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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선수 시절
흔히 알려진 사진. 합성물에서 자주 쓰인다. 눈동자도 합성에서 정면으로 보는 사진도 많다.
이름 | 이호성(李昊星) |
생몰년도 | 1967년 7월 17일 ~ 2008년 3월 10일 |
신체 | 180cm, 80kg, A형 |
출신지 | 전라남도 순천시 |
학력 | 광주서석초 - 충장중 - 광주일고 - 연세대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0년 1차지명 2순위 |
소속팀 | 해태-KIA 타이거즈 (1990~2001) |
범죄유형 | 살인 |
1990년 ~ 1991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 ||||||
1989년 | 1990년 | 1991년 | 1992년 | |||
김일권(태평양 돌핀스)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고원부(빙그레 이글스) | → |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이호성(해태 타이거즈 | → |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 → |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김응국(롯데 자이언츠)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7번 (1990~2001) | ||||
김봉연(1982~1988) | → | 이호성(1990~2001) | → | 강철민(2002~2007)[1] |
해태 타이거즈 역대 주장 | |||||||||||
이강철 (1998) | → | 이호성 (1999~2001) | → | KIA로 이어짐 |
KIA 타이거즈 역대 주장 | |||||||||||
해태에 이어서 | → | 이호성 (2001) | → | 이종범 (2002~2004) |
1 개요
전직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출신의 중심타자였던 야구선수.
그러나 은퇴 후 4모녀를 살해 후 매장한 범죄자.
2 선수 시절
연세대를 졸업하고 1990년 해태 타이거즈에서 데뷔했으며 1990년과 1991년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팀을 한국시리즈 4번이나 우승시키는 등 우승주역으로 떠올랐으며 해태 타이거즈의 4번타자의 한 축을 담당했다. 등번호는 27번으로, 바로 원년 홈런왕이었던 김봉연의 번호였다. 대선배의 번호를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팀이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다만 부상을 자주 당했기 때문인지, 신인 3할을 기록했던 1990년과 20-20 클럽에 가입한 1991년, 그리고 앞의 2년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100안타와 두 자릿수 홈런을 넘긴 1997년을 제외하고는 연도별 성적 자체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1993~97 이종범과 양준혁이 양분하던 시기는 투고타저가 심한지라 25~30홈런 치면 홈런왕이고 팀방어율이 개나소나 3점대 초반도 심심치 않게 찍었으니 저평가될 법하다.[3]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현대와 2승 2패로 맞선 5차전에서 1:0으로 리드하는 상황에서 잠실 야구장의 좌중간을 훌쩍 넘기는 투런 홈런을 작렬시켰다. 결국 그 게임은 3:1로 해태의 승리, 시리즈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요한 한 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언급한 이유로 지금은 주목도 못 받는다. 그 사건 이후 해태가 한국시리즈 또는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한 하이라이트를 보여줄 때 이분이 죄다 편집되거나, 한경기가 통째로 1시간 분량이 나올 때는 타자 언급도 안하면서 잘해야 타격하는 부분[4]만 나온다.
<앗! 시리즈> 중 87권인 <야구가 야단법석>에서 꽤나 많이(3~4번) 언급된 선수이기도 하다(글러브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모자로 공을 받아서 상대팀 주자들을 3루 진루시켰다든가…)
그 외에도 LG 외야수인 이병훈에게 대타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허용한 외야수가 이호성이다. 그 외에도 1994~1995년에 LG에서 해태로 온 이병훈이 이적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반발하여 싸운 선수가 당시 입단동기인 이호성이었다. 덕분에 둘은 어느정도 친해졌다고...
힘이 무지막지해서 신인 때는 라커룸 벤치에 튀어 나온 못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서 박았다고 한다.# 홈런을 쳐서 무등구장 바깥의 무등수영장 기둥까지 공을 날렸던 선수. 싸움 실력이 대단해서 광주 시내에서 조폭 4명과 붙어서 4:1로 순식간에 조폭들을 때려잡은 전설도 있다.#
김기태와 함께 선수협 5적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선수협을 거부하며 프런트의 지시에 따라 선수협에 찬성하는 해태 선수들을 불러다가 군기반장이었던 자신이 직접 빠따로 때렸기 때문. 강병규의 트위터에 따르면 자기가 주장인데 왜 애들을 멋대로 부르냐며 양준혁을 때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3대 선수협 회장을 지낸 바 있다.# 원래 선수협 반대파였기 때문인지 구단에서 어용 회장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최저 연봉 인상이나 복지기금 조성 등을 이뤄내며 선수협 회장으로서 제대로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 특히 2001년 하반기에는 KBO의 외국인선수 기용 확대 움직임에 맞서 '포스트시즌 보이콧'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하여 한때 KBO와 구단측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결국 2001년에 이른 감이 있는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호성을 어용 회장으로 앉혀놨더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수협을 이끌어나가자 구단이 당황하여 은퇴를 종용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인지 2001년은 몇 경기밖에 못 나갔고, 플레잉코치로 보내다가 시즌 끝나자마자 방출되어 은퇴했다.
1990 ~ 2001 시즌까지 1,090경기에 출장. 통산 타율 0.272, 홈런 102, 도루 167, 득점 562, 타점 526, OPS 0.780을 기록. 커리어 하이인 91 시즌에는 타율 0.288, 홈런 21, 도루 25, 득점 98, 타점 84, OPS 0.887을 기록. 도루성공률이 75.2%로 매우 좋은 수준이었고 1992~93시즌에는 25연속 도루성공을 기록하였으며 97년 이종범이 갱신할 때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스탯티즈 기준으로 1990년대 야수들 중 WAR 13위를 기록, 동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강석천, 김상호, 김경기 등을 능가하는 수준이다.[5] 즉, 공수주 삼박자를 갖췄으며, 이종범이나 홍현우처럼 팀을 견인할만한 특급 선수는 아니었지만 한 팀의 중심타자로서는 꾸준히 괜찮은 수준의 성적을 냈다고 볼 수 있다. 이종범이 야구천재라면 이호성은 야구수재라고 보면 될 듯.. 김상훈이나 유동훈, 김종국 등도 은퇴식을 치뤄주는 마당에, 레전드 급에는 못미치겠지만 충분히 은퇴식을 치뤄줄만한 선수이기도 했다. 특히 1년짜리 4번타자인 최희섭이나 10승도 못하고 은퇴한 서재응을 생각해보면 더욱...
3 은퇴, 그리고 몰락
이런저런 복잡한 이야기를 거쳐 은퇴를 했지만, 예식사업에 뛰어들면서 사회인으로서 잘 정착해나가는 듯했다. 호성 웨딩문화원을 설립하여 직원은 70여명에 연간 매출액이 70~80여억원에 달할 정도로 번창하였고, 장성호를 비롯한 기아 선수들도 결혼식을 할 때 호성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을 확장하기로 마음을 먹는데 이것이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순천에서 실내 화상 경마장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100억정도가 소요되는 마권사업에 자본금이 모자라자 가족들을 보증인으로 해 10억원을 빌렸고 그것도 모자라 은행에 담보를 잡고 35억원을 빌렸다. 하지만 주민들의 도박장 반대 여론에 밀려 경마장 사업은 백지화되었고, 이호성은 청와대에까지 탄원서를 올려보았으나 무소용이었다. 결국 100억원이라는 초대형 부도를 내고사업을 말아먹게 된 것.#
도박장 사업은 말 그대로 복불복인데, 철저한 사전준비나 조사가 없이 남의 말만 믿고사업자금을 몰빵한게 컸었다고 한다. 그냥 웨딩홀 사업에만 매진했으면 그가 이렇게 몰락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족이지만, 사건이 화제가 될 당시 일부에서는 그가 소위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휘둘린 결과가 도박장 사업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또, 웨딩홀 사업이 해가 갈수록 잘 안되어서 도박을 한 결과라는 말도 있었다.
그는 후에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운동선수만 하다사회 물정을 너무 몰라 벌어진 일이다. 사회 경험이 없어 아무나 쉽게 믿었던 것이 큰 화근이었다"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사실 운동선수나 군인, 교사[6], 연예인 같은 직종은 타 직종과의 연계율이 매우 낮아, 자기 일엔 프로라 해도 자기 분야만 벗어나면 생초짜나 다름이 없다. 특히 운동이나 연예계처럼 중고등학생 때부터 그것만을 목표로 두는 경우엔 다른 진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기본적인 공부가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막상 어른이 되어 그 일에서 은퇴하면 사회성이 떨어져 사고를 치기 쉽다.[7] 이후 축구계에서도 승부조작으로 제명되었던 김동현이 제명 후에도 납치/강도죄를 저질러 구속된 것과 청소년기부터 뻑치기 전과로 유명했던 위대한이 임의탈퇴 이후 조폭이 되어 상습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대표적으로, 게다가 한국은 서열을 중시하는 나라인지라 선수의 경우 학생시절 때부터 선후배간 구타 같은 악습이 유난해 사회성에 더욱 악영향을 끼치는 문제도 있다.
물론 한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타 분야로의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한들 본인의 문제점을 놔두고 모두 환경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은퇴 후 열심히 공부해서 재취업에 성공한 사례도 분명 있으며, 악조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도 많고, 순조건 속에서도 막장화한 인간도 흔하기 때문이다. 장정구의 경우는 은퇴 후 경제난 때문에 재데뷔를 해서 얼마동안 현역에서 좀 뛴 뒤 체육관을 차렸고 이 외에도 모든 종목의 스포츠 감독들이 선수 출신이지만 선수 시절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선수였던 감독들이 더 많다. 굴지의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들이라는 조세 무리뉴, 요아힘 뢰브, 알레한드로 사베야, 거스 히딩크나 메이저리그 감독 출신의 스파키 앤더슨, 토니 라 루사 등은 전원 선수시절엔 별볼일 없던 사람들이 감독이 되고 나서 스타가 된 사람들이다.
세상 물정과는 별도로 그가 만족을 모르고 과도하게 욕심을 냈던 것은 사실이고, 선수 시절 군기반장을 해먹었을 정도로 천성이 터프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실 예식장 하나로 만족했거나 차라리 너무 게을러서 선수시절 번 돈을 까먹으며 살았어도 절대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설령 아무리 궁지에 몰렸었다 해도, 그에게 최소한의 윤리관이나마 있었다면 적어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판단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은퇴 후 사업가로 변신한 사례 중에서 좋은 사례가 같은 팀에 있었던 동료 였던 최해식이 있다.
4 살인 사건
이호성 살인 사건 참고.
5 최후
동거녀의 일가족을 살해한 이호성은 결국 투신자살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사망 시점은 2008년 3월 10일 새벽으로 추정된다.
저정도 업적이 있는 프로 운동선수면 장례식에 수많은 조화로 가득차야 하는데 방문객이 없어 장례식장에 불이 꺼져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들도 화환을 보내주는 S급까진 아니지만 B 내지 A급은 충분히 되는 양반인데 현역 시절 같은 팀 동료나 친했던 선수, 감독의 조화조차 없었다는 말은 얼마나 인간이 글러먹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옆 빈소의 어떤 시민 인터뷰가 압권이다. "살인만 안 했어도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정파를 떠나, 동업자의 죽음은 애도하는 것이 맞다.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 빈소에 한겨레신문 사장, 정의당 등이 조화를 보낸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김영삼 대통령 사망 당시에도 정파와 무관히 하나되어 조문하는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으며 정쟁도 쉬어갈 정도로 조문 정국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호성은... 그런 거 없다. 심지어 선친 산소가 있는 교회 공동묘지를 장지로 하려다가 땅 주인인 교회가 거부했다[8]
얼마나 이호성이 막장이면 마지막 길마저 외로웠을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6 여담
- 호성 드립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 마구마구에서는 '장산격' 이란 카드로 개명되었으며,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신영수', 슬러거에서는 '이화민', 컴투스 프로야구 for 매니저에서는 이합민으로 개명되어 있다. 특히 위의 사건으로 인하여 마구마구측은 몇 차례 진행된 재평가에서 '장산격' 카드의 능력치를 단 한번도 재평가 하지 않았다. 91시즌 0.288 125안타 21홈런 25도루라는 몇차례 재평가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레어카드를 받을 수 있는 기록이지만 노렙업 기준 평균 스탯이 72로 노말급 능력치이다. 다만 다른 야구게임에서는 가명 처리는 하되 능력치는 제대로 줬으며, 살인미수로 1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범수로 7년여만에 출소한 우게쓰 어비나 (우게쓰.U)는 재평가로 레어가 나왔던 지라 논란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9][10]
하지만 진짜 이호성 레어가 나오면 91해태는 너무 강해진다[11]
- 이사만루2015 KBO에는 '이후선'으로 개명되어 있다.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1990년, 1991년 시즌의 슈퍼스타 등급 카드와 현역 마지막 시즌인 2000년의 일반 카드[12]가 존재한다. 그런데 웃기는 점은, 모든[13] 이후선 슈퍼스타 카드에는 당시 이호성의 사진이 있어서 해당 카드를 획득한 유저들을 지리게 했다 카더라. 더더군다나 정면사진에 흑백사진이 있으니 더욱 지렸다. 참고로 91 이후선은 타격스탯이 준수한 15성으로 실장됐다. 흠좀무
- 마구마구 2014에서는 본명으로 나왔고 레어카드도 존재한다. 다만, 저 레어카드는 골든글러브 수상자여서 존재 하는 것으로[14], 당연히 스페셜카드와 공존한다.
- 야구계나 대한민국의 웬만한 야구사이트에서는 거의 언급금지의 인물이다. 예를 들자면 엠엘비파크 한국야구게시판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이 금지어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컴투스 프로야구 2016에는 아예 카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야갤에선 그러한 금기는 당연히 없으나 떡밥이 식어서 언급이 되지 않는다.
- 왠지 모르지만 심영(야인시대)과도 자주 엮인다. 물론 알다시피 이 사람은 이호성에게 공격당하는 역할이다.(...)
- (현재는 플레이 불가인)I Wanna Kill The Happil에서는 세번이나 써먹었다. (성님, 호성그린, 호성타브)
- 어린이 & 가족 살해에 이은 자살이라는 점에서 1년 앞서 일어난 미국 프로레슬러 크리스 벤와 사건과 비교된다.
- ↑ 강철민은 신인 먹튀가 되었다.
- ↑ 첫번째는 김성한. 같은 해의 장종훈도 가입했지만 이호성이 약간 빠르다.
- ↑ 또한 이 시기에는 지명타자 골든글러브의 수상자 성적도 겨우 2할 5푼대에 불과했다.
- ↑ 1994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4번타자로 나와 정민철을 상대로 2안타 2타점에 고의사구까지 얻었는데도, 9번타자 이경복까지 9번타자라며 자막이 나온다.
- ↑ 마지막 전성기였던 97년까지로 압축한다면 top10에 들어간다. 그 사이 이승엽, 박정태 등이 그를 추월.
- ↑ 공무원은 그래도 좀 낫다. 일부 직종의 경우 자격증이 요구되는데 이걸 이용해서 타 직종과 연계할 수 있다.
- ↑ 일본야구협회에서는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은퇴선수를 위한 직업교육, 구직 활동 지원을 하고 있으나 한국 스포츠계는 이런 제도가 상대적으로 미비하다.
- ↑ 납골당 입장에서는 유명인 사망시 유해를 서로 모시려고 한다. 실제로 최진실의 묘소는 해당 납골당에서 매우 크게 장식해 두었고 눈에 띄는 곳에 전진배치되어 있다. 이 점을 감안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2005년 노동자 5명을 마체테로 공격하고 휘발유를 부으려고 했다. 14년 7개월 형 선고받고 현재는 가석방 상태
- ↑ 사실 우게쓰 어비나의 경우 해외야구에 관심이 있지 않는 한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다. 그러나 이호성의 경우에는 일가족 살인 사건으로 사회에 큰 파장을 줌으로써 야구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상당히 유명해졌다. 또한 이 사건에서 파생된 호성드립 등이 합필갤 등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이미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한 상태이므로 어비나와의 단순비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 ↑ 다만 선수영입, 유망주 시스템이 나오면서 91해태에는 좌익수와 우익수에 퀵스로잉 용병, 유망주를 넣어 외야 3퀵스를 만드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호성 레어가 나온다고 가정해도 퀵스로잉이 없다면 그리 큰 의미는 없다. 무엇보다 16 KBO 업데이트로 인해 좌익수에 김주찬 엘리트가 출시된 탓에...
- ↑ 레전드 등급까지 승급 가능
- ↑ 90 이호성 슈스에도 사진이 있다. 다만 정면 사진은 아니라
지리는 정도파급력은 좀 덜한듯. - ↑ 1996, 1997년에 2할 4푼치고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받은 박재용도 노말과 스페셜 사이의 능력치를 가진 레어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