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들의 즉위를 지켜본 유일한 후궁
1770년 ~ 1822년 (향년 53세). 경기도 여주시 출생. 반남 박씨 박준원의 6남 5녀 중 3녀이다. 궁호는 가순. 정조의 4번째(이자 마지막) 후궁이며 순조와 숙선옹주의 생모. 정조의 3번째 후궁 의빈 성씨와 맏아들 문효세자가 죽자 후사를 잇기 위해 간택되었다. 그가 순조의 생모였기에 그의 가문은 세도정치 가문 중 하나였다.[1]
정조의 여인들 중 가장 행복한 여인. 효의왕후, 화빈윤씨, 원빈 홍씨는 자식이 없었다. 의빈 성씨는 아들과 딸이 있었으나 금방 죽었다. 원빈 홍씨와 의빈 성씨는 일찍 죽었다. 오직 수빈 박씨만이 아들과 딸이 단명하지 않고 성장했으며, 본인 역시 단명하지 않고 아들 딸이 먼저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윗전들에게 공선했고 윗전들도 수빈 박씨를 아꼈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 당시 수빈 박씨의 아버지 박준원을 어영대장을 거쳐 판의금부사로 기용했으며 수빈 박씨를 '수빈 저하'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또한 수빈 박씨의 딸 숙선옹주를 일반 후궁의 딸로 볼 수 없다며 공주와 옹주 사이의 명칭을 주자고 주장했다. 혜경궁 홍씨는 유명한 《한중록》을 정식 며느리인 효의왕후가 아닌 수빈 박씨에게 맡겼다.
2 가족관계
2.1 친정 (반남 박씨)
상당한 명문가이다. 화평옹주의 부마 박명원, 연암 박지원과 친척 관계이다. 어머니 원주 원씨 역시 인조반정 공신 원두표의 자손이다. 큰아버지 박윤원은 저명한 성리학자이다. 수빈 박씨는 삼간택을 거쳐 후궁이 되긴 했으나 사실상 사전에 박명원의 추천으로 내정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빈 박씨가 입궁 3년 만에 아들 순조를 낳자 더욱 더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수빈 박씨의 아버지 박준원은 정순왕후의 정치적 파트너로,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어영대장을 거쳐 판의금부사 자리까지 올랐다. 둘째 오라버니 박종경은 순조 대에 세도가로 이름을 떨치다가 조득영(풍양 조씨)의 탄핵으로 물러나게 된다. 박종경은 홍경래의 난 때 간신으로 지목당하기도 했다.
- 큰아버지 : 박윤원 - 성리학자
- 아버지 : 박준원 - 판의금부사
- 어머니 : 원주 원씨[2] - 인조반정 공신 원두표의 자손
- 오라버니 : 박종보
- 오라버니 : 박종경 - 순조 대 세도가
- 언니 : 신광회에게 출가
- 언니 : 이요헌에게 출가
- 여동생 : 홍욱주에게 출가
- 여동생 : 류첨에게 출가
- 남동생 : 박종익
- 남동생 : 박종희
- 서어머니 : ?
- 이복 남동생 : 박종염
- 이복 남동생 : 박종영
2.2 왕가 (전주 이씨)
3 수빈? 유빈?
박씨의 빈호로 사용된 글자 '綏'는 '편안할 수'와 '깃발 날릴 유'의 2가지 독음이 있는데, 그동안 첫 번째 독음을 따라 수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박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용된 진향문에 적힌 '顯穆綏嬪'의 한글 표기가 현목유빈으로 확인되었다. #
4 야사
수빈 박씨는 가난한 선비의 딸로 혼례를 앞두고 있던 중, 홍수로 집이 모두 무너져내렸다. 다행히 가족들은 무사했지만 혼인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화평옹주의 부마였던 박명원은 자신의 사촌동생의 딸을 염두에 두고 정조에게 후궁 간택을 추천했다. 박명원은 정조에게 허락받았지만 사촌동생은 딸이 고생하는 게 싫어서 후궁 간택에 반대한다. 이미 정조에게 자기 조카라고 말해놨기에 난감해하던 중, 홍수로 집안이 박살난 박준원이 찾아왔고 딸이 단정하고 정숙해보여서 후궁 간택에 추천한다.
5 현빈이라 불리다
정조의 빈에 간택되어 그녀의 친정은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고, 어질고 온화한 성품에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1790년에 정조의 둘째 아들인 순조를 낳는다. 세자를 낳았음에도 박씨는 뇌물을 절대 받지 않고, 윗전들[4]을 공경하며 봉양하여, 박씨에 대한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박씨는 유일하게 자기 아들이 왕이 된 걸 지켜본 후궁이 되었다. 1822년(순조 22년) 12월, 53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1823년(순조 23년) 1월 27일(정유) '자궁[5]께서 평소 사후의 일을 생각해 별도로 두신 은자를 호조에 내어주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교하기를, “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死後)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銀子) 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소(園所)의 역사와 후일 별묘(別廟)를 지을 때에 보태서 쓰도록 하라.”하였다.
6 사후
세상을 떠난 후 현목(顯穆)을 시호로 받아 빈호와 합쳐 현목수빈이라 했으며, 1823년 위패를 모신 사당을 현사전(顯思殿)이라 이름했다가 1년 후인 1824년 사당을 이건한 후 경우궁(景祐宮)이라 개칭했다. 대한제국 때인 1901년 정조가 황제로 추존됨에 따라 빈에서 비로 높여졌다.
아들인 순조는 어머니인 수빈 박씨가 왕비가 아님에도 왕비에 준하는 예로 장례를 치루고 싶어해서 궐 안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가 끝난 뒤에도 3년동안 흰옷을 입었는데 반대한 사람은 죄다 유배보냈다고 한다. 사람이 유하고 국정에 큰 의지가 없던 순조가 거의 유일하게 강하고 의지를 보이던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