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육신적 쾌락보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영원한 쾌락에 모든 것을 걸은 쾌남아
"나는 赤誠[적성]으로써 祖國[조국]의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回復[회복]하기 爲[위]하여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의 一員[일원]이 되야 敵國[적국]의 首魁[수괴]를 屠戮[도륙]하기로 盟誓[맹서]하나이다."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사나이
1 개요
이봉창(李奉昌,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히로히토 암살 미수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와 의거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도 얻었다. 이렇듯 본래는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좌절과 순응을 잘 보여주는 듯한 사고를 갖고 있었던 듯하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각종 차별을 받으면서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히로히토의 즉위식 당시 그가 9일간 유치장에 갇혀 있었던 것이 결정적 계기였던 듯.[2]#, #.[3]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李太王) 전하(殿下)의 옥안(玉顔)을 뵌 적이 없으며 경술병합(庚戌倂合) 후 신일본인(新日本人)이 되어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성안(聖顔)을 뵌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 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聖顔)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봉창은 순수하게 덴노의 얼굴이 보고 싶어(…) 즉위식에 참석하려 했건만, 일본 경찰의 수색 도중 한글이 쓰인 편지가 발견되어 연행되었다. 정작 편지에는 별 내용이 없었으나 출신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는 깊은 회의를 느꼈다고.
"일부러 돈까지 써 가며 교토의 유치장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일본 국민의 자격으로 천황(天皇) 폐하(陛下)를 뵈러 온 것이 아닌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역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천황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31세에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알게 되고 상하이에 도착하나 처음엔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을 받았다. 워낙 일본인같은 제스쳐 그리고 능숙한 일본어 때문에[4] 임시정부의 직원들로부터 '왜영감'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 별명을 증명하듯이, 일본인 사회나 마찬가지인 상해의 홍구지역에 거주한지 1년도 안 되었는데도 일본인 지인이 수 없이 많았으며, 심지어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까지 지인으로 두었으며, 일본 영사의 내정까지 무상으로 출입했을 정도. 심지어 이봉창이 의거를 하러 일본으로 갈 때 부두까지 나와서 잘 갔다오라고 마중을 나온 일본 경찰까지 있었다. 김구는 이봉창 열사와 여러 번의 질문과 대화를 통해 진심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구는 이동녕과 조소앙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 당시 이봉창의 행동을 보면 진짜 일본인같았던지라 말 다한 셈.
임시정부 직원들과 함께 여관에서 한 술자리에서 왜 "덴노를 처단할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말할 정도로 대범한 모습을 보였으며, 자신에게 밀정이라고 의심을 하거나 비판적인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직접 사와 대접까지 하면서 대인배스럽게 호탕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때, 이봉창 열사는 자신이 왜 덴노를 암살할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나는 작년에 도쿄에 있을 때 하루는 일본 임금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구경하러 가서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그런데 임금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이때 가슴이 일렁이고 온몸의 피가 솟구쳐올라 '내게 무기만 있다면 큰일을 한번 해볼 텐데!!' 하고 생각하던 중에 덴노가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버려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이 취중진담이 덴노를 암살한다는 엄청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봉창 열사의 취중진담이 있었던지 며칠 후, 이봉창 열사는 김구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김구와 이봉창 열사의 각별했던 모습이 나온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일리 법조계 중흥여사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을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식으로 한인 애국단에 가입한 시기는 1931년 12월 13일. 그리고 백범일지에는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를 향해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며 위로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동차 위에서 깊이 허리를 숙이고 떠난다.
일본으로 잠입했는데 얼마나 치밀했는가 하면 도쿄에서 숙박했다가 거사 바로 전날 도쿄를 벗어나 가와자키시에서 숙박했다. 일부러 숙박장소를 도쿄에서 외곽으로 변경한 이유는, 덴노의 행차 전날 밤부터 각 치안기관에서 도쿄 관내의 음식점, 여관, 유곽, 절, 빈집 등 공공장소를 검문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 일본 경찰도 이봉창 열사의 치밀함에 놀랐을 정도.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열사는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인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 1개를 던졌다. 헌데 정작 의거 장소에서 떨어진 사쿠라다몬(桜田門) 의거로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이봉창 열사는 여러 대의 마차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덴노가 탄 마차인지 알지 못했다.[5] 결국 그렇게 던진 폭탄 하나는 다른 마차를 맞췄고, 그 폭탄은 마차를 끌던 말과 그 말에 탄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다.[6] 결과적으로 히로히토 암살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폭탄 투척 이후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 열사가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열사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했으나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이봉창 열사는 자수를 했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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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8일 거사 직후 체포된 이봉창 열사.
이봉창 열사에 대한 공식 취조는 1월 8일 오후 3시 50분에 시작되었다. 경시청 형사부장 자리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차단된 상태에서 진행했으며 검사가 직접 취조했다. 아래의 글은 검사가 직접 작성한 본문을 그대로 번역, 옮긴 것이다.
범인은 언어가 명석하여 일본인과 다름이 없고, 태도는 태연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띄우고, 이런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는 관념은 털끝만큼도 없다. 1928년(소화 3년) 11월에 거행된 즉위식을 참관하기 위해 교토로 갔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10일간이나 유치된 것에 분개하여 사상의 변화를 일으키고 1930년 11월에 상해로 가서 중국인 경영의 레코드회사 영창공사에서 근무하고, 백정선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1931년 12월 23일에 도쿄에 왔고, 1932년 1월 4일에 백정선으로부터 은행을 통해 다시 100원의 송금을 받고, 7일 아사히 여관을 떠나 가나가와 현 가와사키의 유곽에서 묵고, 8일 오전 8시에 전차로 하라주쿠에 도착하고, 검색이 심해 거사에 불리함을 알고 전차로 요쓰야 역으로 가고, 다시 경시청 앞으로 가서 덴노에게 폭탄을 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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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가려진 채 일본 경찰과 함께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이봉창 의사.
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고 9월 30일 오전 9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대역죄(大逆罪).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백범 김구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전에 이봉창 의사의 의거 실패를 기억하여 제대로 터지는 폭탄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하나로 무시무시한 전적을 올렸다. 참고로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과 윤봉길이 의거 시 사용한 폭탄 모두 상해에 있는 병공창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당시 창장은 자기네가 빌려주었던 폭탄 화력이 미약하여 암살 미수에 그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윤봉길에게는 시험을 거듭한 폭탄을 성심성의껏 제조하여 20여 개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이 때 폭탄 제조 의뢰를 한 것은 김구의 지시를 받은 김홍일 장군으로, 공장 측의 배려로 폭탄을 김 장군의 집으로 운반해주었다. 김홍일 장군이 이봉창, 윤봉길 의거 당시 폭탄을 제작했다는 설이 있는데 오해다. 정확히는 윤 열사의 폭탄은 왕바이슈가 제작을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둘다 오류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기록을 남길 수가 없다. 기록은 후일 일제가 증거로 쓸수있기 때문이다. 괜히 <미션임파서블>에서 자료를 지우는게 아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이나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한다. 그래서 이 폭탄 제조에 대한 썰은 총 2개가 있다. 하나는 김홍일이 직접 제작했다는 썰이고, 다른 하나는 김홍일이 폭탄제조자 왕바이슈를 주선했다는 점. 그런데 김홍일 장군이 대만대사로 활동하던 중에 왕바이슈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이때 이 왕비아슈가 이봉창 열사의 폭탄을 제조해주었다고 하였기에 일반적으로 김홍일이 중국 병기공창 주임으로 있을동안 왕바이슈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김구의 요청에 따라 왕바이슈와 김구를 연결해주었고, 폭탄제조에 필요한 화약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광복 후 김구가 1946년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열사묘에 안장하였으며(참고로 이봉창 의사는 용산구가 고향),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 언론 보도
1932년 1월 10일 중앙일보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의거. 매우 비난하는 어조의 기사를 실었다.
당시 신문사 사장은 노정일. 일부에서는 이 기사를 실은 신문사 사장이 여운형이라는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있는데, 이 무렵 여운형은 감옥에 있었다.
여운형은 1932년 7월에 출옥하고, 지인들의 도움[7]을 받아 1933년 2월에 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되었고,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쳐서 창간되었다. 위키백과를 보더라도 1933년 2월 16일 여운형이 중앙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봉창 의거는 1932년 1월에 있었으므로, 저 사건은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를 맡기 전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 보도라는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 또한 조선중앙일보에 나왔다는 표현도 당시 쓰여진 다른 기사들과의 연장선에서 파악해야지 한 대목만 인용하고 그걸 근거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1932년 1월 10일 동아일보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의거. 동아일보 역시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는 어조의 글을 실었다.
당시 국내(조중동 해당 5번)에서는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매우 비난하는 어조로 썼다. #(단, 일본 사법성 발표의 인용인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원로 언론인이신 이혜복 옹(1923년 생) 말씀에 따르면 "그 당시 신문을 그렇게 쓰지 않으면 신문이 못 나간다. 총독부로부터 검열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되려 사건을 보도한 자체가 쾌거라는 의미. (검열시대엔 행간을 잘 읽어야한다) 이 분 말씀에 따르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총독부는 신문사들을 압박해서 독립운동가들을 '강도' 등의 표현으로 쓰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반면에 해외에 있어 총독부의 검열 대상이 되지 않았던 한인 신문사[8]들은 '통쾌한 의거였다'는 식으로 대서특필했다.
중국의 신문사인 <민국일보>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봉창이라는 한인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맞지 않았다(不幸不中)"라고 적는 바람에 이걸보고 눈이 뒤집힌 일본 제국이 군대를 동원해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예가 가와시마 요시코가 벌인 공작인 '일본인 승려' 스파이 사건. 그리고 이 기사를 실었던 그 신문사와 그 지역 일대에서 학살을 벌였다. 그걸 기념한답시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었는데, 그 때 참석한 참가자들 사이에는 때를 기다리던 윤봉길 의사와 폭탄 2개가 있었고...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윤봉길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4 모던보이
그의 '모던보이'적인 생활에 관해 다음과 같은 주장하는 책이 나온 적이 있다. #
이봉창은 여자와 마작을 좋아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다이쇼 13년(1924년) 4월 - 계집질과 마작으로 빚을 져서 용산역의 조차(操車)[9]과를 퇴직금을 얻을 목적으로 퇴직함. 쇼와 5년(1930년) 3월 - 가명을 '마츠이 카즈오'로 바꾸고 상경해 도쿄도 쿄바시구 미나미오다하라마치의 채소절임 가게에 취직한다. 7월에는 도쿄도 혼고구 모리카와쵸의 모리야 가방 가게로 전직한다. 쇼와 5년(1930년) 12월 - 중화민국 상하이직할시 민행로로 망명한다. 영창공사의 축음기 외판원으로서 일한다. |
이봉창이 정말로 여자와 마작을 좋아했을런지는 모르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했던말을 생각하면 시대를 관통하는 쾌남에다, 째째한 돈보다는 '쾌락'을 훨씬 좋아했던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바로 일왕을 처단함으로서 대한독립을 자신의 손으로 쟁취하는 영원하고도 궁극적인 쾌락.
5 후일담
한편 의거 이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친일파였다.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 여러 일본 고위층을 방문해 불경범인이 조선인인 것에 대해 송구스럽다며 사죄를 했으며 9일에는 친일단체 120명을 소집해 궁성 입구에서 직접 사죄를 또하는 짓거리를 저질렀고 국내의 친일 세력들은 1월 9일 서울의 요정 식도원에 모여 이봉창 의거에 대해 사죄하기로(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 하는 망나니 짓거리를 저질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저 사건을 자신들이 했다고 알렸는데, 그 결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각종 지원이 끊겨서 서예에 일가견이 있던 김구는 그림을 그려 팔며 힘들게 임시정부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윤봉길의 의거 이후로, 윤봉길의 의거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회생의 길을 얻고 남경중앙군관학교 분교에 조선인 훈련반도 보내고, 돈을 지원받아서 보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의 고위 관료들에게는 이 사건은 재앙이었다(...). 지금도 천황의 위치를 신성히 여기는 일본인데 과거 식민주의와 군국주의로 미쳐 돌아가던 그 당시의 일본에서 천황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위치는 압도적인 것이었는데, 그 천황이 암살당할 뻔했으니 발칵 뒤집힌 건 당연지사. 당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 사퇴하거나 해임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편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80년대 중순에 이봉창 열사 미망인이 별세한 소식이 작게 보도된 바 있다. 남편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면서 당시 보도에선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보통 그러듯이 매우 궁핍하게 살아가셨다고 한다.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받으며 연금이니 여러 혜택이 주어지긴 했지만...
외모가 배우 유해진과 상당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환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해진 주연의 열사 이봉창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
비슷한 인물로 조명하가 있다. 이쪽은 쇼와 덴노의 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10]를 독 묻은 칼로 찔러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국내가 아닌 타국(대만)에서 의거를 일으킨 점도 비슷하다.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인 배경식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봉창 열사의 최고 업적이라 함은 임시정부가 의열투쟁의 길로 나가게 한 것과 함께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뽑았다.
6 폭탄 이야기
이봉창 의사의 의거 때 쓰인 수류탄은 김홍일(왕웅)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봉창 열사에게 수류탄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도 김홍일이라고 한다. 그는 1931년에는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는 등 중국군의 병기를 관리했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는 2개의 폭탄을 준비했는데 1개는 왕웅을 통해 상하이 병공창에서 1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서 얻어온 것이라고 한다. 1개는 의거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자결용이었다.
이봉창 의사는 마미(麻尾)라는 수류탄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무게가 가벼워 멀리 던질 수 있고 휴대가 간편하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불발탄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폭발력이 다소 약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마미(麻尾) 수류탄
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 장교였던 나의 상식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 거리가 1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표적물을 보통 수류탄을 던져 가지고 실수 없이 명중시키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약간 구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보통 수류탄 대신에 마미(蔴尾) 수류탄을 구해서 이 동지한테 주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마미 수류탄은 보통 수류탄에 비해서 폭발력이 약하다는 것이 좀 단점이긴 하지만, 그 대신 중량이 가벼워서 멀리까지 던질 수 있는 데다가 불발탄이 없고, 또한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휴대하기가 간편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 수류탄을 도쿄까지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로 당시 김구 선생과 나는 보통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김홍일,『대륙의 분노 -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273쪽
- ↑ 맨 오른쪽 사진은 합성으로 밝혀졌다. 이봉창 열사의 얼굴 사진을 그림에 떼어 붙인 것. 의거 전 중간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 내용이 흐릿하여 알아보기 힘들자 왼쪽 사진에서 얼굴을 따와 만든 것. 잘 보면 턱선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결정적으로 큰 사진으로 보면 붙여놓은 티가 살짝 난다. 게다가 손과 수류탄은 펜으로 그려넣어 사진이 아니라는 티가 팍팍 난다. 합성인 게 아쉽긴 하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홍보로서는 쓸 만한 사진이라 할 수 있다.
- ↑ 히로히토의 즉위식은 1928년 11월 10일 이었고, 이봉창 의사는 11월 7일 부터 11월 15일 까지 구금되었다.
- ↑ 2번째 링크의 경우, 글 목록의 다른 글들은 꽤나 환빠스틱한(…) 내용들이니, 게시물 본문만 읽자.
- ↑ 거기에 임시정부의 멸칭이었던 '가정부(假政府)'라는 표현을 씀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 ↑ 흔히 대통령이 이동할 때, 대통령이 탑승한 것과 똑같은 자동차가 5대씩 이동하는 걸 생각해보자. 여담이지만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하려 할 때에도 비슷한 이유로 실패했다.
- ↑ 당시 타임지 기사에 따르면 이놈 말이 몸빵을 한 덕에 상으로 당근 1상자를 받았다고 카더라.
- ↑ 대표적으로 조동호가 그를 도와주었다.
- ↑ 대표적으로 미주에 있던 한인 신문사 신한민보.
- ↑ 열차를 편성하거나 다른 선로에 넣거나 나누거나 하는 일
- ↑ 고준황후의 아버지이며, 아키히토 덴노의 외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