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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懿王后
양력 : 1754년 1월 5일 ~ 1821년 4월 10일
음력 : 1753년 12월 13일 ~ 1821년 3월 9일
야사에 의하면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곰보였다고 한다. 남편 정조는 15살 때부터 의빈 성씨(당시 나인)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15년이나 기다려 기어이 후궁으로 삼았다.
목차
1 생애
1753년(계유년) 음력 12월에 가회동에서 청원부원군 김시묵과 당성부부인 남양 홍씨의 딸로 태어났다.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는 윤득양의 딸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최종적으로는 김시묵의 딸인 효의왕후가 세손빈으로 간택되었다고 한다. 10살이 되던 1762년(영조 38년)에 세손빈으로 간택되어 음력 2월 2일, 1살 연상의 왕세손 이산과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혼인한 지 4개월 만인 윤5월 21일,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이때 그녀는 왕세손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가 정조의 배필이 된 것은 그녀의 본관인 청풍 김씨 출신이며 시할아버지인 영조의 할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가 아버지인 숙종을 낳았듯이, 그녀도 정조의 아내로서 적법한 후손을 낳아주길 바라는 영조의 뜻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술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1766년(영조 42년) 8월 3일, 세손빈(당시 14세)이 관례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776년 남편인 정조가 즉위하자 세손빈에서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자신의 도리를 잘 해내 칭송을 받았으나 애석하게도 후사를 낳지 못해서[1] 1790년에 수빈 박씨가 정조의 아들 순조를 낳자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키웠다.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이후 순조의 배려를 받으며 지내다 1821년 창경궁 자경전에서 숨졌다. 향년 69세. 사후에 '예경자수'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시호를 효의(孝懿)로 정하였다.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하고 있다. 1899년 고종 황제가 정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효의왕후 역시 효의선황후로 추존했다.
2 가계
2.1 친정 (청풍 김씨)
- 아버지 : 청원부원군 김시묵
- 어머니 : 의춘부부인 의령 남씨
- 이복오빠 : 김기대
- 조카 : 김종선
- 이복오빠 : 김기대
- 친어머니 : 당성부부인 남양 홍씨
- 친오빠 : 김기종
2.2 왕가 (전주 이씨)
- 남편 : 정조
- 자식없음
3 성격
성격이 온후하였고,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는 벌레를 밟을까봐 함부로 풀을 밟는 것도 자제했을 정도로 심성이 고왔다고 전해진다.
효심이 깊어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시할아버지인 영조는 물론 의붓 시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영조 역시 손자며느리인 효의왕후를 총애했다. 뿐만 아니라 시고모인 화완옹주[2]가 그녀를 몹시 괴롭히고 정조와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온갖 이간질을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텼으며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혜경궁 홍씨의 수라상을 올릴 때는 자신이 직접 반찬의 맛을 보고 올렸다고 한다. 검소한 걸로도 유명했다. 수진궁이나 어의궁에서 쓰고 남은 재물이 있으면 친정에 보내는 왕비도 많았는데, 효의왕후는 이 재물을 공물로 생각하고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불임인 것만 빼면 완벽한 왕비였다(…)
4 홍국영과의 갈등
늘 각별히 정조를 내조하였으나 정조가 총애한 신하인 홍국영과 대립한 적이 있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이가 원빈 홍씨였다.
홍국영은 그의 여동생이 왕자를 낳아서 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 믿고 있었지만, 그녀가 얼마 못 가 갑자기 사망하고 만 것.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의 죽음 뒤에 효의왕후가 있다고 생각하여 효의왕후를 모함했고, 함부로 효의왕후의 궁녀들을 잡아다 문초를 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정조는 효의왕후의 편을 들어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며 효의왕후를 모함한 홍국영을 귀양보냈다.
"임금에게 백사(百事)에 불민(不敏)하니 전하 춘추 삼십이시나 한낱 혈육을 두지 못하였으니 국모의 소임이 다 불가한지라. 빈을 택하여 국가 종사를 전코져 함이나 빈은 지락 십삼에 임금 섬기기 어렵지 아닐까. 후궁을 살피며 지극온순한지라. 원정당 원위(元正堂 元位)를 떼어 빈에게 전하고 정궁은 빈의 협실(夾室: 정궁의 자리에서 물러남)로 나고저 하노라 하신대", 《숙창궁입궐일기》
원빈 홍씨의 입궐 과정을 그린《숙창궁입궐일기》에서, 효의왕후는 더위를 핑계로 원빈의 인사 받기를 며칠이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5 후궁들과의 관계
조선왕조에서 드물게 후궁이지만 삼간택과 가례의 절차를 거쳐 무품빈[3]으로 입궁한 경우가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정조의 후궁들인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다. 그 이유인즉슨 다른 왕들이야 왕비에게서 자식을 얻거나 궁녀에게 승은을 내려 후사를 이었지만, 정조는 왕비 효의왕후에게서 자식이 없는데다 궁녀들을 가까이 하는 왕도 아니었기 때문. 이 때문에 정조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서른이 다 되어 가도록 자식이 없었고, 당시 왕대비였던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명문가에서 후궁을 간택하게 된 것.
첫 번째 간택후궁인 원빈 홍씨와의 사이는 좋지 못했던 것 같다. 원빈 홍씨(숙창궁)의 조현례 과정을 그린 《숙창궁입궐일기》에 의하면, 효의왕후는 유월의 더위를 핑계로 원빈 홍씨의 인사 받기를 며칠이나 미룬다. 또, 원빈 홍씨의 오라비인 홍국영과 효의왕후의 갈등은 야사로 잘 알려져 있다.
원빈 홍씨가 입궁한 지 1년도 안 되어 죽자 2번째로 간택된 후궁 화빈 윤씨와의 사이는 기록된 바 없지만 이재난고의 내용을 보아 자신을 심하게 질투하는 후궁과 사이가 좋을리가 없을 것 같다.
정조의 3번째 후궁이자 정조가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후궁 의빈 성씨와의 사이는 꽤 각별했던 것 같다. 효의왕후와 의빈은 1753년(계유년) 동갑내기인데다 입궁 시기도 10살 때인 1762년(임오년)으로 같다. 정조가 직접 쓴 의빈 성씨의 어제묘지명에 따르면, 처음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가 아직 임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4] 또 의빈 성씨는 죽기 전날 밤에도 앞으로는 효의왕후 처소에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정조의 4번째(마지막) 후궁인 수빈 박씨 역시 효의왕후 등 윗전을 잘 공경하였다고 한다. 효의왕후와 화빈 윤씨, 수빈 박씨 이 세 여인은 정조 사후에도 약 20년을 더 살았고, 약 60세 정도에 1~2년 간격으로 효의왕후, 수빈, 화빈 순으로 졸하였다.
6 상상임신
1787년(정조 11년) 9월, 임신하여 산실청을 설치했다. 정조는 6년 전 후궁 화빈 윤씨가 임신하자마자 산실청을 설치했으나 출산에 이르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지 이번에는 해산달에 산실청을 설치했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출산하지 못했고, 결국 1788년(정조 12년) 12월, 산실청을 철수했다.
산실청이 1년 넘게 지속되었으나 어디에도 출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임신해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상상임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7 정조와의 금슬
남편인 정조와의 금슬은 좋지 못했다.
정조는 이미 15살이던 1766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다 거절당한다. 15년 뒤에 기어이 승은을 내리니 바로 이 궁녀가 정조의 유일한 승은후궁 의빈 성씨다.
또 1769년(기축년), 18살의 정조는 여동생 청연공주의 남편인 홍은위 정재화, 별감들과 술집, 기생집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김시묵은 반드시 화완옹주에게 청하여 홍인한을 정승이 되게 하려고 하였고, 홍인한은 또 정후겸에게 비밀히 부탁하여 김시묵을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게 하려고 하였다. 김시묵이 또 일찍이 나에게, 홍인한이 그 형보다 나으니 정승을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 [5]
정조가 직접 쓴 《존현각일기》의 일부분이다.
효의왕후의 아버지 김시묵은 1771년(영조 47년), 홍봉한과 함께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은신군을 후원했다는 혐의로 청명당 세력에게 탄핵된 바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김시묵은 청명당과 대립하던 홍봉한(정조의 외조부) 세력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정조가 직접 쓴 저 기록에 의하면 정조와 대립하던 정후겸, 홍인한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후궁 원빈 홍씨를 들이기 직전인 1778년(정조 2년), 박재원이 효의왕후의 불임을 치료하기 위해 양의를 들일 것을 건의했다. 정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6]
정조 시절, 효의왕후에 대한 조정의 문후와 약원의 문안이 철폐되었다. 이는 순조 대인 1801년(순조 1년), 문제가 되었다.[7][8] 무슨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지만 왕비로서의 권위가 무너진 일임에는 틀림없다.
8 대중매체 속 효의왕후
정조의 정실 부인이므로 영정조 시대를 다룬 사극에 비중이 적더라도 자주 나온다.
1988년 MBC《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에서 이도은[9]이 연기했다. 1989년 MBC《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 에서는 이휘향이 연기했다. 1998년 MBC《대왕의 길》에서는 고 이애정[10]이 연기했다.
가장 최근작인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박은혜가 연기했다. 참고로 이산은 박은혜가 대장금 이후에 처음으로 출연한 사극이고 대장금에서 연출을 맡았던 이병훈 PD와 2번째로 만난 작품이기도 하다. 극중 효의왕후도 사서에 묘사된대로 어질고 현명하며 인내심 강한 여성상으로 그려졌으며, 박은혜는 이를 잘 연기하여 호평을 받았다. 주로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견미리)와 함께 나오는 장면이 많았다. 주로 혜경궁 홍씨가 뭐라 뭐라 대사를 하면 효의왕후가 놀라 '어마마마'하는 식. 박은혜는 《이산》스페셜에서 명대사로 ‘어마마마’와 ‘전하’라며 “슬픈 ‘어마마마’ 기쁜 ‘어마마마’ 놀란 ‘어마마마’ 정말 많은 ‘어마마마’의 대사를 했다. ‘전하’도 종류별로 많이 해서 두 대사는 정말 자신 있다(웃음)”고 밝히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는 한지민이 연기했는데, 극중에서 '성송연'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11] 정조의 첫사랑으로 각색되어 나왔다.[12] 극중에서 효의왕후는 자신에게는 연적이라 할 수 있는 성송연이 정조의 승은을 입고 문효세자까지 낳았는데도 전혀 시샘하지 않고 진심으로 아끼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극 후반에 성송연이 중병에 걸려 죽어갈 때 그녀의 쾌유를 기원하는 불공을 직접 올릴 정도였다.- ↑ 세손빈 시절부터 임신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임신하지 못했다고 한다. 1787년에 상상임신을 해서 산실청까지 세워진 적도 있다 하니 불임으로 인한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 ↑ 사도세자의 동복 여동생이다.
- ↑ 임신했을 때도 후궁이 임신했을 때 설치하는 관청인 호산청이 아니라 중전이 임신했을 때 설치하는 관청인 산실청이 설치된다. 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나 헌종의 후궁인 숙의 김씨가 옹주를 낳은 뒤에도 후궁 첩지를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첩지를 받은 것과 비교해보면 일반 후궁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 어제 의빈 묘지명
- ↑ 《존현각일기》
- ↑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206005_002
- ↑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605026_005
- ↑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102002_001
- ↑ 드라마 《이산》에서는 의빈 성씨의 상궁으로 등장
- ↑ 드라마 《홍국영》에서는 원빈 홍씨로 등장
- ↑ 실록에는 없지만 정조 대 학자 황윤석이 저술한 이재난고에 의하면 의빈 성씨의 본명은 '덕임(德任)'.
- ↑ 정조가 15살에 고백했을 정도니, 실제로도 첫사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