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빈 윤씨

1 생애

1765년[1] ~ 1824년 (향년 60세)
투기가 심했던 여인.

본관은 남원. 판관 윤창윤(소론)과 벽진 이씨의 딸. 궁호는 경수. 정조의 두 번째 후궁이다.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첫 번째 후궁 원빈 홍씨가 후사없이 일찍 죽자 1780년(정조 4년), 16세의 나이에 간택되었다.

2 성격

"和嬪尹氏僭妬於中宮喑詛於成嬪自內嚴囚方有降宮爲房之議" (화빈 윤씨는 중궁(효의왕후)을 분수에 지나치게 질투 했고 성빈(의빈 성씨)을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저주했다. 이로 인하여 죄를 얻었고 대궐 안에 몹시 엄히 가뒀다. 대궐에 법도가 있어서 의논하여 방을 내렸다.)[2]

이재난고에서는 효의왕후를 질투했고 의빈 성씨를 저주해 따로 방을 내린 것으로 보아 투기가 심하고 성깔있는 성격을 가진 것 같다. 중전과 세자를 낳은 후궁을 질투하고 저주했으니 수빈도 질투받았을 가능성이 크나, 수빈 입궁 이전에 이미 따로 방을 내려 살게 했으니 수빈과는 만나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3 상상임신

"尹嬪 過三十餘朔 産事無實" (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이재난고
"선왕께서는 2남 2녀를 두셨는데, 의빈(宜嬪) 성씨(成氏)는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낳고 한 따님은 1년이 못되어 죽었다. 지금의 상전하(上殿下)와 숙선 옹주(叔善翁主)는 모두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낳았다." 《순조실록- 혜경궁지문》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정조실록(1782년 음력 9월 7일)》


1781년(정조 5년) 1월, 회임하여 산실청까지 만들어졌으나 다른 후궁들의 출산 기록이 있는 조선왕조실록, 선원계보기략, 정조행록, 혜경궁지문 어디에도 화빈의 출산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동안 임신 기록만 있고 출산 기록이 없어 의문점으로 남았는데, 정조 대의 문신 이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화빈이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정조가 문효세자의 출생 당시,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문효세자가 정조의 첫 아이임을 알 수 있다.
첫 임신 기록으로부터 10개월 뒤인 1781년(정조 5년) 음력 11월 2일,《일성록》에 화빈 윤씨의 해산을 기다리는 기록이 있다. 즉 열 달동안은 배가 불러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진맥을 잘못 했거나 유산한 것은 아니고, 상상임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 30개월 간,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은 후에도 화빈의 산실청이 유지된 점과 문효세자의 원자 책봉이 늦어진 것을 보아(생후 2개월 뒤인 11월에 원자로 책봉됨)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반가의 여식인 화빈에게 왕자를 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84년(정조 8년), 문효세자는 3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정조의 둘째 아들 순조가 11세에 세자로 책봉된 것과 비교해 매우 이른 일이었다.

1787년(정조 11년), 화빈의 산실청과 관련하여 조시위(화빈의 인척)와 이문덕이 귀양을 가게 된다.[3]

의빈 성씨가 5년 동안 세 번이나 임신하고, 의빈 성씨 사후에 간택된 후궁 수빈 박씨가 14년 동안 아들 순조와 딸 숙선옹주를 낳고, 수빈이 처음 간택되었을 때 화빈의 나이는 23살로 한창 임신을 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새 후궁을 간택한 것을 보면 화빈 윤씨는 그다지 총애받지 못했던 것 같다.이재난고의 내용을 보면 총애받지 못할만 하다.

4 죽음

1824년(순조 24년), 60세의 나이에 졸하였다. 묘는 고양시의 서삼릉의 후궁묘역에 의빈 성씨, 원빈 홍씨와 함께 묻혀 있다.

5 가계

아버지 윤창윤은 종5품 판관 벼슬로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나, 당시 정조의 최측근이자 영의정이었던 서명선과 인척 관계였다. 서명선과 같은 소론계이다. 삼간택을 거쳐 입궁하긴 했으나 서명선의 추천으로 사실상 사전에 내정된 상태였다.

  • 아버지 : 윤창윤
  • 어머니 : 벽진 이씨
    • 남편 : 정조
      • 자식없음
  • 친척 : 남원 윤씨 (1768년 ~ 1801년) - 가사 《명도자탄사》의 저자

6 화빈 윤씨가 등장하는 작품

극중에서 의빈 성씨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임신했다. 이에 왕실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그녀가 원자를 낳고 의빈이 옹주를 낳길 바란 것으로 그려지며 실제로도 이럴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정작 의빈이 원자(문효세자)를 낳았고 그녀가 옹주를 낳았다. 이후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어 거의 나오지 않는다. 72회에서 아버지 윤창윤과 정순왕후 세력과 힘을 모아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을 막으려 하나 결국 실패하고 세자 책봉식에서 씁쓸한 화빈의 모습이 마지막 출연이 되었다.

참고로 한때 화빈이 딸을 낳았으나 요절했으며 이후 후사를 두지 못했다고 알려진 바 있었는데, 아마 이 드라마의 영향이 큰 듯하다.
  1. 을유년 출생. 정조의 또다른 후궁 의빈 성씨(계유년 출생)와 띠동갑.
  2. 이재난고》 - 十四日甲申”.
  3.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101019_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