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戰死)하게 되면서 1706년(숙종 32년)에 지방 유생들이 충무공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애민정신을 기리자는 뜻에서 사당을 세울 것을 조선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듬해인 1707년 숙종의 어명하에 지금의 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생가에 충무공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기리고 나타낸다는 뜻에서 '현충(顯忠)' 이라는 이름을 붙여 세워지게 되었고 이후에는 충무공의 공로와 업적을 기리는 성역(聖域)으로 거듭났다. 참고로 현충사라는 현판은 숙종이 직접 내린 것.

참고로 이순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현충사 외에도 전국의 여러 곳에 위치해 있다. 전라 좌수영이 있던 전남 여수시의 충민사, 통제영이 있던 경남 통영 한산도의 충무사 등이 그 예이다. 현충사는 그 중 대표격인 형태.[1]

1.1 흥선대원군의 철폐 명령과 일제(日帝)의 탄압

1865년(고종 2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왕 섭정을 맡았던 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 철폐 명령을 내리게 됨에 따라 현충사도 철폐되어 존폐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일부 유생들이 충무공의 충성심에 대한 모독과 패륜행위를 흥선대원군이 저지르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지만 대원군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원 철폐를 강화함에 따라 현충사는 이를 계기로 역사의 뒤안길로 한때 사라지기도 했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제(日帝)에 의해 모진 탄압을 받기도 했는데 일제임진왜란 때 자신들의 선조들을 죽게 만들고 자기들에게 전쟁에서 쓰라린 참패를 안겨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사무라이들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현충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이로 인해 또 한 번의 수난과 존폐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1932년 동아일보의 주선으로 양심있는 조선 애국자들을 비롯한 전국민이 기부한 성금을 통해서 현충사를 보수하고 복원하여 다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1.2 8.15 광복 이후

1962년에는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다는 유물들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유물전시관' 이 개장되었고 1966년에는 현충사의 경역(敬域)을 확장하여 1967년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본전(本殿)과 충무공이 무과시험을 봤던 시절 지냈었던 가옥과 활터가 개장되기도 했다.

2011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을 기념하여 현충사 안에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이 개장되었다.

2 관리

현재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 관리사무소가 관리 및 운영을 하고 있으며 전국민 무료입장이다. 매주 화요일은 휴관한다.

3 시설

광복 이후에 지은 건물들이라 문화재적 가치는 없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물들이다.

3.1 충무문(忠武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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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본전으로 가는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한옥 모습의 문으로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지시에 따라 세워진 관문이다.

3.2 충의문(忠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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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본전의 정문으로 1932년 현충사 중건 때 세워졌다가 1967년 본전이 확장이전하게 되면서 새로 개축하여 지어진 관문이다.

3.3 홍살문

본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관문.

3.4 본전(本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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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원래는 규모가 작은 사당이었지만 1967년 현충사 성역화에 따라 확장이전하여 신축된 건물로 충무공의 영정도 이 곳에서 모시고 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 명령에 따라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10년 한일병합일제(日帝)가 그들의 철천지 원수이자 사무라이들에게 큰 치욕을 안겨준 원흉인 충무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게 되고 여기에 일본인이 충무공의 묘소와 임야를 관리하게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온 겨레의 모금운동을 통하여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게 되었고 1967년에 옛 본전 위의 자리에 지금의 본전을 신축하여 넓고 웅장한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사당 안에는 충무공의 영정과 조선시대 때 사용했던 영기(令旗)가 보존되어 있다.

참고로 현재 내걸려 있는 한글 현판은 박정희가 쓴 현판으로 예전에 걸려있는 현판은 구(舊) 본전에 존치되어 있다. 구 본전은 현충사 한켠에 따로 배치되어 있는데 동아일보가 현충사를 새로 중건하며, 숙종이 내려준 현판을 걸고 다시 세운 것이 구 본전.

3.5 구(舊) 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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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어명하에 따라 최초로 지어진 본전이자 예전에 충무공의 영정을 모셨던 사당으로 현재는 지금의 본전으로 이전되어 보존용으로만 남아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과 1910년 일제(日帝)의 탄압 등으로 쇠퇴의 기로 및 존폐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가 1932년 중건되었고 1967년 지금의 본전이 신축되면서 현재는 빈 공간만 남은 보존용 사당으로 전시하고 있다.

지금의 본전과는 달리 숙종이 직접 하사했다는 친필 현판이 그대로 걸려있으며 지금의 본전과는 규모가 작아보였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주 오래된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3.6 고택(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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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이 무과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살아온 집으로 원래는 충무공의 부인이 살던 집이었는데 충무공이 데릴사위로 오게 되면서 사실상 충무공의 집으로 바뀌었고 이후 종손이 대대로 살아오다가 지금의 현충사로 이전되어 보존 가옥으로 전시하고 있다.

3.7 활터

충무공이 무과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사용해 왔던 활터로 이 곳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고 충무공이 늘 사용했다는 과녁판이 전시되어 있다.

3.8 충무정(忠武井)

충무공과 가족들이 고택에 살던 시절에 사용했던 우물가로 원래는 이름이 없는 우물가였으나 충무공이 전사하고 '충무(忠武)' 라는 시호(屍號)가 내려지면서 그의 시호를 본따 충무정이라 불렀다.

현재는 관람객들의 식수터로 사용하고 있다.

3.9 유물전시관

충무공이 생전에 사용했던 유물 및 유품들을 전시하는 곳으로 거북선을 비롯해 충무공이 사용했던 여러가지 유물 및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3.10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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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으로 2011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을 기념하여 공식 개장했다.
  1. 우리나라에서 충무공이 가지는 위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대다수의 충무공을 기리는 사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