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양광사변

1 소개

1931년 6월, 장제스가 광둥파의 거두인 후한민을 감금한 것에 반발하여 광둥파, 서산파, 개조파, 광서파를 비롯한 반장세력들이 모여 결성된 광저우 국민정부가 장제스와 군사적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중원대전이 종식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북간의 대규모 내전이 발발할 뻔 했으나 만주사변의 발생으로 곧 중단되었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이라고도 한다.

2 배경

탕산 사건 하나로 설명 끝이라고 할 수 있다. 후한민의 감금으로 그간 장제스의 정치적 영향력의 성장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광동파가 완전히 반장으로 돌아선 것은 물론이요 반장전쟁에서 패배하여 숨죽이고 있던 서산파, 개조파, 광서파 들까지 참여함으로 반장운동은 과거 중원대전을 뛰어넘는 속도의 결속을 보여주었고 광동파가 군사력을 제공함에 따라 장제스와 한판 뜰 수 있는 세력을 마련하게 되었다.

3 전개

3.1 광저우 국민정부의 성립과 북벌의 준비

1931년 5월 27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들은 민주집권제를 천명하며 난징정부의 주석제를 배격하고 위원제를 실시하였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핵심에는 왕징웨이, 쑨커, 고응분이 있었으며 광서파도 한몫을 차지했다. 광저우 국민정부가 처음부터 장제스와 무력으로 맞설 것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장제스와의 무력충돌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음으로 이들은 휘하의 군사조직을 개편하는 한편 북벌 계획을 수립했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군사조직은 군사위원회와 군사위원회 휘하의 각 집단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명목상으론 전국의 육해공군을 관할했지만 실질적으론 광저우 국민정부가 지배하는 양광 지역의 군부대들만 통솔할 수 있었다. 뭐 당연하겠지만 6월 2일의 국무회의는 천지탕을 1집단군 총사령관, 리쭝런을 4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는데 2집단군과 3집단군은 각각 옌시산펑위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중원대전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고 천지탕을 자신의 패배의 원흉으로 보아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광저우 국민정부에 가담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 계획에 따르면 1집단군이 강서로, 4집단군이 호남으로 진격하며 쉬충즈가 2개 사단을 지휘하여 복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제스가 초공작전을 위해 강서성으로 이동하자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는 동안은 북벌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북벌준비를 중단했다.

한편 장제스 역시 평화적 협상을 바랬지만 역시나 군사적 충돌을 상정하고 속전속결이 불가능하면 지연전을 펼친다는 방침을 잡고 양광 내부의 변화를 기다리는 한편 공산당을 먼저 토벌하기로 했다. 공산당을 토벌하는 동안은 광저우 국민정부가 공격하지 않을테니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면서 양광이 알아서 분열하길 기다렸다가 필요하면 무력으로 처리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어쨌거나 광저우의 공격에 대비하여 장제스는 호남과 강서에 병력을 증강시켰고 천지탕의 반장 입장이 확실해지자 그 대안으로 진명추와 장광내, 차이팅카이의 19로군 포섭을 시도했다. 특히 일본으로 출국한 진명추에게는 매일 전보를 보내 여러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같이 해결방안을 찾자고 구슬렀다. 한편 19로군은 시국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들 모두가 진명추가 광저우로 돌아온 다음에 방침을 정하자고 함으로 19로군이 진명추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입증했다. 결국 5월 말 19로군은 장제스에게 충성하겠다는 전보를 보냈고 장제스는 크게 기뻐하며 장광내에게 전보를 보내 천지탕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19로군을 확보한 장제스는 진명추의 귀국을 종용하는 한편 차이팅카이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진명추는 장제스를 지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장제스에 맞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장제스의 편을 들었다. 광동사태 해결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지휘하기 위해 난창으로 이동했다.

3.2 광저우 국민정부의 1차 북벌

한편 광저우 국민정부 외교부장 천여우런이 광저우 일본대리총영사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천지탕은 긴급군사회의를 소집하여 난징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를 위해 병력을 재배치했다.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가 선제공격할까봐 두려워하였는데 이들의 반장운동이 생각보다 별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다가 내부 갈등이 심하였고 재정 적자가 심각하여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결국 광저우 국민정부는 군비확충을 위해 여러 재원을 마련하는 한편 일본의 무기원조를 요청했으나 일본은 광저우 국민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광서파벌은 세금을 신설하여 세금 징수권을 판매하는 조건으로 200만원을 마련했으며 100만원 상당의 공채를 발행, 홍콩에서 무기와 탄약을 수입하였고 비행기까지 사들여 공군을 창설하고자 했다. 당시 광저우 국민정부도 어느 정도의 공군을 보유했으나 난징 국민정부가 보유한 공군의 질이 훨씬 우수하였으므로 공군총사령관 장혜장이 신식 비행기를 수입하자고 했으나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해군 총사령관 진책도 포르투갈제 군함을 구입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으나 진책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던 중 7월 18일 12로군 총지휘관 석우삼이 광저우 국민정부에 매수되어 반장세력에 합류하자 이에 고무된 광저우 국민정부는 7월 21일 장제스 토벌령을 내리고 석우삼과 호응하여 장제스를 공격하기로 했다. 여기에 산서와 사천에서도 장제스 하야를 요구하는 반장파들이 호응하여 광저우 국민정부에게 상황이 유리해졌다. 4집단군 소속 장파쿠이와 이품선이 즉각 행동을 게시, 호남으로 진격했고 1집단군 소속 위한머우, 이양경도 북벌을 개시했다. 광저우 국민정부는 이제 장제스 타도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시간문제에 불과하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석우삼 부대는 베이핑을 향해 진군하다 참패하였고 석우삼은 하야했다. 호응하기로 했던 석우삼 부대가 패퇴한데 이어 비상회의 내부에서 주화파와 주전파의 갈등이 심해짐으로 광저우 국민정부 내부의 갈등이 표출되자 천지탕은 진격 중지를 명령했고 1차 북벌은 소득 없이 끝났다. 고응분, 천지탕 등은 애초에 후한민의 석방과 광저우의 군정대권 확보가 목적이었지 장제스가 하야하고 말고는 애초에 별 관심도 없었던 와중에 석우삼이 개발살나는 걸 보자 난징 정부를 군사력으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 더 소극적이 되었다. 따라서 고응분과 천지탕은 후한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난징 정부와 협상을 원했다.

하지만 광서파와 개조파는 광저우 국민정부가 북벌을 하지 않으면 광동파에 밀려 자신들이 별볼일 없어질 것이 뻔하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북벌을 하여 다른 세력들의 호응을 얻어 장제스를 끌어내리고 새로이 통일된 중국에서 한자리를 잡는 모험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광동파와 충돌하였다. 하지만 천지탕과 고응분을 비롯한 광동파 주화파들은 앞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광서파, 개조파 등의 주전파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고 광저우 국민정부를 장악한 광동파가 주화론을 내세우자 주전파의 주장은 먹혀들지 못했다. 고응분과 천지탕은 왕징웨이가 광서군에 필요한 경비를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기도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왕징웨이는 칭병하여 홍콩으로 떠났고 광저우 국민정부는 설립된지 얼마나 됐다고 와해 위기에 몰렸다.(...) 이에 천지탕과 고응분은 쑨커를 홍콩에 보내 왕징웨이를 달래는 한편 난징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하여 자신들이 주전론에 뜻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왕징웨이도 광저우 국민정부 외의 대안이 없음을 알았기에 장파쿠이를 광동에 보내 분위기를 살폈고 장파쿠이가 광동파가 훨씬 적극적이 되었단 보고를 올리자 3가지 요구를 제시했다.

1. 1집단군 전원은 즉각 호남과 강서로 이동해 북벌을 진행한다.
2. 광동성 동강 및 후방의 방무는 4집단군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협조한다.
3. 광동방무를 돕기 위해 이동한 4집단군에게 광독측은 마땅히 충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이후 이 부대의 군비 역시 광동정부에서 전부 책임진다.

천지탕과 고응분은 왕징웨이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왕징웨이는 다시 광저우로 돌아갔다. 이에 광저우 국민정부의 2차 북벌이 임박하였음을 안 장제스도 대비에 들어갔다.

3.3 광저우 국민정부의 2차 북벌

천지탕과 고응분은 방무를 강화하는 한편, 4집단군에게 요충지를 양여하였고 군사문제에 있어 내부의견을 일치단결할 것을 휘하의 1집단군 장령들에게 명령했다. 이러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8월 25일 장제스에게 보고되었다. 장강 범람의 수습[1]만보산 사건 때문에 고생하고 있던 찰나에 광저우 국민정부가 다시 북벌을 분비하고 있단 사실에 장제스는 큰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장제스는 보고를 받은 날 3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1. 광독측의 군사적 움직임에 상관없이 공산당 토벌에 전력을 기울인다.
2. 공산당 토벌에 동원된 부대를 모두 철수시켜 우선 반역자들을 섬멸하고 그 다음에 공산당을 숙청한다.
3. 공산당 토벌의 현상을 유지하되 일부 주력을 빼서 호남에 보내 반역자를 처단한다.

장제스는 진명추와의 논의 끝에 양광의 총공격이 개시될 것으로 예상되는 9월 초까진 초공 작전에 힘을 기울이다가 초공 작전이 마무리되면 병력을 빼 호남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즉 3번 안이 결정된 것이다.

8월 28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북벌을 시작했고 진명추는 천지탕에게 전보를 보내 양광 군대의 북진이 공산당을 돕는 행위이며 중앙군이 호남과 강서에 다수 파견되었기 때문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 군대를 돌릴 것을 권고했으나 천지탕은 이를 듣지 않았다. 위한머우, 향한병, 바이충시 부대가 일제히 북진을 게시했고 9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동원령을 선포, 예하 부대에게 호남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으며 4집단군이 선봉에 섰다. 이에 난징 정부도 응원군을 파견하였다. 북벌군은 호남의 여러 요충지를 점령하고 형양으로 진군했다. 한편 1집단군은 영국, 독일, 일본에서 비행기, 무기, 방독면을 구입함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난징 정부와의 일전을 대비했다.

이렇게 되자 호남 주석 겸 4로군 지휘관 하건의 태도가 관건이 되었는데 호남은 탕성즈의 영향이 강하게 남은 곳으로 탕성즈가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한 상태라서 광저우 국민정부는 탕성즈에게 30만 원의 공작비를 주어 호남을 포섭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하건은 휘하의 상계 군벌들에게 통일의지운동을 펼쳐 내부를 단속할 것을 명령하여 탕성즈의 공작에도 호남군벌들은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난징 정부도 하건에게 여러 주요 인사들을 파견하여 그의 충성심을 재확인했다. 하건은 장제스에 대한 절대옹호의 입장을 천명했고 대신에 4로군이 초비 군사활동에 지친 상태이니 중앙군을 파견하여 양광의 북벌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난징 정부는 3개 사단을 파견하는 한편 허잉친을 장사에 보내 현지의 장령들과 논의하여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사실 이건 큰 의미가 있는 것인데 원래 각 지방 군벌들은 중앙군이 자신의 영지에 들어오는 것을 경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하건은 자청하여 중앙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는 호남의 장제스에 대한 충성이 강력하다는 증거였다.

한편 천지탕과 리쭝런은 하건에게 호남성 주석 자리를 보장할테니 광저우 국민정부에 붙을 것을 종용했다. 이에 하건은 공산당, 장간 범람 등의 천재와 인화로 호남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자신은 호남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라고 거절했다. 이에 광저우 국민정부는 9월 11일 천지탕을 양광 부대를 총지휘하게 하여 북진을 전개하도록 했다. 광동 소속 이양경이 침주를 점령함으로 형양에서 광서군대와 합류할 준비를 갖추자 호남성 정부는 크게 긴장하였다. 동시에 외교적 협상도 진행되어 9월 12일 감찰위원 오충신이 장제스가 하야한다면 군사행동을 멈추겠다는 왕징웨이의 요구를 전달했다. 이에 장제스는 광저우 국민정부가 먼저 무력행동을 멈추고 대표를 상하이에 보낸다면 일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 하야를 선결조건으로 걸고 북벌을 계속했다. 하지만 형양을 점령한 1집단군은 갑자기 9월 15일 광동으로 철수해버렸고 4집단군도 9월 16일 철수해버렸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으나 광저우 국민정부가 갑자기 공산당 토벌에 전념하여 더 이상 북벌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게 된 것만은 확실하다. 이에 난징정부도 허잉친에게 진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북벌 이전의 대치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3.4 만주사변의 발생

호남 깊숙이 진격했던 북벌군이 갑자기 철수했단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즉각 부대들을 강서로 보내 초공작전에 동원했다. 또한 장제스는 19로군을 동원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견제하고 동시에 19군을 강서 남부에 집중시킨 다음에 4전 대회에서 자신이 사직하여 광동의 각성을 촉구하며 만일 광동이 각성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하지만 광저우 국민정부도 장제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만주사변이 발생한 것이다. 장쉐량의 급한 보고를 받은 난징 정부는 경악하여 난창의 장제스를 급히 난징으로 소환했다. 일본의 침략에 온 중국이 분노하였고 침략에 맞서 내부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장제스는 내란 평정 때문에 외교문제를 소홀히 여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난의 위기 상황에서 여전히 내쟁을 그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양해하지 않을 것이며 우방도 중화민국에 대한 열정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생각컨대 광동측 요인들도 천하의 지적을 견뎌가며 군사행동을 계속하진 않을 것이다."

즉 광저우 정부에 분쟁을 종식하고 협상하자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9월 19일 장계, 이석회, 오철성 등의 인산들이 난징 정부를 대표하여 광저우 정부에 분쟁을 종식하고 국난을 같이 이겨내자는 전보를 보냈다. 광저우 정부도 이에 호응했고 9월 20일 광저우 정부는 분쟁을 중지하자는 오철성 등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밝혔다. 장제스는 상황이 대단히 심각함을 인식, 광동과 더 이상 힘을 겨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진명추를 상하이로, 채원배와 장계를 홍콩에 보내 광동과 협상에 들어갔고 9월 21일 난징에 도착하여 간부회의를 소집, 만주사변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광동도 만주의 요충지들이 잇달아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고 있단 소식이 들려오는 와중에 장제스가 화해를 요청하자 지금은 반장활동을 할 떄가 아니란 것을 인식,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리쭝런은 여세를 몰아 난징을 공격한 다음에 항일과 초공을 영도하자고 했으나 쑨커는 국난시기에 분열적 행동을 하면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왕징웨이는 항일도 공산당도 중요하고 난징정부와의 화평도 이뤄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위해 장제스가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21일 광저우 정부는 난징에 전보를 보내 3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1. 장제스 하야
2. 광저우 국민정부 취소
3. 통일 회의에서 통일정부 출범 논의

3.5 협상의 진행

위의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진명추, 장계와 상의하여 자신이 하야할 수도 있다고 한 다음에 진명추를 광저우에 보내 협상을 지시했다. 장제스 역시 3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광동측 동지들이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중앙의 동지들도 모든 것을 양보할 의향이 있다. 이 경우 광동의 모든 동지들은 난징에 들어와 정부를 개조하라. 나 개인의 하야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광동 방면의 동지들이 책임 있는 행동을 약속하고 난징으로 들어온다면 나는 그 즉시 하야를 발표할 것이다.

2. 광동 동지들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중앙에 모든 것을 맡겨라. 이 경우 광동정부는 스스로 취소를 선언하고 광동 동지들은 수도에 모두 모여 함께 국난을 극복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어야 할 것이다.

3. 각 방면이 합작한다면 나는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단 이 경우도 필히 먼저 상하이에서 얼굴을 맞대고 흉금을 터놓고 난관을 극복할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할 것이다. 광동측이 장제스, 후한민, 왕징웨이 세 사람의 합작을 원한다면 기꺼이 응할 것이다.

또한 장제스는 진명추에게 왕징웨이, 쑨커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었으며 이 친서에서 장제스는 이전의 시비곡직은 모두 자신이 떠안을 것이니 여러 동지들이 당과 나라를 위해 진정으로 화담에 임해줄 것을 두 사람에 간곡히 부탁했다. 진명추를 떠나보낸 장제스는 측근들을 소집, 다시 대내외문제를 논의했다. 이 논의 끝에 난징 정부는 우선 국제연맹이 만주사변 확대를 막아달라고 제소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후한민을 다시 복귀시키도록 설득하여 화평의 실을 얻으려 했다. 후한민은 원래 대일 강경파였으나 중국이 현실적으로 일본을 이기기 어려움을 인정하고 "이번 사태는 일본 군부의 극소수 강경파가 주도한 것으로 전체 일본의 뜻은 아닐 것이다. 외교 역량을 효과적으로 운용한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입장을 표명하며 외교부장 왕정임과 일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장쉐량을 징계하고 외교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일본에 파견해 담판을 짓자고 했다. 이에 다이지타오 등이 후한민을 찾아 복귀를 요청했고 후한민은 당원이자 국민으로써 당연히 당과 국가를 위해 봉사할 것이나 건강에 회복되지 않아 당장 복귀하긴 어렵다고 밝혔다. 장제스는 계속 측근들을 파견하고 구국단체를 움직여 후한민의 복귀를 청했으나 후한민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장제스는 후한민이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 한다고 불쾌해했다. 이에 오경항은 왕징웨이와 합작한다면 후한민도 복귀할 것이라는 계책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광저우 역시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천지탕은 장제스와의 화해를 주장하며 만약 장제스가 하야하면 일본과 교섭을 진행할 사람이 없다고 장제스의 하야도 반대했다. 이에 왕징웨이와 리쭝런은 고응분과 천지탕이 다시 장제스에게 붙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장제스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왕징웨이는 민주정치만이 중국의 역량을 모을 수 있으니 장제스가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응분은 자신들도 대표를 파견해 난징 정부의 의도를 확인하고 그 다음에 장제스의 하야를 요청하자고 주장했다. 왕징웨이가 이에 동의하여 쑨커 등과 함께 홍콩으로 향했다. 이는 자신을 자꾸 억누르는 광동파에게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9월 25일 상하이를 떠나 홍콩으로 향한 진명추는 9월 28일 홍콩에서 광저우 대표들과 만났다. 진명추는 왕징웨이에게 장제스의 친서를 전했으나 왕징웨이는 구체적인 하야 표명이 없는 것에 실망하여 장제스의 하야를 다시 요구했다. 자신이 장제스의 하야를 담보할 수 없던 진명추는 장제스에게 광동측 위원들을 안심시키고 상경할 분위기를 조성과 정부 통일 방법이 정해진 후 장제스의 하야와 광저우 국민정부의 철폐가 이들의 요구임을 전했다. 요약해서 광저우 국민정부 인사들의 안전보장+장제스의 하야가 이들의 요구였다. 이에 장제스는 자신이 하야할 순 있으나 대신 광동파가 대표를 상하이에 파견해야 한다고 했다. 장제스의 조건부 하야 의사를 확인한 왕징웨이는 난징 정부의 대표들을 광저우에 보내 협상하게 했다. 장제스는 만주사변을 당하고도 자신에게 굴복과 하야만을 요구하며 정작 일본에 대응할 용기와 결단을 보여주지 못하는 광저우 측에 불만을 품었으나 광저우와의 합작을 위해선 계속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의 조건부 하야를 받아들인 광저우 정부는 반응이 엇갈렸다. 고응분, 소불성 등의 호한민 파는 장제스의 선하야, 후화평을 요구했다. 그들은 10월 5일까지 장제스가 하야할 것을 요구하며 왕징웨이와 쑨커의 태도가 유약하다고 비판하는 등 전보다 강경해진 태도를 보였다. 리쭝런도 장제스가 즉각 하야해야 하며 광서파에 대한 보복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지탕은 후한민과 이제침 석방을 요구했다. 이에 난징 대표들은 장제스의 하야가 필수적임을 알려왔고 장제스는 "왜구들에게는 사사건건 양보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안으로는 고압적 자세를 취한다"라며 크게 분통을 터트렸다. 한동안 분을 이기지 못하고 광저우 정부를 욕하던 장제스는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 기존 3원칙를 따르는 것 외엔 협상의 여지가 없음을 다시 확고히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야하지 않아 일이 엉망이 됐단 비판을 받을 가능성을 인식, 왕징웨이와 쑨커가 난징에 오거나 광동 대표들이 상하이에 오면 즉시 하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장제스의 태도에 광저우 정부는 성의 표시로 후한민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의하고 상하이에서의 회담이 성과가 있으면 그땐 광저우 정부 인사들이 북상하기로 결정함으로 장제스 하야를 선제 요구하는 것을 접었다.

10월 11일 상하이에 도착한 진명추는 10월 12일 난징에 도착 수도위수사령관에 임명되어 19로군을 통솔하며 광저우 정부 인사들을 보호할 준비를 갖추었다. 후한민 석방이 필요해진 것을 안 장제스는 10월 13일 후한민을 찾아 당과 국가를 위해 이전의 잘잘못을 모두 묻어버리길 청했고 10월 14일 다시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모든 시비곡직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자신이 맡겠다는 장제스의 태도에 감동받은 후한민은 장제스의 사과를 받아들여 상하이로 떠났고 그 전에 광동에 전보를 보내 대표를 상하이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후한민의 전보를 받은 광저우 정부는 왕징웨이, 쑨커, 이문범, 오조추를 대표로 서정하여 상하이로 보냈고 이들은 10월 2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10월 22일 장제스가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에 도착하여 이들을 맞았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후한민은 국민정부주석과 육해공총사령관 자리의 폐지와 정부 개조, 장제스의 하야를 요구했다. 장제스는 불만스러워했으나 결국 4차 전국대표회의의 개최, 육해공 총사령관직 페지, 국민정부주석을 연륜있고 덕이 높은 당내 인물에 맡긴단 조건에 합의했다. 즉 장제스의 당권과 군권의 박탈과 하야가 합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4 결말

1931년 10월 27일부터 11월 7일에 걸쳐 행해진 화평통일회의는 최종적 타협에 도달했다. 12월 상하이에서 국민당 4차 전국대표회의가 열렸고 장제스는 오랜 숙적 왕징웨이와 손을 잡았다. 왕징웨이의 개조파 위원들이 대거 선출되었고 장제스는 12월 15일 자신보다 유능한 인물에게 자리를 내어주겠단 구실로 사퇴했다. 쑨커의 새 정부는 장제스가 사라진 이후 그동안 장제스가 조달해오던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어 큰 난관에 빠졌고 후한민도 궁지에 빠져 광저우로 떠나야 했다. 중국 전체가 분열되려 하자 쑨커는 결국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1932년 1월 장제스와 왕징웨이는 장왕합작에 동의했고 1932년 1월 28일 왕징웨이가 행정원장, 2월 8일 장제스가 군사위원회위원장이 되었다. 이 장왕합자가 체제는 1935년 왕징웨이 저격 사건 때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다시 한번 정치적 권위를 재확립한 장제스의 앞에는 수많은 군사적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산당은 물론이요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일본인들이었으니... 머지 않아 일본인들은 두 차례의 거대한 도발을 감행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광주국민정부의 북벌과 장개석의 대응, 김영신, 원광대학교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남경정부의 대응, 김영신, 원광대학교
  • 중일전쟁 전후 대일 협력자 왕정위집단의 형성(1928~1938), 박상수, 고려대학교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6 관련문서

  1. 15얼 7천만원의 재산피해와 43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초대형 자연재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