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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閻錫山(염석산) (1883년 10월 8일, 산시 우타이 ~ 1960년 5월 23일, 타이완 타이베이)

1 소개

옌시산은 청나라의 전직 혁명가, 중화민국의 군벌이다. 자는 보촨(伯川 백천)이다. 산시(山西)의 실질적인 군주로 40년 가까이 군림했던 군벌로 산서왕, 산서의 토황제란 별명이 있었으며 군벌들 중에선 가장 안정적인 영지를 운영하여[1] 군벌들 사이에서 꽤 독특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뒤통수와 현실주의적인 처세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유년시기와 신해혁명

1883년 10월 8일 청나라 산시 성 북서쪽의 우타이 현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한때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평범한 삶을 살았으나 가업이 몰락하면서 산서무비학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1904년 일본 유학을 떠나 1905년 동맹회에 가입하여 혁명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1909년 졸업 후 귀국한 옌시산은 산서신군에서 군개혁과 신식군대 훈련의 임무를 맡는 한편 혁명 세력을 조직했다. 신해혁명(1911)이 일어나자 옌시산은 산시성의 성도인 타이위안에서 타이위안 기의(太原起義))를 일으켜 반혁명파 군인들을 숙청하고 혁명군을 조직하여 산시성을 장악, 산시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 옌시산은 산시의 입헌파, 경찰, 혁명장령들의 투표를 거쳐 산시의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사실 타이위안 기의에 옌시산 직속 병력들이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옌시산이 대표로 추대된 것은 옌시산이 타이위안 기의를 기획한 조직(산서신군, 동맹회)의 핵심 인물이었던데다 타이위안 기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헌한 바가 컸기 때문이다. 물론 옌시산이 산시 성 출신이라는 것도 중요한 정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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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의 옌시산

산시성에서의 혁명은 유혈을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산시성의 혁명군은 구 청조의 관리들, 입헌파 인사들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구 기득권층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던 옌시산은 산시성 유력자들의 지지를 받는데 성공함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이후 옌시산은 군사들의 약탈 행위를 단속하여 산시의 치안을 확보했고 옌시산은 산시의 안정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1911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가 파견한 청군이 반격해오자 옌시산은 패하여 산시 성 북방으로 철수했는데 산시에서의 혁명세력이 안착하고 산시 성의 유력자들이 옌시산에게 돌아올 것을 촉구함에 따라 옌시산은 1912년 2월 19일 남하를 시작, 4월 4일에 타이위안에 입성했고 다시 산시 성 도독에 취임하고 군정부를 조직했다. 옌시산은 혁명파 장령들을 정부에 기용하였고 일본군 편제를 본따서 산서군을 재편성했다. 1913년 내몽골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몽고원정군을 파견했다.

1915년에는 군사교육단을 창설하여 장교들을 육성하는 한편, 옌시산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혁명파 장령들을 숙청하거나 명예직만을 줌으로써 권력을 자신들의 측근들에게 집중시켰다. 독자적인 무장세력으로 성장할 싹수가 보이는 자들은 예외없이 토벌해버렸다. 옌시산의 숙청작업은 훗날 중일전쟁, 국공내전 시기까지 이어졌으며 이렇게 숙청, 살해된 정적은 수백 명에 달한다. 옌시산은 차라리 능력은 좀 부족할지라도 믿을 수 있는 심복만을 중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훗날 자신의 상전이 되는 장제스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2.2 산서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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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옌시산

옌시산은 산시성의 절대권력자가 되었지만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취임함에 따라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위안스카이에게 개길 힘이 없던 옌시산은 즉각 위안스카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축을 함으로 위안스카이의 부하가 되었다. 이때 옌시산은 위안스카이가 파견한 산서순안사 진용(金永)에게 밀려 액정경비만을 사용하는 등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황제병 걸린 위안스카이가 1915년 12월 12일 중화제국을 선포하자 옌시산은 후작 작위를 받지만 전국 각지의 반발에 밀린 위안스카이는 83일만에 황제자리에서 하야해야 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은 1916년 6월 6일 패혈증으로 죽고 만다. 이후 리위안훙이 대리총통이 되었고 위안스카이가 파견한 진용도 산시를 떠났고 옌시산은 산시 내부의 경쟁 군벌들을 모조리 내쫓고 다시 산시에서 떵떵거릴 수 있게 된다. 옌시산은 실질적인 권력자인 돤치루이에게 로비를 하는 한편, 자신이 산시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산시의 경제성장과 근대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리위안훙은 옌시산을 싫어하였으나 돤치루이의 지지를 받는 옌시산을 산시성장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에도 그를 퇴진시키고 옌시산의 정적들로 교체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옌시산은 1916년 병기를 만들던 육군수계소(陸軍修械所)에 동원국(銅元局)과 철기국(鐵器局)을 신설, 화폐 제조를 시작했으며 동원 개주작업을 통해 거액의 자본을 확보, 이를 바탕으로 군수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옌시산 산하 군수공장들은 독자적인 각인을 새겨 생산해낸 짝퉁 총기들로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것은 마우저 C96을 카피한 "산시 17식 권총(山西17式, Shanxi Type 17)". 그 밖에도 콜트 M1911톰슨 기관단총도 베껴 썼는데, C96도 M1911, 톰슨처럼 .45 ACP탄을 쓰게 개조한 데다 중국 불법복제판 중에서는 성능이 가장 좋아서 다른 곳에서도 평이 좋았다고.

그리고 자신의 지시로 혁명군이 1913년에 발행했던 공채를 모두 갚아줌으로 자신의 정권에 대한 신뢰를 얻어냈다. 하지만 옌시산이 그 돈을 현금으로 다 갚아줄 능력은 없었고 대신에 산서성은행의 주식을 나누어주었다. 1917년 9월 다시 산시의 성장으로 취임한 옌시산은 1919년 1월 산서성은행을 설립했고 모든 교역을 자신이 발행한 은원과 동원으로 처리하게 함으로 혼란한 금융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화폐의 유통을 정지, 자신이 발행한 돈으로 교환해주었다. 그리고 전통적 금융활동과 상호 발행도 규제함으로 기존에 발행된 것들은 1923년까지 성정부가 모두 정산해주었다. 이처럼 옌시산은 오랜 세월 계속된 전통 금융기관의 지폐 발행 등을 상업 정돈을 명분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근절해가며 자신이 발행권을 독점함으로 정권을 견고히 했다. 1927년엔 규제 하에 그나마 통용이 허용되던 전통 금융을 모두 혁파하고 완전한 화폐 통일을 이뤄냈다.

산시 성 자체는 중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으므로 옌시산이 여타 군벌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산시 성을 안정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옌시산은 중립화를 선언하여 여타 군벌들간의 내전에 관여하지 않는 한편, 변발·아편·전족 금지, 여성교육 확대 등 근대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산시성 발전을 위해 근대화를 수행해야 한다는 발상은 옌시산 본인의 일본 유학 경험과 중국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외국인들과의 만남이 큰 계기가 되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당시 다른 군벌들이 대부분 타 군벌들과의 경쟁과 인민 착취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산시 성 먼로주의'라고도 평가되기까지 하는 당시 옌시산의 행보는 상당히 이색적인 것이었다. 이후 산시는 외부인들로부터 다른 주들의 롤모델로, 옌시산은 모범적인 군벌로 평가받기도 했다.

2.3 장제스의 북벌중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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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펑위샹과 함께 찍은 사진.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 옌시산은 지배 영지는 작아도 휘하 병력만 20만 대군을 거느린 대군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우페이푸, 장쭤린, 펑위샹 등은 그 몇배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옌시산은 철저히 눈치를 살피며 여러 군벌들 사이를 오가면서 그때그때 제일 잘 나가는 군벌에게 붙곤 했다. 환계가 커졌을 땐 환계에 붙었고 직계가 커졌을 땐 직계에 붙었으며 1924년엔 펑위샹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하지만 1926년 펑위샹이 산시를 노리자 장쭤린, 우페이푸와 손잡고 펑위샹을 공격했다. 그런데 1926년 들어 광저우 기반의 국민당이 천중밍 등의 견제세력을 차차 몰아내고 광둥을 장악했으며 광시의 리쭝런, 바이충시, 후난의 탕성즈 등과 연합, 북벌을 개시했다. 북벌군의 총사령관은 장제스였다. 장제스의 군세는 우페이푸를 격파하고 우한을 점령했으며 장시의 쑨촨팡도 몰아냄으로 7개 성, 1억 7천만 인구를 지배하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를 본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붙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장제스의 2차 북벌에 합세하여 3군 사령관이 되었다. 옌시산은 펑위샹을 견제하려는 장제스의 계획에 따라 베이징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면서 장제스, 펑위샹, 리쭝런의 뒤를 잇는 국민당의 4대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고 차하얼 성을 비롯, 북방의 막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대군벌로 성장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북벌이 끝난 이후 편견회의를 통해 군벌 세력을 감축하려 했고 지방분회를 폐지함으로 군벌의 영향력을 약화하려 했다. 이에 크게 불만을 품은 군벌들은 잇다라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반장전쟁이다. 옌시산의 경우에는 1929년까진 장제스를 지지했으나 1930년 장제스에 대항하여 펑위샹, 왕징웨이, 리쭝런과 합세하여 베이핑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장제스에 옌시산 체포령을 내림에 따라 반장전쟁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거대한 중원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1930년 6월 옌시산은 펑위샹과 장제스가 맞붙는 동안 산둥을 공격, 성도 지난을 함락시켰고 7월엔 산둥 전역을 손에 넣었다. 이러한 승리를 바탕으로 옌시산은 자신이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할 생각까지 했으며 이를 위해 베이핑에서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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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에 중국의 새 지도자로 소개된 옌시산. 하지만 너무도 이른 소개였다.

하지만 장제스는 펑위샹의 군세를 격파했고 여세를 몰아 산둥의 옌시산 부대도 몰아냈다. 때맞춰 장쉐량이 장제스의 편을 들어 중원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옌시산을 비롯한 반장세력은 궁지에 몰렸다. 이에 옌시산은 관동군이 통치하는 다롄 항구로 달아났다. 1931년 8월 옌시산은 장쉐량의 도움으로 자신의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옌시산은 자신의 산시 복귀를 알리지 않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가 없어진 산시는 무주공산이 되었으며 정부 활동은 정지되었다. 옌시산의 부하들은 장제스에게 자신을 옌시산의 후임으로 삼아달라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옌시산은 자신이 없는 동안 성장을 맡은 쉬융창을 막후조종하여 다시 지배권을 확보했고 장제스는 양광사변에 대응하느라 옌시산의 복귀를 방해하지 않았다.

옌시산은 자신이 없는 동안 엉망이 된 산시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1932년 장제스와 타협하여 다시 산시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하지 못한 장제스의 난징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한 것을 구실로, 옌시산은 산시에서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국민당 세력을 축출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국민당 찌꺼기만 남김으로 다시 산시의 군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옌시산의 이러한 행태에도 옌시산이 반공 활동과 더불어 장제스의 난징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조건으로 그를 여전히 공직에 남겨두었다. 어쨌거나 중원대전으로 인해 옌시산의 피해도 컸는데 영토 손실은 별로 없었으나 그간 그가 안정적으로 운영해오던 산시의 재정이 파탄난 것의 타격이 컸다. 이 피해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순간까지 회복되지 않았고 그가 일본군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2.4 중일전쟁

이후 옌시산은 산시 성에서 은행 조직 개편, 내전으로 위축된 산시의 상공업 활동 촉진, 난징 국민정부의 법폐 발행에 대한 대응을 하며 산시를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이 과정에서 내세운 것이 바로 생산경제발전에 집중한 십년계획이었는데 덕분에 산시엔 중공업이 대거 육성되었고 이는 1935년 난징에서 장제스가 실행한 5개년 계획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옌시산은 산시로 숨어든 공산당 토벌에도 참가했으나 공산당 토벌이 장제스의 권위 확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서 그리 열성적으로 참여하진 않았다. 1936년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옌시산은 장제스가 죽는다면 초대형 내전이 벌어질 것인데 일본군의 침략이 목전에 닥친 지금 중국이 대형 내전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 장쉐량에게 장제스를 죽이면 안된다고 설득하고 국공합작을 지지했다. 이후 홍군이 팔로군으로 개편되자 홍군은 옌시산의 지휘를 받게 된다. 옌시산은 희생구국동맹회를 창설, 반일을 외쳤으며 이를 위해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하였고 저우언라이를 정치고문으로 삼았다.

마침내 1937년 일본군이 침략해오자 옌시산은 2전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산시 방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은 너무도 강력했고 일본군은 베이핑, 톈진을 점령한 이후 황허 이북의 중국 영토를 모조리 함락시켰다.이때 옌시산도 차하얼 성을 비롯해서 산시 바깥의 영토를 모조리 잃었다. 펑위샹이 수비하던 6전구가 무너지자 일본군은 옌시산의 영지인 산시로 몰려들었다. 옌시산은 홍군과 연합하여 핑싱관 전투(평형관 전투)와 신커우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으나 흥분한 일본군은 더욱 거세게 공격해왔다. 결국 1937년 10월 옌시산은 산시의 성도 타이위안을 내주고 린펀(临汾)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공산당이 옌시산 휘하의 부대들을 습격해 섬멸하는 일이 잦아지자 옌시산은 정말로 열받았고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 미운 공산당도 잡을 겸 1940년부터 일본군과 협상을 시작했다. 옌시산은 적극적인 반공으로 돌변, 희생구국동맹회와 산서청년항적결사대를 습격해 몰살시킴으로 공산당과 완전히 돌아섰다.

옌시산은 자신이 일본에 저항하지 않으며 공산당을 토벌하는 대가로 일본군의 산시 철군과 식량 및 철 지원을 요구했다. 일본군이 고압적으로 나오자 옌시산은 협상 결렬을 선언했는데 이때 협상대표로 파견된 일본 대표가 하나야 타다시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태도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옌시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박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또한 일본군이 옌시산을 암살할 것이란 거짓 정보가 들어온 것도 옌시산의 협상 거부 선언에 한몫했다. 결국 1943년에 일본군은 옌시산과의 비공식적인 휴전에 동의했고 산시의 옌시산 영지에는 공산당과 국민당 간첩을 잡아내자는 플랜카드가 걸렸다. 이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하자 옌시산은 전혀 주저 없이 장제스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했고 수천명에 달하는 일본군 패잔병과 장교들을 흡수하였다.

2.5 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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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의 옌시산
더러워보이던 인상이 급격히 부드러워졌다...

일본군이 항복하자 옌시산이 몰입했던 일은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타이위안을 비롯한 산시 북부의 탈환이었다. 일본군은 휘하의 19군을 동원, 타이위안을 탈환했고 일본군과 괴뢰군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하지만 중일전쟁 기간 동안 산시의 변방에 침투하였던 세력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공산당이었다. 공산당 역시 일본군의 흡수를 원했고 당연히 옌시산과 공산당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옌시산이 공산당 뒤통수를 후려친 원한이 있다는 것은 부차적인 설명이었다. 옌시산 휘하 4개 사단 1만 7천명은 산시 성 동남부인 샹당지구를 재점령했는데 마오쩌둥은 국민당을 몰아내고 샹당지구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8월 31일 공격 명령을 하달받은 2만 8천명의 공산군의 공세가 9월 10일 시작되었는데 이때는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충칭에서 고급요리와 담배를 즐기며 회담을 하던 시점이었다. 이 국공회담이라는 것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샹당전역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공산군의 습격에 19군은 참패했고 옌시산은 19군에게 항전을 명령하며 23군과 83군을 급파했으나 공산군의 습격에 패배했고 19군도 포위섬멸당했다.​ 옌시산은 3개 군 11개 사단을 잃었으며 3천명이 전사했고 3만 명 이상의 포로를 내었다. 그래도 타이위안을 비롯해서 산시 성의 상당한 지역에선 여전히 떵떵거렸는데....

하지만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면서 옌시산의 오랜 산시 통치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만주에서 공산당에게 참패당한 국민당은 화북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공산당의 화북병단은 산시를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옌시산은 국민당이 무너지기 전엔 웨이리황, 후쭝난 등과 함께 산시의 공산당을 토벌하고 1947년 옌안을 점령하는 등 잠시 잘 나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네룽전이 지휘하는 화북야전군 1병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의 세상도 끝장났다. 옌시산은 산시에서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다른 군벌들이 맥없이 무너진 것과 달리 8만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미친듯이 저항했지만 1948년 10월 5일 샤오디엔 전투에서 2개 사단을 잃었으며 타이위안이 포위되었다. 옌시산은 일본군들까지 모조리 동원하고 후쭝난이 보낸 지원병력을 투입하여 싸웠으나 결국 홍군을 격퇴하는데 실패했다.

옌시산은 타이위안을 잃을 바엔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타이위안 곳곳에서 가솔린과 폭약을 설치했고 자신도 자결하기 위해 독약을 준비했다. 하지만 공산군도 옌시산이 조밀하게 요새화한 타이위안을 뚫진 못하고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푸쭤이가 수비하던 베이핑과 톈진이 함락됨으로 옌시산을 제외한 장강 이북의 모든 국민당 부대가 완전히 무너지자 더 이상 옌시산도 버티지 못했다. 옌시산은 무려 3대 1의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고 물자도 부족했다. 옌시산은 난징으로 날아가 리쭝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리쭝런의 코도 석자였다. 이 무렵 공산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어 옌시산은 다시는 산시를 밟아보지 못했다. 옌시산의 부하 왕징궈는 공산당 지하조직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고 후쭝난이 보내주는 공수로 연명하여 악착같이 버텼지만 대세를 돌이킬 순 없었다. 4월 24일 산시는 함락되었고 옌시산의 왕국은 사라졌다.

한편 난징도 4월 23일 함락되었고 옌시산은 광저우로 옮겨간 국민당 정부에 합류했다. 탕성즈 등이 반란을 일으켜 후난을 공산군에 바치자 허잉친은 자신이 물러나지 않으면 배반당하거나 자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사임했다. 리쭝런은 후임 행정원장에 자신의 입맞에 맞는 인물을 세우려 했으나 그 꼴을 볼 수 없었던 장제스는 옌시산을 지지했고 그 결과로 옌시산은 허잉친의 뒤를 이어 4대 행정원장 겸 5대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광저우도 함락되고 수도가 충칭으로, 다시 청두로 옮겨가는 혼란 와중에 장제스와 함께 타이완으로 달아났다. 아무것도 안한건 아니고 11월에 장제스 복귀를 촉구하여 장제스가 다시 총통이 되는 것에 일조했으나 그래봐야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고 기껏해야 섬 몇개와 국경지대 오지만 남은 상황인지라....

탕성즈, 푸쭤이, 룽윈 [2] 등이 공산당에게 붙은 것과 달리 그는 공산당과 너무도 척을 졌기에 배신의 달인임에도 마지막에 공산당으로 전향하는 뒤통수를 칠 수는 없었다.[3]

2.6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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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의 옌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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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옌시산.(1950년)

대륙 시절엔 그래도 행정원장까지 지냈던 옌시산이었지만 자기 기반 다 날아간 그는 장제스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으며 장제스는 옌시산이 자신에게 대항했던 원한을 잊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국민당 중앙평의회 위원과 총통 자정[4]이란 명예직만 가진 체 아무런 실권도 누리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살아야 했다. 장제스 성격상 장쉐량마냥 연금당하거나 처형 안 당한 것을 나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광시 군벌 바이충시(백숭희)나 신강 군벌 성스차이(성세재)도 비슷한 말로를 겪게 된다.[5]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일본으로의 출국 허락을 요청했지만 장제스는 그가 타이완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역사책이나 자신의 개인철학, 중화민국의 현재 정치상황에 대해 분석하는 책을 쓰며 조용히 살다가 1950년대에 완전히 은퇴했고 1960년 7월 22일에 사망했다.

3 여담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쓴 책인 <평화 혹은 세계대전>에서 북한이 곧 남한을 침공할 것이나 남한은 이를 극복할 것이고 곧 미국의 지원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이고 중공이 북한을 지원할 것이며 그 결과로 미군이 남한에 오래 주둔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바가 있는데 그의 분석은 적중했다.

옌시산이 죽은 후, 그의 무덤은 산시에서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관리했는데 2001년 옌시산을 따라온 마지막 사람이 80이 넘은 노인이 되어 더 이상 무덤을 관리할 여력이 없자 타이베이 시에서 옌시산의 무덤을 관리하게 되었다.

옌시산은 살아남은 거물급 군벌들 중에서[6] 장제스를 제외하곤 공산당에 전향하지 않고 국민당에 남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선 그를 까는 프로파간다를 많이 내놓은 바가 있다.

대륙에서 쫓겨난 후에도 산시에선 옌시산의 평가가 꽤 좋았다 하며 산시인들 중에서 아직도 옌시산을 그리워하는 인물이 있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장제스처럼 이 사람도 열심히 일기를 써서 2011년 중국에서 옌시산 일기를 묶어서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오길 바라는건 어림 없을 듯...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도 인연이 있다. 안창남을 비롯한 많은 숫자의 조선인 비행사들이 염석산 휘하 공군부대에 있었고 산서에서 생산한 무기들을 독립군들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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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아들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옌시산.

가족사항으론 아내 서씨와 아들 다섯이 있었다.

4 참고문헌

  • 염석산 정권 전기의 권력집중과 정치개혁, 강명희, 서울대학교.
  • 염석산 정권 시기 금융통화의 개혁과 통제, 강명희, 한세대학교.
  • 1930년대 산서성 토지촌공유제의 배경과 성격, 김지환, 인천대학교.
  • 중국 군벌의 성쇠와 초기 국민정부에 미친 영향, 오수열, 조선대학교.
  • 위키피디아 영어판 옌시산 문서.
  • 중일전쟁의 저자인 권성욱 님(욱이님)의 관련글
    • [중국근대사 군벌시대 5화 "산서의 토황제 염석산"]
    • [국공내전史 장제스 타이완으로 향하다 - 7. '산시의 토황제' 옌시산의 몰락]

5 관련문서

  1. 이 때문에 모범 장관이란 별명도 있다.
  2. 이 사람들은 군벌출신임에도 공산당으로부터 여러 감투를 받았다. 물론 실권없는 얼굴마담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의 대자보질로 비판되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박해를 당하지는 않고, 비교적 평화로운 노년을 보냈다. 어차피 대만으로 장제스를 따라갔어도 마찬가지 신세였을 것이다.
  3. 마찬가지로 박쥐처럼 배신을 일삼던 군벌 성스차이도 마오쩌둥의 동생인 마오쩌민을 처형한 전적이 있어서 얌전히 타이완까지 따라왔다.
  4. 자문위원. 영지를 다 잃고 타이완에 빈손으로 들어온 옌시산은 장제스가 자신에게 총통 자문을 맡겼단 말에 타이완에서도 권세를 누릴수 있지 않을까 잠시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5. 바이충시의 경우에는 하이난 방어에 실패하고 리쭝런의 만류를 뿌리치고 타이완에 가지만 역시나 찬밥 신세가 되었으며 신강 군벌 성스차이는 역시나 배신의 달인이지만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민을 처형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공산당에 투항했다간 목숨이 위험해서 끝까지 국민당 편에 붙어 있었다.
  6. 보면 장제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의 군벌들을 들자면 우페이푸, 장쭤린, 펑위샹, 리쭝런 등이 있는데 장쭤린은 만주사변이 터지기도 전에 황구툰에서 죽었고 우페이푸는 중일전쟁 중에 일본인 치과병원에서 의문사했으며 펑위샹은 공산당에 전향은 안했지만 반장활동을 멈추지 않다가 중일전쟁 종전 직후 사고로 죽었고 리쭝런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공산당에 붙어버렸다. 그외에 탕셩즈를 비롯해서 개별 단위로 공산당에 붙은 군벌들은 부기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