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300px
300px
섬네일을 만드는 중 오류 발생: 파일이 없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강우규김구김규식김좌진
김창숙민영환서재필손병희
신익희쑨원쑹메이링안중근
안창호여운형오동진윤봉길
이강년이승만이승훈이시영
이준임병직장제스조만식
조병세조소앙천궈푸천치메이
최익현한용운허위박정희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대장부가 집을 떠나면(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대한민국독립운동가. 호는 매헌(梅軒).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청춘과 스스로를 바친 민족의 위인, 영웅.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일제 고위급 인사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몇 안되는 의거자.
민족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온몸을 불살라 가장 밝은 빛을 비추어 준 영원한 청년 의사.

1 훙커우 의거 이전

1908년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다.
글자를 몰라 아버지의 묘소를 찾지 못하는 농부[1]를 보고 교육에 뜻을 가져, 월진회를 조직, 야학과 강습회를 열어 문맹 퇴치 및 계몽운동에 힘썼다. 참고로 월진회는 설립초기에는 계몽운동조합으로 운영되었지만, 현재는 농촌체험마을 사업이나, 마을 도서관 건립운동, 윤봉길 문화 축제 등을 추진하며 여전히 활동 중이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우진회란 이름으로 존속했지만 1946년에 다시 월진회로 환원했다. 현재 공식 명칭은 초대 회장이던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매헌윤봉길월진회로 쓰고 있다. 윤봉길은 이후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만주 등의 지역에서 갖가지 사회 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 애국단에 소속되었다. 칭다오에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만주사변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라면서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와 만났다고. 이때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라고 부탁했다.[2]

1932년 4월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했다.

2 훙커우 의거


1932년 4월 29일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승리로 장식한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에게 굴욕을 안기고, 상하이 훙커우(홍구)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일왕, 쇼와 탄신기념 행사와 전승 기념 행사를 가진다. 전날 구파 백정기 의사도 나름대로 계획했지만 입장권을 얻지 못해 실패했으며, 백 의사는 그 이듬해 중국 주재 일본 공사였던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다 실패, 이시하야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효창공원에 나란히 묻혔다.

거사 얼마 전에 있었던 이봉창 의사의 의거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은,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이외에는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이에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물통으로 위장한 특수 폭탄을 사용했다. 이때 투척했던 폭탄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다. 도시락 폭탄은 자폭용(!)으로 들고 갔지만 불발로 알려져 있다.[3]

nh_200806mag_122_5.jpg

파일:FB IMG 1474730765919.jpg

다만 체포된 후 조서에서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

"29일 아침 자동차를 타고 신공원(훙커우 공원)으로 가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보자기를 찢어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뚫은 것은, 폭탄을 보자기에 싼 채로 던지려고 폭탄의 발화용 끈을 당기기 위해서였다. 상황을 보니 도저히 2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다. 물통 모양 폭탄에 끈이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하여, 도시락 상자 폭탄은 땅 위에 내려놓고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것이다."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자결하여 중일 간의 분노를 고조시키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윤봉길 의사의 조카 윤주 매헌기념관 관장은, 자살용으로 들고 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의거로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河端貞次)는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인수분해되고, 상하이 일본군 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부상을 입은 후 상처가 악화되어서 죽었다. 상하이 공사 시게미츠 마모루와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村井倉松)는 중상을 입었으며,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 켄키치(植田謙吉)는 왼쪽 다리를 잃고, 해군중장 제3함대 사령장관 노무라 키치사부로(野村吉三郎)는 오른쪽 눈이 날아가 애꾸가 되었다. 이 때문에 노무라는 예편 후 외교계로 전향했다.

여기서 민간인이 휘말렸다는 주장이 있으나 피해자로 기록된 민간인 신분인 2명은 각각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와 일본 거류민 서기장 토모노(友野) 뿐이다. 즉 일제와 무관하게 구경하러 온 민간인이 죽었다는 말은 거짓이다. 애초에 철저한 검열이 있던 자리의 귀빈석에 아무 연고도 없는 민간인은 있을 수 없다.

이 거사에 숨은 조력자가 있으니 바로 미국인 선교사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그는 자신의 자동차 요인석에 윤의사를 태우고 직접 홍커우 공원으로 운전했다. 피치 선교사는 후에 욘 라베와 함께 난징학살에서 중국인들을 구했다.

2.1 몇 시간밖에는 쓸 수 없는 시계

파일:Ui3p4ti.jpg
이때,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걸 알고 있어서 김구와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새로 산 시계김구에게 주고, 김구의 낡은 시계로 바꿔 팔에 차고 갔다고 한다. 이 때 김구에게 한 말이 정말 명언이다.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또 식장에 가는 길에 김구에게 남은 돈을 다 주었는데, 김구가 "돈 좀 가져가면 어때서 그렇소?"라고 묻자 윤봉길 의사는 "자동차 값 다 치러도 5~6원은 남을 정도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참고로 당시 소학교 교사 월급이 20원이었다.

현재 이 두 시계는 효창공원백범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3 최후

이렇게 일본 군민 관료들을 싹 날려버린 건 좋았으나, 앞서 말한 도시락 폭탄의 불발로 결국 붙잡혀 순국했다. 시신은 봉분도 없이 모처에 암매장됐는데, 훗날 김구의 지시로 박열 의사가 수습했다.

1994년에 일본의 시민 운동가인 야마구치 다카시가 펴낸 <윤봉길 암장의 땅, 가나자와에서>라는 책에 의하면, 사실 일본군은 윤봉길을 현장에서 공개 처형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오히려 윤봉길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고 일본군이 침략군이라는 이미지가 심어질 수 있을 것을 염려해서, 일본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이시카와카나자와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했다고. 어쨌든 이때 윤봉길 의사의 나이는 25세. 그야말로 짧고 굵게 살다 갔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파일:Attachment/1110011577.jpg
455px
최후의 모습.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윤봉길은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후 숨을 거두었다. 사진에 보면 일부러 윤의사에게 흰 천을 둘러 미간을 쏘고 붉은 피가 나오게 만든것은 일장기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 카나자와에서 이른 아침 사형이 집행된 데에 대해서 윤봉길 의사 의거 당시 중상을 입고 숨진 육군 사령관 시라카와의 세력 근거지에서 그가 병상에서 사망한 시각에 형을 집행한 것이란 설이 있다. 이렇듯 일제는 순국마저 욕되게 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계단에다가 방치해 놨는데, 지나가면서 윤봉길을 밟으며 가라는 뜻이다. 반성은 커녕 변명만 늘어놓는 군국주의자들의 실체.

이후 카나자와의 노다야마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광복 직후인 1946년에서야 대한민국으로 유해를 옮겨올 수 있게 되었다.

해당 지역 인근에는 윤 의사 기념비와 총살을 당한 지역의 비석이 설치되어 있다. 링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4 반향

이 사건 이전에는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일제의 앞잡이'로까지 여겼고 이 때문에 만보산 사건(완바오산 사건) 같은 한중 대립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의 의거로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뀐다. 반일 감정에 휩싸인 중국인들이 조선을 항일 동지로 생각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특히 당시 중국 대륙을 어느 정도 통치하고 있었던 장제스는 윤봉길의 의거 소식을 듣자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는 말로 극찬한 뒤 김구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진에서 보듯 나중에 장제스는 윤봉길의 거사에 장렬천추란 휘호를 써서 유족에게 전달해주기도 하였다.

5 비판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정치인 테러' 같은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한인애국단 활동의 성과 보고서 형식으로 출판된 '도왜실기' 서문에서 이승만은 "윤봉길의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의 연합을 가능케 한 사건이며, 카이로 회담에까지 이어지는 국제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즉, 윤봉길의 의거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결의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 자신이 철저한 외교론자였던 만큼, 국제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자 생각을 바꾼 모양이다.

박헌영은 윤봉길의 의거 정신 자체에는 높이 평가했지만 방법론에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 1932년 7월에 박헌영은 '상하이 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 그는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라고 보았으며,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 행위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보면 알겠지만 윤 의사의 의거에 대한 두 사람의 비판은 공통적인 부분이 있는데, 바로 '폭력을 동원하면 오히려 적에게 이로운 명분이나 이미지를 씌워줄 수 있다' 는 것이다. 하지만 상술하였듯 이는 무고한 민간인도 휘말리게 하는 막장 테러의 경우나 그렇지 윤 의사의 의거는 무고한 일반인들의 피해는 피하고 정확하게 일본군 거물들만을 노린 것이였고 이렇게 사리판단을 정확히 행한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4]

만약 윤 의사가 IS같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행했다면 (이승만이나 박헌영이 주장하던 대로) 테러에 휘말린 중국인들도 한국인을 좋지 않게 보았을 것이며 중국 국민당이 그의 소속인 임시정부에게 지원을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즉 윤 의사의 의거는 일반적인 테러리즘과는 분명히 다른 선이 있으며 두 사람의 비판은 이러한 점을 간과한 오평인 것이다.

재미있게도 윤 의사의 의거를 동일하게 비판한 저 두 사람 모두 동일하게 끝이 좋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존재한다(...)[5].

6 사진 논란

한 때 윤봉길 의사가 의거 후 연행되는 사진이 진짜냐 가짜냐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위의 연행되는 사진은 日 아사히 신문의 보도사진인데, 상하이 타임즈 등의 중국 신문은 윤봉길 의사가 의거 직후 수십 명의 일본군에게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질질 끌려가 차에 '던져'졌다고 보도되었다. 즉, 일본중국 양측의 보도내용이 다르기에, 이 사진 속의 인물이 정말 윤봉길 의사가 맞는가?가 논란이 되었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마무리한 시점에서, 주변 군인들(내지 중국 군인-민간인 포함)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 중국 상하이 타임즈 쪽의 보도가 신빙성이 높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가설을 채택하여, 사실 사진 속의 인물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고, 일본군 측이 자신들의 신사적인 대우를 어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체포하여 연행한 것을 찍었다고 방영했다. 해당 방영분에서는 실제 중국 측의 신문도 자료로 제시되었다.

파일:/image/020/2007/02/26/200702260104.jpg

7 그 외

의거에 실제 사용된 폭탄은 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었음에도, 불발된 도시락 폭탄이 왠지 모르게 '윤봉길 의사 전용 유니크 아이템' 이미지가 더 강해서, 어린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던 시절 도시락을 던지며 윤봉길 의사 흉내를 내는 장난을 종종 하곤 했다.

파일:TcPSAIT.jpg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폭탄은, 독립운동가김홍일 장군[6]이 제작한 것이다. 백범일지에 왕웅이라는 가명으로 나오는 김홍일 장군은 이봉창 의사가 사용한 폭탄도 제작했는데, 폭탄의 위력 부족으로 이봉창 의사가 실패하자 안타까워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사용할 폭탄을 열심히 제조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성능 실험에서는 성공적으로 폭발했으나, 도시락 폭탄은 터지지 못했다.

정확히는 누가 제작했는지 모른다. 독립운동의 경우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일제에 쫓기는데 기록 남겼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게 대부분이 독립운동가들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의열단의 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김원봉이 북으로 망명한 것도 이유지만 즉, 독립운동은 절대적인 객관적 기록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래서 이봉창, 윤봉길 폭탄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혼선을 빚고 있다.

이에 대한 설은 2개가 있다. 하나는 김홍일이 제작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김홍일이 폭탄제조자 왕백수(왕바이수)를 소개시켜주었다는 설이다. 결론은 둘 중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나 김홍일이 이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는 것은 자명한 듯하다.

사족으로 이 분의 장손녀인 윤주경 씨는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인수위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현재는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직중이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가 있고 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인 윤모순(模淳)과 윤담(淡)에게 남긴 유서. 보물 568호로 지정되어 있다.

파일:FB IMG 1474731386099.jpg
1949년 4월 29일, 충남 예산에서 거행된 '윤봉길렬사비' 제막식에 참가한 김구와 윤봉길 유족들.

위키백과에서 저격수로 분류되어 있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스나이퍼가 아니고, 당시뿐이 아니라 현재에도 높은 사람을 어떤 형식으로든 처치하면 대개 '저격'으로서 분류된다. 여기서의 저격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는 뜻이 아니다. 저격(狙擊)[7]의 한자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

2014년 7월 3일 진수한 손원일급 잠수함 5번함이 윤봉길함으로 명명되어 윤 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게 되었다.

링크 가끔 윤봉길의 폭탄투척 직전이 촬영된 사진이 있다고 애기하는 몇몇 사이트들이 있는데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진을 보면 윤봉길이라 추정되는 사람이 단상 앞에 위치해 있는데 실제로는 단상 앞이 아니라 뒤에서 폭탄을 던졌다. 게다가 사진을 보면 중절모를 쓰고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는 발언은 단 한마디도 없다. 고로 이 사진에 찍힌 사람은 윤봉길이 아니라 그냥 다른 행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이 사진의 인물이 진짜 윤봉길이라 단정하면 다른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이 남자의 옷차림이 위의 조작논란이 일고 있는 사진의 인물의 옷차림과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중절모까지 손에 들고 있어 확인사살.

8 롯데그룹과의 관련 논란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현재의 롯데그룹과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는 시게미츠 하츠코라는 일본인 여성과 1945년에 결혼했는데, 시게미츠 하츠코는 시게미츠 마모루조카라는 설이 있다.. 시게미츠 마모루는 주중공사였던 1932년,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맞아 다리를 잃었으며 그후 의족을 사용했다. 2차대전 항복문서 조인식에 일본 외무대신으로 참석해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인물이며, 도쿄 전범 재판에서 형을 확정받은 A급 전범이었으나 한국전쟁 와중에 사면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 내에서 굳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한국 이름도 안쓰고 시게미츠란 일본 성을 쓰는데, 일본 국적 취득 당시 아내 시게미츠 하츠코의 성을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시게미츠 하츠코는 신격호 회장의 아들인 신동빈, 신동주의 어머니이다.

한편 롯데그룹에서는 이 사실에 대해 그동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다가', 2015년에 경영권 다툼으로 롯데그룹과 일본과의 연관성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면서 한국내 여론이 악화되자 이 부분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롯데측은 오히려 시게미츠 하츠코가 남편의 성을 따랐다고 주장하는데 근거 자료를 내세운 것은 아니기에 단순히 이미지메이킹/언론플레이인지 아니면 정말 전범 집안과의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정말 진실인지는 정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 알 수 없는 상황.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시게미츠 마모루, 신격호 항목 참조.

사실 시게미츠 하츠코는 2015년 현재 멀쩡히 살아있고, 경영권 분쟁 당시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국내 기자들과 대면한 적도 있다.

시게미츠 하츠코가 명확하게 사실을 확인해주면 논란이 결론이 나겠지만, 특별히 부인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롯데그룹측의 해명과는 별도로 아직 명확한 진실은 알 수가 없다.

9 기타

  • 1992년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방송에서 특집 드라마로 만들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상물에서는 자주 나왔지만, 윤봉길 의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이 작품뿐. 제목은 문자 그대로 <매헌 윤봉길>. 윤봉길 역에 김상중, 김구 역은 정욱이 맡았다.
  • 1986년에는 광복절 특집 드라마로 <그의 아내>라는 작품이 방영되었다. 윤봉길의 아내 배용순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

10 관련 문서

  1. 안습인 게 글을 읽지 못하니 근처 묘소들에 꽂힌 나무 말뚝들을 모조리 뽑아와 윤봉길 앞에 내려놓고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러자 윤봉길은 "어떤 것이 당신의 부친 묘에서 뽑아온 것인지 기억하시오?"라고 촌철살인을 날렸고 농부는 멘붕했다고 한다.
  2. 배경식 교수는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와 그 개정판인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을 통해 윤봉길 의사가 김구를 찾아간 것을 최대의 수확이라고 주장했다.
  3. 이는 KBS 스펀지 197회 방송분에서도 소개되었다.
  4. 한인애국단의 의거 전에는 임시정부는 자금줄이 끊겨 김구가 그림을 그려 파는 돈으로 조직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판국이었으나 이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것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다.
  5. 이승만은 4.19 혁명 후 대통령 직에서 하야한 뒤 이국에서 객사했고 박헌영은 혹부리 할방구에게 8월 종파사건때 숙청되었다.
  6. 훗날 대한민국에서 3성 장군까지 진급
  7. 노리고 겨냥하여 총을 쏘거나 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