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공작전

1 개요

초공작전은 1930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 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한 장제스의 군사작전을 말한다. 하지만 1~4차는 군벌들의 비협조, 일본의 침공, 혼란한 내부사정, 형편없는 군대의 기강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으며 5차에 이르러서야 성과를 거두지만 장쉐량이 서안 사건으로 장제스 뒤통수를 후려갈기면서 공산당을 섬멸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위초작전, 소공작전이라고도 한다.

2 배경

2.1 공산당의 내부사정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공합작은 붕괴되었고 코민테른의 노선 변경으로 인해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와도 공산당은 결별했다. 이에 공산당은 우한 정부군의 동정에 동원된 장파쿠이의 2방면군에 소속된 운대영 휘하의 친공산당 부대들을 빼내어 난창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려고 기도했다. 덕분에 11군 24사단장 엽정 휘하의 5개 연대, 20군장 하룡 휘하의 6개 연대, 주더의 교도단 2개 중대 등 1만 6천명의 병력과 차이팅카이의 부하 5천 명을 흡수하여 상당한 군세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27년 8월 1일 공산당은 난창기의를 일으켜 저우언라이, 장궈타오, 리리싼 등을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고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국민당의 반격으로 난창의 소비에트 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잔존한 공산당 부대들은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유격대와 합류했다. 이후 후난, 후베이, 장쑤, 광둥에서 공산당은 수차례 봉기했고 광저우에서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봉기하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후난에서 봉기를 기획했던 마오쩌둥 등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후 공산당은 리리싼 주도 하에 기존의 모험주의적이었던 노선을 비판하며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서 혁명활동을 하여 차차 도시를 포위하자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기존의 도시 쟁취 전략을 시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리리싼이 지휘했던 창사폭동도 실패로 끝남으로 다시 한번 쓰디쓴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잠시나마 창사를 점령하기도 했던 전과 때문에 공산당은 리리싼을 중심으로 꽤 견고하게 뭉쳤는데 코민테른은 리리싼을 모험주의적이라고 불신했고 스탈린동방노동대학과 손일선중국노동대학을 나온 공산당 국제파들이 리리싼을 규탄하며 당권을 장악했다. 1931년 11월 7일 전국노농병소비에트대표회의가 열렸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헌법초안, 토지법, 노동법을 제정하고 경제정책을 결정했다. 또한 마오쩌둥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주석으로 장궈타오와 항영을 부주석으로 선출했다. 군사위원회 주석으론 주더가 임명되었다.

2.2 홍군의 조직

한편 여러 기의에 참여했던 여러 유격대들은 노농혁명군이란 이름으로 통합되었다가 다시 홍군과 노농홍군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광저우 기의 때 홍군이란 명칭이 정식으로 사용되었고 도시를 노린 기의들의 잇단 실패에 일찍이 호남농민운동시찰보고 등을 올리며 농촌 중심 혁명을 주장했던 마오쩌둥은 자신의 전략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927년 9월 29일 정강산에서 노농혁명군은 마오쩌둥이 주창한 삼만개편에 따라서 잔존 병력을 노농혁명군 1군 1사단 1연대로 개편했고 부대 내부의 민주제도 도입, 구타 근절, 사병의 발언권 보장, 사병위원회 설치 등으로 홍군의 규율을 정리했고 각 부대에 당 조직을 설치하여 당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이후 여러 공산부대들과 국민당 내부에서 숙청된 부대들이 합류함으로 홍군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1928년 1월엔 주더가 후난에서 국민당과 싸우다 퇴각하여 마오쩌둥에 합류함으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마오쩌둥은 3천명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1928년 4월의 국민당 공세를 격퇴했으나 8월 공세에선 크게 패하였고 1928년 펑더화이의 패잔병을 받아들여 병력을 보충했다. 이후 마오쩌둥과 주더는 장쑤와 푸젠에 해방구를 늘리는 전략에 집중했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나 국민당의 공세에 정강산에서 펑더화이가 패퇴하면서 정강산에서 홍군은 축출되었다. 1929년 12월 열린 고전회의에 참석한 마오쩌둥은 현 상태론 국민당과 싸워 이길 수 없으니 건군노선을 확정하고 홍군을 건설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그 유명한 3대 기율(명령에 절대 복종, 인민의 것은 사소한 것이라도 뺏지 않는다, 모든 노획품은 공적인 것.)과 8항(말을 부드럽게 한다, 공정히 물건을 사고판다, 빌린 물건은 되돌려준다, 물건을 파손하면 배상한다,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다, 덜 익은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이 만들어졌으며 마오쩌둥의 16자 전법(적이 공격하면 나는 후퇴하고 적이 후퇴하면 나는 추격하며 적이 머무르면 나는 어지럽히고 적이 피로하면 나는 타격한다.)도 창안되었다. 이후 홍군은 중앙정부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을 중심으로 민심을 확보하는 한편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3 전개

3.1 1차 초공작전

한편 난창 기의 이후로 유격전을 벌이며 성미를 건드리는 공산당을 장제스가 가만 놔둘 리는 없었고 장제스는 1930년 8월 우한 행영 주임인 허잉친에게 후난, 후베이, 장쑤의 병력을 소집하여 홍군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30년 11월 5일 1차 초공작전이 시행되어 국민당군 중앙군 4만 4천명을 합쳐 10만 대군이 동원되었으나 1931년 1월 3일 장쑤 성 흥국현에서 홍군의 유인 작전에 걸려 무참하게 섬멸당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공산당이 일부러 많은 물자를 남겨 국민당군의 약탈을 유도했고 과연 약탈에 여념이 없던 국민당군은 홍군의 기습에 무참히 섬멸되었다 한다. 홍군은 국민당군의 무기를 잔뜩 노획하였으며, 사로잡은 지휘관들은 전향을 거부하자 대부분 처형하였다.[1]

3.2 2차 초공작전

1차 초공작전의 실패에 빡친 장제스는 1931년 4월 심복인 허잉친에게 중앙군 10만 대군과 지역병 10만 대군, 도합 20만 대군을 주어 공격을 명령했으나 허잉친은 지휘능력이 영 좋지 못한 반면 마오쩌둥은 세계 게릴라전사를 새로 쓰게 만들 정도의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고 1931년 5월 31일 장쑤 성 건녕현에서 국민당은 3만의 병력과 2만 자루의 소총을 잃고 참패했다. 이때 홍군은 통치영역을 3배로 늘렸고 국민당의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3.3 3차 초공작전

2차 초공작전의 실패를 보고 정말로 열불받친 장제스는 직접 직속부대인 6,9,10,11,14 사단 등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공격에 나섰으며 이때 독일인 고문들까지 대동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현지에서 23개 사단, 3개 여단 병력 30만 명이 뒤에서 지원하기로 하였다. 1931년 7월 1일 공세가 시작되었다. 장제스는 2차례의 패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진군했는데 이 때문에 공산당은 2차 초공작전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장제스의 공격에도 제때에 철수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성공과 성공적인 철수작전에 고무된 공산당은 무리하게 정면 공격을 시도했으나 야전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홍군은 4천명의 병력을 잃고 패주했다. 하지만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광서파벌의 반란인 양광사변과 불안정한 후방 때문에 자꾸 병력을 차출해야 해서 오히려 세력이 자꾸 줄고 있었다. 거기에 1931년 9월 15일엔 국민당군이 또 다시 패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만주사변이 터지면서 장제스는 공격을 중단하고 병력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퇴각하는 국민당 군대를 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3차 초공작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내부에는 마오쩌둥의 리더십에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만약 만주사변같은 외부적 요인이 없었으면 그냥 끝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유격전을 주장하던 마오쩌둥은 이겼음에도 오히려 입지가 축소되어 지휘계통에서 제외되고 저우언라이가 홍군 총정치위원에 임명되어 기존의 유격전에서 진지전과 정면대응전을 방침으로 삼게 되었다.

3.4 4차 초공작전

3차례의 승리 덕분에 홍군은 전국각지에 수십만 대군을 보유한 세력을 성장하는데 성공했고 장제스가 만주사변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더욱 확장했다. 만주사변1차 상하이 사변의 여파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광서 파벌의 반란도 진압된 후인 1932년 6월에야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다. 이번에 동원된 병력은 10만명이었는데 단순한 군사작전 뿐만이 아니라 대규모 경제 봉쇄 및 홍군이 출몰하는 모든 성에 4개 사단을 동원하도록 하고 각 마을에 자경단을 조직하는 한편 도로를 정비하여 공산당 토벌에 전방위로 몰두했다. 목표는 장쑤, 허베이, 허난, 안후이, 후난 전역의 홍군 섬멸이었다. 이에 맞선 것은 8만명의 홍군이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국민당의 공세가 주효하여 허베이, 허난, 안후이 소비에트는 국민당에게 패배하여 함락당했고 후난과 후베이 서부 지역의 홍군도 크게 패하고 물러나야 했다. 8만의 홍군은 절반으로 줄었고 쓰촨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산당이 새 근거지로 삼은 쓰촨과 장시의 농촌에 대한 통제력이 부재했던 국민당은 농촌 유력가들을 통해서 정책을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공산당은 국민당에게 소외된 농민들을 유혹하는데 성공했고 설상가상으로 국민당의 농촌 위무 정책과 강압적인 징병, 징용 정책이 농민들의 반발을 사면서 공산당을 토벌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쓰촨성에서의 토벌 작전을 마무리하는데 성공한 장제스는 장지성 소비에트 공화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공군까지 동원하여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공군 덕분에 장제스는 광둥을 습격하여 전선을 확대하려는 공산당의 시도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보급부족과 해이한 기강 때문에 허물어진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의 습격에 잇달아 패했다. 결국 광창 전투에서 국민당 주력군은 패배했고 실질적으로 이때 4차 초공작전이 끝난 것으로 평가된다. 게다가 장제스는 초공작전을 단순히 공산당 토벌을 위해서만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 군벌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동원된 군벌군들은 태업행위를 일삼았다. 결국 1933년 러허 사변이 터지면서 4차 초공 작전도 중단되었다.

어쨌거나 새로운 방침인 진지전과 정면승부에서 한번 이긴 공산군은 한번 해볼만한데?라는 자신감을 품게 되고 이 노선을 고수하지만... 난징과 상하이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장제스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공격을 퍼부을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3.5 5차 초공작전

러허사변의 여파도 가라앉자 장제스는 1933년 말부터 다섯번째 초공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독일식 사단만 무려 20만 대군이 동원되었고 중앙군으로 따지면 50만, 지역병까지 합치면 총 66개 사단 100만 대군이 동원되었다. 장제스가 유례없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동안 공산당은 마오쩌둥과 독일 고문 오토 브라운 및 28인의 볼셰비키의 주도권 다툼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상하이 파벌 등은 마오쩌둥의 게릴라전을 비웃으며 무모한 정규전을 주장했고 마오쩌둥은 이들의 공세에 실각하고 만다. 그동안 장제스는 1100킬로미터 구간의 도로를 건설하는 한편 마오쩌둥과 주더의 목에 10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고 공산당원들에 대한 회유책을 홍보했다.

그러나 국민당군의 이런 전술 변경에 반해, 그간의 군사상 성공에 도취된 홍군은 그동안 성공적이었던 게릴라전을 버리고 되려 국민당군과의 정면대결을 선택하였다. 이것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를 장악하던 소련 유학파인 일명 '28인의 볼셰비키'와 이 사람들을 지원한 코민테른 대표 이덕(오토 브라운)[2][3]의 작품이다. 이 사람들은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을 근거로 들면서 공산주의 혁명은 도시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혁명이므로, 일시적인 근거지인 농촌에 안주하기보다는 도시로 진군하여 동맹 세력인 도시 노동자들의 봉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러니까 한마디로 스탈린 빠돌이들. 1917년의 러시아과 1930년대 중국 대륙은 정치, 경제, 사회구조 등 모든 것이 다른데도 이 사람들은 코민테른의 권위와 자신들의 소련 유학 경험을 내세워서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의 전술을 사리를 따지거나 분별없이 무턱대고 중국에 적용한 것이다.[4] 마오쩌둥를 비롯해 농촌이 혁명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게릴라전을 지지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후일 공산당 지도부가 될 사람들은 뒤 구석에서 찬물만 들이키는 실정이었다.[5]

다만, 이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보여준 교조주의적 면모가 전적으로 스탈린 빠돌이짓, 즉 러시아 혁명이 그런 식으로 일어났으니까 우리도 생각 없이 따라하겠다는 발상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부분은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특징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생전에 혁명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별달리 설명한 바는 없으나, 농민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농민은 본질적으로 소 부르주아지적 이해관계[6]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혁명의 주도세력이 될 수 없다 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즉, 마르크스주의적 논리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혁명은 도시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일어나는 것 맞고, 마르크스는 중국과 같이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고 농촌 지역에 인구의 대다수가 몰려 있는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는 딱히 상정하지 않았다. 당장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 당시 중국의 가난한 농민을 고통에 빠트린 모순은 자본주의적 모순이라기보다는 봉건제적 모순이었고, 애초에 마르크스주의란 '자본주의의 극복'을 전제로 한 사상이지 '봉건제의 극복'을 전제로 한 사상이 아니다.(...) 이 부분은 마오주의를 참고할 것. 마오쩌둥의 사상은 엄밀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의 한 분파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착상을 얻은 별개의 사상에 더 가깝고, 애초에 당시 중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보기도 한다.

1934년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 장군을 고문을 대동하고 공격에 나섰다. 공산당을 포위하게 위해 무려 3천개의 토치카가 지어졌으며 장제스의 군대는 홍군보다 5배나 많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을 실각시킨 28인의 볼셰비키와 오토 브라운은 장제스의 군대를 얕잡아보고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150대의 전투기와 장제스가 육성해온 17개 중앙군 사단, 독일식 정예부대들이었다. 당연히 홍군은 아주 개발살났다. 마오쩌둥조차도 '철저한 수세적 후퇴'라는 표현을 쓰며 이 전투의 참패를 인정했고 홍군은 궤멸 직전으로 몰렸다. 공산당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푸젠 성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실패했고 공포에 질린 홍군 병사들은 앞을 다투어 탈영했다. 공산당은 탈영병들을 닥치는대로 참수하며 대응했지만 수천명에 달하는 탈영병을 다 잡을 순 없었다. 1934년 6월 항일선견대라는 명목을 내세운 홍군이 포위망을 뚫으려고 시도했지만 전멸했다. 결국 공산당은 버틸 수 없다고 판단, 기존의 근거지들을 포기하고 탈출을 결정하여 행군길에 올랐는데 이를 대장정이라 한다. 공산당의 탈출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종말을 맞았다. 군벌들이 장제스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하여 공산당과 비밀 협약을 맺은 덕분에 공산당은 장시를 빠져나가 광둥성까지 달아날 동안 국민당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뒤늦게야 홍군이 달아난 것을 안 장제스는 15개 사단을 급파하였고 장제스는 리쭝런, 바이충시와 합세하여 샹장 강에서 홍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나 홍군을 전멸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대장정 항목 참조.

4 관련문서

5 참고 문헌

  • 모택동 대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다큐멘터리 중국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 마오쩌둥 평전, 로스 테릴
  •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상, 장융, 존 핼러데이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1. 따지고 보면 근거지도 불안하고 유격전 위주였던 홍군 입장에서 상대 지휘관(장교)를 잡으면 둘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풀어주던가 죽이던가. 먹고 살기 위해서 입대하는 경우가 태반이던 일반 병사들이야 회유한다 쳐도 나름 지식인에 가까운 장교들이 쉽사리 전향하지는 않으니까.
  2. 독일인.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코민테른 대표로 중국공산당에 파견 나와 있었다. 코민테른의 권위를 내세워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대장정 쭌이 회의 이후 실권을 상실한다.
  3. 중국국민당의 군사고문이 독일인 한스 폰 젝트 장군이었고, 중국공산당의 정치고문도 역시 독일인 오토 브라운이었다는 점에서 독일인들의 싸움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4. 이런 태도를 가리켜서 교조주의라고 한다.
  5. 냉전 시대 공산권을 분열하게 했던 중소분쟁의 씨앗은 이때부터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토착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현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열면 "러시아 혁명때 볼세비키는 이렇게 했다!", "소련공산당의 역사를 보면 어쩌구 저쩌구...", "코민테른의 지시다"식으로 무조건 소련을 추종하는 소련유학파와 이들을 일방으로 후원하는 소련에 강한 반감을 품는다.
  6. 간단히 말해, 가난한 농민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족과 함꼐) 농사지을 수 있는 땅 한 뙈기'를 갖는 것이었고, 농민을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혁명운동(대표적으로 러시아의 인민주의 등)은 이러한 농민의 욕망을 반영하여 토지개혁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토지개혁은 '소수의 지주-다수의 빈민 소작농'으로 구성된 사회적 관계를 '다수의 소규모 자영농' 으로 재편성하는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사회적 모순의 근본적 원인인 소유 관계 자체를 재편성하지는 못하고 단순히 소유 구조를 개선한 것에 불과하다. 즉, 점진적인 현실적 개선이기는 하나,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궁극적인 목표일수는 없는 것.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보듯 대다수의 농민들은 토지개혁까지는 환영했지만, 토지 개혁 이상으로 소유권을 재규정하려는 시도에는 매우 큰 거부감을 보였다.(러시아 혁명에 대한 농담을 상기하자. 착한 공산당원들이 우리에게 땅을 나눠주었는데, 나쁜 볼셰비키들이 와서 집단농장 만든다고 다시 그 땅을 뺏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