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상하이 사변

(1.28 항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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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차 상하이 사변은 1932년 1월 2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탈한 일본 제국만주국을 설립하고 만주의 항일 세력을 일소할 시간을 벌기 위해 벌인 침략 행위이다. 중국에선 1.28 항전이라 부른다.

2 배경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천황과 내각의 재가도 받지 않고 류타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장쉐량의 오판에 힘입어 순식간에 만주를 점령한 바가 있었다. 만주사변을 주도해낸 관동군 과격파들은 만주를 아예 중국에서 분리하여 괴뢰국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본국은 중국의 만주에 대한 명목상 주권을 인정하자는 입장이었지만 이런 과격파 일당들은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본국의 말 따위는 듣지 않았다.(...) 이들은 장쉐량의 정적인 만주 구파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데려와서 만주국을 수립하려 했는데 벌건 대낮에 눈뜨고 영토를 침략당한 중국의 반발과 국제사회의 이목을 의식하여 이를 바로 추진하기 어려웠다. 이에 일본은 만주국 수립 과정에서 세간의 이목을 돌려보기 위해 유럽 열강의 이권이 직접적으로 연결된 상하이에서 사고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3 발단

당시 상하이는 세계 15대 도시, 아시아에서 2번째로 큰 경제대도시였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이 조계지를 설치하고 막대한 양의 자본을[1] 투자한 곳이었다. 일본이 원하는 이목집중이란 과제를 달성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마침 시기도 적절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벌어지자 상하이의 언론들이 일본 천황이 안타깝게 죽지 않았다고 보도하며 반일 기사들을 내보냈는데 이것이 상하이의 일본 거류민을 비롯한 일본을 크게 자극한 것이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개입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또 한번의 사고를 조작하게 되니 1932년 1월 8일 상하이 총영사관 소속무관인 다나카 류키치 소좌가 괴한들을 매수하여 일본인 승려들을 습격하게 한 것이었다. 승려 한 사람이 죽었고 나머지 네 사람도 부상당하자 흥분한 일본인 2천명이 폭동을 일으켜 공장에 불을 지르고 중국 경찰과 대치하여 중국 경찰 2명과 일본인 1명이 사망했다. 상하이 시장 우톄청은 이에 대해 사죄를 표명했다. 사실 다나카 류키치 소좌의 테러 사주의 배후엔 관동군의 이타가키 대좌가 있었다. 그들의 작전을 주효하여 상하이 거류민들과 일본 우익 단체들은 중국에 대해 자위권을 행사하라고 소란을 피워댔고 육군이 만주에서 신나게 승전보를 올린 것을 본 해군도 배가 아파서 이번엔 해군이 나서야 할 차례라고 전쟁을 선동했다. 일본은 거류민과 선박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상하이 주둔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지나파견함대에 항공모함, 수뢰전대, 해군 육전대를 더 붙여주었다. 일본 해군은 상하이 앞에서 무력시위를 감행하며 중국 선박들을 마구 나포했다.

일본군이 이런 도발을 부리기 시작하자 중국도 가만있질 않았다. 상하이는 차이팅카이 장군의 19로군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장제스의 직계부대는 아니었지만 전투력이 강한 정예부대로 광둥파에 소속되어 있었다. 차이팅카이는 60사단, 61사단, 78사단을 상하이에 투입하여 국제공동조계를 포위했고 참호와 토치카, 지뢰지대를 건설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본 제1파견함대 시오자와 고이치 소장은 1월 28일까지 방어시설을 철거하고 병력을 뒤로 물릴 것을 요구했는데 일본이 과거 지난 사건 등에서 보인 바와 같은 전형적인 기만술책이었다. 이미 시오자와 고이치 소장은 뉴욕 타임스 기자인 헬릿 어벤드에게 중국이 군대를 물리든 말든 11시부터 공격할 것이라 자랑했고 어벤드 기자는 이를 미국 총영사에게 보고했지만 미국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일본군은 오후 11시 30분부터 장갑차를 앞세워서 공세를 시작했다.

4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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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중인 국민당 19로군

중국군은 3만 5천명, 일본군은 6천명이었으나 일본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함대와 비행기를 비롯한 막강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오자와 소장은 4시간 안에 상하이를 점령할 것을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19로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일본군의 함포사격과 폭격에도 일본군 해군육전대는 19로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일본군은 이때 민간인 구역에도 마구 폭탄을 퍼부어서 국제여론의 비판을 받았으며 시오자와 소장은 아이살해자란 욕을 먹었지만 자신이 더 많은 폭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고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일본군의 공격에 난징 정부도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하였다. 상하이는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상하이를 잃으면 수도 난징도 위험한데 이는 중일전쟁 당시에 적나라하게 증명된 바가 있었다. 그런 전략적 필요 외에도 중국 전체가 반일 시위로 들끓고 있었고 일본의 침략에 더 이상 소극적인 대응을 하는 것은 정권에 위협이 될 판국이었다. 장제스는 1월 29일 자신의 직속부대인 2사단을 보냈으며 2월 14일에 장즈중에게 독일식으로 훈련을 받은 최정예 5군 소속 87사단과 88사단을 주었다. 여기에 교도연대, 세무경찰연대가 증파되어 중국군은 5만명으로 불었다. 이들이 가져온 독일제 중화기들은 상하이 방어에 큰 보탬이 되었다. 장제스는 일본이 장강을 따라 올라올 가능성을 고려하여 정부기관을 뤄양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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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이 상황에서 일본군은 이게 다 중국군이 선제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라고 적반하장을 시전해댔다. 시오자와 소장은 해임되고 후임으로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이 임명되었으며 함공모함 2척, 순양함 4척, 구축함 4척, 해군 육전대 7천명을 증파했다. 일본군은 2월 2일 다시 총공세를 감행했으나 중국군은 이를 또 방어해냈다. 이를 본 노무라는 육전대와 해군 만으로 중국군을 이길 수 없으니 육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1932년 2월 9일 일본군 9사단과 24혼성여단이 파견되어 일주일 후에 우쑹 해변에 상륙했다.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중국군에게 후퇴하라는 통첩을 보냈으나 중국군은 단호히 거부했다. 2월 20일 육군이 가세한 3번째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해군의 치욕을 씻어주겠다고 득의양양하던 육군도 중국군의 저항에 막대한 피해만을 입을 뿐이었다. 노무라는 피해가 궤멸적인 것을 보고 이틀만에 공세 중지 명령을 내리는 한편 다시 증원을 요청했다.

교전 중인 국민당 헌병대

일본은 중국군의 놀라운 분전에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 등의 주장으로 2월 24일 1사단과 14사단을 증파하고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상하이 파견군을 창설했다. 2월 29일 상하이 파견군은 상하이 북쪽에 상륙했고 중국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3월 1일의 4번째 공세에서 결국 중국군 방어선을 붕괴되었다. 특히 배후를 공격당한 중국군 5군은 와해되어 20킬로미터나 후퇴해야 했다. 중국군의 피해는 막심하여 전병력의 반 이상을 잃었다. 이 패배에는 중국 지도부의 분열도 한몫했다. 장제스는 상하이 항전의 주역인 19로군이 광둥파벌인 것을 껄끄러워하고 있었으며 병력을 증파했다가 1931년처럼 공산당이 뒤통수를 칠 것도 두려워했다. 게다가 장제스와 왕징웨이 모두 싸움을 너무 확대해선 안된다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모두 경제와 군사적인 대국인 일본과의 전면전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게다가 상하이에 너무 주력하다간 이제 막 세워진 난징 정부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결국 난징 정부는 추가 증원을 하지 않았다.

1932년 3월 3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열강들의 중재로 중일 양국은 정전에 합의했지만 일본군은 협정을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감행했다. 3월 14일 영국 공사 램프슨의 중재로 중일 양국과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표가 만났지만 서로 병력을 먼저 철수할 것을 요구하며 대립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주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이 사건을 벌인 것이었으므로 막대한 배상금이나 상하이의 할양을 요구하진 않았으며 중국군의 상하이 철수, 상하이에 추가적 방어시설 설치 금지 등을 요구했다. 난징정부는 이를 받아들였고 크나큰 국민적 저항에 부닥쳤다. 중국에선 일본과의 전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국민당과 난징 정부는 매국노라고 비난받았지만 일본과 싸울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대의명분만 앞선 무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요구였다.

5 결과와 여담

한달간 벌어진 싸움에서 일본은 9만명의 병력과 군함 80척, 항공기 300대를 동원했으며 공식적으로 634명의 전사자와 1791명의 부상자를 냈다. 중국군은 10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공식적으로 1만 3천명의 피해를 냈는데 중국은 일본군이 최소 5천명의 피해를 냈다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그 넓은 만주에서 일본군은 500명도 안되는 전사자를 냈는데 상하이의 중국군은 만주의 50만 대군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전과를 올린 셈이 되겠다.

일본은 상하이에서 깽판을 치는 동안 만주국의 수립에 성공하였고 만주를 괴뢰국화하였다.

3월의 4차 공세에 대해서 말이 있는데 카와시마 요시코가 쑨커를 꾀어서 차이팅카이에게 일본군 상륙지점에 대한 거짓정보를 주어 교란시켜 일본군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중일전쟁의 저자인 권성욱의 경우에는 이를 낭설이라고 주장했다.

일본군은 상하이 점령을 기념하여 훙커우 공원에서 행사를 열었는데 부왘을 울려라 이때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폭탄이 날아들어 시라카와 대장 등이 요단강을 건너고 많은 일본군의 거물들이 중상을 입게 된다.끄아악 이에 감명받은 장제스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1차 상하이 사변에서 큰 공을 세웠던 19로군은 처우에 불만을 품고 1933년 11월 푸저우에서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압된다.

이후 중일관계는 히로타 고키 등 대중유화론자들이 일본의 대중정책을 주도하면서 한동안 완만해지지만 1937년에 일본인이 초식동물이라고 주장하던 똥별 하나가 깽판을 치면서 사고가 터지는데(...)

6 참고 문헌

  • 중일전쟁(권성욱)
  • 장제스 평전(조너선 펜비)
  1. 영국이 5억 3400만 위안, 일본이 3억 8천만 위안, 미국이 1억 6300만 위안, 프랑스가 1억 300만 위안을 투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