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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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계유정난을 설계하다!
압구정을 알아본 혜안의 소유자
조선의 역대 영의정
구치관한명회황수신
박원형한명회홍윤성


1 조선시대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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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의 서명. 자기 이름 글자를 변형한 것이다.

韓明澮
1415~1487


2 개요

조선 초기 최고의 권신. 모략가(謀略家)로 장량보다는 진평에 가깝다. 그래서 더 까다롭다.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狎鷗)[1], 시호는 충성(忠成), 작위명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2]

조선 제 8대왕 예종의 첫번째 비인 장순왕후와 9대왕 성종의 첫번째 비인 공혜왕후아버지이기도 하다. 조선 역사상 두 왕의 장인이 된 인물은 한명회가 유일하다.

3 일대기

일곱 달 만에 태어난 칠삭동이로 배 위에 별 모양의 이 있었다고 한다.[3]집안은 명문 집안인데 7대조 한강 , 6대조 한사기, 5대조 한악, 고조 할아버지 한공의, 증조 할아버지 한수 등은 고려사 열전에도 입전된, 고려 말기 매우 유력한 정치적 인물들이었다. 특히 한수는 고려 공민왕 대 정치가이며 대학자였다. 학문 실력 및 과거 급제 연령으로 치자면 목은 이색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워낙 이색보다 먼저 졸하였기 때문에 인지도가 덜한 것은 유감. 할아버지인 한상질은 명나라에 가서 조선 국호를 허락받은 사람이며 한상질의 동생이자 한명회의 종조부인 한상경은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는 안습[4] 한 나날을 보낸 인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40세까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 결국 음보(음서)로 관직에 들어가 개성에 있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 살던 집인 경덕궁의 관리직을 맡았다. 이 때 개성에 와서 벼슬하는 서울 출신 사람들끼리 '송도계'라는 계를 만들어 모임을 가졌는데, 한명회가 이 자리에서 가입을 희망했으나 말단직에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단순 거절 정도가 아니라 경덕궁직도 벼슬이냐?라고 한바탕 비웃음을 당해 아주 개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세종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한다.

과거 공부 때부터 친했던 권람의 추천으로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던 수양대군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참모가 되어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많은 깡패 무뢰배들을 포섭하고 홍달손을 비롯한 무장들을 끌여들었으며 수양대군의 정적인 김종서안평대군 일파의 정보를 수집, 마침내 세조가 즉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계유정난의 주역으로 공신 반열에 오르면서 일약 인생역전에 성공한다.[5] 또 수양대군이 무사들을 불러놓고 거사를 종용하자 무사들의 의견이 서로 분분하게 갈라져서 생각보다 호응이 신통치 않았다. 세조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 이때 한명회가 "길가에 집을 지으려면 3년이 지나도록 다 짓지 못합니다."라면서 결단을 촉구했고 홍윤성도 "군사를 내어 적을 치는데 가장 큰 문제가 결단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라고 거들었고 이에 수양대군이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다. 떠날 자는 떠나고 따를 자는 따라라."라고 외치고 김종서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이는 세조의 결단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수있다.[6] 이 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움직임을 간파한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별운검을 폐하여 사육신의 계획을 좌절시켜 세조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런 지대한 공 때문에 세조는 그를 "나의 장량이다."라고 평가했다.[7] 이후 왕실에 두 딸을 시집보내고 정승이 되면서 조선 최강의 권력자로서 권세를 휘둘렀다. 세조 사후 예종, 성종 초반까지 그 권세가 계속되었다. 그의 권세가 어찌나 막강했는지 대간들이 그를 비판하지 못했고, 사간원의 간원 한명이 한명회가 몸담고 있던 원상제 폐지가 권해진 적이 있었는데 다른 대간들이 "너 미쳤냐? 원상제가 얼마나 좋은 제돈데 왜 없애? 왜 네놈이 멋대로 한 일 때문에 우리까지 피봐야 하는 거냐고?"라고 몰아세웠고 대사간까지 "죽기 싫으면 당장 철회해라."라고 협박했는데 이 과정이 공개되면서 사간원이 죄다 갈려버리는 (사간원 입장에서) 망신살스러운 사태까지 있었다. 심지어 예종 때는 왕도 못보는 실록의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이 대신들의 비행을 적기가 두려워 이미 제출된 사초를 빼돌려 대신들의 허물을 감추는 식으로 수정하다가 들켜서 목이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에게 시집보낸 막내딸 공혜왕후가 요절하고[8] 성종이 장성하면서 그의 권세도 수그러지게 되는데 특히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기 전에 성종의 부탁으로 정희왕후에게 "대비마마께서 물러나시면 우리가 불안해서 술 한 잔도 못 한다니까요."라고 오버를 하는데 성종이 그럼 날 못 믿는다는 거냐?라고 정색하면서 상당히 궁지에 몰렸고 대간의 탄핵이 시작되면서 결국 한명회는 좌의정 직에서 물러나 보통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후에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와중에 생겼던 압구정동 사건[9]으로 직첩이 거둬지는 수모를 당했으나 그것 외에는 쓸쓸하긴 해도 영화롭게 살다가 73세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 뒤 연산군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의 목이 베어져 해골이 길바닥에 내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그의 사후는 비참했다. (이후 중종 때에 신원된다) [10]


4 인물됨과 일화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최강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인물이지만 사극에서는 세조의 장량(장자방)이라는 말 때문인지 참모 스타일의 캐릭터로 이 무렵을 다룬 사극에서 비중있게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참모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스형 정치가였다. 훈구파의 영수로 정국을 이끌었고 그의 도움으로 재상이 된 인물도 많았으며, 도량도 컸다는 평가를 당대에 들었고 또한 사재를 털어 성균관의 도서 보충에 도움을 줘서 당시 선비들이 " 비범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보스 기질이 강했던 인물답게 통도 컸던 대인배 기질도 있었다.

야사에는 술자리에서 취한 나머지 세조의 팔을 꺾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신숙주를 도운 일화도 남아 있다. 세조가 먼저 신숙주의 팔을 잡아 비튼 후에 "경도 따라해 보라"고 하자 신숙주가 정말로 세조의 팔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어찌나 세게 비틀었는지 세조가 비명을 질렀는데, 이때 동석하고 있던 세자(예종)가 심기가 뒤틀렸는지 신숙주를 쏘아보자 세조는 예종에게 "나는 이러고 놀지만, 너는 이러고 놀지 마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실 신숙주는 술에 취해도 조금만 깨면 책을 읽는 습관이 있었는데[11], 연회가 끝나고 한명회가 신숙주의 하인에게 "오늘 들어가서 주인 드러누우면 꼭 옆에 있는 책부터 전부 치우거라."라고 당부했다. 신숙주는 버릇대로 자다 깨서 책을 찾았는데 주변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도로 누워서 자야 했다. 그런데 실은 그때 세조가 신숙주가 정말 취해서 벌인 행패였는지를 확인하려고 신숙주의 집에 내시를 보낸 상태였다. 만일 그가 깨어서 책을 읽고 있었다면 내시는 신숙주가 술 안 취하고 멀쩡히 깨어서 책 보고 있더라고 보고를 올렸을 것이고, 의심 많은 세조는 "이놈이 제정신으로 취한 척을 해 나를 능멸하였나" 라며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명회의 기지 덕에 신숙주가 술에 취해 자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갔고, 그제야 세조는 "숙주가 그렇게 취했으니 그랬겠지." 라며 넘어갔다고 한다.

또한 백수 시절부터의 친구인 권람이 미녀였던 젊은 여종과 검열삭제를 하고 싶었으나, 아내 눈치 보느라고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한명회가 권람에게 상사병을 앓는 것처럼 하라고 한 후 회화나무 꽃을 삶은 물을 권람에게 줘서 "이걸 온몸에 바르고 황달 걸린 것처럼 해."라고 했다. 그리고는 권람의 부인에게 우는 척하면서 "아이고. 부인께서 계집 하나를 아껴서 내 친구 죽게 생겼다!"라고 통곡하는 연기를 하자 권람의 부인은 길일을 택해 그 여종을 권람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 다음날 한명회가 권람을 찾아가니 권람이 "대사는 이미 이루어졌다!"라고 하자 두 사람이 껄껄 웃었다는 야사도 남아 있다.[12] 어째 권람 부인이 져 어쨌든 야사에는 한명회의 꾀나 지혜와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사극 등지에서 꾀 많은 책략가처럼 묘사되는 것은 이런 면모 때문인 듯하다.

자리에서 물러날 당시에도 자신의 정적쯤 되는 사림파의 한 사람에게 '자네는 너무 강직한 것이 문제이니 조금은 숙일 줄도 알아야 한다.'라고 진지하게 충고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 예언이 맞은 건지 그 충고를 받았던 사람은 결국 사화에 휘말려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성종에게 한 말은 꽤 명언. 이 말은 실록[13]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이 말을 마치고 죽었다고 한다.

"처음에 부지런하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게을러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나중을 삼가기를 항상 처음처럼 하십시오."

한명회의 묘는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데 묘역 밑에 그의 사당인 '충모사'가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묘역 바로 앞을 지나가고 있어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지나치게 되는 셈. 서울에서 부산 갈때 천안휴게소에서 차로 5분정도 지나면 좌측에 큰 무덤이 두개가 있다. 앞의 것이 한명회 부인 묘소이고 뒤의 것이 한명회 묘.


5 평가

실록의 사관은 "도량이 크고 성격이 활달했으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능력은 대단히 출중한 인물이었던것 같다.

다만 개인적으로 잘났을 뿐, 그 능력을 악용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으고 비정상적인 권력을 휘둘렀으며, 특히 단종 축출의 주역이 되는 등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왕보다 더한 권세를 누렸기에 간신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여러모로 평가가 엇갈리지만 뭔가 캐릭터가 튀는 인물이고 '책사의 대명사' 같은 이미지 때문인지 사극 작가들에게 예전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온 인물.

자신의 큰딸은 신숙주의 며느리, 둘째딸은 예종의 아내인 장순왕후, 셋째딸은 성종의 아내인 공혜왕후로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인 국구로서도 군림했으나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젊은 나이에 죽는 바람에 외손을 전혀 얻지 못하여 대대로 외척은 되지 못했다.

6 기타

음흉한 계책을 잘꾸미는 책사라는 이미지와 한명회를 연기했던 사람의 외모 때문에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 없을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의외로 기록에 보면 키도 크고 잘생겼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술을 못했다고 한다. 술고래들인 세조, 신숙주와 이 분야에서의 본좌인 홍윤성과는 반대 성향. 하지만 술자리는 꼭 끼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에서는 정진[14] 이 담당하였고 사실상 사극 속의 한명회의 캐릭성을 정립하고 침체기에 몰렸던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를 다시 살려낸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 이 드라마를 본 세대는 한명회 하면 딱 정진이 연기하던 모습을 떠올릴 정도...

한명회에서는 이덕화가 담당하였다. 추남 이미지로 밀고 나가는 한명회의 캐릭성에 더해 귀까지 당나귀귀 처럼 꾸몄으며 배우의 익살스러운 연기가 잘 어우러졌다.

왕과 비에서는 최종원이 한명회 역을 맡았는데, 특유의 악역 포스가 살아있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주로 코믹한 조연으로 나왔던 이희도가 한명회 역을 맡았는데 간교한 책략가의 이미지는 여전하며, 청풍관 왈패들의 두령으로 등장하여 책략가의 이미지와 역사상 모습에 가까운 '보스'의 모습을 둘 다 살리고 있다.[15] 특히 수양대군에게 받은 재물을 만지면서 부하들에게 하는 "돈이란 말야. 권력을 잡으면 저절로 굴러들어오게 되어 있어"라는 대사는 권력에 대한 야심과 물욕을 지닌 한명회의 모습을 잘 설명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30대 후반인 한명회를 가장 잘 구현한 캐릭터이다.

뿌리깊은 나무(드라마)밀본 조직원인 한가놈(조희봉)이 한명회가 아닐까하고 많은 시청자들이 추측하고 있었는데, 마지막화에서 자신의 이름이 한명회임을 밝힌다.

영화 관상에서는 김의성이 연기했다. 비열하고 간교한 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젊은시절 수양대군의 참모로 각종 책략을 통해 계유정난을 성공으로 이끄는 주역으로 그려진다. 영화 러닝 타임 내내 얼굴이 안 나오는 캐릭터로 등장하며 김내경을 괴롭히다가[16] 결말 부분에야 얼굴이 공개된다.

특히 후반부에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외치는 김내경에게 "진짜 지옥을 보여주겠다."라고 비웃으며 전설의 살생부 씬을 연출할 땐 그야말로 진정한 악역 포스 그 자체. 김내경의 눈앞에서 수많은 대신들을 살해한 다음 정줄 놓은 그를 오늘 일을 알려야 하니 살려보내겠다고 웃으며 배웅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지간한 사이코패스 저리 가라 할정도. 그러나 최후반에 초야에 은거한 김내경을 회유하러 방문했다가 오히려 김내경에게 "당신, 목이 잘릴 팔자요."라는 예언을 듣게 되고 그 날 이후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하면서 지내다 결국 목이 잘려서 죽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최후를 맞는다. 즉, 이 영화 초반부에서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다 못해 강박 증세까지 보이던 그 노인이 바로 한명회였던 셈.


본인 스스로는 예언이 틀렸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눈을 감지만 그 예언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최후의 순간까지 김내경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평생을 왕에게 총애받는 권력자로써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왕이 직접 의원까지 보내주고 호위를 하는 병사들까지 보내주었으나 항상 누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잠도 못 자고 괴로워하면서 불안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잔인한 업보를 받은셈이다. 결국 작중 내내 집요하게 괴롭히던 김내경에게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복수를 당한 셈이다.
  1. 호를 따서 정자를 세웠는데 정자 이름이 압구정.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의 유래이다. 현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인근에 압구정 터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있다.[article default ##]
  2. 청주 한씨이므로 청주의 옛 이름인 '상당'을 군호로 받았다. 청주시 상당구와 상당산성의 '상당'이 바로 청주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
  3. 사람의 형체마저 갖추지 못해 부모마저도 이 아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서 꿈틀대기에 차마 버리지는 못해서 여종이 이불을 둘둘 말아 따뜻한 방에 두었다고 한다
  4. 다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상경에게 갔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돈보다는 과거에 합격을 못해서 안습이라는 말이 나오는거 같다.
  5. 계유정난 때 살생부를 들고 조정 대신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한 일화는 유명하다. 데스노트의 원조격? 단 살생부 관련은 정사에는 없고 야사에만 전해온다.
  6. 훗날 사육신단종복위운동 실패사례와 대비된다
  7. 그러나 이 장자방이란 표현은 당시에 상투적으로 쓰이는 표현이였다. 관직에 오르고도 군사 부문 업무를 담당하며 북방 순시를 즐긴 것 때문에, 사실은 모사형 인물이라기보다는 뚝심과 과단성이 있으며 아랫사람들을 휘어잡는 독장형 인물에 가깝다는 평이 있다. 계유정난에 관련된 일련의 행동들도 정작 정변의 주체와 설계자는 세조고 한명회 등 심복들은 정보 수집 및 수하 무사들을 모은 정도였다.
  8. 예종에게도 셋째딸인 장순왕후를 시집보냈으나 이쪽도 요절하면서(예종이 세자 시절) 딸 복은 지지리도 없었다.
  9. 한명회가 중국 사신을 자신의 별장인 압구정에서 접대할 것을 청하자 "중국 사신이 거기가 좋다고 하면 개나 소나 거기로 가서 백성들에게 민폐가 될 걸 왜 모르냐? 그리고 정자에서 술먹고 노는 게 아름다운 일이냐?" 라고 성종이 꾸짖자 다른 곳으로 접대 장소를 옮긴 다음에 항의 표시로 "사실 아내가 아파서 전 안 갈랍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신하들이 "지난번엔 안 간다고 안했는데 저거 전하께 개기는 겁니다."라고 탄핵했고 성종도 "언젠 아내가 다 죽게 생겼는데도 굳이 명나라 가더니 이번엔 별로 안 아픈데도 안 간다고? 속셈이 훤하다!" 라고 직첩을 거두어버린다. 몇 달만에 돌려주긴 했지만.
  10. 실제로 2치 폐비 논의때에 이미 죽고 없던 사람들은 피해를 안입었지만 이때는 물론이고 그 이후 폐비 사사때까지 살아남았던 이들은 거의 다 주살되었다.
  11. 아무래도 세종대왕 시절에 당한 적이 있어서.
  12. 이 일화는 MBC의 조선왕조 500년과 KBS 사극 한명회에서도 다루었다. 권람의 코믹한 꾀병 씬이 꽤 압권.
  13. 성종 209권, 18년(1487 정미 / 명 성화(成化) 23년) 11월 14일(기유) 2번째기사, 상당 부원군 한명회의 졸기
  14.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의 책사였던 능환역으로 알려져있다. 2016년 6월 2일 암투병중 별세.
  15. 실제 역사에서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일파가 당시 세력들 중에서 가장 위치가 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무사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한명회의 수완 때문이었다.
  16. 수양대군과 그의 수하를 바꿔치기하면서 문종의 명으로 역심을 품을 만한 용의자들을 물색하던 김내경을 속인 것과 김진형의 눈을 멀게 한 것도 모자라 이를 김종서 일파의 짓으로 오인하게 만든 것도 죄다 이 사람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