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 등번호 27번(200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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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é Desiderio Rodríguez Lima
호세 데시데리오 로드리게스 리마
1 개요
2 MLB 시절
메이저 통산 89승.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데뷔했으며,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뛰었던 시기가 최전성기였다. 1998년 16승, 1999년 21승을 따내면서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99년에는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사이 영 상 투표 4위를 달성했다. 이 해 마지막 21승째가 바로 박찬호와의 애스트로돔 홈경기 선발대결이었는데, 7 1/3이닝 무실점으로 판정승했으며 승리투수가 되었다.(박찬호는 당시 7연승의 상승세를 타고 있었으며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으나 크레이그 비지오의 솔로홈런으로 패배의 멍에를 썼다.) 당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홈구장이던 애스트로돔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던[2] 리마는 마이크 햄튼과 함께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원투펀치로 활약했다. 하지만 홈 구장이 엔론 필드(현재의 미닛메이드 파크. 엔론 부도 이후 이름을 바꾸었다)로 바뀌면서 리마의 재앙은 시작되었다. 99년 21승 10패, 평균자책점 3.58의 성적이 2000년 7승 16패 평균자책점 6.65로 엄청나게 폭망한 것. 원래 피홈런이 많은 수준이긴 했지만 2000년에는 피홈런만 48개를 허용했다. 수준급의 체인지업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피칭을 하던 리마는 새로운 구장의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고 만다.
결국 저니맨 생활을 이어가다 2004년 LA 다저스에서 13승 5패 평균자책점 4.07의 깜짝 활약[3]을 했고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강타선을 5안타로 잠재우면서 완봉승까지 거둔다. 이후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했는데, 5승 16패 방어율 6.99라는 처참한 기록을 남겼다. 덧붙여 이 2005년 로얄스 시절에 박찬호의 100승 제물이 되며 국내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2006년에는 뉴욕 메츠로 갔는데 승리 없이 4패에 9.87의 방어율을 기록했고, 결국 방출되며 메이저리그 경력을 마감했다.
3 기아 타이거즈 시절
그 이후 도미니카와 멕시코 리그를 전전하다, 2008년 KIA 타이거즈와 계약하게 된다.
리마 타임으로 대표되는 쇼맨쉽이 좋았던 선수.[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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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고 넘치는 리마 관련 움짤들(지금 이거 말고도 더 있다. 야구 방망이를 들고 뜬금없는 골프스윙이라든가…). 단 한 시즌 뛴 선수(그나마 풀타임도 아닌데)치고는 많은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 밖에 한국 프로야구에 입단한 외국인 선수들 중 가장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나이 탓에 구위가 떨어져 장기였던 체인지업도 잘 통하지 않으며 고전하다가 08시즌 중반에 퇴출당하고 말았다. 성적은 당시 김기아씨와 더불어 좋지 않았다. [6]
양현종과 친하기로 유명했다. 기아에 있었을때 아버지 아들 할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면 양현종이 2010년 6월 2일에 완봉승을 기록했을 때, 인터뷰 중 가장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가 '얼마전 세상을 떠난 호세 리마가 생각난다'고 답변했을 정도(양현종은 이 답변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7] #인터뷰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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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재주의 별명 중 하나인 '재주스패로우'의 원형이 된 이 그림이 바로 이 호세 리마가 그린 그림이다.
4 사망
2010년 5월 23일에 급성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하는 비운을 당하게 된다. 워낙에 재미있는 선수여서인지 리마를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목숨을 잃어 더욱..
호세 리마의 성적은 별로였으나, 존재 자체만으로 포스를 뿜어냈는데, 바로 '한국 국가대표' 투수였던 박찬호도 해내지 못한 메이저리그 20승 투수라는 타이틀때문이었다. 박찬호야 말할 것도 없고, 김선우라든지 최희섭이라든지 그저 메이저리그 출신이란 사실만으로 확실한 프리미엄이 붙게 마련인데, 호세리마는 메이저리그에서 21승을 거두며 사이영상 4위 해본 투수였으니까 차원이 달랐다. 특히 박찬호 리즈시절 박찬호와 붙어서 승리하며 뛰는놈위에 나는놈있다라는걸 몸소 보여준 투수였기에 기억하는 팬들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박찬호가 7연승을 거두며 미칠듯한 상승세였는데, 당시 상대 투수가 이미 20승(...)인 투수라서 국내 팬들에게 '저 괴물은 뭐야?' 이런 인상을 받았고, 박찬호가 7이닝 1실점으로 빼어난 호투를 펼쳤음에도 7이닝 무실점으로 박찬호를 제압하며 21승을 찍었으니까 말이다. 한국 최고 박찬호를 꺾었던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니까 메이저리그 팬들에게는 인지도가 있었고 그런 투수를 한국에서 볼 수 있단 것만으로 반가웠을 것이다. 마치 박찬호가 국내 프로야구에서 뛰었을 때 그저 국내에서 보는 것만으로 반가웠듯이.
불암콩콩코믹스에서 추모웹툰을 그리기도 했다심판을 징벌하는 건 덤
- ↑ 등번호 27번은 해태 시절 이호성이 달았던 번호였다.
이호성의 저주?? - ↑ 애스트로돔은 다저 스타디움, 오클랜드 콜리시엄과 더불어 파울지역이 상당히 넓었던, 극단적인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었다.
- ↑ 그럭저럭 잘 던지긴 했지만, 13승은 승운이 좋았다. 같은해 오달리스 페레즈의 성적은 방어율 3.25에 풀타임 선발이었지만, 7승 6패 밖에 못한거해 비하면...
- ↑ 끈적한 친화력, 열악한 무등구장에 대한 놀라운 적응력, 훌륭한 팬서비스 등 한때 MLB 20승 투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팬 입장에서는 최고의 선수였다. 이종범은 그를 성적만 좋았으면 더 많은 인기를 끌었을 선수로 평가했다.
- ↑ 사실 리마타임의 의미는 3가지였다. 하나는 당연히 라틴음악과 함께한 경쾌한 행동들. 2번째는 NBA의 명선수 레지 밀러처럼 리마가 갑자기 전성기를 구가한 것에 대해서 부르는 것으로 사실상 명칭의 어원은 이쪽이고, 마지막으로 LA 다저스 시절 당시도 FC 다저스의 명성에 하나도 부족함이 없던 LA 다저스가 이상하게 호세 리마만 등판하면 타자들이 득점 지원을 잘해줘서 승리를 뽑아냈던 것에 대한 경탄이기도 했다. 2004년 호세 리마의 성적은 13승5패 4.07. 반면 득점지원을 평소처럼 받았던 같은 해 같은 팀의 오달리스 페레즈의 성적은 7승6패 방어율 3.25였다. 다만 2번과 3번의 모습은 한국내에서는 그다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리마타임하면 1번의 의미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 ↑ 참고로 리마를 퇴출시키고 데려온 케인 데이비스는 구위는 그럭저럭 괜찮아 다음시즌 재계약도 고려되었으나, 느린 퀵모션 때문에 낙제점을 받았다.
- ↑ 2008년 양현종이 한참 힘든시절, 너 활발한 성격인 것 다 아는데 왜 그렇게 기죽어 지내냐. 너의 공은 아무도 못친다. 등등의 조언을 해주는 선수가 리마였다고 한다. 2015년 5월 26일, 양현종이 리마의 기일에 134구를 던지는데, 이것이 리마를 추모하자는 의미에서 자신이 무리하면서 까지 던진 것이라고 하며, 실제로 양현종의 모자엔 '리마타임' 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여담이지만 pgr21에 당시 리마와 양현종을 언급하는 글이 있다. 별 상관은 없지만 사람 울리게 하니 한번 읽어보면 좋다.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58396&page=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