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橫看. 조선 세조 10년, 1464년에 처음 제정된 국가 재정 세출예산표.
2 내용
2.1 공안의 제정
이 부분은 한국학진흥사업단 조선왕조실록 전문사전 홈페이지 : 공안 항목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공안 항목을 참조하였습니다.
공안(貢案)은 조선 태조1년, 1392년 10월에 처음 만들어진 국가 세입예산표이다. 전세를 비롯하여 공물, 진상, 어세(魚稅), 염세(鹽稅), 선세(船稅), 공장세(工匠稅), 공랑세(公廊稅), 행상노인세(行商路引稅), 신세포(神稅布), 노비신공포(奴婢身貢布), 각종 부역 등의 잡세 모두를 수록한 장부였다.
조선 건국 후 바로 세입예산표인 공안이 제정됨에 따라 국가 재정 수입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세출 예산표인 횡간은 조선 왕조가 건국된 지 70여 년이 지난 세조대에 이르러서야 제정되었다. 세조대에 횡간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국가의 경비 지출은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서 지출한다(量入爲出)는 원칙이 있었지만, 실상은 용도의 크고 작은 정도를 그때마다 짐작하여 마련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재정은 경비에 비하여 매우 방대한 공안의 수입으로 유지되었고, 이것은 결국 백성에게 공물을 부당하게 많이 거두는 결과를 낳았다. 세종 때의 경우 공안 세입이 경비에 비해 방대한 액에 달하여 그 대비는 2, 3배 이상, 물목에 따라서는 7, 8배에 달하였다. 각사(各司)의 경비를 과다하게 책정해 그 폐해가 날로 늘어가자 1438년(세종 20) 무렵에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공안의 전면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세조대에 이르러 일대 혁신을 보게 되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세조 이전까지는 국가의 수입은 알 수 있었으나 수출 내역은 알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가정으로 비유하자면 반쪽짜리 가계부만 사용한 것인데 원래 가정에서는 가계부를 적을 때 자기 집의 수입을 예상하고 그에 맞추어 어느 정도 지출할 것인지를 예상해 잡지만, 현대 대한민국도 그렇고 과거 조선 정부에서는 가계부 같은 것을 짤 때 년초에 그 해의 사업과 지출내역을 먼저 정하고 어느 정도 그 양에 맞추어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때문에 세조가 횡간, 즉 지출명세서를 제정하기 전까지는 쓸 만큼의 양에 맞추어 세금을 거두어들인다는 일정한 기준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가면 일단 뜯고 보자는 생각으로 원래 부과해야 될 세금의 7, 8배에 달하는 엄청난 내역의 세금을 수탈하였고, 당시엔 화폐경제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세금으로 과다하게 받아놓은 물품들을 제대로 쓰지도 못한채 썩히곤 했던 것이다.
2.2 횡간의 제정
이 부분은 조선왕조실록사전 : 식례횡간 항목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횡간 항목을 참조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최초의 공안은 태조 즉위 직후에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에서 제정되었으나 위와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백성들에 대한 극심한 수탈이 만연하였다. 이 문제점이 세종대에 이르러 극심해지자 세종 20년, 1428년에 실제 소요와 부합하는 식례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처음 이루어졌으나 총 114개 중앙 관서 중 43개 관서의 것만 고치는 수준에 머물 정도로 그 개혁 과정이 미미하였다.
세종 22년, 1440년 4월 21일에는 경비식례를 상정하기 위한 식례색(式例色)을 설치하였고 세종 28년, 1446년에는 그동안 상정한 식례 경비의 내용을 검토하였다. 이렇게 공안의 폐단과 그 문제의 심각성을 세종은 이해하고 있었으나 결국 세종대에는 모든 관서의 경비를 파악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였다.
공안의 전면적 개혁과 세종대부터 추진된 식례횡간의 제정이 이루어진 것은 세조대였다. 세조 10년, 1464년 2월에 횡간이 정비된 후 공안을 개정하기 위해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등을 도청(都廳)으로 삼아 모든 도의 공물을 조사하여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특히 세조는 횡간 작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일차적으로 완성된 이후에도 계속적인 교정 작업을 지시할 정도로 만전을 기하였다. 세조 때 횡간이 제정된 이후 공안이 다시 재상정(詳定)되고, 성종 때 공안이 또다시 개정되었는데, 그 때마다 백성들의 부과액이 감소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때 공안을 1로 치면, 세조 때 공안은 3분의 2, 성종 때 공안은 3분의 1로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횡간에는 각사별로 1년 재정 운영에 필요한 세출 항목들이 열거되어 있고, 해당 항목들에는 적절한 지출량이 기재되었다. 세조 당시에는 이러한 지출량이 기존의 관례에 비해 매우 적게 책정되었다면서 일선 관리들이 그 부당성을 토로하기도 하였지만 세조는 줄어든 식례 경비의 적용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여 국가의 세출 규모를 줄였다. 그에 따라 국가의 세입과 백성에 대한 수탈도 대폭 감소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공안과 식례횡간을 근거로 한 재정운영 방식이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세종대 기획된 국용 전제 역시 식례횡간이 완성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3 변천
세조대에 시작된 횡간의 제정과 공안 개혁으로 인해 세조에서 성종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백성들의 세금 부담과 고통이 크게 경감되었다. 그러나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경비 지출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연산군을 비롯하여 경비를 담당한 호조에서는 국용(國用)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공안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연산군 7년, 1501년 7월에 공안을 개정하였는데, 이것이 신유공안(辛酉貢案)이다. 연산군 때 개정한 신유공안은 세조와 성종이 개혁하면서 이 이상 세금을 받아서는 안된다며 커트라인을 제시한 공안의 총액을 깨고 이를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후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낭비의 구조화로 인해 공물과 진상은 계속 증대되어 다시 폐해가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횡간은 대동법 실시 이전까지 세출예산표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후 대동법이 실시됨에 따라 공부(貢賦) 수입을 주체로 하는 공안과 함께 폐지되었고, 이를 대신해 대동사목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대전회통에서는 다시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추가로 사용하게 하였다.
3 바깥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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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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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근 외, 『역주 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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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룡, 『조선 전기 경제 구조 연구』, 숭실대학교 출판부,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