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 이념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어 문서를 열람할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한 문서의 악의적 서술 · 편집은 민사 · 형사 상 소송이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KFA 선정 명예의 전당 7인 | ||||||
김용식 | 홍덕영 | 이회택 | 차범근 | 김화집 | 히딩크 | 정몽준 |
350px | |
이름 | 정몽준(鄭夢準) |
출생일 | 1951년 10월 27일 |
출생지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
본관 | 하동 정씨 |
본적 | 강원도 통천군 |
신체 | 180cm, 83kg, O형 |
학력 | 장충국민학교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 |
가족 |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1] 배우자 김영명, 슬하 2남 2녀 |
종교 | 개신교 |
정당 | 새누리당 |
직업 | 정치인 |
대한축구협회 회장 | |||||
김우중(45대~46대) | → | 정몽준(47대~50대) | → | 조중연(51대) |
대한양궁협회 회장 | |||||
1983년 창설 | → | 정몽준(초대) | → | 정몽구(2~5대) |
1 개요
1951년 10월 27일생.정주영 회장의 6남으로 현대중공업의 대주주[2]이자 새누리당 소속의 전직 7선 국회의원.[3] 전 FIFA 부회장(4선, 현 명예 부회장), 대한축구협회 전 회장. 여담으로 과거 새누리당 의원 재산 조사를 하면 항상 정몽준 의원 덕분에 급격히 오르는 경향이 있어서(...) 그는 빼고 조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전 의원이 되었으니 다행(?).
2 정치인이 되기 전
장충초등학교,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과거 합격한 이방원이 자랑스러운 이성계의 심리 근데 최고 라이벌 재벌의 손자도 서울대 나옴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정주영 회장에게 사랑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그룹을 물려줄 생각도 해봤으나 본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치자금용으로 현대중공업 그룹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4]
여담으로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해 학력 콤플렉스를 가졌던 정주영 회장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아들을 총애했다고 한다. 또 이런 총애 덕분인지 형제들 중에 가장 빠른 31세에 사장이 되는 기염을 토했고, 배짱도 어지간했는지 천하의 왕회장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놀라운 일을 해내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병역은 재벌답지 않게 ROTC로 복무했는데 후보생 시절 동기들의 단가방을 자비로 다 갈아치우기도 했다. 기업가인 만큼 장기복무는 하지 않고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부인은 고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딸인 김영명 씨이다.
3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한나라당계 정당의 비주류 거물로 인식되고 있지만[5][6] 의외로 그 당에 속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텃밭인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고, 14대 총선에서는 아버지 왕회장이 대선 출마를 하기 위해 만들었던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고, 당 대변인, 당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90년대 왕회장의 대선 패배, 대선 출마에 따른 정치 보복 논란이[7] 이어지면서 통일국민당이 와해되자 다년간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땐 오히려 영남 기반 정치인임에도 한나라당보단 당시 여당이었던 DJP 연합쪽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정치인생에서 대권주자로서 리즈시기는 2천년대 초반이었는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유치하며 정치적 입지가 급부상하였고,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기적적인 4강에 오르면서 대선 후보로 주가가 더욱 상승했다. 먼가 냄비근성스럽지만 넘어가자 이에 대선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국민통합21을 만들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여론조사로 후보 단일화를 했으나 패하고 만다. 정몽준 씨는 이후 지지활동에 나섰으나, 선거일 전날 밤 지지를 돌연 철회했다.[8] 하지만 노무현 후보가 대선에서 이기면서 결과적으로 정몽준은 하루만 더 참았으면 얻을 수 있었던 국무총리직을 스스로 날려먹은 셈이 되었고, 이후 대권주자로서의 입지 또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국민통합21은 대표 1명만 의원(제17대 국회의원 선거)으로 있는 정당으로 지내다가 2004년 9월 해체되고 정몽준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입당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후 한나라당에서 대표최고위원(2010년)까지 지내지만[9] 월드컵 열기가 식어 예전만큼 대권주자로 두각을 보이진 못한다. 재벌에게 정치권력까지 주면 안된다는 심리도 반영이 좀 된듯하고. 여튼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산 동구 대신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재선했다. 참고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작구 을에서 그와 대적한 후보는 현대자동차 사장과 현대카드 회장을 역임한 이계안 전 의원이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나섰다. 당초에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마땅한 후보가 없던 새누리당의 강력한 요청과 함께 당시 안철수의 신당 창당 활동으로 야당표가 갈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입장을 바꿨다. 같은 당의 김황식, 이혜훈과 경선을 치러 5월 13일에 최종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후보 등록과 함께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현직 박원순 시장에게 큰 표차로 패배, 낙선하였다. 게다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가족들의 팀킬, 후보자 토론에서의 발언으로 네타 캐릭터에 등극했다.(...) 자세한 내용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화젯거리 항목을 참고.
현대중공업이 있는 동구(울산)는 아래의 당선이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정치적 기반이다. 그야말로 어떤 소속으로 나오든 거뜬히 5선을 해냈고, 특히 울산은 노동계의 정치세력이 굉장히 강한 곳임을 감안하면 동구에서 그의 정치적 기반은 대단히 탄탄하다고 할 수 있다. 정몽준이 서울로 지역구를 옮겼지만, 그의 뒤를 이어 2선을 한 안효대 의원 또한 현대중공업 임원 출신으로 대놓고 정몽준 라인으로 분류된다. 최소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입지를 상실할 여지는 없는 셈. 다만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후 2016년 20대 총선에는 아예 불출마하였다. 그 대신 이런 글을 블로그에 올려 안효대 의원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낙선..안습
3.1 국제정치학 박사
1993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SAIS)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본인의 프로필에도 '국제정치학 박사'임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본인의 주도로 설립된 아산정책연구원이 최근 빠른 속도로 국내 유수의 국제정치 연구기관으로 성장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핵무장론이 국내외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배경으로 작용했다.[10] 하지만 정몽준의 박사 논문 주제인 "일본의 정부-기업간 관계: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원제: The government-business relationship of Japan : a case study of the Japanese automobile industry)는 외교, 국제분쟁과 같은 일반적인 국제정치보다는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비교정치, 정치경제 부문에 더 가깝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국제정치는 이런 지역정치학 역시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다소 의문이 가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납득의 여지는 있는 편.
3.2 재산
구 버전 하위 1위에 누군가가 보인다면 기분탓이다.
2015년
한국의 국회의원 재산 상위 1위를 항상 고수하고 있으며 알려진 재산총액은 2조'원[11]대이다. 국회의원 안해도 떵떵거리며 살겠는데 워낙 천문학적 금액이라 국회의원들의 평균 재산액이 언론에 보도될 때, 정몽준 재산은 반드시 빼고 평균을 계산하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다.[12] 평균금액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정도로 재산 액수가 엄청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사람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뇌물을 뿌린다면 몰라도 절대 뇌물을 받지 않을 정치인으로 꼽는 1순위가 정몽준이다. 물론 다른 의미로 2조 원을 300으로 나누면 67억 원이다(...) 2조를 빼도 4위다. 물론 어디까지나 정몽준이 부자인 이유는 다른 국회의원들과는 달리 현대중공업이라는 대기업의 대주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몽준이 국회를 떠나며 1위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었다.[13]
4 국내 축구계의 초거물
한국 축구 역사에서 정몽준의 공로는 그야말로 지대하다.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전 당시 한국은 일본보다 5년이나 늦게 유치 준비를 시작한데다, 당시 FIFA의 주앙 아벨란제 회장은 대놓고 일빠였다. 하지만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정몽준은 치열한 축구 외교전을 벌였고 현대그룹의 재력까지 총동원하여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인 디에고 마라도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등의 성과를 쌓아가며 기적적으로 공동개최안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리고 2002년 한일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그 후의 한국 축구의 비약적인 발전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14] 일선에서 물러난 현재까지도 한국 축구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몽준과 현대 家의 영향력이 없으면 한국축구는 지금처럼 운영하기가 힘들어 질 것이다. 이것은 정몽준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명백하게 인정하는 사실이다. K리그도 공식 스폰서가 현대 오일뱅크다. 덕분에 축덕 겸 가수협회장 김흥국이 측근이 되었다[15]
파일:Attachment/e0006522 4d25a977cf3de.jpg
사진은 AFC회장선거에서 정몽준 지지파가 떨어졌을 당시 사진으로 정몽준의 침울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미소짓는 제프 블라터. 자세한 내역은 항목참조..
FIFA 회장이나 AFC 회장직도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제프 블라터와 반목했었고 반블라터파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을 지지하며 그의 FIFA 회장 선거를 열심히 도왔으나 완패를 당했고, 이후 요한손이 블라터 지지를 얻은 미셸 플라티니에게 UEFA 회장 재선에 실패하면서 피파 내에서 블라터파에게 많은 견제를 받아야 했다. 결국 2011년 정몽준은 FIFA 부회장 5선을 노렸으나 블라터의 지지를 받은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에게 패하여 떨어지고 명예 부회장이 됐다. 하지만 말 그대로 명예직이라 아무런 권한이 없기에 더 이상 FIFA에선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진 못한다.
그의 몰락은 한국 축구 국제 외교력의 몰락이라는 말도 있으나 김운용과 마찬가지로 후계자를 전혀 만들지 않고 자신의 집권에만 신경썼다는 지적도 있다.
주앙 아벨란제 전 FIFA 회장의 심복이 바로 제프 블라터였다. 덕분에 아벨란제가 물러난 뒤로 터진 그의 비리혐의를 죄다 블라터가 쉴드쳐주거나 덮어버려서 그 어떤 수사도 조사도 이뤄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IOC 위원장 자크 로게는 전 위원장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심복으로 역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두 조직 부회장, 부위원장인 정몽준, 김운용은 전혀 후계자 및 지지 후임자가 전무했다.
반면 블라터에 맞서다가 지금은 야인이 된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회장은 후임을 여럿 둬서 이들이 현재도 UEFA 고위직으로 남아서 플라티니의 경쟁후보로 남아있다. 그래서 블라터와 플라티니가 요한손 전회장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이들이 똑같이 막아버린 거와 달리 김운용, 정몽준은 그러질 못했다. 파벌까지 뿌리뽑고 IOC에서 어떤 명예직도 없고 축출당한 김운용과 달리 그나마 정몽준이야 비리적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기에 명예부회장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걸 내주긴 했지만.
그의 몰락에 대하여 IOC가 안타까워했다는 후문. 2012 런던 올림픽까진 23살 이하 선수로 3명에 한하여 축구 와일드카드가 이뤄지고 있다.
이후론 21살 이하 선수로 자격을 제한하거나 아예 21살 이하 축구 대회를 올림픽 축구로 대처하고 블라터 뜻대로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부터는 와일드카드 및 올림픽 축구 제한이 바꿔질 예정이라는 루머도 있으나 아직까지 이에 관련되어 확정된 사안은 없다.
사실 한국에선 경악할 일이겠지만 U-20 청소년 월드컵은 유럽 축구리그에서 외면하는 게 크다. 유달리 아프리카에서 청소년 축구와 올림픽 축구 성적이 좋은 점으로 유럽 리그에서 외면하던 게 원인이라는 분석도 많다. 사실 경기 수익도 월드컵에 견주면 없는 수준이며 우승상금도 없는 명예대회인지라 올림픽 축구에 병합해도 FIFA에선 별다른 피해도 없다. 그저 유망주 발굴이라는 요소로 보면 되니까. 게다가 21살 이하로 와일드 카드를 줄이자면 20살 이하 축구대회와 차이가 없고 유망주 및 선수 혹사라는 비판 및 문제도 없앤다고 여기기 때문에 90년대부터 꾸준히 FIFA에서 논의하던 사항이다.
이젠 피파에선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기에 정치인으로만 활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와 범현대가는 한국 축구계쪽에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013년 기준 축구협회장인 정몽규가 그의 사촌동생이기도 하고.
2018월드컵 개최지투표에서 한국은 영국에 투표하고 영국은 2022월드컵에서 한국에 표를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나왔다. 그리곤 영국측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항의하자 "이것이 축구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그러나 제프 블래터가 회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FIFA회장 출마여부를 국제 축구 인사계들을 만나 경청한 후 좀 더 차분히 결정할 것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6월말 들어서 피파 회장에 도전한다고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몽준의 피파 회장 당선에 대해서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아프리카 및 아시아 쪽 상당수 피파 임원들이 블라터 지지파이며[16] 다른 경쟁자들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아시아 축구연맹을 좌우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아랍 측에서도 정몽준을 견제해오는 게 사실. 위에 서술한 대로 정몽준을 그동안 피파 부회장이나 AFC에서도 견제하고자 블라터가 지지하던 게 아랍 측 인사였듯이. 게다가 블라터 반대파가 가장 많은 유럽 쪽도 유럽파 후보를 지지할게 뻔하다.
2015년 7월 23일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8월에 공식 출마선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선가능성이 그렇게 높지 않지만, 출마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8월 들어서 강력하게 어필하고 개혁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후보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회장을 블래터 전 피파 회장과 아들과 아버지라고 비난하면서 나서고 있다. 문제는 2015년 들어서 터진 현대중공업 비리 문제로 반대 후보들이 기업 하나 감당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피파 개혁을 외치냐고 맞설 거리를 만들어버린 셈. 게다가 더더욱 문제는 AFC 안에서조차 정몽준 지지세는 그리 없다는 점[17] 사실상 정몽준이 승리보단 정치적인 홍보로 이미지를 남기고자 크게 나선다는 반응이다. 이런 가운데 정몽준 사촌동생인 정몽규 축구협회 회장이 지지를 표명하며 피파 내에서 정몽준 입지를 보여주고자 2005년 8월 이후 끊긴 남북친선 평화축구 부활을 부르짖었으나....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서부전선 포격 사건이 터지는 통에 이건 가망이 없게 되었다.
정몽준 본인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아는지 2015년 9월, AFC가 블래터 똘마니라는 듯한 발언을 하며 하고픈 말을 다했다. 당연히 AFC에서는 분노했다....
시사저널 지에서도 사실상 정몽준이 회장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기사로 분석한 바 있다. 유럽에서는 플라티니를 비난하면서도 사실상 그가 된거나 다름없다고 본다고 독일 및 여러 유럽 나라 언론을 보도하고, 남미, 아프리카는 플라티니 절대 지지세, 북중미도 미국 빼고 플라티니 지지세, 오세아니아랑 아시아도 마찬가지라면서...정몽준이 안된다는 글은 없으나 해외 5대륙 반응, 외신 보도로 보면 딱히 가망이 없어보인다.
여기에 FIFA 윤리위원회에서 2022 월드컵 대회 유치과정에서 한국 유치위원회의 국제축구발전기금 조성안 계획을 각국 집행위원들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15년, 윤리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로 4년을 구형받았다. 정몽준 측 "FIFA 윤리위, 정 회장 제재 확정할 듯" 이에 한국의 법률회사인 '김앤장'이 정몽준을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는 기사가 떴다.김앤장 'FIFA 징계 위기' 정몽준 살리기 나서 다만 정몽준 자신은 이에 대해 자신이 개혁세력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꿈보다 해몽'급 해석을 시전했다. 자료기사 결국 2015년 10월 8일에 FIFA로부터 6년간의 자격정지를 받았다.
이에 항소했지만 기각당해 사실상 피파 회장 도전은 나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사실 피파 회장은 너무나도 가망이 없었고 차라리 부회장 선거로 나가고 강력한 회장 후보를 지지했더라면 어떨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물론 플라티니가 너무나도 굳세 다른 후보로도 도저히 가망이 없었다는 의견, 그리고 이전에 요한손을 이렇게 밀어줬다가 참패하고 자신도 부회장에서 오래가지 못했던 일이 있었기에 이것도 어렵다는 분석도 많았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후 플라티니, 블래터도 정몽준이랑 같이 징계 및 처벌을 받아 피파에서 사실상 매장되었다.(...) 셋이서 나란히 바이바이 그리고 피파 회장은 또 그 놈의 스위스인인 잔니 인판티노가 새롭게 취임했다.
5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울산 동구) | 무소속 | 40,253 (54.4%) | 당선 (1위)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울산 동구) | 통일국민당 | 61,263 (71.1%) | 당선 (1위)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울산 동구) | 무소속 | 55,697 (71.0%) | 당선 (1위)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울산 동구) | 무소속 | 51,346 (61.5%) | 당선 (1위)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울산 동구) | 국민통합21 | 56,851 (65.2%) | 당선 (1위)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구 을) | 한나라당 | 47,521 (54.4%) | 당선 (1위) |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동작구 을) | 새누리당 | 46,480 (50.8%) | 당선 (1위) | 2014.5.14 의원직 사퇴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 |
2014 |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 새누리당 | 2,109,869 (43.0%) | 낙선 (2위) |
6 트리비아
프로필상 키가 182cm라고 한다. 참고로 부인도 키가 꽤 크다. 170대 초중반인데, 지금 기준으로도 꽤 큰 키인데 옛날에는 가히 거인 수준이었다고. 그래서 정몽준의 부인은 정몽준과 결혼한 것을 행복하게 여긴다고 한다.
좌우명은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뜻은 군자는 남들과 조화롭게 잘 어울리지만, 남들과 같아지려 하지는 않는다. 소인은 남들과 같아지려고만 할 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한양궁협회 초대 회장이기도 하다. 현재야 뭐 정몽구와 그 아들[18]이 하고 있어서 모르는 사실이지만 대한양궁협회 역대 회장 명단에 들어가 있다.[19] 축덕으로 만족하는듯
그야말로 재벌스러운(?) 흑역사 중 하난데, 2천년대 모 라디오 방송에서 요즘 버스비가 얼마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다가 "한 70원 하나요?"라고 전설의 멘트를 날린 적이 있다.[20] 더 심각했던 건, 그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교통카드를 보이며 교통요금을 잘 안다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하필 그 카드가 청소년 교통카드였다.(...) 그 이후 정몽준 하면 70원 드립이 항상 따라다니게 되었으며, 2014년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을 때도 '공약으로 버스비 70원 해 주나요?'(...)라는 드립이 나왔을 정도. 진짜 70원이 되었다면 당선 가능했을텐데 비견되는 드립으론 김문수 관등성명 드립이 있다 이 사건 후 나온 기사에 의하면 기본적인 물가 몇 가질 아예 암기하고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21]
그래도 정치인·재벌가 사람들 중 병역문제에서 깨끗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본인과 장남 모두 육군 학군사관(ROTC)으로 병역을 마쳤으며, 아들은 1군단 특공대에서 소대장과 연대 작정과장으로 군생활을 마쳤다. 당시 아들이 복무하는 특공대를 방문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피자 한 판·치킨 한 마리씩을 돌렸으며, 낙후한 시설을 보고 사비로 군 시설을 개선해주고 싶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후자는 당시 지휘관에게 거절당했다.) 막내 아들 또한 학군단으로 보내고 싶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육군 제대´ 정몽준 "사회 지도층 자녀 전방복무""병역 의무 엄격히 관리" 강조.
2014년 당시 서울시장선거에 출마한 정몽준 후보의 정몽준의 막내 아들이[22] 페이스북에서 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고위 공직자에게 물을 뿌리는 유족들을 향해 '대한민국 시민의식이 미개해서 국가가 미개하다'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정몽준 후보는 자식 잃은 부모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아들의 불찰이라며 즉각 사과하고 진화에 나섰지만, 결국 이 사건은 그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데 한 몫 했고 결국 낙마하고 만다. 더 자세한 사항은 미개 항목 참조. 이후 정몽준의 부인이 아들의 발언은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시기상 좋지 않았다고 발언해 또 구설수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발언이 있은 후 정몽준 후보는 떨어진 지지율을 만회해보고자 한 고시원을 방문했는데, 이때 정 후보의 문화충격을 받은 듯한 리얼한 표정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기 방값은 70원인가요
2016년 10월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 회고록 논란이 일어 정치판에 종북몰이가 기승을 부리자, 이에 야권이 반격한답시고 과거 정몽준이 쓴 그의 회고록의 한 문단을 들고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내용인즉슨, 2002년 방북해 김정일과 회담하고 돌아온 박근혜가 이후 남북간 친선축구경기를 주최했는데, 거기서 박근혜가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로, '대~한민국' 대신 '통~일조국'으로 구호를 부르기로 합의를 봤는데 실제 경기에서 응원단들이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정몽준에게 화를 냈다고 적혀있었기 때문. 이렇게 또 박근혜에게 빅엿을..
축구협회장 당시 연예인으로선 유일하게 자비를 들여 원정 응원을 다녔던 김흥국과 연을 맺어 지금도 절친인 건 공공연한 사실. 그래서 매번 선거철만 되면 기자들이 김흥국에게 들러붙어서 출마할 거냐고 물어보는 게 관례였는데, 이에 김흥국이 총선 출마 포기 선언을 한 일이 있다. 그리고 김흥국이 출마를 못하는 이유를 라디오 스타에 나와서 직접 밝혔는데 그 말이 걸작. "공천을 줘야 출마를 하지!" 아
정몽준의 소원이 모조리 다 이루어지면 대통령이 FIFA 회장을 겸하는 재미있는 경우가 벌어진다는 개그가 있다.
울산 동구 지역 문화 시설을 방문하면 죄다 그의 이름이 걸려있다.- ↑ 왕회장의 몇몇 아들들이 그렇듯, 생모는 따로 있다. 정몽준 본인도 생모가 따로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생모로 유력시되는 인물들이 있으나, 확실히 확인된 인물은 없다.
- ↑ 때문에 현대중공업은 전문 경영인이 경영하고 있다. 정계 입문 전인 1988년까지는 정몽준이 현대중공업 회장이었다.
- ↑ 현대중공업 공장이 있던 울산 동구에서 5번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13·14·15·16·17대)됐다가, 18대와 19대 총선 땐 서울 동작 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2014년 서울시장선거에 나갔다 낙선하였고 2016년 20대 총선엔 출마하지 않았다. 참고로 20대 기준 서울 동작 을 지역구 국회의원은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이 맡고 있다.
- ↑ 정치란게 정치자금이 있어야 돌아가는 법이기도 하고, 본인도 대선에 출마한 적이 있으니 아들의 꿈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을 아들이 이루어주길 바랐던 측면도 있다.
- ↑ 2010년대 대표적인 비박계로 박근혜 의원과 사이가 안좋기로 유명했다. 박근혜 측근이었다 그녀에게 실망해 친이계로 갈아탄 전여옥 전 의원의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박근혜를 맹비판한 부분을 청중들 앞에서 태연히 직접 읽기도 했을 정도.(...) 다만 본인은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이런 세간의 인식(박씨 부녀에 대한 반감)에 대해 일정부분 오해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 오해가 무언지 말안한건 함정 - ↑ 이러한 관계에 대해 과거 정몽준이 박근혜에게 선거 지원을 요청했는데 당시 정몽준 캠프에 일하고 있던 사람 중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를 변호한 변호사가 있었고, 박근혜가 지원받고 싶으면 그를 내치라고 했는데 정몽준이 거부해 본격적으로 사이가 틀어졌단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그와 별개로 정몽준이 보수적인 기질이 있으나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신념이 투철해 독재자를 싫어한다는 소리도 있고.
- ↑ 현대가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 대출 제한 등. 정몽준도 초원복집 사건 관련자에게 도피 자금을 전했다는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바 있다. 물론 이건 정몽준의 잘못이니 할 말은 없지만,.하여튼 이런 일을 겪고 나자 현대가는 DJ에게 줄을 댔고, 이후 DJ가 대통령이 되자 남북 화해 무드 속에서 정주영 회장이 북에 소떼방문도 하는 등 제법 득을 봤다는 것이 세간의 중평이다.
- ↑ 지지 철회 이유로는 외교 정책상의 이견과 차기 대권 주자로서 인정 받지 못한 소외감 등이 회자된다.
- ↑ 박희태 대표최고위원의 양산시 재보궐선거 출마로 인한 사퇴로 전당대회에서 차점자로 당선되어 승계.
- ↑ 한국 정계에서 핵무장론을 이야기하는 정치인은 소수나마 있기는 했지만, 정몽준 정도의 거물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사실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은 케네스 월츠가 중동 정세를 언급하며 차라리 핵확산이 중동 평화를 부를 것이라고 주장한 것의 동북아 버전으로 근거 없는 허튼 소리로 치부될 것은 아니지만 유불리를 따지면 불리함이 많을 것이라는 게 전반적인 평. 다만 연구원에서 주최하는 '아산 핵포럼' 등의 각종 행사에 참석해서 늘 언급하기 때문에 꽤나 많은 주목을 받는 편.
- ↑ 현대중공업 주가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는 4조원이었지만 2015년 기준으로는 조선업이 최악의 불황을 맞은 탓에 1조 7천억대로 쪼그라들었다.
- ↑ 대학교 통계학 교재에서도 평균값의 맹점에 대해 잘 나오는 사례이다.
- ↑ 2014년에는 조금 변동이 있다. 원래 2위이던 고희선 새누리당 의원은 별세했고,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재보선에서 당선되면서 재산총액 2위를 가져갔다. 무소속 현영희 의원은 당선무효 처리되었으며 이에 의해 10위에 장병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이름을 올렸다. 또한 하위 1위였던 성완종 전 의원의 의원직 박탈로 하위 1위가 바뀌었다. 사실 그가 경남기업 회장이었다는걸 생각해보면 -7억은 순 뻥이다.(...) 당장 성완종 리스트에 올라간 뇌물 금액만 해도 16억원이다.
- ↑ 비단 월드컵 개최에 성공한 것 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계의 인프라 개선에 자신의 사비까지 써가며 앞장섰고, 그 결과 축구 선진국 못지않은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 ↑ 다만, 정몽준의 입장에서는 미묘하다. 대놓고 밀어줄 정도로 공천을 주는 것도 아니고...
- ↑ 아프리카 축구협회장 이사 하야투가 정몽준과 함께 반 블라터 진영 핵심 인사로 자리했었고, 지금도 정몽준과 가까운 사이지만, 현재는 하야투가 거듭된 패배로 인해 친 블라터 인사로 분류되고 있다. 원래 아프리카가 하야투가 반 블라터 활동을 할 때에도 표 단속이 안 될 정도로 친 블라터 성향이 강하고.
- ↑ 정몽준이 블래터 전 회장을 비난하면서 내세운 근거가 2022 카타르 월드컵 선정비리인데 이 점으로 나서자면 AFC에서 입지가 큰 아랍 측에게 분노를 받을게 뻔하다. 그리고 알 칼리파 AFC 회장, 알리 후세인 피파 부회장이나 알 사바 OCA(아시안 게임 조직 위원회) 총재 겸 피파 진행위원은 정몽준에 대하여 어떤 지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다가,알 사바나 알 칼리파는 알리 후세인 부회장이 피파 회장 후보로 나서지 않는다면 플라티니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당연히 한국 편 들어줄리가 없기에 공식적으로 플라티니 지지를 밝혔다. 이로서 아시아에서조차 지지도 못 받는 주제에 무슨 회장이 된다는거냐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 ↑ 정몽준에겐 장조카다.
- ↑ 이 영향인지 양궁협회는 현대그룹의 빵빵한 지원을 받는 중. 참고로 정몽준 이후의 회장도 전부 현대그룹 관련 인물들이다.
- ↑ 2008년 당시 서울 기준 지간선 버스의 요금은 성인 기준 현금 1000원, 카드 900원. 1979년에 일반 버스 요금이 60원, 1980년에 일반 버스 요금 80원이였다.
- ↑ 본인이 평생 버스를 탈 일이 없으니(...) 일정부분 이해는 된다만, 서민의 기본 생활을 한 치도 모르면서 서민, 즉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긴 하다. 특히 정몽준은 표심을 얻기 위해 자신은 재벌이지만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었다. 또 잘 생각해보면 가게에 직접 나가 물건 하나조차 사보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물건 하나라도 직접 사봤으면 물가 수준을 대충 알 수 있었을테니까.
- ↑ 1996년생으로 2014년 당시엔 재수생이었다(빠른 생일이라 95년생과 같은 학년이였다). 이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에 합격해 15학번으로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