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런던 올림픽

역대 하계올림픽
(Citius, Altius, Fortius)
11회[1]14회15회
1936 베를린 올림픽1948 런던 올림픽1952 헬싱키 올림픽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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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날짜 : 1948년 7월 29일 ~ 8월 14일
개최장소 : 영국 런던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2번의 올림픽이 취소되었으며, 이 중 1944년에 개최가 예정되었던 런던이 4년 뒤로 미뤄서[3] 결국에는 1948년에 개최됨으로써 12년만에 열린 올림픽, 역시 이전 대회와 똑같이 BBC 텔레비젼으로 생중계가 되었다. 개막식장은 웸블리 스타디움.

2 특징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라 IOC에서 동독서독, 그리고 일본의 참여를 불허했으며, 공산주의 국가들은 초대는 받았지만 참가는 하지 않았다. 사실 1948년 시점이면 공산주의 국가들은 막 수립되는 상황이라서 내부 수습에도 정신이 없을 시절이라...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열린 올림픽이라 선수촌을 지을돈이 없었으며, 결국에는 임시로 지은 군대천막에서 머물러야 되는 사태까지 나오게 되었다. 빈민 올림픽...??[4][5]

네덜란드의 파니 블라커스-코옌은 트랙 필드경기에서만 금메달 4개(100m, 200n, 80m허들, 4x100m릴레이)를 가져가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서 세계를 놀라게 하였으며[6], 헝가리의 펜싱 선수인 아이로나 엘렉과 체코의 카누 선수인 잔 브로작은 12년 뒤에 열린 이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타이틀을 지켜낼 정도로 아직 실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새미 리가 이 대회에 다이빙선수로 출전해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 참고로 새미 리는 아시아계 미국인중에 최초로 금메달을 딴 선수이다.

런던은 64년 후에 2012 런던 올림픽 을 다시 개최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개최하게 되었던 이 때와는 달리 64년 후 열리는 올림픽은 영국 정부의 든든한 지원으로 성공적으로 개최를 다짐할 정도.

단복 재질이 런던의 기후와 맞지 못하였던 탓에 당시 참가했던 선수들은 그야말로 고생을 겪으며 런던의 기후에 적응해야만 했다. 게다가 선수촌 임대료 미납을 이유로 한때 선수들 전원이 선수촌에서 강제로 퇴거당할 뻔한 슬픈 사연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는 듣보잡에 불과한 신생 변방인데다가 가난하기 짝이 없는 농업국가에 불과했던 탓에 올림픽 지원금도 없을 정도로 매우 가난하였던 시절이었다. 이것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자금을 모아서 어렵게 런던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7]

독일일본IOC의 훈령에 따라 전범국 조치에 의거 이 올림픽에 모두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 중 1896년에 열렸던 1회 아테네 올림픽 때부터 참가해 왔던 독일과는 달리 1912년 스웨덴 스톡홀름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일본은 3번째로 열린 2012 런던올림픽이 런던올림픽 첫 출전이 되었다.

3 대한민국 대표팀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하계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대회이기도 하다. 최초의 참가는 1948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갓 독립한 상황에서 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에 올림픽 참가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올림픽 참가를 위해 기념 복권을 발행하는 노력 끝에 참가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 때 발행한 복권이 한국에서 발행된 최초의 복권이라고 한다.

이때 한국 선수단이 입었던 단복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올림픽 참가 이후, 2년 뒤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태극 문양이 달린 단복은 모두 태워서 이 당시 입었던 단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2012년에 등록 문화재로 지정된 단복은 올림픽 당시 고문으로 참가한 이원순씨 소장이었는데, 이 분은 1948년 올림픽 직후에 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단복이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2012 런던 올림픽 한국 선수단 단복은 이때의 단복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 참가한 하계 대회에서 한국은 동메달 2개(복싱 플라이급에 한수안 선수, 역도 미들급에 김성집 선수)를 따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 축구 국가대표팀은 감독이었던 박정휘가 개박 3일전 돌연 사퇴를 하는 바람에 조선야구협회 시찰단 자격으로 참가했던 이영민에게 지휘봉을 주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표팀 분위기가 어수선 했으나 1라운드에서 만난 멕시코를 상대로 5:3 승리를 기록하며 최초로 메이저 대회 2라운드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넣은 5골은 올림픽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한경기 5골 이상을 넣은 유일한 경기로 오랜기간동안 기록되었으나 2016 리우 올림픽 조별리그 1차전 피지전에서 8-0으로 승리하게 되어 기록이 경신되었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 스웨덴에게 0-12로 참패하면서 한국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8] 최윤칠 선수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슛이 많이 들어와서 골키퍼였던 홍덕영 선수가 다음 날 움직이지도 못 했다고 한다.[9]
  • 마라톤에서도 상당히 선전했다. 38Km까지 최윤칠 선수가 선두를 달리면서 금메달이 눈 앞에 보였는데, 그만 38Km 지점에서 근육 경련으로 쓰러지면서 기권했다. 너무 아쉬웠는지 2Km 정도는 걸었는데, 그 때까지도 선두였다고 한다. 즉, 40Km까지 선두였던 셈.[10]

여담으로 이 대회가 폐막한 다음 날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면서 대한민국은 국제 무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4 창작물

  1. 12회 올림픽(1940년)과 13회 올림픽(1944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취소됨
  2. 빅벤이 모티브라고 하였다. (ioc 설명)
  3. 1940년의 경우 원래 일본이 개최지였으나 전범국에 대한 처벌로 당연히 개최권을 박탈당한다.
  4. 남자 선수 한정. 여자 선수들은 대학교 기숙사 건물에서 지냈다고 한다. 다만 그래도 전대회에서는 호텔에서 머물렀던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상황이 안좋았던것은 사실.
  5. 전쟁은 끝났지만, 경제재건은 지지부진했고 유럽전역은 사실상 폐허상태였다. 영국도 전국민이 정부의 식량과 석유배급으로 간신히 생활하던 시절이다.
  6. 출전 당시 아이를 둘이나 둔 주부였다. 그래서 별명이 '트랙의 주부'(...) 올림픽에서 여성 선수의 위상을 드높인 선수로 평가받고 있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그녀가 금메달 4개를 걸고 개선하는 날을 임시공휴일로 선포했을 정도로 네덜란드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상은 높다.
  7. 직전 해인 1947년, 한국에서 국가적으로 복권을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의 정식 명칭은 올림픽 후원권. 1988 서울 올림픽에서도 올림픽 복권을 팔았었고.
  8. 여담으로 스웨덴이 우승을 차지하며 축구 금메달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은 국대 선수 출전 제한이 전혀 없어서 월드컵과 같은 축구 국제대회로 손색이 없었다. 유일하게 제한이 걸린 형태가 프로 리그 선수는 출전하지 못하는 형태인데, 이 시절만 해도 많은 나라에서 프로리그가 없거나 프로가 없는 대신 아마추어 축구가 준프로 수준이라서 꽤 실력좋은 선수가 올림픽에 나오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당시 스웨덴에서는 군나르 노르달,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흘름을 내세워 우승하게 됐는데 후에 세 선수 전부 AC 밀란으로 이적해 전성기를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밀란팬들에게 그래노리 삼총사라고 칭송을 받들어 레전드로 추앙을 받고있다.
  9. 흔히 이 일이 스위스 월드컵 당시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골키퍼로 참가했던 故 홍덕영의 증언이 나오면서 1948 런던 올림픽 때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홍덕영 인터뷰. 당시 스웨덴이 찬 슈팅수가 48개였다.
  10. 참고로 당시 한국 마라톤 대표팀의 감독은 바로 손기정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