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덕영

KFA 선정 명예의 전당 7인
김용식홍덕영이회택차범근김화집히딩크정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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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때 경기전 축구화를 수선할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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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드셨을 때 모습.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
성명홍덕영
생몰일1926년 5월 5일 ~ 2005년 9월 13일
국적대한민국
학력보성전문학교 (현 고려대학교)
수상2005년 축구 명예의 전당 선수부문 헌액, 1974년 FIFA 국제축구연맹 심판특별상
경력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 1985~1987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1969~1976 서울은행 감독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최선의 노력을 다해 월드컵 본선에서 맹활약하여 전세계에서 인정받으며 대한민국을 알린 골키퍼.

비록 월드컵에서 2경기 16실점이라는 성적을 냈지만,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던 골키퍼.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골키퍼)이자, 전 축구감독이다.

1 생애

함흥 출신으로 8.15 광복후 남한으로 건너와 정착했다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주전 골키퍼는 따로 있었는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홍덕영 씨가 대신 뛴 것이라고 한다. 당시 구경만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주전 골키퍼로 발탁되시는 바람에 되게 무섭고 떨렸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16강전[1]에서 멕시코와 맞붙었는데 결과는 5:3으로 한국이 승리했다.

그리고, 홍덕영 골키퍼는 당시 축구 강호 멕시코를 상대로 불과 3실점밖에 하지않는 놀라운 성적을 낸다. 그러나 8강전에서 스웨덴에게 12:0으로 패배하며 홍덕영 골키퍼의 첫 국제대회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홍덕영 골키퍼가 막아낸 슛의 갯수인데 당시 스웨덴의 슛 개수가 무려 48개였다. 즉, 홍덕영 골키퍼는 48개의 슈팅 중 36개의 슈팅들을 막아냈고 이는 매우 선전한 것이었다. 당시 양 팀의 수준을 감안한다면 매우 놀라운 성적임이 분명하다.

1.1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서의 활약

그 뒤, 1954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일본과 맞붙었는데[2] 당시에는 8.15 광복 직후라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커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놈들이 한국 땅을 밟는 것을 두 눈 뜨고 못 본다"라고 하는 바람에 1, 2차전 모두 일본에서 원정경기를 치뤄졌다.

1차전의 결과는 5:1 한국의 대승. 홍덕영 골키퍼는 당시 우리보다 축구를 더 잘하는 일본 국대를 상대로 90분 내내 1실점밖에 하지 않는 그야말로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주며 일본 국대를 데꿀멍 시켰다. 그리고 2차전에서 2:2로 비기며 한국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그러나, 당시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가 국내에 없어서 선수단은 여러나라를 거쳐서 일주일 만에 스위스에 도착했고 그야말로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경기를 치뤘다. 참고로 스위스에 도착한 때가 첫 경기인 헝가리전 바로 전날 밤 10시였다고 한다.

결국, 조별 예선 1차전 헝가리전에서 선전했으나 9:0으로 패하고[3] 2차전 터키전에선 7:0으로 패배하며 조기에 짐을 싸 귀국해야 했다. 하지만 푸쉬카시를 필두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헝가리와 경기 일주일 거쳐서 경기 전날 밤 10시에 1진 11명만 도착했고 등번호가 필요하다는것 조차 알지못해 일일히 등번호를 꿰매야 했던 한국의 열악한 처지를 고려하면 최소 20:0으로 패배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겨우 9:0이란건 정말 엄청나게 선전한거다. 홍덕영 골키퍼는 이날 경기에 대해 "푸스카스의 슛은 정말 강해서 위잉 소리가 났고,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라고 술회했다. 실제로, 경기가 끝나고 난 뒤에는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홍덕영 골키퍼는 불과 9실점밖에 하지않는 그야말로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경기내내 그렇게 무리를 하다 보니 나중엔 너무 힘들어서 공을 잡으면 고의로 밖으로 차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공을 1개 가지고 했기 때문에 공이 올 때 까지 좀 쉬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 터키전에서도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주면서 불과 7실점밖에 하지 않았는데, 이것도 정말 대단한 활약이었다.

2 그 후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수상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4] 1957년에 선수생활을 접고 심판으로서 10여년 간 활동했다가 1959년 부터 1962년 까지 자신이 선수로서 활약했던 고려대 감독을 맡아 활약했고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서울은행의 감독직을 맡아 활약했다. 1985년부터 이듬해인 1986년 까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년엔 당뇨합병증으로 인해 시력을 잃고 발가락 절단 수술까지 하는 고생을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2005년 9월 13일 별세한다. 향년 79세.

  1. 올림픽은 월드컵과 달리 16개국만 참여한다.
  2. 지역예선 할 때 같은 조에 중화민국도 있었는데 중화민국이 기권해서 실제 경기가 치뤄지진 않았다.
  3. 경기 중에 4명의 선수가 쥐가 나는 바람에 7명이서 뛰게 된 상태였다. (당시에는 골키퍼 말고 선수를 교체할 수 없었다) 당시의 故 홍덕영 골키퍼는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 공세를 막아내다가 갈비뼈가 골절될 정도로 투혼을 보였기에, 경기가 끝나고 일부 관중들이 이러한 활약에 감동하여 故 홍덕영 골키퍼에게 사인도 받아갔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해외 언론은 20-0 내지 그 이상의 스코어를 점친 곳도 많았다. 되려 9-0으로 졌다고 놀랐을 정도.
  4. 옛날에는 동남아가 아시아 쪽에서 축구를 잘하던편이였고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이니 은메들도 그당시에 매우 선전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