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축구 관련 인물, 감독/목록, 축구 해외파 선수들,
하리보
KFA 선정 명예의 전당 7인 | ||||||
김용식 | 홍덕영 | 이회택 | 차범근 | 김화집 | 히딩크 | 정몽준 |
150px | ||||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
박종환호 (1996~1997) | → | 차범근호 (1997 ~ 1998) | → | 허정무호 (1기) (1998 ~ 2000) |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박종환 (1996~1997) | → | 차범근 (1997 ~ 1998) 김평석 (1998 / 감독대행) | → | 허정무 (1998~2000) 박항서 (2000 / 감독대행) |
울산 현대 역대 감독[1] | ||||
김호 (1988~1990) | → | 차범근 (1991~1994) | → | 고재욱 (1995~2000) |
수원 삼성 블루윙즈 역대 감독 | ||||
김호 (1995~2003)[2] | → | 차범근 (2004~2010)[3] | → | 윤성효 (2010~2012) |
2004년 K리그 감독상 | ||||
차경복 (성남 일화 천마) | → | 차범근 (수원 삼성 블루윙즈) | → | 장외룡 (인천 유나이티드) |
2008년 K리그 감독상 | ||||
세르지오 파리아스 (포항 스틸러스) | → | 차범근 (수원 삼성 블루윙즈) | → |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
차 범 근 (車範根 / Cha Bum-Kun / Tscha Bum) | ||
출생 | 1953년 5월 22일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시 | |
국적 | 대한민국 | |
가족 | 배우자 오은미, 딸 차하나, 아들 차두리, 차세찌 | |
종교 | 개신교 | |
신체 | 183cm, 78kg # | |
포지션 | 공격수, 미드필더 | |
소속 | 선수 | 고려대학교 (1972~1975) 서울 신탁은행 (1976) 공군 (군 복무) (1976~1978) SV 다름슈타트 98 (1978~1979)[4] 프랑크푸르트 (1979~1983) 바이어 레버쿠젠 (1983~1989) |
감독 | 울산 현대 (1991~1994) 대한민국 대표팀 (1997~1998) 선전 핑안 (1998~1999)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4~2010) | |
해설 위원 | MBC 축구 해설위원 (2002~2006) SBS 축구 해설위원 (2010~2014) | |
국가대표 | 135경기, 58골[5] |
1 개요
갈색 폭격기
대한민국의 레전드급 전 축구 선수, 축구 지도자, 축구 해설자, 행정가.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의 전설이자 분데스리가에서 은퇴 당시 외국인 통산 득점 1위를 기록했었던 월드 클래스 공격수.[7]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A매치 최다 득점자(58골)이자 살아있는 전설.[8]
2 개인 신상
본관은 연안(延安, 현재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이며, 집안에서 삼남(막내)으로 태어났다. 가족은 배우자 오은미와 그 사이에 딸 1명(차하나)와 아들 2명(차두리, 차세찌)가 있다. 알다시피 장남인 차두리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돌격대장 그 차두리가 맞다.
3 축구인 생활
국가대표 132경기 출장, 59골 기록, 한국인 선수 최초의 센추리 클럽에 가입, 한국인 선수 중 역대 최다 A매치 골 기록,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24년 139일), 독일 1 분데스리가에서 12년 간 총 308경기 출장(외국인 선수 중 역대 3위), 98골(외국인 선수 중 역대 6위) 기록. 참고로 분데스리가 98골 중 페널티킥 득점은 0골이다.[9] DFB 포칼이나 UEFA 컵 기록까지 포함하면 372경기 121골. 차범근은 인터뷰에서 멀티 골은 20번이나 해 봤지만, "해트트릭은 한 번도 못해봤다."고 말했었다. 대신 후배들이그의 한을 풀어줬다!
1976년, 아시아에서 큰 국제대회이던 박스 컵에서 말레이시아[10]를 상대로 7분 남기고 4:1로 뒤진 상황에 차범근이 혼자 세 골을 몰아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무승부를 만드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아쉽지만 방송국도 그 경기의 테이프가 없다고 했고[11] 차범근도 두 골은 기억이 나지만, 나머지 한 골은 어떻게 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박스컵도 그렇지만, 이 시기의 국대축구는 영상이나 문자 매체 등의 상당수가 유실된 일종의 흑역사라서 차범근의 육체적 전성기인 20대 초반의 활약상은 직접 본 사람 외엔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현역시절 자료가 부족하다보니 발생한 것이 바로 포지션 논란. 센터포워드였는지 윙포워드였는지 아니면 윙어였는지 논란이 분분하다. 하지만, 차범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포워드, 분데스리가에서는 최전방 투톱으로 뛰었다고 한다. 윙포워드로 뛰었던 경험 덕분에 클럽에서는 센터포워드임에도 불구하고 드리블과 측면 활용 능력을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말년에는 미드필더로 전향했다.
전설이 된 현역 시절의 모습[12] | 독일의 축구 잡지, 키커(Kicker)의 표지 모델 위엄 |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시절 | 인맥대장, 차붐(Tscha Bum)! |
3.1 선수 생활
차범근의 선수 생활에 대해서는 차범근/선수 경력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3.2 감독 생활
차범근의 감독 생활에 대해서는 차범근/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3.3 해설자 생활
1998년의 실패 이후 K리그 감독으로 복귀하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중국 프로축구 선전 핑안 감독으로 부임했다가 1년 6개월만인 1999년 12월 재계약이 불발되었고 이후로 국내외를 오가며 눈에 띄지 않는 야인 생활을 거듭했다. 하지만 차범근 축구교실만큼은 직접 챙기면서 유소년 육성에 대한 의지만큼은 뜨거웠는데, 2001년 초에 한 어린이 선수가 "우리들이 다치는 걸 걱정해 직접 얼음을 깨고 있는 저 분이 바로 전설적인 축구선수 차범근 감독님이다."라는 글을 Daum의 차범근 팬 카페에 올리면서 일부 축구팬들의 심금을 울린 적도 있었다.[13]
그러다가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 1998년 내려졌던 자격정지 5년에 대해 사면조치를 취하면서 차범근의 국내 활동이 자유로워졌고 MBC가 2000년 12월부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14] 2001년 2월 2년 2억원에 MBC 해설위원으로 계약하게 된다. 왠지 특정 숫자가 보인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개막된 컨페더레이션스컵부터 본격적으로 해설을 맡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축구 해설은 여러 분석을 내놓는 신문선과 이를 재치 있는 입담으로 포장하는 송재익 콤비를 내세운 SBS가 대세였고 차범근 본인이 딱히 말을 잘하는 타입이 아니다보니 허정무를 해설위원으로 내세운 KBS에 오히려 시청률이 뒤지는 상황까지 있었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에 또박또박한 말투, 그리고 수십 년간 쌓였던 선수시절 내공 덕에 경기를 한 수 앞 먼저 읽는 해설로 차츰 호평이 많아졌고, 2002년 월드컵 본선 때는 오히려 SBS의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누르고 MBC의 시청률이 승승장구할 정도로 인기 있는 해설을 하게 되는데 결정타가 된 것이 바로 2002년 5월 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 이 때 김남일의 태클로 지네딘 지단이 부상을 당한 뒤 허공으로 손을 돌리자 신문선은 판정불만에 대한 항의하는 거라고 했지만 차범근은 표정을 보고 지단이 부상으로 뛸 수 없다고 해설했으며 벤치에서 얼음찜질을 받고 알약 먹는 장면이 잡히자 신문선-송재익은 영양제를 먹으며 컨디션을 관리한다고 언급했지만 차범근은 "지금 진통제를 먹고 있네요."라는 언급을 했다. 실제로 지단이 이 날 부상으로 인해 본선에서 제대로 뛰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차범근의 해설은 가히 예언급. 여하간 월드컵 기간 내내 MBC가 일방적인 1위를 달렸고 왕년의 시청률 제조기였던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야심차게 영입한 SBS는 2위로 주저앉았다.
2003년까지도 계속해서 MBC 해설을 맡았으나 계약기간이 만료된데다 마침 수원 삼성 감독직 제의가 들어오면서 해설위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2006 독일월드컵 기간에 한해 MBC 해설을 또 맡기로 이면합의가 되어 있었고 여기에 엔트리에서 탈락한 차두리까지 가세하면서 부자(父子) 해설위원이라는 진풍경으로 또 다시 MBC가 시청률 1위를 기록. 물론 '우승 경쟁 하는 마당에' 월드컵 해설하러 가신다고 서운해 하는 목소리가 그랑블루 안에서 심심치 않게 나왔을 정도인데 다른 팀 서포터들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왔는지는 차범근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어서인지 모 스포츠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 '미안하다'고 답한 바 있다. 다만 후반기 앞두고 이관우와 백지훈을 영입해 반등에 성공, 준우승을 차지했기에 서포터즈의 우려와 달리 책임은 다했다.
2010년과 2014년 SBS 해설위원으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경기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경기를 해설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그의 인기는 여전했으나 브라질 월드컵에선 나이가 들어서 인지 순발력이 좀 느려지고 말을 버벅대는 부분이 많아지고 다른 방송사의 해설위원들이 선전하면서 그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분위기다.
다만, 전문 해설가가 아니라 방송인으로써도 달변가가 아니기 때문에 해설자로써 한계는 있다. 특히 순발력이 떨어져 특히 머릿속에서 상황은 읽지만 말로 옮겨내지 못해 버퍼링이 걸리기도 한다. 이게 빠른 시간 내에 적당한 말로 옮겨지면 여지없이 명해설이 터지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도 많다. 또한, 특유의 사람 좋은 면 때문에 선수단에게 나쁜 말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거나[15] 직접 해결책을 지시하지 않는 해설 스타일은[16]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해설까지 집중할 코어 시청자의 대부분은 공격적이며 직설적인 해설을 더 선호하나 한국에 말주변 좋고 직설적이면서 경기를 읽는 눈까지 갖춘 해설자는 없기 때문에[17] 호불호의 문제다.
축구 중계 시 카메라에 잡힌 축구계 유명 인사들을 잘 소개하지 못하기도 한다. 박문성이나 장지현, 한준희 등이 축구계 인사는 물론 때로는 정재계 인사들마저 귀신 같이 소개하는 반면 차범근은 잘 소개하지 못한다. 요아힘 뢰프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버벅거리거나[18] 올리버 비어호프가 카메라에 몇 차례나 잡혔음에도 캐스터와 함께 침묵을 지켰던 사례가 있다. 물론 축구해설자의 본분은 잡학 자랑이나 선수 프로필 읊어주는 게 아니라 경기를 풀어주는 것인만큼 큰 단점은 아니나[19] 어쨌든 중계 카메라가 이들을 잡아주는 건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중계 특성상 멘트가 중간에 끊어지는 걸 시청자들은 매우 어색해하기 때문에 이 점이 축빠들에게 약점으로 지적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4강전 미네이랑의 비극에서 전반에만 독일이 5:0으로 브라질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앞서나가자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셀프디스를 시전했다. [20]
독일 대표 팀의 중계를 맡으면 중립을 지키다가도 은연중에 독일 쪽으로 편파해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21] 하지만 프로야구의 편파중계 정도의 완전하게 치우친 모습은 당연히 아니고 잘 들어봐야 알아차릴 그런 정도다.[22] 그랬다면 공중파 해설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차범근 본인의 독일에 대한 애정에 비하면 꽤 중립을 잘 지키는 편이라고 봐야 한다.[23] 단, 독일이 브라질월드컵 토너먼트에서 가장 고전한 16강전 알제리와의 경기에서는 외질이 두 번째 골을 넣자 기쁨을 감추진 못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마친 후 SBS와 계약이 만료됐고, 재계약하지 않았다. 이후 인천AG 결승전 때 SBS의 객원 해설로 마이크를 잡은 적이 있다.
3.4 축구행정가 생활
2016년 4월에 2017년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지금껏 축구인 생활을 하면서) 감투를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감독이나 해설자가 아닌 축구 행정가로서 한국 축구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밝혔다. #
4 영향
선수로서 유럽에서 성공했다는 점과 감독으로서 미적지근했다는 점을 제쳐두고, 축구인으로서 한국 축구에 기여한 바는 실로 엄청나다.
차범근은 독일에서 은퇴한 후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고 코치 자격증을 따 왔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계에서 몹시 희귀한 케이스였다.
라이센스 제도를 놓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 첨언하자면, 차범근이 단지 자격증이 있어서 대단한 게 아니다. 외국에서도 얼렁뚱땅 자격증만 따서 감독하는 야매들은 얼마든지 있다. 핵심은 제도권 스쿨을 거쳤느냐 하는 점이다. 차범근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라이센스를 따오면서 지도자가 되기 위한 선진적인 모델을 보여줬고, 차범근 이후 코치방법을 몰라 외국 감독이 하는 걸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우고, 그저 가오잡기만 하던 기존의 지도 관행은 개선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차범근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차범근 유소년 축구 교실로 대표되는 한국의 축구 유소년 인재 발굴, 육성의 토대를 잡은 것이다. 1990년 독일 생활을 마무리 하고 나서 국내에서 시작한 이 차범근 축구 교실은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서, 아니 대한민국 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학원스포츠 밖에서 유소년 양성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이다.
오래 전부터 학원축구의 폐해를 지적하고 유소년 축구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많았으나, 정작 사재를 털어가며 이를 실천에 옮긴 이는 차범근이 처음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성공리에 마치고 토토 수익금으로 자금력을 확보한 대한축구협회가 비로소 유소년 육성 정책을 시작했고, 이들 2002 키즈가 바로 훗날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임을 감안한다면 차범근의 선구자적 면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차범근축구상'을 제정해 이동국, '박지성', 기성용 등 축구 꿈나무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소년 육성과 지도자 교육이라는 해당 국가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한발 앞서 유럽축구를 경험한 차범근이 이른바 "선진적인 모델"을 보여준 것은 한국 축구계의 크나큰 자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차범근 개인이 감독으로서 업적은 공과가 크게 갈린다.
가장 먼저 지적할 부분은 세계 축구의 유행과 발전상에 뒤쳐졌다는 점이다. 차범근의 축구철학이 1970년대 분데스리가 스타일을 숭상하기 때문에, 감독을 맡았던 수원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재임기간 동안 꼬박꼬박 트로피는 따줬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사실 이 시기 수원 팀 자체는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차범근 해임 이후 K리그의 빅5 추세를 본다면 귀네슈-빙가다-최용수로 이어지는 FC 서울, 김정남-김호곤으로 이어지는 철퇴 울산, 최강희가 구축한 닥공 전북, 파리아스-황선홍으로 이어지는 스틸타카 포항은 모두 고유한 팀 컬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수원은 뻥축구라는 조롱을 길게 받았다.[24] 과거 김호 감독 시절의 수원이 발레리 니폼니시의 부천과 더불어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 을 운용하며 포백 시스템과 존 디펜스 도입 등 선진축구로 팬들의 찬사를 샀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명백한 퇴보다.
또한 프런트에서 우수한 선수들을 사주면 그만큼 성적을 내줬기 때문에 정작 팀의 근간이 되는 유스가 황폐화하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서울과 포항 두 팀에서 유스 출신들이 하나 둘 주전을 꿰차며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고, 2012~13년 포항의 유스 출신 영건들이 패스축구로 수원을 털어버리며 '승점자판기'라 조롱하는 광경을 거듭 목격한 수원 팬들 입장에선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다.
때문에 'K리그 수원 감독 맡지 말고 유소년 축구만 몰입하셨더라면 두고두고 존경받으며 욕 먹을 일이 없으실 텐데' 하고 탄식하는 축구팬들이 많다. 차범근과 앙숙인 허정무도 감독이나 해설말고 스카우트를 했으면 좋았을 거란 소리를 듣는다.
- 국가대표에서 처음으로 4백 수비진을 도입했다.[25]
- 일찌감치 체력집중 트레이닝을 강조했다.[26]
- 선후배관계는 중요하지만 경기장에서는 형&선배 호칭을 빼라 했고, 기자회견 시간을 정해놓고 언론의 무차별 인터뷰를 차단하는 등 여러모로 서구형에 가까운 팀 운영을 보였다.
잘 살펴보면 위의 3가지 모두 차범근 이전부터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감독들이 일치감치 지적한 문제들이다. 다만 국내 축구인들이 한국 실정을 모르는 외국인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사실 비디오 감독관, 피지컬 트레이닝, 평등한 선후배관계 등 히딩크의 성공요인으로 꼽히던 요소들 대부분이 차범근이 먼저 이야기한 것이다. 다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 2002년 이전까지 한국 축구계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이야기도 된다.
5 이야깃거리
- 현역 때도 유명했지만, 차범근의 허벅지 둘레는 무려 27inch. 웬만한 여자 허리둘레
조금 가는 남자 허리둘레수준으로 차범근의 엄청난 주력과 힘이 여기서 나왔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참고로 야구 얼굴마담 이대형과 동급이다. 여기서 동급이란 이대형의 허벅지가 아니다. 이대형의 허리(!) 치수와 같다.더 놀라운 것은 한국 축구 역대급의 피지컬을 자랑하는 아들 차두리가 술회하길 자신이 국가대표선수가 될 때까지도 어떤 신체능력으로도 차범근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2014년에도 매일 2시간씩 러닝과 웨이트를 거르지 않고 소화중이며, 한 번은 차두리가 같이 운동하다가 먼저 손들고 올라온 일이 있었다고.(...).원조 차미네이터...이쯤되면 진짜 기계인간이 아닐까 싶다.현역 당시 그의 허벅지 모음. 그야 말로 펄떡거리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허벅지 근육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독일의 레전드 로타어 마테우스가 차범근을 처음 봤을 때, 허벅지밖에 안보였다고...
파일:NgSramnr.jpg
62세 어르신의 위엄
2014년 현재 허벅지 상태를 보면 차두리의 말이 진담인 것을 알 수 있다. ㄷㄷ 다만 '이제는 차두리가 나보다 더 허벅지 굵음'갑빠도라고 2010년 월드컵 때 '차범근에게 물어 보세요'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바 있다.
- 여타 운동선수와는 달리 일찌감치 광고 출연이 많았다. 이미 독일 진출 전이었던 1970년대 후반 남양유업의 요구르트 광고에 나왔던 것을 비롯해, 1980년대에는 레버쿠젠의 모기업인 바이엘 제약의 광고에도 자주 나왔다. 2000년대 들어 SK텔링크 00700 CF에 고정 출연하며 김선아와 함께 포스를 뿜어내었다. 원래 파트너였던 싸이는 병역비리에 걸려서 하차. 명언은 "국제전화 비싼 줄 알았지? 아니야!!"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한창일 땐 신문선과 나란히 해설계의 거성으로 활동했다.[27][28] 2006 FIFA 월드컵 독일 때는 차두리도 같이 해설을 하면서 부자가 같이 해설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대한민국과 스위스의 조별 예선에서 스위스가 2번째 골을 넣자 차두리가 "이건 사기입니다."라고 말하자 차범근이 차두리를 노려보면서 입단속을 시킨 것이 밝혀져 잔잔한 웃음을 주기도. 2002년 월드컵 이전 거스 히딩크 감독이 오대영 감독이라고 비난받을 무렵, 그를 지지한 몇 안 되는 축구 인이기도 하다. 다만, 수원의 성적이 부진할 땐 감독 때려치우고 해설이나 하라고 욕을 먹었다.
-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녀 차하나(1978년~). 그리고...
- 70년대 후반 찍었던 공익광고. 그 때는 삼천리금수강산 초만원 하던 시절이니...
- 그리고 아들 둘을 더 낳았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장남 차두리(1980년~), 차남 차세찌(1985년~). 장녀는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막내아들은 해병대를 전역 후(2009년 입대) 형과 아버지와 함께 간때문이야 광고에 출연 중. 딸은 결혼해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이[29]가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차범근으로선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차두리가 결혼할 때 기자회견에서 손자가 태어나면 자신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축구선수로 키워보고 싶다고 밝혔다. 자신이 바빠서 아들 두리를 제대로 봐주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쉬웠다고. 2010년 11월 29일 차범근의 소셜 네트워크에 내년 5월에 태어날 차두리의 둘째가 아들이라는 소식이 올라왔다. 링크참고 네티즌들이 예상하는 아이 이름은 차바인, 차쯔바(독일어로 2는 zwei쯔바이) 등등이었는데, 정작 한달 늦은 6월말에 태어난 둘째 아이의 실제 이름은 '차아일'(Ail). 독일어가 아닌 웨일즈어로 '2'라는 뜻의 이름으로, 많은 네티즌들의 허를 찔렀다.[30] 어쨌거나 많은 이들은 벌써부터 "2030년 월드컵 국대 원톱"으로 단정짓는 중. 자녀 이름을 하나, 둘(두리), 셋(세찌)으로 짓는 비범함을 보였다.
- 기자
기레기들과 악연이 많다. 80년대 초반에는 기레기들이 독일까지 가서 "양주를 내놓으라, 대접 잘해라." 이딴 무개념 쓰레기 짓거리를 해서 정나미가 떨어진 차범근은 문전박대를 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한국에서 신문으로 "차범근 독일에서 무개념으로 군다." 이렇게 왜곡을 하는 기사를 써재꼈다. 이런 일로 아버지가 속상해하던 걸 보던 아들 차두리도 커서 기자들을 꺼려하며 기레기들과 갈등이 많았다. (원래 차두리는 축구 전문 언론인을 꿈꾸었었다.) 덕분에 김병현을 옹호하다가 그런 기레기에게 욕설을 듣기도 했다.
- 동년배의 다른 스타들과 비교했을 때 참 자기 자랑이 없는 사람이다. 인터뷰를 해도 옛날 얘기를 한두 문장 이상으로 이어서 하는 일이 없고, 해설할 때도 그 흔한 현역 시절 에피소드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인데, 당장 선수 경력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분데스리가 커리어에 대한 문서화 작업이 굉장히 부족한 상황에서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구술사도 전무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축구 팬들이 그의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축구팬들도 차붐, 차붐 하고 그가 분데스리가에서 유명했다더라 하는 정도만 알지, 어떤 플레이를 보여줬으며 어떤 선수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니 젊은 축구팬들에게도 해외에 나가 있는 수많은 현역 축구 선수들의 선조뻘로만 다가오지, 예컨대 박찬호나 박지성처럼 차범근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 보통 이 쯤 되면 야구의 선동열같은 사례처럼 전성기 시절의 커리어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나올 법도 하지만, 잊을만 하면 자랑할 의도도 없었는데 무시무시한 에피소드[31]들이 튀어 나오는 통에 다들 경악만 할 뿐이다. 아들의 리그 활동에 관련한 행정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아버지 친구 분한테 추천서를 부탁했는데 그 친구 분이 프란츠 베켄바우어라든가... 특히 70년대 독일의 선수 출신 축구인들이 전세계의 주요 축구 지도자로 나선 이후 월드컵을 비롯한 국제 대회에 해설자로 한번 나갔다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과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사실관계 뿐이다. 대단한 과거가 있다고 짐작만 할 뿐, 디테일을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 2010 남아공 월드컵에 주전 수비수로 출전중인 아들 차두리에 대해서 해설 중에는 말을 아꼈지만 경기 종료 뒤에는 우리 두리 잘하잖아~~ 하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셨다고 한다. 링크 참고
- 또한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K리그 구단들에게 열악한 환경속에서 선수들을 잘 키워져서 고맙다는 감사 코멘트를 했다고 한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고, 여러 번 자신의 신앙에 대해 간증을 했는데 종교문제 때문에 구설이 오른 적이 있다. 1997년의 월드컵 예선 때 한국 국가대표팀이 골을 넣으면 기도를 드려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도올 김용옥이 신문기고로 이를 비판했고, 이후에 차범근도 반박 기고를 하여 키배가 벌어진 적이 있다. 그리고 부적을 사용하는 고정운을 잘 기용하지 않는것도 이런 종교문제 때문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원수라 할 수 있는 통일교 계열의 K리그 구단 천안 일화 천마가 성남으로 연고를 옮기려 할때 성남 기독교계가 항의를 하자 차범근은 신문기고로 "축구와 종교는 상관없다."고 신문기고를 한 적이 있다.
- 2010년에 나온 차두리 로봇설과 관련하여, 차두리 로봇 설계도를 알려달라는 팬들의 장난스런 요청에 로보트...그거 일급비밀이야. 많이 알면 다친다고!!! 로보트 아빠는 상관없지만 로보트 엄마는 비밀로 부치고 싶어해. 이해해줘. 로보트 가족 중에는 엄마 힘이 젤 세다고!!!라고 답하며 축구 실력뿐 아니라 유머감각도 레전드급임을 과시했다. 그 보다 며칠 전, 차두리가 로봇 설에 대해 한 말을 보면 부자가 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듯하다.
- 감독직 사임 이후 SBS에서 국가대표 경기 해설자로 활동 중이며 평가는 굉장히 좋은 편. 선수 출신답게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경기 내적인 내용들을 잘 짚어주고 감정적인 애국해설을 자제하고 경기의 흐름과 풀어나갈 방향을 거론하는 방식. 보다보면 후배이며 제자들인 선수 한명 한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게 보인다. 2011년 2월 1일, 박지성이 은퇴한 것에 대해, 축구 유망주들이 유년기에 훈련을 너무 많이 하는 관행을 고치려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며 인터넷 상에 글을 올린 게 화제가 되었다(관련 기사).
- 소중한 날의 꿈에 캐스팅 되신 듯하다. 직접 보면 안다.
- 스탯은 전설의 선수 아니랄까봐 메시와 거의 동급인 90.
- 2013년 10월 17일부터 다음에서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독자들의 평도 상당히 좋은 칼럼으로 유명해지고 있다. 링크
- 한때 딸 차하나의 독일인 친구 아버지를 마중하러 김포공항에 나갔다가 당시 김포공항 경찰대(전경)의 불심검문을 받게 되었는데, 주민등록증을 안 가져와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차범근이 1997년~1998년 중 날짜 미상의 '전경'지에 기고한 글 중에서) 당시 국민적 스타인 차범근을 그 전경대원이 몰랐을 리는 없고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 한국 선수로서 세계무대에서 활약한 레전드라는 점에서 현 시대의 레전드인 박지성과 같이 언급되거나 비교되는 일이 잦은 편이다. 물론 둘 다 월드클래스의 실력을 지닌 선수였지만 현역 시절 남긴 실적과 역량을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차범근이 우위. 유럽 정상급 리그에서 중위권 팀의 에이스 스트라이커로 통산 98골을 넣으며 UEFA컵 우승을 이끈 차범근과, 세계 정상권 명문 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에이스라기에는 다소 모자란 주전급 선수 박지성은 약간의 클래스 차이가 있다. 굳이 말하면 팀을 이끄는 에이스와 팀에 기여하는 좋은 선수의 차이.[33] 또한 박지성은 '차범근 유소년 교실' 세대의 첫 주자이자 '차범근 축구상'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 자기 주관이 뚜렷한 성격이라 그런지 스타플레이어와 자주 충돌했다. 차범근과 최강희의 불화는 유명하고 98년 국가대표 감독일 때는 서정원의 벤피카 진출에 대해서도 불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경향신문에는 "입단을 구걸하러 가서 무엇 하겠습니까?"고 서정원이 속고 있다고 인터뷰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그래서 축구협회에 이적동의서를 발급하지 않아서 벤피카로 가서 연습경기까지 뛰던 서정원은 해외 진출이 무산되었다. 이외 수원 시절 국내로 유턴했던 안정환, 이천수와 불화가 있었는데 이 둘은 본인들 탓이 더 컸던지라 차범근에 대해선 별 말이 없었다. 선수시절 얽힌 일 때문에 최강희 감독과는 지금도 사이가 별로 안 좋다.[34] 서정원 감독과는 지금은 감정이 다 풀렸는지 잘 지낸다.
- 이임생은 김호 감독시절 대표 팀에 소집 돼서 훈련 중에 연고전/고연전이 열려서 무단이탈한 탓에 그 후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않았는데 차범근이 국가대표 감독일 때 다시 발탁했다. 이 때 같은 고려대 선, 후배라서 다시 기용한 게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는데 이임생은 부천 르네상스의 핵심 수비수였으며 벨기에 전 붕대 투혼과 수원 삼성에서의 수석코치로 우승까지 함께 한 실적이 있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쓸 만해서 썼다. 그리고 차범근은 국가대표 감독일 때 장대일도 발탁해 홍명보 대타라는 중임까지 맡겼는데 장대일은 고려대 출신이 아니다.
- 부자가 함께 대표팀에 발탁되어서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사례인 것은 맞지만 최초는 아니다. 최초의 부자 국가대표는 故 김찬기 - 김석원 부자로 故 김찬기는 1960년 AFC 아시안컵 우승을 이끌었던 멤버 중 한 명이었고 김석원은 1979년과 1981년에 U-20 월드컵에 출전했고 이후에 국가대표에도 발탁되었던 인물. 다만 워낙 옛날 일이고 차범근 - 차두리 부자의 무게감이 엄청난지라 현재의 젊은 세대는 차범근 부자가 최초의 사례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 당대를 같이 보낸 선수들 중에서 차붐이 존경을 표했던 선수는 칼 하인츠 루메니게와 파울 브라이트너. 2013년 스포탈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선수 생활을 결산하면서 남는 아쉬움이 있다면?분데스리가 베스트11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한 단계, 즉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등이 서있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욱이 처음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정열과 패기였다면 충분히 오를 수 있었던 곳에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의 오해와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습니다.[35]
'내가 꼬이지만 않았으면, 발롱도르 1, 2위하는 사람들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어.'라고 말하시는 차붐의 위엄.
- 여담으로 상당한 공처가이기도 하다. 늘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건 아내다라고 이야기하고 다닐정도로...
- 다만 이렇게 공처가가 된건 어찌보면 당연할 수 밖에 없는데 독일진출 당시 차범근은 도착 직후 제대로된 환대를 받을것이라 예상했지만 프랑크푸르트의 슐테 조감독은 상당히 냉담한 반응만을 보였었고 제대로된 실력을 발휘하기 전까지 대우가 형편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시기에 아내인 오은미씨는 상당히 곱게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억척같이 뒷바라지 하면서 차범근의 영양관리를 도왔기 때문.[36]
- 또한 아내인 오은미는 남편인 차범근이 축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도록 축구 이외의 모든것을 전담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차범근이 버는 모든 수입의 관리뿐만 아니라 대외활동의 매니지먼트, 심지어는 차범근이 쓰는 글 대부분의 대필까지도 해주고 있다는건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이다.[37]
- 197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땄었다. 당시 결승 상대가 북한이었는데 120분의 혈투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해 공동 금메달을 받았다.[39]
- 차두리 와 재미난 언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마라도나 와 지단 둘중 누가 더 축구를 잘하냐는 것. 마지막에 서로 주고받는 말이 압권이다.
"아버지, 지단이랑 뛰어봤어요?" "너 마라도나랑 뛰어봤어?" ㅎㄷㄷ
-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를 소유중인데 현재는 단종된 숏바디 모델이다. GE230 모델로 무려 구형 초록번호판[40] 이다! 최근 벤츠사에서 리스토어를 해주었다. 영상
- 2014 브라질 월드컵이 한 해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대한축구협회의 협회장이 바뀌고 내부 임원이 대대적으로 갈리면서 그동안 대한축구협회와 갈등을 빚었던 차범근이 한 자리 맡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어떤 구체적인 자리에 선임된 것은 없었지만, 브라질 월드컵 예선 바레인 전에 신임 축협회장 정몽규와 나란히 경기를 관전하는 것이 TV에 잡혔다. 축구협회 임원진을 태운 전용기에 같이 동석하여 관람을 하고 왔다고 한다. 이로서 소문은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에서 그에게 어떤 직책을 내릴지 주목된다. 하지만 2014년 10월이 지나도록 차범근에게 어떤 직책이 주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그냥 축구협회가 그간 껄끄러웠던 차범근과 화해만 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중.
- 2014년 중 런닝맨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박지성 자선경기에 교체 출전하여 25년만의 경기 출전을 했다! 그의 라이브 경기를 본 올드팬들도, 라이브 경기를 보지 못한 현 세대 팬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수많은 축빠들이 차붐의 활약을 기대하며 동점골을 넣기를 바랐으나
눈치 없는(...)인도네시아 올스타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뛰어서 그다지 많은 기회를 받지는 못했다. 애당초 뛴 시간이 10여분 남짓이었고 기대한 슈팅은 나오지 못했지만, 좌우 사이드를 가리지 않고 뛰고 중앙에서 킬 패스도 뿌리는 등 현역 시절 말기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깝게 뛰며 클래스는 영원한 것을 보여주었다. 중간에 백 힐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해서, 웃음을 주기도 하였다.
6 차범근 축구교실 비리 의혹
차범근 축구교실의 비리에 대한 전 직원의 폭로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차범근 축구교실은 서울시로부터 한강 부지를 싼값에 임대하여 운영중임에도 서울시에서 정한 기준보다 높은 수강료를 받아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있으며, 적발 이후에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유소년 선수 후원용으로 무료로 제공받은 축구용품을 수강생들에게 유료로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전코치는, 축구교실 직원으로 부인 오은미씨를 비롯한 친인척들을 채용했는데, 이들은 근무기간 중에도 해외여행을 가는 등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서 급여만 받아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속 코치에게 차범근 부부 소유의 상가 관리 등 차범근 일가의 개인 심부름 등을 시키면서도 제대로 된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고, 축구교실에서 근무했던 코치들 중 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한 3명 이외에 단 한 사람에게도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오은미씨는, 열악하던 초기 때는 퇴직금까지 줄 수 있을 정도로 기반이 없었다고 하고 있는데, 지금은 축구교실의 초기도 아니며, 임금 지급은 무엇보다 우선한 고용주의 임무이기 때문에 이는 근거 없는 변명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차범근이 한국 축구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평소 높은 신망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축구팬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차범근 본인은 아직까지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았으며 사단법인 차범근 축구교실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대호(담당변호사 박동균)는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 보도한 것이다. 제보자와 방송국을 상대로 법적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보도자료 전문을 올린 기사
이 보도자료에 따르면 전 직원은 공금횡령으로 인해 권고사직을 당한 사람이기 때문에 폭로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2016년 8월까지 2580 역시 위 반박에 폭로 신빙성을 제공할 의견이 없다. 논란 소지가 있으나 딸기첩쌀떡 사건 재현으로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란 상황까지 나오는 형국이다.
이후 pd수첩에서 프로야구 승부조작사건을 다루면서 한동안 시끄러웠는데 제보자의 진술을 언론들이 신빙성이 없다고 그냥 무시했는데 mbc 혼자 덥석 물어 방송에 내보냈다는 점으로 인해 엠비씨의 가뜩이나 없는 신뢰도가 추락했다. 헌데 이 차범근축구교실 건도 엠비씨의 단독 보도라 이 역시 단순 찌라시일 가능성이 높다.
- ↑ 당시 팀명은 현대 호랑이(1983~1995)
- ↑ 공교롭게도 현대 시절과 마찬가지로 김호→차범근 순으로 교체된다.
- ↑ 시즌 도중 사임.
- ↑ 리그 경기 1경기만 치루고 병역 문제로 계약 파기
- ↑ 당초 121경기 55골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4년 11월 4일 축협이 데이터베이스 조사를 통해 누락된 기록들을 포함하면서 현재는 이 기록으로 수정되었다. 이 기록은 또 한 번 정정될 가능성이 있다.
- ↑ 2000년대 이후 축구를 접한 사람들은 "박지성이 최고 아니냐?"라는 의견을 가질 수도 있으나,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박지성은 차범근의 명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박지성은 "차범근 감독님이 최고의 아시아 선수였다."라고 인정하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차범근은 'AFC 선정 아시아를 빛낸 10대 스트라이커'로 뽑히기도 했다. #
- ↑ 98골. 게다가 이 기록에 PK 득점은 하나도 없다. 이 기록은 훗날 차범근이 은퇴하고 10년이 흐른 1999년에 스테판 샤퓌자에 의해 경신되었다. 2015년 기준으로는 6위. 가장 최근에 그의 기록을 경신한 자는 바로 폴란드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 ↑ 특이하게도 대한민국에서는 신격화와 평가절하가 공존하는 기이한 선수이기도 하다. 특히 박지성 이후 해외축구를 접한 해축빠들 사이에서 유독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차붐이 해외에서 뛸 당시 열악한 중계사정과 아래 언급되는 박스 컵 같은 86년 이전의 한국 축구 사 자료들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그의 위상이 후대 한국 축구팬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20년 가까이 해외진출 선수 계보가 끊어지면서 인터넷이 없던 그 당시 40~50대 축구팬들과 현 시대의 축구팬들이 완전히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당시 분데스리가의 위상이나 축구 환경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현재 메날두같은 신 급 선수들이 경기당 1골은 기본으로 넣다보니 경기당 0.3골의 차붐이 우습게 보이기도 하는 것. 26세가 넘어서 진출해 30대 시절이 더 많았다는 점과 말년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향한 점 등 여러 가지 불리한 점이 있음에도 시대 보정을 했을 때 충분히 70년대 후반~8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공격수 계보에 내세울 수 있는 선수인건 그를 지켜본 독일과 유럽축구계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 ↑ 페널티킥을 모두 실축했다는 것이 아니라, 페널티킥을 아예 차지 않았다는 의미다. 고교 시절 페널티킥을 실축한 이후 트라우마가 생겨서 프로선수가 된 이후론 한 번도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 ↑ 과거 농구의 필리핀이 그러했듯이 이때의 말레이시아는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모든 과거의 강호가 그러하듯, 높으신 분들이 망쳐놔서 지금은 아시아에서도 하위권이다.
- ↑ 당시에 비디오 테이프 가격이 비싸다고 재활용하는 일이 많았던 시절이라 이런식으로 방송자료가 유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대 최고의 인기드라마인 여로도 1회분만 남아있을 지경이니 말 다한 셈이다.
- ↑ 사진은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시절이다. 눈여겨봐야 할 곳은 대퇴 사두가 아니라 대퇴 이두 부분이다. 보통은 운동선수라도 저렇게 대퇴사두처럼 튀어나올 정도로 단련하기 힘든 부분이다.
- ↑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이 2000 시드니 올림픽과 2000년 AFC 아시안컵에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서 차범근 감독에 대한 동정 여론이 많아지던 시기기도 했다.
- ↑ 여담으로 이때 고려대 동기(72학번. 나이는 허구연이 2살 형이다.)인 허구연이 차범근을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해설가는 선수출신이 잘 보는 거라고.
- ↑ 옳던 그르건 자기 맘에 안 들면 히딩크부터 시작해 죄다 깠던 조광래와는 성격이 정반대다. 수원 감독시절 굉장히 사이 나쁜 서울에서 뛴, 아스날에서의 부진과 명백히 자신의 잘못인 군문제로 한창 여론의 질타를 받았으며 런던 올림픽에서도 일본전 이전까지 계속 부진한 박주영 조차 최대한 감싸고 기운을 북돋아주려 했고, 월드컵 전부터 졸전을 거듭하던 대표 팀에 대해서도 해설이나 칼럼에서 비판하는 것은 자제했다.
- ↑ 허정무와 정반대다. 물론 허정무의 해설은 술 취한 아저씨 해설이라 불리며 컬트적인 인기를 제외하면 별 호응이 없다.
- ↑ 비선수 출신들은 잡다한 상식이 많고 말을 잘하나 경기 보는 눈이 떨어져서 해설이 안 되는 경우가 많고 선수 출신들은 아는 건 많은데 말로 표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허정무나 이상윤처럼 아예 둘 다 안 되는 경우도 있고.
- ↑ 사실 뢰브를 모를리가 없다. 선수시절 뢰브는 차범근의 후보선수였기 때문이다.
- ↑ 이런류의 최악의 해설이 이상윤. 선수 프로필 읽고 잡스러운 얘기는 많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경기 해설을 못한다.
- ↑ 그러나 차범근보다는 브라질이 훨씬 더 참혹한 상황이었다. 차범근이 겪은 대패는 그래도 전반 40분 가까이 무실점이었다가 2골을 허용한 것이었다.
물론 김병지 덕을 많이 보긴 했다.또한 브라질과 독일보다 대한민국과 네덜란드의 실력차가 훨씬 더 컸다. 차범근이 잘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여론이 현실을 인정할 줄 몰랐다. - ↑ 2006년 독일 월드컵 8강전 독일vs아르헨티나 경기 해설 중 연장전에 접어들자, 우스갯소리로 본인 스스로가 해설자로서 그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자꾸 독일 쪽으로 기운다고 인증한 적도 있다. 당시 옆에 있던 캐스터는 김성주.
- ↑ 독일이 골을 넣으면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다르다거나 상대방이 완벽한 찬스를 맞이했을 때 '위험해요!'라고 외친다던가.
- ↑ 고국 축구협회로부터 공공의 적 취급을 받는 차붐이 독일에서는 유명 인사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베켄바워라든가 마테우스, 클린스만, 뢰브 등...또 차붐은 한국 프로축구에서 뛴 적이 없어서 어느 클럽의 전설로 남진 못했지만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에서는 레전드로 대우해 준다. 거기다가 차붐은 독일어를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정도로 (말하기가 차두리만큼은 유창하게는 아니어도) 독일어 회화가 상당한 편이다.
- ↑ 최용수 이후 FC 서울도 욕먹고 있기 때문에 수원은 유일한 구단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김호곤이 사퇴한 후 조민국-윤정환으로 이어지는 울산도 이제... 2016년 들어서 포항도 스틸타카 같은건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 ↑ 포백 시스템은 이미 K리그에서 김호와 니폼니시 감독이 성공적으로 도입하면서 차츰 퍼지는 단계였다. 다만 대표 팀에서 줄곧 3백을 썼던 이유는 '홍명보' 때문이다. 홍명보는 3백에 최적화된 선수로, 4백에서 센터백으론 대단히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 히딩크도 부임 초기 4백을 실험하다가 결국 3백으로 돌아갔으며, 결국 한국 국대에 4백이 정착된 건 홍명보가 은퇴한 이후이다. 이는 과거 독일도 마찬가지였는데, '마테우스'라는 걸출한 수비수 때문에 4백 전환이 굉장히 늦었다.
- ↑ 다만 피지컬 문제는 진작부터 외국인 감독들이 지적한 바 있다. K리그 대우의 비츠케이나 올림픽 팀 비쇼베츠 감독이 대표적인 예.
- ↑ 2002 월드컵 직전에 열린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지네딘 지단이 교체되는 것을 보고 그가 부상당했다고 해설했는데, 그 말이 정확했다.
- ↑ 또한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미하엘 발락이 결승골을 넣기 불과 몇 분전에 "지금 상황은 절대로 조심해야 합니다. 단 한 방으로 경기가 끝날 수도 있거든요."라고 말했을 정도.
- ↑ 태어났을 때, 뉴스 제목은 '차붐 할아버지 되다'였는데, 제목만 보고 상당수가 '차두리(당시 미혼)가 사고친 줄 알았다.'고 댓글을 남겼다.
- ↑ 여자아이인 첫째의 이름은 '아인'이다. 독일어(Ein)로 1.
- ↑ 벵거 가 차범근 쳐다보며 엄지손가락 치켜든다. 무리뉴 가 와서 90도 인사한다. 베켄바워 를 걔 라고 해도 주변 독일인들이 아무도 뭐라고 안한다...프랑크푸르트 100년역사 의 레전드 로 선정! ...
헐~ - ↑ 한국 피파 온라인 시리즈 제외.
- ↑ 물론 후자가 꼭 전자보다 못한 것은 아니며 박지성도 월드클래스의 선수들이 우글거리는 맨유가 아니라 국대에서처럼 자기가 팀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팀의 주역이자 에이스다운 면모를 보였다.
- ↑ 이 건에 대해선 자기관리 개판으로 유명했던 최강희 잘못이라는게 축구계 중론.
- ↑ 루메니게와 브라이트너라는 이름만 듣고 감이 안 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둘 모두 뮌헨 명예의 전당에 오른 레전드다. 루메니게는 발롱도르 2회에 빛나는 당대 최고의 공격수였고 브라이트너는 수비수의 위치로 발롱도르 2위까지 오른 최고의 사이드백. 현 시대의 선수로 따지면 각각 호날두와 람 정도가 비견될 만 하다.
- ↑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출신으로, 차범근과는 미팅으로 처음 만나 결혼했다. 70년대에 여성이 대학을 다녔다는건 상당히 좋은 집안이 아니었다면 매우 힘든일이었다. 실제로 차범근 또한 곱게 자랐던 아내가 이 시기에 너무 고생을 많이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 ↑ 이와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로는 차범근은 자동차를 상당히 좋아해서 만약 오은미 여사가 돈관리 안했으면 자긴 진작에 집안에다가 각종 차를 종류별로 모아놨을거라고 한 이야기. 차범근이 오은미 여사랑 차를 사러갔다가 축구장 만들어준다는 이야기에 포기했다고. 그렇게 만들어진게 경기도 연천의 축구장이다.
- ↑ 대표적으로 마인츠에서 뛸 당시의 박주호. 2014년 브라질월드컵 특집 다큐에서 차범근이 마인츠에서 뛰고있는 구자철과 박주호를 찾아갔는데 박주호가 발가락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있자 들고 간 것이 하리보. 병실에서 나가기 전 "꼭 먹어"하며 챙겨주는 부분에서 하리보 사랑을 엿볼 수(?) 있다.
- ↑ 당시 승부차기제도가 국제 축구 대회에 적용한게 2년 밖에 안된 상태고 그때 당시에 유로컵, 월드컵 빼고는 국제축구에서는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36년 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축구 결승때 남북전이 다시 성사 되었는데 이번에는 대한민국이 120분간의 혈전끝에 임창우선수의 극적인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해서 28년만에 금메달을 얻었다.
- ↑ 1973년 제정되어 1995년까지 쓰인 번호판으로, 이런 번호판이 달린 차는 못해도 20년이 넘른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