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호헌조치

1 소개

4.13 護憲措置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1] 일체의 개헌논의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이었지만 결국 역풍을 불러일으켜 6월 항쟁을 점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2 배경

1985년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은 전두환 정권의 오만 방해와 갖은 술책에도 불구하고 각 대도시에서 선전하면서 야당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가 각계에서 터져나오면서 신민당은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하기에 이른다.

이런 범국민적인 직선제 개헌 요구에 못이겨서 결국 1986년 7월 30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과 야당인 신민당의 합의로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야의 입장은 팽팽했는데 민정당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정권연장을 위해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반면, 신민당은 국민적인 열망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해 합의점이 도통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며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에 분노하며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압박이 더해지자 결국 전두환은 위험을 느끼고 중대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3 4.13 호헌조치 발표

4월 13일, 전두환은 중대선언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망국을 타계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도움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 성장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였다. 이를 요약하자면

  • 여야가 합의해서 개헌을 하기를 바랐으나 야당이 하도 어거지를 부리니 합의가 안된다.
  • 고로 오늘부터 일체의 개헌논의를 중단하고 현행헌법에 따라 1988년 2월에 새 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2]
  • 개헌논의는 88 서울 올림픽 이후로 미룬다.
  • 대신 임기중에 지방자치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하는것을 검토하겠다.

한마디로 말해서 곧 올림픽도 하는데 개헌이야기는 모두 닥치라라는 이야기로, 정권 유지하기 위해 올림픽 핑계를 댄 것이다. 그러라고 개최하는 올림픽이 아닐텐데? 당연히 국민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간 발표였다. 개헌논의 중단에 대한 반발로 야권에서 주장하던 지방자치제 도입을 반대급부로 시사하긴 했으나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전두환은 1987년 1월 12일에 한 신년 국정연설에서도 여야가 합의해서 개헌을 하길 바라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 중대결단을 내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라고 이미 호헌조치를 암시한 바가 있었다.신년부터 야당과 국민에게 협박질

4 국민적 반발과 6월 항쟁

이 조치에 국민들은 반발했고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전두환 정부가 박종철군의 고문 사실을 은폐, 왜곡한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으로 향했다.

결국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전국 16개 도시에서 일제히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및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는 6.10 범국민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이 범국본 집행부들을 모두 체포하면서 집회는 거리시위로 바뀌었고 6월 항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국민적 저항에 견디다 못한 전두환 정부는 결국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으로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4.13 호헌조치가 전두환 정권의 명줄을 재촉한 자충수가 되어버렸던 셈이다.

사족이지만 명분으로 내걸던 지방자치제는 시도하려고도 안 했고, 6.29에서 노태우가 주장하던 1990년 중간평가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지방의회에서만 지방자치가 이뤄지는 수준으로 1991년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94년으로 계획되었던 지방단체장 선거도 미뤄져서 결국 1995년 지방선거가 돼서야 임기 3년짜리 지방자치가 시작되게 되었다.
  1. 원래 담화문 발표는 4월 12일에 있었던 거지만 그날 생방송으로 방송하지 않고 녹화를 떴다가 다음날인 4월 13일에 방송했다. 녹화방송으로 하루 늦춰 발표한 이유는 4월 13일에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2. 81년 8차개헌 당시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간선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니 직선제 개헌은 입다물고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소리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