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빈호의빈 성씨
별칭성빈[1], 성의빈[2], 의빈궁[3]
이름성덕임(成德任)[4]
출생1753년(영조 29년, 계유년) 음력 7월 8일
사망1786년(정조 10년, 병오년) 음력 9월 14일
본관창녕 성씨
배우자정조
자녀문효세자, 옹주, 셋째
처소창덕궁 연화당(讌華堂)[5]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6]
"너(의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7]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만든 여인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를 낳은 유일한 후궁.[8] 양반가 겸종(청지기)의 딸에서 왕세자의 어머니가 된 입지전적인 여인. 조선왕조의 비빈들 중 유일하게 임신 중에 죽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

정조[9]를 15살 때부터 무려 15년 동안 기다리게 하고, 2번이나 거절한 여인. 3번째 고백을 받아들였고, 5년 동안 3번이나 임신할 정도로 사랑받았지만 자식을 잃은 슬픔을 2번이나 겪고, 셋째 아이를 뱃속에 품은 채 죽은 비운의 신데렐라.[10]

조선 정조의 3번째[11] 후궁. 정조의 다른 후궁들은 후사를 위해 명문가에서 간택한 후궁인 데 반해, 의빈 성씨는 유일하게 궁녀 출신이다. 또, 정조가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여인이다.

1 궁녀로 입궁하다

본명은 덕임.[12] 본관은 창녕. 1753년(영조 29년, 계유년) 음력 7월 8일, 홍봉한(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13]였던 아버지 성윤우와 어머니 임씨의 딸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년)[14], 10세의 나이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15]

혜경궁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한다.[16] 헌종비나 철종비는 자식이 없어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녀를 양녀처럼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혜경궁은 의빈과 비슷한 나이의 자녀가 셋(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이나 있다. 아무튼 혜경궁이 친히 기를 정도면 정조와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2 소설을 필사하다

곽장양문록 문서 참고바람.

국문소설을 필사했다는 것으로 보아 한글은 물론이고 한문도 쓸 줄 알았을 것이다. 궁녀는 글도 공부한다. 또 혜경궁 처소의 궁녀로 있으면서 청연공주나 청선공주와도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10책에 달하는 소설을 필사했다는 것으로 보아 의빈 성씨가 평소 소설을 즐겨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조는 소설을 싫어하여 문체반정을 일으키기도 했다.

3 정조의 사랑을 받다

"처음 승은을 입을 기회가 있었으나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키우지 못했으니 울면서 못한다고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이후 15년 동안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뽑았고 다시 의빈에게 명하였지만 또 사양했다. 결국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고 나서야 명을 따랐다. 이후 임신하여 임인년 9월에 왕세자가 태어났다. 이에 소용이 되었고, 아들의 귀함 덕분에 의빈이 되었다" [17]

정조가 직접 쓴 묘지명의 일부이다. 첫 아들 문효세자가 1782년 음력 9월 생(양력 10월 생)이므로, 늦어도 1781년에는 첫 승은을 입었을 것이다. 1781년에서 15년 전이면 정조가 처음으로 고백한 시기는 1766년(영조 42년)으로 추정된다. 1766년이면 정조가 15살, 의빈 성씨가 14살이었다(...)[18]

궁녀로서는 최고의 영광인 승은을 거부한 것으로 보아 욕심이 없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또한 의빈 성씨는 거절의 이유로 효의왕후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음을 들었는데, 이를 통해 효의왕후와의 사이도 원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효의왕후는 끝내 임신하지 못했다.[19]

이후 정조는 15년 간 후사를 위해 간택을 거쳐 후궁 둘을 들였는데, 첫 번째 후궁 원빈 홍씨는 입궁 1년만에 죽고, 2번째 후궁 화빈 윤씨는 별다른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에 정조는 첫 번째 고백을 하고 거절당한지 15년 만인 1781년에 의빈 성씨에게 2번째로 고백했으나 또 거절당한다. 또 거절한 이유는 안 나와 있지만 그때까지도 효의왕후가 임신하지 못했으니 효의왕후에 대한 배려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남자로서 정조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정조는 안되겠다 싶었던지 이번엔 의빈 성씨의 하인[20]에게 벌을 내리는 강수를 뒀고, 의빈 성씨는 그제야 정조의 마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21] 여기서 중요한 건, 정조가 일개 궁녀였던 의빈에게 2차례나 거절당하는 걸 감수하면서도 긴 세월을 기다렸다는 점이다. 신분상 자신이 원하는 여자는 강제로라도 후궁으로 삼을 수 있었는데도 의빈이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 점에 대해서는 끝내 벌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입궁 30년 뒤에 상궁이 되므로 승은을 입을 당시 의빈 성씨는 나인 신분이었을 것이다. 승은을 입고 상의(정5품)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22]

4 후궁이 되다

1782년(임인년) 9월 7일 인시(새벽 3시-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맏아들 원자(문효세자)를 낳았다.[23] 이 때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 복례[24]와 유모 아지[25]를 보내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이후 정3품 소용을 거쳐 정1품 의빈이 된다. 의빈의 빈호는 정조가 직접 정했다.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26], 수(綏) 자[27]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용궁에게 올릴 빈호를 의(宜) 자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빈(嬪)으로 봉작(封爵)하는 관교(官敎)는 작년에 이미 옥새를 찍어 하비하였으니, 자호(字號)를 정사를 열어서 거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방에 있는 낭관을 재촉해서 올라오게 한 후에 전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28]

1784년(갑진년) 윤달 3월 20일에 옹주[29]를 낳았다. 아마 이 때가 정조와 의빈 성씨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아들 하나, 딸 하나의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5 비극적인 죽음

그러나 옹주는 불과 생후 2개월도 안 된 음력 5월 12일에 죽어 작위도 받지 못했다. 문효세자 역시 2년 뒤인 1786년 음력 5월 11일에 5세를 일기로 홍역으로 요절했다. 문효세자 사망 당시 셋째를 임신하고 있던 의빈 성씨 역시 앓기 시작해서[30] 그 해를 못 넘기고 만삭[31]의 상태로 숨을 거둔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았던 것 같다. 향년 34세(만 33세).

6 독살 의혹

1786년(정조 10년) 12월 1일, 정순왕후 김씨(당시 왕대비)가 언문으로 하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상 이 하교는 은언군을 제거하기 위한 정순왕후의 정치적 노림수로 보는 의견이 있다. 결국 이 하교 때문에 은언군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천만 뜻밖에 5월에 원자가 죽는 변고를 만나 성상이 다시 더욱 위태로워졌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또 9월에 상의 변고를 당하였다.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32], 나라에 관계됨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2차례 상의 변고에 온갖 병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필경에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33]

같은 해 같은 달, 또 독살 의혹에 관한 기록이 있다.

김종수가 아뢰기를, “어떤 선비가 와서 이 종이쪽지를 보여 주었는데, 보고서 마음속으로 몹시 놀라 감히 이렇게 청대(請對)하였습니다.” 하여, 원지(原紙)를 가져다 보니, 대략에, “마을 안에 손가(孫哥)란 자가 있는데 와서 말하기를, ‘9월에 성빈(成嬪:의빈 성씨)께서 앓고 있을 때 내관 이 지사(李知事)가 약물을 간검(看檢)하였는데, 내의원의 약을 쓰지 않고 자기가 가져온 약을 달여서 올리니, 약을 드시자마자 바로 돌아가셨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아는 자가 없었는데, 하늘의 이치는 가리기 어려워 왕대비전께서 살펴서 알아낸 점이 있어 이를 상감에게 전달하자, 상감이 듣고 크게 놀라 곧장 성빈의 치상소(治喪所)에서 이 지사를 잡아다 그 자리에서 끌어 내어 목을 베려고 하였는데[34], 또 중간에서 만류한 자가 있으므로 그 자리에서 칼을 씌워 멀리 찬배(竄配)하였는데, 동짓달에 상께서 특별히 용서하여 풀어 줘 이 내관(李內官)의 고향인 충청도로 돌려보냈다. 대체로 이 내관은 일찍이 홍국영(洪國榮)과 한통속으로 결탁했던 자로서 위세를 부리고 아부하는 것이 종잡을 수 없고 지극히 요망하고 악독하였으니, 옛날 진 시황(秦始皇) 때 천하의 간신이었던 조고(趙高)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자 양대의(梁大宜)도 상의 총애를 받아서 품계가 높았는데, 그자의 아비가 죄를 받았을 때에 또한 그 품계를 삭탈당해 우선 신문(新門) 내궐(內闕)의 제청색(祭廳色)에 차임되었다. 이 내관의 집은 매우 재물이 넉넉하여 보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고 한다.’ 하였습니다."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내막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다른 일로 의심할 단서가 있다면 혹시 조금이라도 그럴듯하게 여기겠지만, 약을 쓴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운운한 것은 지극히 가소롭다. 약을 조제하고 다릴[35] 때에 내가 반드시 직접 검열한 사실을 궁중 안팎이 모두 다 알고 있으며[36], 더구나 약봉지와 약그릇을 모두 누워 자는 침실 안에 보관해 놓고 썼다. 경이 이런 상황을 몰라서 비록 이처럼 놀랐지만 사실이 대체로 이와 같으니, 그자의 약을 쓰고 쓰지 않은 문제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 중관이 주관하는 궁방(宮房)이 자못 많아서 내부에서 시기하는 자가 없지 않았을 것이니, 지난해에도 이런 근거 없는 말이 있었다. 궁중의 일에 관계되므로 조용히 조사하여 단서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금 기다려서 응당 문안(文案)을 내보이겠다. 경은 우선 물러가라.” 하였다.[37]

당시 내관 이윤묵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정조는 의빈의 치상소에서 이에 연루된 내관 이윤묵의 목을 바로 치려고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정조는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 항상 자신이 직접 검열하였으므로 독살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고 얼마 뒤 이윤묵을 풀어주었다. 정조는 독살설을 퍼뜨린 손용득을 직접 신문하여 손용득과 여종 악연을 귀양 보냈다. 정조실록

7 사후

출산한 두 아이는 요절했고 셋째는 태어나지도 못한 채 의빈과 함께 죽었기에 후사는 전하지 않는다.

1797년(정조 21년)에는 육상궁선희궁의빈궁명일제삼궁고제[毓祥宮宣禧宮宜嬪宮名日祭三宮告祭]를 지낸 기록이 남아 있다. 육상궁은 숙빈 최씨의 사당, 선희궁은 영빈 이씨의 사당이다. 의빈 성씨가 정조의 증조모, 조모와 함께 제사를 받았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종로구 안국동에 '의빈궁'이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바로 옆에 아들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도 있었다. 문희묘는 본래 경모궁(사도세자의 사당) 근처에 지으려 했으나, 문효세자 사후 5개월[38] 만에 생모 의빈 성씨가 졸하자 의빈궁 옆에 지은 것. 무덤에 이어 사당도 어미와 아들이 나란히 있게 한 정조의 배려였다.

그러나 의빈궁은 고종황제 때에 육상궁의 별묘로 옮겨간다. 하지만 왕을 낳은 후궁이 아니라는 이유로[39] 칠궁에 포함되지 못하고 1908년, 순종황제 때에 신위를 땅에 묻었다. 이 때 문효세자의 신위도 땅에 묻혔다. 대신 1년에 1번씩 원소[園所]의 예에 따라 제사를 지내라고 했는데 원소[園所]는 왕의 사친, 왕세자, 왕세자빈의 예다.

8 의빈창녕성씨지묘

사적 제 200호.

정조는 의빈 사후 이례적으로 아들 문효세자와 나란히 묻힐 수 있도록 해주었다. 본래 후궁보다 후궁의 자식들이 신분이 더 높다는 점과 숙종 때, 숙빈 최씨의 묘자리를 공주가 묻힌 곳으로 정할 수 없다 하여 다시 정했다는 전례를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40]

아들 문효세자와 함께 효창원에 묻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효창원이 효창공원으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때문에 아들과 어머니가 나란히 묻히게 한 정조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문효세자는 백부인 의소세자와 나란히 묻혀있고, 의빈 성씨는 효창원에서 2km 떨어진 후궁묘역에 묻혀있다. 이 후궁묘역은 비공개 지역이라 사전에 서면으로 신청을 해야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드라마 《이산》에서 의빈 성씨 역을 연기했던 배우 한지민이 의빈 성씨의 묘에 다녀왔다고 밝히기도 하였다.기사

9 이재난고

조선시대 여성 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드문데, 정조 대의 문신인 이재 황윤석이 쓴《이재난고》에 의빈 성씨의 본명, 가족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의빈 성씨와 모르는 사이였던 황윤석이 어떻게 의빈의 본명, 가족관계 등에 대해 알고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의빈이 당시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정조가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서른이 넘도록 왕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해 간택해 후궁을 둘이나 들였는데도 정작 첫 왕자를 승은을 입은 궁녀가 낳았다 하니 당시 호사가들 사이에서 화제였을 것이다.

昭容成氏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惠慶宮稱其福相而上亦愛之 許令從所顧屬內庭旣有娠 惠慶宮恒以語上曰德任腹漸高大矣上則微哂而已 尹嬪過三十餘朔産事無實 而元子生 則産廳都提調徐命善等猶請姑待尹氏産期 而不請元子定號 奉朝賀金尙喆亟上疏 引春秋立庶以長之義 請元子定號上意亦然 亟從之徐則竟八度呈辭而遞蓋 昭容本係洪家傔人之女 故老論或以線索甚,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아버지가 홍봉한(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 혜경궁이 서로 그 복을 일컫었고 임금(정조) 역시 덕임을 사랑했다. 내정(임금이 사적인 생활을 하는 궁궐의 내부)에 드는 것을 허락했고, 이윽고 임신했다. 혜경궁이 덕임의 임신을 말하자 임금은 조용히 웃었다. 윤빈(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덕임이 원자를 낳았지만 윤씨의 산실청 때문에 원자 정호를 청하지 못했다. 원자 정호를 청하자 임금 역시 그러했다. 소용은 본래 홍봉한 가문에서 일하던 시종의 딸이다."

10 어제비문(御製碑文)

어제비문이란, 왕이 직접 쓴 비문을 말한다.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嬪宮)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나아가 느끼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 너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네가 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가 문효세자이며 내 후계자다. 세자는 이미 2살 때 글을 깨우쳤다. 너의 근본이 단단해서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문효세자가 죽은 후 셋째가 되어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올 줄 알았건만 하늘과 땅은 오히려 사이를 더 떨어뜨려 놓았다. 이로써 마음 한 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어렵게 얻은 아들 문효세자를 하늘에 견주어 돌아오길 바랐으나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 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 앞전에 겪은 일과 비교해도 비교할게 없을 만큼 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 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또 권세를 능히 삼가하고 도리를 지킬 줄 알고 나눌 줄 알았다. 너는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는 예를 다하며 울었고, 쉬지도 못했고, 눈물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가 잘 못 될까봐 걱정 돼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랗단 말이냐? 이제 나는 무릇 중요한 일을 접고 너의 장례를 치러서 살필 것이다. 문효세자의 옆에서 편히 쉬어라. 아들의 무덤에서 멀지 않게끔 아들과 어머니가 좌우에 있도록 할 것이다."[41]

11 어제의빈묘지명

어제의빈묘지명

12 어제의빈묘표

어제의빈묘표

13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의빈 성씨가 죽은 지 3년 째인 1789년(정조 13년), 정조가 직접 쓴 글이다. 제축문이란, 제사를 지낼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월을 말한다.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14 의빈성씨유제축문

1789년(정조 13년)에는 의빈성씨유제축문[宜嬪成氏諭祭祝文]을 받았다.의빈성씨유제축문

15 거둥고개

1788년(정조 12년) 7월 8일, 승지를 보내어 의빈묘(宜嬪墓)에 치제(致祭, 임금이 공신이 죽었을 때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것)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4월 25일, 의빈묘(宜嬪墓)에 가서 다례(명절날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매달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 따위를 맞아 지내는 제사)를 행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4월 26일, 의빈묘에 가서 별다례(명절, 음력 초하루나 보름 외에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드리는 차례)를 행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12월 28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 왕이 왕비가 되지 못하고 돌아간 조상이나 왕자, 왕녀를 임금이 몸소 제사 지내는 예)를 행하였다.
1790년(정조 14년) 3월 24일, 의빈묘(宜嬪廟)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다.[42][43][44][45]
이처럼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동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서울지명사전

16 가족관계

16.1 친정(창녕 성씨)

  • 7대조부 : 성만종(成萬種) - 제릉 참봉(종9품)[46]
  • 고조부 : 성경(成景) - 군자감 정(정3품)[47]
  • 아버지 : 증찬성 성윤우(成胤祐) - 홍봉한의 청지기이자 군문의 고지기, 사후 찬성으로 추증
  • 어머니 : 증정경부인 임씨 - 통례원 인의(종6품) 임종의 맏딸, 사후 정경부인으로 추증
  • 고모 : 공조판서 정방(鄭枋, 1707년~1789년)의 첩[53]

어제의빈묘표에서는 의빈이 여항 출신의 비천한 태생[54]이라고 언급되어있다. 여항은 중인, 평민, 천민을 아우르는 말이나 의빈의 조상들이 간간이 낮은 벼슬을 한 것으로 볼 때 중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조부가 벼슬을 한 뒤로 증조부, 조부, 부친에 이르기까지 3대 째 벼슬을 하지 못한 것, 언니와 고모가 양반가 첩이었던 것, 의빈이 궁녀로 입궁한 것 등을 볼 때 유복한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다.

16.2 왕가(전주 이씨)

17 여담

여담이지만 그 유명한 장희빈과는 100년(정확히는 94년) 간격으로 유사한 삶을 살았다. 정사에 기록된 건 아니지만 조선시대 빈들 중 이름(장옥정, 성덕임)이 알려진 경우 역시 두 사람 뿐이다.

희빈 장씨와 의빈 성씨 모두 중인 출신 궁녀였으며, 각각 웃전인 장렬왕후(숙종의 증조 할머니)와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예쁨을 받았다. 웃전의 처소에서 왕(숙종, 정조)을 처음 만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첫 아이(경종, 문효세자) 출산 시기도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로 같으며[56], 둘째 아이(성수, 옹주) 출산 시기도 32살로 같다. 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비극적인 죽음(사약, 병사)을 맞는다는 점에서 최후도 비슷하다.[57]

하지만 장희빈과 숙종의 이야기가 적힌 《인현왕후전》이 한글소설이라 장희빈 역시 대중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반면, 의빈 성씨와 정조의 러브스토리가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은 굉장히 긴 한문으로 되어있어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8 대중문화

왕을, 그것도 정조를 15년 간이나 기다리게 만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이 한문으로 기록되어있어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명, 가족관계 등이 적힌 《이재난고》도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도 정조의 유일한 승은후궁이라는 점 때문에 소설, 드라마에서 주로 정조가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비극적인 죽음[58]을 맞는 정조의 첫사랑으로 그려졌다. 2005년 로맨스소설에 처음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은 한지민이 연기한 드라마 《이산》속 성송연 캐릭터. 최근에는 정조를 다룬 창작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에도 등장하였다. 실제로는 궁녀 출신이나 도화서 다모, 호위무사 등으로 각색되어 등장하였다. 본명은 '성덕임'이나 작품마다 '성송연', '성선우', '성연' 등 각양각색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TV 드라마

성송연 문서 참고바람. 역사대로 이산(정조(이서진))의 첫사랑으로 그려졌다. 임오년에 궁녀로 입궁했다는 것까지는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임오화변이 있던 이 해에 당시 세손이었던 이산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이후에 도화서 다모가 됐다는 것은 모두 제작진의 허구적 상상력에 의한 설정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조의 승은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자를 출산했고, 그 원자가 세자(문효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소용에서 의빈으로 승급했다. 그러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죽는 걸 봐야 했다. 이때 둘째[59]를 임신 중이었는데 장결병(간경화) 진단을 받게 된다. 이산은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청국에서 의원을 불러오려 한다. 그러면서 송연에게 나는 아이보다 네가 더 소중하니 아이를 포기하고 치료를 받으라며 낙태약까지 건네나 송연은 아이를 더 잃을 수 없다며 일체의 치료를 거부하고 버틴다. 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정조의 어진을 직접 그렸으나 결국 산달까지 살지 못하고 임신 중에 끝내 병사한다.

창작뮤지컬

  • 2016년 수원시립공연단 창작 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
    • 배역 : '성선우' 역
    • 배우 : 홍민아

정조와 장터에서 처음 만나 '물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수원시에서 만든 뮤지컬인만큼 '물의 근원'은 '수원'을 의미한다.

소설

  • 로맨스 소설 《비단속옷》(2005)
    • 세자익위사 '성연' 역
  • 로맨스 소설《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2005)
    • 콘티작가 '강건희' 역

비단속옷 문서 참고바람.

  • 소설 《이산 정조대왕》[60] (2007)
    • 도화서 다모 '성송연' 역
  1. 의빈 성씨의 수묘군으로 근무했던 안장손이 '성빈 수묘군 안만길 준호구'를 발급하였다.
  2.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성의빈만사'를 지었다.
  3. 의빈 성씨의 사당 이름
  4. 조선시대 빈들 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장희빈과 의빈 성씨 뿐이다. 추존빈이지만 사도의 후궁인 숙빈(임유혜)와 경빈(박빙애)의이름도 한중록을 통해 알려져 있다.
  5. 궁중 여인은 대개 거처하는 처소에서 아기를 낳았다. 경종은 희빈 장씨의 처소 취선당(就善堂)에서 태어났고, 영조는 숙빈 최씨의 처소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고,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처소 경춘전(慶春殿)에서 태어났다. 이로 말미암았을 때 의빈의 처소는 문효세자를 낳은 연화당(讌華堂)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추정을 토대로 보면 당시 상의(정5품)였던 의빈이 전(殿) 다음으로 높은 당(堂)에서 거처했다는 것은 의빈이 왕실에서 어떤 위치였고, 정조에게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화당(讌華堂)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일상 업무를 보던 선정전(宣政殿) 동쪽에 있었다. 왕의 침전이자 집무실로 쓰인 희정당(熙政堂)도 선정전 동쪽에 있었다. 따라서 의빈의 처소는 정조가 나랏일을 하는 전각 주변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6. 정조, 조선왕조실록-의빈 성씨의 졸기(1786년 9월 14일)
  7. "而亦哀予之不能忘哀也", -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8. 왕을 낳은 7명의 후궁들승리자들의 사당이 바로 '칠궁'이다. 의빈 성씨는 아들이 왕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순종황제 때에 신위를 땅에 묻었다. 참고로 의빈에게는 시조모가 되는 영빈 이씨도 그 아들인 사도세자가 즉위 전에 죽임을 당해 아들이 즉위하는 걸 보진 못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후대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9.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호로자식', '젖비린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다혈질에 터프가이였다.
  10. 사실 자식을 잃은 사례는 왕비나 후궁중에서 여럿 있다. 숫자상으로도 태종의 원경왕후는 3명의 아들을 잃었다. 하지만 의빈은 낳은 자식들을 모두 잃었고, 임신 중에 죽었다.
  11. 첫 번째 고백을 받아들였다면 첫 번째 후궁이자 유일한 후궁이 되었을 것이다. 정조의 다른 후궁인 원빈 홍씨화빈 윤씨는 의빈 성씨에게 차이고 후사를 잇기 위해 간택했으며, 수빈 박씨는 의빈 사후 후사를 잇기 위해 간택했다.
  12. "昭容成氏 名德任: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황윤석, 이재난고)
  13. 예전에, 양반집의 수청방(守廳房)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잡일을 맡아보고 시중을 드는 하인.
  14. 공교롭게도 이 해 2월, 정조와 효의왕후가 가례를 올렸으며 윤5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의빈이 정확히 몇 월에 입궁했는 지는 알 수 없다.
  15.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황윤석, 이재난고)
  16. "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황윤석, 이재난고)
  17.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 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어제의빈묘지명)
  18. 공교롭게도 이 해 8월, 효의왕후(당시 세손빈)가 관례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방도 이 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 정조와 효의왕후의 금슬은 좋지 못했다. 정조는 《존현각일기》에서 효의왕후의 아버지 김시묵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했고, 1778년 박재원이 양의를 들여 효의왕후의 난임을 치료하자고 했으나 정조가 이를 거절했다. 또 정조 대에 효의왕후에 대한 조정의 문후와 약원의 문안이 철폐되었는데 왕비로서의 권위가 무너진 일이었음에도 정조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정조 사후 순조 대에야 문제가 되었다. 또 의빈 사후 정조는 효의왕후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에서 멀리 있는 창경궁 집복헌을 새 후궁 수빈 박씨에게 내주고 자신은 그 옆의 영춘헌에서 기거하였다. 혜경궁 홍씨 역시 《한중록》을 효의왕후가 아닌 수빈 박씨에게 맡겼다.
  20. 조선 시대의 궁녀들은 윗전을 모시느라 바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식주나 청소는 무수리 등 하인에게 맡겼다고 한다.
  21. 현대적 정서로 보면 싫다는 여자에게 15년 간이나 매달리는 정조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 궁녀는 무조건 왕의 여자였다. 정조가 의빈 성씨를 죽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22. 다만 순헌황귀비 엄씨가 승은을 입을 때 의빈 성씨와 비슷한 연령대였고 시위상궁 신분이었던걸 감안하면 성씨도 상궁 신분일 가능성도 있다.
  23. "壬寅九月七日寅時誕世子于昌德宮之讌華堂", 김종수 《문효세자지문》
  24. 문효세자 출산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시녀' 직위를 받았다고 한다. -한중록
  25. 혜경궁이 청연공주, 청선공주를 낳을 때도 도왔다고 한다. -한중록
  26. 철빈, 태빈, 유빈, 흥빈(...)이 될 뻔 했다.
  27. 의빈 사후 간택된 후궁 수빈 박씨가 이 빈호를 받았다.
  28. 일성록 정조7년 2월 19일
  29. 정조실록 1784년 5월 12일 기사에 "새로 출생한 '옹주(翁主)'가 졸하여"라고 기록됨
  30. 야사에 따르면 딸, 아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충격받아 실성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제의빈묘지명》에 의하면, 의빈이 죽기 전날 밤 정조에게 앞으로는 효의왕후의 처소에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하는 등 실성한 사람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모습을 보인다.
  31. "嬪方有娠幾臨月而嬪遂歿矣", "빈이 임신하여 해산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어제의빈묘지명》
  32. 의빈 성씨는 혜경궁이 친히 기를 정도로 혜경궁과 가까운 사이였다. 훗날 정순왕후 김씨가 혜경궁 집안의 홍낙임을 사사하는 등 혜경궁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음을 고려할 때, 정순왕후 김씨와 의빈 성씨는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33.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012001_002
  34. 정조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 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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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정조가 얼마나 의빈 성씨를 사랑했는 지 알 수 있다.
  37. 일성록 정조 10년 12월
  38. 1786년은 5월과 9월 사이에 윤7월이 있어 5개월 뒤다.
  39. 실상은 경제적인 이유
  40. 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 4월 20일 무술 1번째기사
  41. #
  42.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7월 8일 무진 1번째기사
  43. 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4월 25일 신해 1번째기사
  44.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2월 28일 기묘 1번째기사
  45. 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3월 24일 갑진 1번째기사
  46. "七代祖萬種齊陵參奉", 《어제의빈묘지명》
  47. "高祖景軍資監正", 《어제의빈묘지명》
  48. 정조는 성식을 편전 앞문 밖에 불러서 문효세자와 의빈의 연줄을 타고 내통하면 극형으로 다스릴 것이라며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고 가르쳤었다. 하지만 1782년 음력 9월 15일, 어영청 금위대장(종2품)에게 성식이 다른 사람과 내통하는 일이 생기면 안 되니 파면하라는 명을 내렸다. 《일성록 정조6년 음력 9월15일》
  49. 일성록 정조6년 9월15일
  50. "有二娚窮窶", "두 오라비가 있었는데 가난했다" 《어제의빈묘지명》
  51. "其兄弟方爲別軍職", 황윤석 《이재난고》
  52.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성소용(후일 의빈 성씨)의 아버지는 본래 홍봉한의 청지기인데 또한 즉 홍낙성 첩의 아버지이다", 황윤석 《이재난고》
  53. "鄭枋(...)妾成生者與成嬪爲姑姪", "정방의 첩이 성씨인데 성빈(의빈 성씨)과 고모 조카 사이이다.", 황윤석 《이재난고》
  54. "閭巷卑微之地生" 《어제의빈묘표》
  55.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이때에 새로 출생한 옹주(翁主)가 졸하여 여러 신하들이 문안하기 위해 와 기다리고 있어서 드디어 소접(召接)한 것이었다.", 《정조실록 17권, 정조 8년 5월 12일 병인 1번째기사》
  56. 늦은 출산에는 각각 이유가 있는데, 장희빈은 명성왕후 청풍 김씨(현종의 정비)에 의해 7년 간 쫓겨나 있었기 때문이고,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 청풍 김씨(정조의 정비)가 임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5년 간 승은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몇 년동안 어떤 여인도 왕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결국 장희빈이나 의빈 성씨가 낳은 아들이 각각 숙종과 정조의 첫 아들이었으며, 세자로 책봉됐다.
  57. 그렇지만 장희빈이 이후 숙빈 최씨와 명빈 박씨 등 다른 후궁에게 총애를 빼앗긴 것과 달리, 의빈 성씨는 죽을 때도 셋째를 임신 중이었고 죽은 후에도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58. 작품에 따라 병사, 자살, 살해 등으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병사했으나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다.
  59. 실제 역사상으로는 셋째 임신 중에 졸하지만 극전개상 일찍 죽은 옹주는 등장하지 않았다. 연출자인 이병훈 PD는 정조가 사랑하는 영조, 홍국영, 문효세자, 의빈 성씨의 연이은 죽음에 시청자들이 피로를 느낄까 우려했다고 한다.
  60. 드라마 《이산》의 소설판. 전 5권으로 구성돼 있다. 성송연의 생애는 드라마와 거의 유사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나 극중에서 병사한 것과 달리 소설에서는 정순왕후 김씨에게 자결을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음독자살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등 일부는 드라마와 다소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