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국왕 | ||||||
18대 현종 이연 | ← | 19대 숙종 이순 | → | 20대 경종 이윤 |
열성어진에 실린 숙종의 어진 | ||
묘호 | 숙종(肅宗) | |
시호 | 조 선 |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 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 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
청 | 희순(僖順) | |
본관 | 전주(全州) | |
능묘 | 명릉(明陵) | |
휘 | 이광(李爌) → 이순(李焞) | |
자 | 명보(明普) | |
아명 | 용상(龍祥)[1] | |
출생장소 | 한성 경덕궁 회상전 | |
사망장소 | 한성 경덕궁 융복전 | |
배우자 |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인원왕후(仁元王后) | |
아버지 | 조선 현종 | |
어머니 | 명성왕후(明聖王后) | |
생몰 기간 | 음력 | 1661년 8월 15일 ~ 1720년 6월 8일 |
양력 | 1661년 10월 7일 ~ 1720년 7월 12일(58년 9개월 5일, 2만 1462일.) | |
재위 기간 | 음력 | 1674년 8월 23일 ~ 1720년 6월 8일 |
양력 | 1674년 9월 22일 ~ 1720년 7월 12일(45년 9개월 20일, 1만 67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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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어필.
使人長智莫如學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기르게 하려면 배움만 한 것이 없으니 若玉求文必待琢 옥의 문채를 찾기 위해서는 절차탁마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 經書奧旨于誰問 경서의 깊은 뜻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는가? 師傅宜親不厭數 마땅히 사부를 가까이하여 자주 뵙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네 ㅡ1715년 11월 4일, 6남 연령군에게 내린 한시였다. |
조선의 역대 왕세자 | ||||||
현종 이연 | ← | 숙종 이순 | → | 경종 이윤 |
목차
1 개요
조선의 제 19대 임금.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적장자의 수난[2]이라는 유서 깊은 징크스를 깨부순 유일한 사람[3]. 그리고 살아온 인생 자체가 막장 드라마.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그는 왕비를 3번 들였는데[4] 그 중 2번째 왕비가 저 유명한 인현왕후 민씨 되겠다.
주로 사극의 인기 소재인 희빈 장씨 드라마에서 나오는 일이 잦은 군주로 드라마에서는 우유부단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성격은 다혈질에 정치판에서는 냉철한 고단수 정치가였고, 조선 역사상 유례없이 강한 왕권을 지녔던 군주였다. 결코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나약한 왕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5] 게다가 정치판에서도 유감없이 그 성질을 드러내셨으니 다혈질과 냉철함이 합쳐진다면 말 그대로 머리도 갖춘 신하 갈구는 임금이 된다는 거다.
즉위 당시엔 14세라 약간 어린 편이고[6], 모후인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도 만만치 않은 인물인데, 조선 역사상 세자빈, 왕비, 대비 3관왕을 한 유일무이한 사람이다. 계증조모 자의대비[7]가 생존했으므로 수렴청정을 해도 되었지만 즉위하자마자 권력을 휘어잡고 친정을 할 정도였다. 오히려 비빈 사이를 오가며 아내들을 환국에 이용했다는 평. 이런 상태로 장장 46년을 재위하며 신하들을 휘어잡았다.
본래 휘는 '광(爌)'이었으나 현종 7년인 1666년 전한 때 장군 이광과 음이 같고 폭군의 대명사였던 수양제의 이름(양광)과 음이 같다는 대사헌 조복양의 지적을 받아들여 공모를 통해 휘를 '순(焞)'으로 고쳤다.
2 강력한 왕권의 원동력
아버지인 현종도 부왕인 효종의 고명아들 이었고, 자신도 정실부인 소생의 고명아들이었고 딱히 외척에 관련한 트러블도 없어 정통성에서는 꿀리는 게 없는 왕이었다. 꿀리기는 커녕, 부계와 모계 정통성이 모두 완벽한 조선조 정통성의 끝판왕이었다. 그가 태어났을때, 세조같이 왕위를 찬탈할 백숙부도 없었고, 연산군때의 중종처럼 폐위시키고 세울 대군도 없었다.[8] 왕비나 세자빈 소생의 왕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출생, 원자(원손)-세자-왕 순서로 정상적으로 왕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무엇보다도 장수한 왕이다. 한 성깔하는 건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것도 있으나 이처럼 귀한 아들인 탓도 있을 듯하다. 그러니 얼마나 귀하게 키웠겠는가. 숙종의 그 성질머리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수도 있겠고 그런식으로 생각하면 따지고 보면 예송논쟁도 현종의 후손이 1명밖에 없다는 이유도 있을수 있다. 그리고 그 어머니도 세자빈-왕비-대비 테크를 제대로 밟았다. 추가로 친증조모는 아니었지만 대왕대비까지 있었으니 수양대군 같은 야심 많은 숙부가 있었다고 쳐도 계유정난 같은 쿠데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문종과 인종과 헌종[9]은 왕위에 올라 단명한데다, 정확히 말해 문종은 원손으로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10] 상기된 최초의 금지옥엽 + 정통성 + 상왕까지 올랐던 단종[11]은 3년만에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연산군은 반정으로 축출되었다. 원손-세손-왕의 절차를 밟은 정조의 경우 호적상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이지만 어쨌든 생부 사도세자의 문제가 있었다.[12] 비슷한 예로 아버지 현종이 있는데 정확히 따지면 현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소현세자이니 원손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세자교체와 관련한 효종의 원죄가 남아 예송논쟁이 발생하고 현종 자신 또한 비교적 요절한지라 조금 격이 딸린다. 순종황제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즉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쉽게 말해 날 때부터 모든것을 다 타고났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에서도 정말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 정통성면에서 꿀릴게 없는지라 왕권을 마음대로 휘두룰 수 있었고 이 양반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불 같은 성격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지만, 성미는 매우 개같아[13] 궁녀들이 머릴 빗겨주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결국 머리 빗겨 주는 것은 어머니가 직접 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못 참아 투정을 부리자 빗 등으로 머리를 때려가면서 빗겼다고 한다. 그래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14]도 아들을 디스평하기를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명성왕후는 며느리인 인현왕후에게 이런 언급도 하였다.
"(인현왕후가 출궁당한 장희빈을 불러들이자고 주청하자[15])아직 내전이 그 사람(희빈 장씨)을 보지 못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 간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소. 주상께서는 평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나시는데 간악한 사람이 그것을 옆에서 부채질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될 것이오."
조선왕조실록은 숙종 14년(1688년) 7월 16일 숙종의 건강 상태를 이렇게 전한다. 전형적인 화병 증세다.
"이 때에 왕의 노여움이 폭발하고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았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다, 마음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번뇌가 심했다."
숙종이 평생을 두고 호소한 질병은 산증이다. 산증은 아랫배에 병이 생겨서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은 증상이다. 동의보감은 이 병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형적인 화병의 증상이다.
"대체로 성을 몹시 내면 간에서 화(火)가 생긴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내부가 습기로 차가워지며 통증이 심해진다."
숙종 본인도 자신의 이러한 성품을 인지한듯, 실제로 <숙종실록>을 보면 1704년(숙종 30년) 12월 11일자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의 화증이 뿌리 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이 갈수록 깊은 고질이 되어 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면 화염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사실 밑의 송시열과의 악연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도 조선 왕비들 중에서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한 성질하는 왕비였다. 아버지 현종은 온화한 성격이었으니 그의 성격은 모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1675년 '홍수의 변'[16] 때에는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전까지 와서 통곡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홍수의 변 때 총대를 매고 삼복(복평군 형제들)을 탄핵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삼복과 반대 당파에게 무고죄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서 이랬던 것. 신하들 역시 '이건 뭐 문정왕후가 또 나타났나요?'라고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장희빈만 나쁜 년이고, 착한 숙종은 끌려다녔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숙종이 다혈질에 사리분별을 모르는 짓을 종종 했던 인간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숙종 14년(1688)에 장희빈이 아들을 출산하자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한 적이 있다. 이 때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심부름꾼 수준) 소유들이 장희빈 어머니의 가마를 보고는 이를 적발해 가마를 부쉈다. 그 가마는 옥교라는 지붕이 달린 여성용 가마로, 당시 법에 의하면 정 3품 이상 관리의 여자 가족이나 탈 수 있었다. 즉, 소유들이 원칙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들은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유를 전부 때려 죽이라고 명했다. 신하들이 뒤늦게 말려 중단되기는 했지만, 결국 내수사에 끌려가서 심문 당하던 소유 중 2명은 맞아 죽었다.
가끔 이걸 보고 노론이 장희빈을 구박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애초에 장희빈의 어머니가 주제넘은 짓을 한 것이 맞다. 하지만 달리 보면 어쨌거나 왕자의 외할머니이자 왕의 장모인데, 그를 욕보였으니, 화를 내는 것 자체는 인지상정일 수도. 하지만 숙종도 법대로 한 것뿐인 자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그들에게 상을 내리고 이 일을 문제삼은 대간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인 것도 특징. 위의 소유를 패대기친 것은 장희빈의 환심을 사려고 한 짓이며 장희빈을 이용해서 강적인 송시열(과 서인)의 끝을 보려했다는 시각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송시열이 죽고 난 이후에는 숙빈 최씨를 이용하면서 장희빈을 외면했단 것.
생각해보라. 계비인 인현왕후까지 있는 없는 혐의를 죄 쥐어짜서 기어이 폐서인으로 만들고 장희빈을 중전까지 삼아줬다. 하지만 장희빈의 이용가치가 사라졌고 그래서 인현왕후에게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장희빈에게도 있는 없는 혐의를 죄 쥐어짜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켜 버리고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으로 삼았다.(타이밍이 참 교묘한 게 인현왕후는 중전으로 복위된 지 얼마 못가서 죽었다.) 이에 숙종은 그 혐의를 장희빈에게 또다시 뒤집어 씌워서 죽였다.[17] 즉, 숙종이라는 인간 자체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인물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다르게 말하자면 왕권강화를 위해서 바른 말 하는 신하들도 가차없이 죽이고 두 여자를 갖고 놀며 자기의 아들의 인생도 엉망으로 만드는 일종의 병크를 많이 저질렀다는 애기도 된다. 일단 인현왕후는 5년이라는 길고 열악한 폐비생활이 사망에 영향을 많이 끼쳤고, 장희빈은 저주를 했다는 증거도 고문으로 인한 궁녀들의 자백뿐인데다 세자의 어머니인데다 남인 세력도 씨를 매우 많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귀양이고 뭐고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거기다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릴 당시 세자는 완전 어린 나이도 아니고 14살이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피를 많이 흘린 태종도 적어도 충신들이나 왕비인 원경왕후나 후궁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숙종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다.
4 환국(換局) 정치
숙종의 진면목은 바로 환국정치의 창시자로 인조반정 이후 현종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에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 식으로 전개되었다. 간단하게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가는 거였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어나가는 형태였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과 정여립의 난으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혈투를 벌인것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전개된 것. 이로 인해 집권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그에 준하는 정국 뒤집기로는...
- 1689년 (재위 16년차)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왕비 교체에 반대하는 서인을 내몰고 남인을 중용했다. 이때의 남인은 민암 중심.
- 1694년(재위 21년차)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6년만에 남인을 내몰고 서인으로 정권 교체.
-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등용. 재위 21년 시절,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환국정치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 여파로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충성을 강요하게끔 한다.[18]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 이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19]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오분전 + 피를 피로 씻는 배틀로얄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붕당의 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밀어붙여야만 했다. 근데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 자체는 숙종이 최초로 제기한 것.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숙종 17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 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친척들과 함께 내시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같은 숙종 17년엔 '그 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 그 내용을 다룬 만화, 송시열과 윤휴의 혼백이 숙종을 디스하는게 압권.
“예전부터 나라를 어지럽힘은 붕당보다 혹독한 것이 없는데, 동서(동인과 서인)가 겨우 주장을 내세우자 노소(노론과 소론)가 바로 마구 헐뜯어대어 공도는 때로 아주 없어지고 사심이 날로 이어 붙어 있으니 모름지기 은감이 가까운 줄 알아서 끝내 충성의 힘 다하여야 하리라."(從古禍人國/莫如黨比酷/東西纔標榜/老少轉橫拆/公道時淪喪/私心日係着/須知殷鑑邇/終始竭忠力.)
5 송시열과의 악연
환국을 일으킨 끝에 즉위하기 전부터 미워했던 송시열에게 결국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로서 인조, 효종, 현종의 세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도 별 수없이 "어, 어"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이 때 송시열이 사약 1사발에 안 죽자, 3사발을 먹여서야 죽었다고 한다. 자세한 건 사약 참조.).
왕권 강화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계기가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삼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다소 감정적인 요인도 컸을 것이라 추측된다. 원래 숙종은 송시열을 싫어했고 송시열은 하던 버릇대로 숙종과 각을 세우다[20]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송시열을 따르던 유생들이며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자 상소를 올린 이들도 다 유배를 보내는 숙종다운 성질을 보여준다.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열불난 숙종이 송시열을 국문을 열기 위해 한양으로 불렀다. 그때 송시열이 올라오는 길에[21] 그를 따르는 노론들이 몇백명이었단다. 점점 한양으로 올라가며 졸졸 따르는 이가 500명이 넘었다고 했으니 숙종이 국문이고 나발이고 사약을 출동시켜서 결국 죽여버렸다.
송시열은 할아버지인 효종을 둘째 아들이라 못을 박고, 현종 때 도 강씨의 신원 회복을 주장하는 등 당대 왕가에 껄끄러운 문제를 건드렸다. 이는 적자-적손으로 이어지는 숙종의 정통성을 건들게 되는 일이니 좋아할리 없었다. 그리고 송시열의 세자 책봉 반대는 단순 반대로 여기기에는 문제가 있다. 송시열 같은 거물이 세자 책봉에 반대한다면 세자의 정통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이런 일을 했던 숙종이 정작 죽을 때 경종의 정통성을 훼손해서 노론이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게 한편으로는 아이러니.
숙종과 송시열의 다툼은 야사에서는 숙종 탄생시기까지 간다. 숙종의 회임기간으로 볼 때 숙종을 임신한 시기가 하필이면 효종 초상기와 맞물린 것.[22] 야사에선 이때 송시열이 원자 축하를 디스했다고 한다.(사실은 상경하다가 중간에 일이 생겨 기일을 못 맞추게 되자 송시열이 이것을 이유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근데 이 어머니 되시는 분도 조선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성깔을 자랑하던 명성왕후[23] 김씨 되시겠다. 이후 명성왕후는 송시열이 왕실에 한소리 하기만하면 "저 놈의 영감탱이는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어쩌구" 하면서 송시열 디스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뒷날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단행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학통이 교조화되는 데 한몫한 군주도 다름 아닌 숙종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이런 송시열에 대해 짬밥이 너무 엄청나서 맞대결하기가 부담스러웠고[24] 그래서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얻기도 전인 즉위 직후인 14살 시절부터 송시열을 갈구며 송시열의 제자들을 죄다 내쫓고 송시열을 귀양보낸 게 숙종이었다.
6 치적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평안, 함경을 제외한 전국에 시행하여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고 본격적으로 주전, 즉 화폐제조를 실시했다. 흔히 우리가 잘아는 상평통보는 인조 때 주조되기 시작했으나 숙종 즉위 초년부터 이르러 전국의 중앙, 지방관청에서 유통되었다. 숙종이 상평통보를 발행한 목적은 국가 재정의 확충이라는 목적이 컸다.
숙종의 의도가 적중해서 이후 조선 말까지 화폐제조를 통한 이익으로 국가재정을 충당한다는 개념이 정착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일본과의 은 무역에서 크게 번영했다.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은 숙종 시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국가재정 역시 탄탄했다.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강해서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대동법의 영남/황해 확대와 후술하는 을해정식을 통한 궁방전의 억제 등이 대표적이다. #
조선의 국경도 숙종 년간에 사실상 확정되었는데, 조정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널리 알려졌듯 1690년대 안용복이 울릉도는 우리 땅(덤으로 독도도)을 외치고 왔고, 앞서 말했듯 북쪽은 백두산에 청과 국경선을 다시 긋고 정계비를 세워 "서위압록 동위토문"을 적어넣었다. 문제는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청나라 관리 목극등의 병크로 근 170년쯤 뒤에 간도 떡밥이 시작되어 버린 것. 이 병크는 조선 왕실에서도 알아챘기 때문에 숙종실록에 토문강을 치면 간도 떡밥을 분쇄하는 가장 큰 근거가 나온다. 다만 그 뒤에 대한 대응은 적혀있지 않다.
한편 1678년, 안남(베트남)의 회안부(호이안)에 표류한 김태황(金泰璜)을 6개월 정도 머물게 한 후 청나라 상인을 통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안남왕은 답신을 기대하며 조선에 교류 국서를 보냈으나 조선 측에서는 제주에 도착한 김태황과 청나라 상인 일행을 표류한 것으로 처리하였다.
6.1 추증과 복권
조선왕조의 과거사 정리에 관심이 많았는지 정종과 단종을 복권시켰다. 정종은 본래 "공정왕"이라는 시호만 있고 묘호가 없었는데 이때 묘호를 얻었고, 단종은 이때까지 "노산군"이라 불렸는데 숙종이 "노산대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단종으로 복위시킨다. 이 때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모두 복권되었다. 물론 그냥 짠, 하고 복위한 것은 아니고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치기는 했다. 단종 복위 때는 기념으로 과거까지 열었다.
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자손들이 정식으로 왕족으로 복귀한 것도 이 때였다. 그 전까지는 역적의 후손이란 이유로 족보상으로만 왕족이고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아무 것도 누리지 못했다.
신덕왕후의 아들들인 방번과 방석을 복권시키기도 했으며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를 복권시키기도 했다.
숙종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충을 강조하고[25] 왕가의 정통성을 다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26]
숙종 자신이 출생배경과 성장과정에서 오는 정통성이 여느 왕과 달리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왕권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 쯤 폭넓게 들어줘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작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정조 대에 이르면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사사되었던 유몽인이 복권되었고 철종때에는 광해군의 사돈이자 소북의 영수인 박승종 또한 복권되었다. 고종 때는 인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한 유효립도 복권 되었고 순종 대에 이르러선 김일경, 유자광, 윤원형, 정인홍 같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인물들조차 대부분 복권된다.[27]
6.2 국방정책
숙종은 방위체계 수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손봤다.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오군영제도가 확립된 것이 숙종 대로 평가되는데 방어체계가 수도 중심으로 재편된 김에 북한산성을 축성한다. 상대적으로 한양 성곽은 너무 크고 수비하기가 어렵고, 강화도는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을 못 막으며, 남한산성은 한강을 건너가야 하는 위험함이 있다는 이유였다.
실록에 보면 이 과정에서 신료 사이에 의견이 크게 갈려 싸우게 되는데 숙종은 이미 마음을 먹어놓고선 계속 논의토록 지시한다. 아마도 청나라의 간섭[28] 때문에 책임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711년에 청에서 해구[29]의 준동이 있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와 도성 백성들을 동원하여 그 험하디 험한 북한산에[30] 6개월 만에 성을 쌓아 올리고 행궁을 만든다.
이후에도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방비가 허술하다며 탕춘대성을 만들고, 크고 수비하기가 어렵다고 한 한양성곽을 고치고,[31] 허술하고 멀다고 한 강화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김포에 문수산성을 축성했다.
또한 추가로 개풍군에 있는 대흥산성을 고쳐 쌓고, 평안도 남포에 황룡산성, 강화성, 경상북도 칠곡에 가산산성, 황해도 해주 수양산의 수양산성, 평안북도 염주의 용골산성, 충청북도 청주시의 상당산성을 증개축하고, 남한산성 행궁을 증축한다. 이래저래 성도 많이 짓고 북한산성 행궁과 남한산성 행궁에는 각각 행차하여 잠시 지내고 오는 등 재위 동안[32] 수도방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만들어진 수도방어체계는 영조가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정조가 장용영을 만드는 등 약간의 변화를 거치긴 하지만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고 덕분에 이때의 산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손실된 내부시설을 제외하고 대부분 잘 남아있다.
또 한꺼번에 무과 합격자를 1만 8천여명이나 뽑아서 국방을 강화시킨다.
또한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터지자 예의주시하며 북벌을 준비하는 구절이 실록에 여러번 등장한다. 결국 흐지부지 하긴 했지만...
7 가계
- 정비 : 인경왕후 김씨
- 장녀 : 공주
- 차녀 : 공주
- 제1계비 : 인현왕후 민씨
- 제2계비 : 인원왕후 김씨
- 후궁 : 희빈 장씨
- 장남 : 경종
- 차남 : 성수
- 후궁 : 숙빈 최씨
- 삼남 : 영수
- 사남 : 영조
- 오남 : 왕자
- 후궁 : 명빈 박씨
- 육남 : 연령군
- 후궁 : 영빈 김씨
- 후궁 : 귀인 김씨
- 후궁 : 소의 유씨
8 죽음과 정유독대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세자를 연잉군(영조)으로 바꾸려는 노론과 경종을 지키려는 소론이 끊임없이 싸웠다. 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자의 자리는 그대로였다.
다만 정작 숙종의 의중은 이미 은연중에 연잉군에게 넘어가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당시나 지금이나 주를 이룬다. 경종에게 후사가 없었고 그가 희빈 장씨의 아들이라는 점도 정치적으로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숙종이 아무 말도 없이 죽었다면 왕위 문제가 한동안은 조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기어코 분란의 씨앗을 남기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정유독대다.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 숙종은 노론의 대신인 이이명을 불러 독대를 한다. 조선 시대에 사관도 없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것은 불법이었다. 더욱이 왕의 임종이 임박한 시점의 독대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독대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후 이이명의 말과 행동, 노론이라는 그의 위치로 볼 때 세자 교체나 경종 즉위 후에라도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된다. 어쨌든 숙종의 정유독대라는 나비효과는 경종 기간 끝 없는 정쟁의 씨앗을 제공했고 신축옥사, 임인옥사로 이어져 결국 당사자 이이명을 죽게 만든다.
파일:Attachment/숙종(조선)/Example.jpg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있는 명릉(明陵). 숙종과 2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나란히 묻혀 있는 쌍릉과 3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가 혼자 묻힌 능 1기가 오른쪽 위 언덕에 따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은 명릉 내에 있지 않고 아예 따로 조성되었다. 서오릉 내에 있는 익릉(翼陵)이 그것. 숙종의 명릉은 서오릉의 능역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다. 나머지 서오릉의 능들은 정자각 쪽에서만 구경할 수 있고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없다. 덤으로 이 명릉 택지와 관련해서 야사도 있다. 암행 나갔다가 숨은 명풍수를 만나서 얻은 자리라 한다.
9 영향과 평가
군주로서의 자의식과 책임감이 강해서 여러 자잘한 업적을 남긴 것 때문에 명군으로까지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정작 실상을 보면 민생에 "관심"을 가지기만 했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나 효과를 보는데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물론 이것도 "그 긴 재위 기간을 놀고만 있었다"라고 보기엔 실체화만 안되는 것이지, 이미 균역법의 근거가 되는 여러 조사들이 숙종 말년에 마련되고 있었다는 지적도 많다. 균역법이 "남자 1인당 포 2필"이었던 것을 1필로 줄인 것인데, 전국의 군포를 모두 포 2필로 통일한 것이 바로 숙종 때 이루어졌다.
또한 부왕 현종이 기껏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산당의 세력을 약화시켜 서인과 남인간의 붕당의 균형을 간신히 맞추어 놓은 것을 환국을 통해 다 무너뜨려 정국의 혼란을 초래했으며 말년에는 아예 대놓고 노론의 편을 들면서 결국 조선 후기 노론의 일당 독재를 초래한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환국으로 촉발시킨 조선의 합리적 정치 시스템 파괴 역시 영정조 시대까지 지속돼 마침내 정조 대에 붕당 정치의 붕괴로 절정에 이른다. 그 결과? 다들 아는 세도정치 되시겠다.
이런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치세는 결국 영조, 정조 시대라는 조선 후기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던 만큼 제법 그 의의는 크다. 또한 숙종 무렵부터 조선이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해서 그런지 딱히 장희빈 이야기가 아니라도 사극에서 배경으로 많이 다뤄지곤 하는 시기가 바로 숙종 시기.
숙종은 예순살에 사망할 때까지 46년(정확히는 45년 10개월)을 다스렸다. 이는 영조의 재위기간인 52년(51년 7개월)에 맞먹는 것이며, 조선 왕 중에 2번째로 재위기간이 긴 인물이다. 참고로 재위기간이 40년 이상인 왕은 이들 외에는 둘뿐으로 선조가 41년(40년 8개월), 고종이 43년(43년 7개월)을 다스렸다. 이 점에서 영, 정조보다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숙종 치세는 전란으로 감소한 조선의 국력이 거의 수습된 시대였고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으며, 화폐유통 경제가 정착되었고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시기라서 조선 경제사에서는 의미가 매우 큰 시대이다.
희빈 장씨가 앤 불린에 비교되는 만큼, 숙종 역시 헨리 8세에 비견되곤 한다. 불같은 성격, 환국 정치로 대표되는 냉정하지만 다혈질 성격과 이와 연관된 정치 투쟁, 후손들의 행적이 많이 닮아있다.
10 여러 이야기거리
- 본격 관우 빠돌이였다. 숙종은 개인적으로도 관우가 보여준 충의로운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중에 들어왔지만 별 관심을 못받던 관우신앙을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관우에 대한 제사를 국가 주관 제사로 격상시켰고 자신이 직접 제사에 참석해서 제삿상에 술을 따르고 4번이나 절을 올릴 정도로[33] 열렬히 관우를 숭배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서종태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시라.
- 이순신에 대해서도 평가를 높였는데 사우에 현충이라 호를 내리고, 현충사의 제문을 직접 지었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에서 처음 보네. ㅡ 현충사 제문
-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숙종이 재임하던 시기에 일지매가 도적질을 하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말로 설치고 다닌 도적은 황해도의 장길산. 황석영의 동명 소설도 있다. 경신대기근에 맞먹는 을병대기근(1695)도 있었다.
- 성종과 함께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조선 왕인데 함께 민담에서는 암행을 나가서 백성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꽤 멋진 임금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서울 지역에서는 "숙종 시대는 태평성대였다"는 구비설화가 상당히 많이 채록되어 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백성들 사이의 이미지는 상당히 괜찮았던 모양이다. 백성들 입장에서야 신하들이 죽든 말든 왕비가 바뀌건 말건 기본적으로 별로 상관없는 문제이긴 하다. 하도 치세가 길기도 했고, 지역마다 이미지가 달랐을 수 있다. 왠지 같은 시기 옆동네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랑 비슷한 이미지인것 같기도...
- 조선이 고구려보다 큰 나라라고 믿었던 것 같다.
- 박시백은 만화 조선왕조실록에서 꽤 박한 평가를 내렸다. 전체적으로 역량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결과에 대해선 비판의 강도가 높은 식. 군강신약을 이루었다는 점과 민생, 군역 문제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 그러한 평가의 근거는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그의 치세를 대표하는 '환국'에 일관성이 없고 기준도 모호하였기에 정권교체를 통한 개혁에 쓰여야 할 에너지를 정권교체 자체와 그 뒷수습에 소모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가 하면, 정치 세력과 명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흑백논리에 빠지는 등. 심지어 모 상소는 '권력을 잡게 한 초기에는 무릎에라도 앉힐 듯 하시다가, 배척할 적엔 연못에 밀어버리듯 하십니다'라는 비난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는 왕 아래에서 신하들은 그저 몸을 수그린 채 눈치만 살필 수 밖에 없었고, 행여나 눈 밖에 나 숙청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비판 정신을 버렸으며 생존을 위해 상대 붕당들에겐 더욱 가혹해져 허울뿐인 화합이 되고 말았다.
- 또 하나는 그렇게 거듭된 환국과 숙청으로 근래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으면서도 한게 딱히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핵심에 다가서면 발을 빼기 일쑤였고(양반층 군포 징수에 일관되게 반대), 기득권층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해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일에도 인색하였다[34]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거 그냥 저자의 조사가 부족해서 오류낸 거다. 숙종대에는 궁방으로 하여금 해당땅 주인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절수지를 획득하도록 한 금가매토제와 절수지의 총량을 제한하는 을해정식이 제정, 시행되어 궁방전의 확대를 제한했다.[35]양역변통이 사대부의 눈치보다 지지부진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역시 틀렸다. 오히려 양영변통절목같은 절목들이 마련되어 영조대 균역법의 기틀을 닦았다.[36]
- 유일하게 남은 여동생 명안공주(明安公主)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공주들은 전염병으로 사망한 듯 하다. 게다가 이듬해에는 아버지 현종까지 승하하고 말았으니, 어린 숙종에겐 어머니 명성왕후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명안공주가 보통 존재는 아니였을 것이다.</ref> 돌아가신 아바마마 대신해서 결혼식을 성대히 챙겨준 것도 오빠 숙종이고, 그 이후로도 사신을 통해 예쁜 수입산 비단이 들어오면 이걸 곧잘 선물로 챙겨주었다고 한다. 또 공주가 자기 땅을 갖고 싶다고 하니 마침 원을 그리면서 하늘을 날던 솔개를 가리키며 '쟤가 그리는 원 아래 땅 다 네 꺼 해라'고 했다는 야사에서는 숙종의 남다른 동생사랑 스케일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안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결국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숙종을 상심케 했다. 이때 실록의 기록을 보면 숙종은 아직 염습도 못 해서 문상객 받을 준비가 안 된 공주의 집에 만사 다 제치고 달려가 한참 통곡했다고 하며, 너무 슬퍼서 고기반찬도 못 먹겠다는 걸 궁인과 신료들이 겨우 뜯어말리기도 했다. 이후 먼저 간 여동생에게 못해줬던 걸 매제에게라도 대신 베풀고 싶었던 것인지, 숙종은 홀로 남겨진 매제 오태주(吳泰周)를 곁에 두고 매우 아꼈다.[37][38] 오태주가 49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숙종은 그에게 직접 지은 글을 내리며 애도를 표했다. 지금도 명안공주 부부 묘에 가면 제문비에 새겨진 숙종의 글들[39]을 볼 수 있다.
- 몸이 약하고 잔병치례가 잦아서 온갖 몸에 좋다는 약재들을 찾아 먹고는 하였다. 우황 항목 참조.
10.1 애묘가
고양이를 정성스럽게 키웠다는 기록도 있다. 고양이 한 마리를 금손(金孫)이라 이름붙여 손수 먹이를 먹이며 정사를 볼 때도 곁에 두고 쓰다듬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그래서 성적취향도 앙칼진 여자를 좋아했나보다 이는 네이버캐스트와 다음웹툰 <탐묘인간>(85~89화)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조선사회에서 고양이를 보는 시선이 곱지 못했고 불길한 동물로까지 여겨졌던 걸 생각하면 매우 특이한 점.[40] 훗날 금손은 숙종이 붕어한 직후 먹이도 안 먹고 울고 다니다가 시름시름 앓더니 죽어서, 대왕대비의 명으로 숙종릉 옆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기록은 실록에는 없는데 국정에 관련이 없는 사소한 일이라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을듯.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익이 숙종 때의 관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숙종이 애묘가였던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기록에도 교차 검증이 되며, 그 가운데는 금손의 어미인 금덕(金德)을 위해 장례식(!)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시까지 지었다고 한다. 빼도박도 못할 역대 한국사 최고위 집사(애묘가)가 맞을 것이다.(열성어제 수록.)
또한 조선 후기의 문인 김시민(金時敏[41], 1681~1747)의 문집인 동포집(東圃集)에도 금손이의 죽음을 추모한 시인 금묘가(金猫歌)가 전하고 있다.[42] 동포집을 보면 금묘가는 동포집 2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동포집 2권에는 김시민이 1715년에서 1721년 사이에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시기는 숙종이 승하한 1720년과 딱 겹치는 시기이기 때문에 숙종이 고양이를 길렀다는 사실은 제법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을 보면 고양이가 궁궐 내에 들어와 깽판을 친 기록이 남아있고, 유독 고양이가 궁궐에서 깽판을 치는 기록이 숙종실록 이후 영조실록에까지 많이 나타난다. 궁궐에 고양이가 많기는 많았던 모양. 특히 영조는 팔에 통증이 오자 어의로부터 "고양이 생가죽이 팔 통증에 좋다고 하니까 시험해 보시옵소서"라는 처방을 들었는데 "내가 옛날부터 여러 고양이가 궁궐을 싸돌아다니는 걸 봐서 그런지 차마 못죽이겠어"라고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조의 발언으로 미뤄보면 숙종이 고양이를 길렀거나 기르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애묘가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애묘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숙종실록을 보면 유난히 기형 고양이에 대한 기록도 자주 나온다. 각각 숙종 4년, 9년, 10년 기록에 나타나는데 눈이 4개였다거나 머리가 2개였다거나 머리는 하나인데 몸통이 2개 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기형 고양이에 대한 기록은 이전 왕들의 실록에도 보이지만 대개 한 번 정도 기록되었을 뿐이고 숙종실록에 유난히 자주 나타난 편이다.
10.2 지극한 자식 사랑
아들을 지극히 아끼기도 했다. 여섯 아들 중 겨우 살아서 성인이 된 세 아들 가운데 6남인 연령군 이훤을 가장 총애했다. 연령군이 5세 때 모친인 명빈 박씨(䄙嬪朴氏)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찾았다. 숙종은 이 어린 아들을 애처로워하며 조정 신료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때부터 연령군을 편애하기 시작하여 그뒤 어느 아들들보다 연령군을 아껴서, 원래 6세 이후에 봉군하는 예법을 무시하고 5살 때 군호를 내렸고 7세의 나이엔 종친부 당상관의 작위까지 내렸다.
게다가 1708년 연령군이 출가할 땐 직접 제택(第宅)[43] 구입에 수만냥을 들이려고했다. 이에 부제학 조태구 등이 1년전 연잉군의 제택을 마련한 돈이 수천냥이라 지적하며 반대하자 숙종은 할 수 없이 선조의 적녀(嫡女)[44]인 정명공주의 제택을 구입하여 하사하는데 그것도 연잉군이 구입하려 하는 것을 금한 것이었다[45] 더구나 이후 그 제택을 복구하는데 들인 비용도 중인 4가구에 해당하는 비용이었다고.
이후 연령군이 2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자 숙종은 오열을 하며 친히 제택으로 찾아가려고 할 정도였으니 가히 아들 영조의 딸 사랑에 견줄만 했다.
물론 끔찍히 사랑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연령군이 정치와 아주 동떨어진 말 그대로 '애정용 아들'이었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즉 '너는 왕 따위 꿈도 꾸지 말고 내 사랑이나 받아라'라는 뜻일 수도 있다는 거다. 경종의 경우 완전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숙종이 심하게 갈구는 경우가 많았으며, 영조에 대해서는 똑똑하다 공부 잘한다 이런 칭찬이 아니라 유난히도 몸 튼튼해서 오래 살겠구나 하는 칭찬이 잦았다.
헌데 정작 숙종을 본받아(?) 아들을 경종 이상으로 심하게 갈궈댄건 다름아닌 영조였다. 참으로 씁쓸한 부전자전...일까?
그러나 이렇듯 극진한 애정은 연령군에게만 보였던 것은 아니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한 뒤에 바로 2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신료들 앞에서도 매우 기뻐했다가, 나중에 그 아들이 100일을 갓 넘기고 죽었을 때에는 "내가 슬퍼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 라며 역시 신료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모후인 명성왕후가 언급한 것처럼 희로애락이 극단적인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11 어진
일제강점기 당시 2종류의 어진이 원본+이모본으로 총 4장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관리실수로 인한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그나마 얼굴이 멀쩡히 남은 영조, 철종이나 다른 곳에 안전하게 보관된 어진이 있었던 태조, 어진 자체는 불타버렸으나 초본 사진이나마 남아있는 세조, 선원보략에 조잡하게나마 초상화가 남아있는 정조, 순조, 헌종과 달리 어진 자체는 잿더미가 되고 선원보략에도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어요.
다만 일제강점기 당시에 나온 서적인 '열성어진'(列聖御眞)을 참고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책에는 조선조 왕들의 간략화된 어진을 실어놨는데, 선원보략에 초상화가 남은 왕들과 선원보략에 초상화가 없었던 태조, 숙종, 영조의 어진 간략본 역시 있었다. 문제는...
숙종의 초상화를 그린 이가 선원보략에 그려진 조선 왕들의 초상화를 그린 자보다 그림 실력이 떨어진 사람이 그렸고, 그림을 그린 이가 실제 어진을 보고 그렸는지 신뢰가 안 간다.
12 사극
그저 장옥정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바지사장스러운 임금으로 묘사되다가 숙빈 최씨가 장희빈보다 더 예뻐서 장희빈을 버리고 숙빈 최씨를 선택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역대 숙종 중 가장 카리스마 있던 숙종을 꼽자면 단연 KBS 2TV 장희빈의 전광렬. 정말 카리스마 있고 불같은 성품이지만 실은 냉혹한 정치가였던 숙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나마 이 숙종이 역사의 숙종과 가장 비슷한 드라마 속 숙종이라 할 수 있다. 무예를 연마하며 칼을 휘두른다든지...
지진희가 연기한 드라마 동이에서는 시청자들이 깨방정 혹은 허당으로 부르며, 대부분의 사극에 나오는 고풍스러운 임금님이 아닌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그렇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른바 신세대 임금님으로 나왔다. (나는 뛰어 본 적이 없다. 나는 담을 넘어본 적이 없다.)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왕이 뛰어다니거나 담 넘을 이유가 없으니까.
궁궐에서 빠져나와 미행하는게 취미생활. 하지만 역적의 딸로 몰려 출궁당하게 된 동이를 끌어안고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임금 자리도 포기하겠다고 하는 장면에서는, 사랑하는 여자라도 왕권을 위해 이용하고 버렸던 실제 역사 속 숙종의 모습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드라마만 놓고 보면 괜찮은 주인공이지만, 노회한 정치인 송시열을 15살 때 귀양 크리 태우고 29살 때 사약을 내려 보내버린 역사 속의 냉혹한 카리스마 군주와는 거리가 멀다.[46] 일본판 성우는 이노우에 노리히로.
동이 다음으로 이병훈 pd의 사극이자 강한별이 연기한 드라마 마의(드라마)에서는 현종의 외동아들로 극중에서 얼굴에 종기가 생겨 사투를 벌이고, 백광현의 외과술을 받고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라고 나오지만 그게 전부다.
- 유아인: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2013년 방영한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유아인이 캐스팅 되었다. 희빈 장씨 역은 김태희. 숙종쪽이 연하라는 것을 반영한 것 같다. 특유의 목소리와 섬세한 연기에 시청자들의 호평이 줄을 잇고 있는 상태. 사실상 드라마를 떠받치는 기둥.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전의 냉철하고 정치적인 숙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패악을 부리는 장옥정도 용인하는 등 갈수록 캐릭터 자체가 붕괴하고야 말았다. 일개 후궁이 대전에 난입하는데도 좋다고 지켜보는 꼴을 보면 혼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듯.
배우 최민수가 해석한 숙종 역에 관련한 인터뷰 기사
얄궂게도 7대 숙종인 전광렬이 이인좌 역으로 등장하며, 그동안 잘 묘사되지 않았던 냉철한 철혈군주의 이미지와 불같은 성격을 잘 묘사했다는 평이 많다. 이색적이게도, 폐병에 의한 고통때문에 아편을 하는 군주로 묘사되기도. 배우 특유의 카리스마와 재해석이 잘 어울려 기존의 숙종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표현해 내었다는 평이 있다. 드라마의 묘사는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정곡을 찌르는 말 한마디, 특유의 행동과 분위기 덕분에 그들의 앞에 서는 모든 이들의 숨을 죽이게 만든다. 성질을 안부리는 것은 또 아니라서 초반에 숙빈 최씨를 음모를 꾸며 제거하려 했던 장희빈의 머리채를 냅다 잡아 내동댕이 쳐버리는 모습도 보여준다. 앞서 전광렬이 장희빈에서 연기했던 숙종과 쌍벽을 이룰만큼 잘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패왕 숙종.- ↑ 할아버지 효종이 붙여준 아명으로, 명성왕후의 침실에 뭔가가 이불에 덮여 있는 것을 열었더니 용이 나왔다는 태몽을 꾸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숙종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붙여놓은 이름이라 태명이기도 한 셈.
- ↑ 실제로는 적장자와 서장자를 가리지 않는다. 그냥 조선 왕실의 맏아들이면 피하기 힘든 팔자였던 듯.
- ↑ 조선 왕실에서 왕위에 오른 적장자는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이 7명뿐이다. 다른 적장자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
- ↑ 후에 왕비에서 폐한 희빈 장씨도 포함하자면 4번이다.
- ↑ 재평가가 이루어진 최근에는 드라마에서도 카리스마있는 이미지로 그려지게 되었다.
아 물론 지진희는 제외하고 - ↑ 즉위하자마자 하는 소리가 "송시열이 잘못했다"였다.
- ↑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
- ↑ 2대독자였기에 태어난 기준 가장 가까운 왕족은 당숙이었다. 이 때문에 사실상 그 누구도 숙종을 견제할 수조차 없었다.
- ↑ 다만 헌종은 워낙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단명하긴 했어도 재위기간은 길다. 세도정치 때문에 제대로 왕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서 그렇지.
- ↑ 문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양녕대군으로, 문종은 왕의 삼남의 적장자로 태어난 것 뿐이다.
- ↑ 원손-세손-세자-왕-상왕을 모두 거친데다 정통성도 완벽한 유일한 왕이다.
- ↑ 게다가 효장세자나 사도세자나 둘 다 영조의 서자다. 영조의 적자가 없어서 문제가 안 됐을 뿐이다.
- ↑ 이 성질머리는 아들내미와 손자, 증손자까지 제대로 물려받았다. 허약한데다 지지기반도 약해서 늘 조심해야 했던 맏아들도 드물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깔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있다. 특히 아들내미와는 허약하지만 장수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 ↑ 본관은 청풍이고 이 왕비의 할아버지는 대동법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재상 김육이다.
- ↑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투기를 하지 않는 것이 왕비의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승은을 입었으면서도 특별상궁이나 후궁의 첩지를 받지 못한 궁녀들에게 첩지를 내리자고 자주 간청했고 그런 일의 연장선상에서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났던 희빈 장씨도 다시 입궁시키자고 간청했다. 결국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 특별 간택령을 내려 부르는 형식으로 희빈 장씨가 다시 궁궐에 돌아오게 된다. 연령군의 생모인 명빈 박씨도 이때 특별상궁으로 승차했다. 야사에 전하기로는 숙종의 부친인 현종에겐 후궁이 단 1명도 없었다 보니 명성왕후 자체가 아들의 첩질을 허용하기 힘들어했다고도 한다.
- ↑ 紅袖之變.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아들들이자 숙종의 당숙에 해당하는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 형제가 내시와 나인들을 심복으로 만들었다거나 심지어 이 나인들과 간통해 아이까지 낳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은 사건이다. 홍수(紅袖)는 직역하면 '붉은 소매'지만 나인들이 붉은 끝동 저고리를 입었기 떄문에 '나인'을 뜻하기도 한다. 이 사건을 쉽게 말하면 종친과 궁녀 사이에 섹스 스캔들이 났다고 보면 된다. 단, 실제로 이렇다 할 증거는 없었다.
- ↑ 반 농담조로 하긴 했지만 남편으로선 나쁜 사람이었던 건 맞다. 사실상의 첫째 부인(인경왕후는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은 폐비 때의 몸고생 마음고생 때문에 복위되어서도 병으로 힘들어하다 죽었고(추측일 뿐이지만 만약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이 딸이 왕비가 되고 나서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숙종의 행적과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원경왕후, 소헌왕후 친정 가문의 전철을 밟았을 수도 있다. 전처(폐비였으니)의 친오빠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비하했던 사람이 숙종이다. 인현왕후의 오빠들은 여동생의 왕비 즉위 후에도 정치계를 떠나지 않았으니 그녀가 폐위될 때 숙종이 그녀의 과거 행적을 캐내어 비난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셈이다.) 둘째 부인은 자신의 손으로 죽였으며(심지어 신하들이 말렸는데도!) 마지막 부인 인원왕후 김씨만이 천수를 누렸다. 비슷한 성격을 가진 먼 외국의 어떤 왕이 생각나는 부분.
- ↑ 해외파 중에서는 관우였고 조선의 인물중 충의 상징으로 내세운 인물은 사육신이다. 남효온의 육신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부터 선비들 사이에 사육신과 단종에 대한 복권론이 있긴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던 것을 실행에 옮기고 강조한 이가 숙종이다. 이후로 사육신의 사적을 복원하는 사업도 착착 진행된다. 사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사육신의 시조는 모두 원래 원작자 미상으로 전해오던 것을 숙종~정조 시기를 거치면서 사육신의 것으로 '비정'된 것이다.
- ↑ '신임사화'라고도 하나, '사화'란 사림이 화를 당한다는 의미이므로, 사림:훈구의 대결이 종식된 이후에 사화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 종묘에 고한 일을 뒤집으려했을 정도로 날뛰었다.
- ↑ 당시 국문이면 뭐 고문 받고 죽으러 가는 길. 게다가 80넘은 노인이니.
- ↑ 원래 유교 사상으로 볼 때 상중에는 부인과 동침도 안 해야 한다. 예학이 교조화된 조선 후반기엔 시부 상중에 임신한 부인이 자살하는 일까지 나온다.
- ↑ 고종의 비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며느리인 어떤 분과는 다른 인물이다.
- ↑ 반면 노신 표연말을 가차없이 패대기친 연산군 같은 왕도 있다.
- ↑ 그런 목적으로 단종의 충신들도 모두 복권되었다. 사실 사육신은 야사 논외로 치고 보면 정말 (조선왕들이 좋아할만한)충신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육신이나 김종서, 황보인 등은 그렇다쳐도 일개 무당까지 복권해서 위패를 배식단에 올려주는 후대 왕들의 행적을 보면 그 목적이 아주 노골적으로 보인다.
- ↑ 역시 정통성에서 문제가 적었던 현종은 이러한 사안에서 무신경했는데 이는 아들인 숙종의 입지가 매우 탄탄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숙종은 정실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였고 후계자인 경종은 어머니 장희빈이 사사당한 약점, 경종이후 왕이 되는 영조는 어머니 출신이 한미한 무수리로 죽은 남편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거짓소문(영조는 숙빈최씨의 둘째 아들이기에 숙종의 자식인 점은 확실하다.)이 떠도는 등 후계자가 되는 두 왕자 모두 정통성에 크나큰 결함이 있었기에 이러한 작업 특히 단종과 그 충신들의 복권은 후계를 생각한 작업이라 추정할 수 있다.
- ↑ 참고로 이완용이 건의하고 주도했다.
- ↑ 조선은 호란의 패배로 인해 전쟁 준비가 금지되어 있었다. 산성의 축성과 수리는 청나라 사신이 꼬투리 잡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문제였다. 자세한 것은 병자호란 참고.
- ↑ 실록에 해구로 적혀있는데 왜구로 보거나. 이양선으로 보기도 한다.
- ↑ 봉우리를 이어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성벽을 따라 돌면 북한산 봉우리를 전부 돌아볼 수 있다. 이런 험한 산지에 성을 쌓고 보초가 기거하는 성랑을 만든 고생은 답이 없을 수준이다. 오늘날 성곽을 복원하는데 있어 헬기가 돌을 실어 나르는데 이를 등짐으로 일일히 올렸다고 생각하면 그 고생이 짐작될 것이다.
- ↑ 여담이지만, 숙종 시대에 축성된 부분은 돌들이 하나같이 크고 아름답다. 기본 가로세로 2자(60cm)인 돌들이 한몸처럼 꽉꽉 짜맞춰져 있으니, 조선 전기에 축성된 부분이 짱돌처럼 보일 정도.
- ↑ 재위기간도 긴편이었다.
- ↑ 이 때 숙종이 '선조대왕도 임진왜란 후에 사배(四拜)를 드렸다'란 전례를 근거로 들었는데, 선조는 명이 구원병을 보내준 상황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 데 반해 숙종은 진심으로 '관공 하악하악'이란 마음가짐이었다.
- ↑ 폐단이 더할나위 없이 크던 왕족의 토지 사유 등을 방치
- ↑ 을해정식으로 황무지를 개간해서 땅을 무한정 늘리는 '절수'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고 이제 각 궁방은 매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해야만 했다. 아울러 민결면세제(民結免稅制)가 시행되어, 궁방은 소유권과 무관한 민전에 호조수세분(戶曹收稅分)만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절수지의 규모를 대략 200결 단위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궁방전의 확대와 이후 궁방재정 통제의 근거로 삼고자 했다.
- ↑ 여말선초와 같은 대격변기가 아닌 이상, 특히 조선시대와 같은 보수적 유교사회에서 세법같이 민감한 주제의 개혁은 임금 하나가 마음먹는다고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동법이 실시되기까지 광해군-인조-효종-현종까지 100년 동안 엄청난 수의 논의와 다양한 중간 조치들이 있었음을 떠올려 보자. 영조 시절 균역법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도 숙종 시대의 여러 조치들이 기반이 되었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해창위 오태주는 글솜씨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인물이었고, 스스로도 시 쓰는 취미를 즐겼던 숙종은 그와 자주 시를 주고받곤 했다. 또 이 시기 왕실에서 쓰던 문서 중에도 숙종이 오태주를 시켜 지은 것이 꽤 많았다고.
- ↑ 오태주의 부친이자 명안공주의 시아버지인 오두인은 인현왕후 폐위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지독한 국문을 받는다. 결국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유배 가는 길에 사망했다.
- ↑ 내용이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할 것. 뒷면 명안공주의 어제치제문에서 당시 숙종의 절망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다.
- ↑ 여러 기록이나 궐에 고양이가 많았다는 기록을 봐서는 무조건 싫어한게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아닌 사람은 싫어하고 취향차이로 보인다. 현대랑 별차이가 없는 듯
- ↑ 임진왜란 때 진주 대첩의 명장 충무공 김시민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 물론 이 김시민은 충무공 김시민보다 훨씬 후대 사람이다.
-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서 금묘가로 검색하면 볼 수 있는데, 아직 고전번역원에서 공식 번역이 되어 있지는 않은 상태. 숙종과 금손이 이야기를 다룬 탐묘인간 웹툰에서 번역본을 볼 수 있다.
- ↑ 살림집과 정자.
- ↑ 정실부인이 낳은 딸.
- ↑ 근데 실록에는 연잉군의 가례비용이 만만치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연잉군에게도 들인 비용이 많았다는 당시의 견해가 있었으니, 연령군에게 들인 비용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사실 동이(드라마)에는 송시열이 등장하지도 않았다. 이 사극에서 숙종 당대의 실제 신료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극중 조정 대신들의 모델이 되는 인물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우의정 오태석(정동환 분)의 모델은 남인의 영수이자 우의정을 지냈고 갑술환국으로 숙청되는 민암이 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