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지방선거

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
1960년 12월 12일/12월 19일
/12월 26일/12월 29일
1991년 3월 26일/6월 20일1995년 6월 27일
1960년 지방선거1991년 지방선거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 개요

1991년 3월 26일과 6월 20일 2번에 걸쳐 치러진 한국지방선거. 투표율은 각각 55.0%, 58.9%를 기록하였다.

국내에서 31년만에 부활된 지방선거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실질적인 지방자치제를 통일 이후로 유예하는 내용의 제3공화국 헌법이 도입되고, 제5공화국에서는 지방의회를 재정자립도에 따라 설치하도록 했지만 결국 설치되지 못한 상태였다. 1987년 6월 항쟁에 따라 개헌이 될때 지방의회의 설치가 헌법에 규정되면서 지방선거가 부활되었다.

2 과정

오늘날과 달리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선출하는 날이 달랐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선출하지 않았다. 본래 1992년 6월에 단체장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경제에 미치는 부담을 이유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3년 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던 것. 노태우가 공약했던 중간평가 역시 1989년 이미 유야무야 되었다. 하지만 이런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91년 지방선거는 분명히 "중간평가"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여하튼 선거가 치러지기 직전 민자당은 거듭되는 날치기와 당 내분으로 지지율이 낮았던 상황이었고, 평화민주당을 확대 개편한 신민주연합당의 지지율도 그리 높지는 않던 상황이었지만 민자당과는 대체로 비슷한 수준, 제3당인 꼬마 민주당이 선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덕택에 당초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이 부진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한편, 지방의원 선거는 1961년 이후 기존의 시읍면단위[1]에서 시군단위로 행정 사무를 처리하는 제도가 도입되었으므로,[2] 부활되기 전과 달리 기초의원은 시군단위로, 광역의원은 시도단위로 선출했다.

기초의원선거는 3월 26일, 광역의원은 6월 20일 선출하였다. 참고로 3월 26일에는 선거일을 맞아 학교가 쉰다고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간 몇몇의 학생이 실종되는 일명 개구리 소년 사건이 일어나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또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5월에 일어나면서 선거 분위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3] 신민주연합당의 상징색은 초록색, 꼬마민주당의 상징색은 파란색이었다.

3 결과

기초의원 선거는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과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으로 당시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 지지율이 크게 저조했음에도 불구하고, 3당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한 지역 조직력과 저조한 투표율에[4] 힘입어 보수계의 우세로 나타났다. 시군구의회 260곳 중 190곳에서 보수계가 과반을 차지했고, 기초의원 4,333명 가운데 과반에 조금 못미치는 인원(2142명)이 민자당원이었고, 평민당은 785명에 그쳤다.[5]

이후 치러진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강경대군 치사 사건 및 잇달은 분신 정국으로 민자당이 열세일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선거 직전에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밀가루 봉변을 당하는 사태가 터지고 역시 기초의원 선거와 마찬가지로 투표율이 저조하게 나오면서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이 868석 가운데 564석을 휩쓸었고, 지역적으로도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었다.(단, 득표율은 40.6%에 그쳤다). 반면 평민당의 후신인 신민주연합당(신민당)과 민주당(1990년)(별칭 꼬마민주당)은 야권표 분열로 대패했다.

결과적으로 이 지방선거는 신민주연합당에게 꼬마민주당과의 합당 없이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결국 1991년 두 당이 통합하여 민주당(1991년)이 창당되었으며, 다음해 14대 총선의 결과는 민자당의 득표가 비슷한 상황에서 (통합)민주당의 득표는 29.2%로 7%를 더할 수 있게 되었다.[6]

3.1 군소당의 의미있는 성과

사실 꼬마민주당은 참패를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 선거인 13대 총선와 비교하면 득표율에서는 민자당이 결코 이득을 본 선거가 아니었던 것. 앞선 13대 총선에서 4당의 득표는 노태우의 민정당 34%, YS의 통민당 24%, DJ의 평민당 19%, JP의 공화당 16%였다. 그리고 이 상황을 그대로 대입한다면 3당합당으로 창당한 민자당은 34 + 24 + 16 = 74%의 어마어마한 득표율을 올려야했다. 그러나 실상은 지방선거의 특성상 무소속에 22.4%가 쏠리면서 민자당의 득표는 고작 40%에 그쳤다. 그리고 신민당은 21.9%로 고작 3%를 더 득표하며 부진했던 반면, 꼬마 민주당은 전국적으로 14.3%라는 혁혁한 득표를 올렸다. 옛 통민당 지자표의 과반 이상을 흡수한 것이다.

또한 꼬마 민주당은 양당의 쏠림 현상이 심각한 호남, 대구직할시,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모두 의석을 확보했다. 특히 인천, 충남에서는 각각 무려 3석, 4석을 확보해 민자당에 비해서는 매우 부족하지만 2당이 되었다. 다만 서울의 1석은 아쉬운 결과였다. 신민당은 서울에서도 고작 132석 중 21석을 확보하는데 그쳤으며, 수도권과 호남, 대전(2석), 경남(1석)을 제외한 전국에서 전멸했다.

한편, 진보정당인 민중당은 42명이 출마하여 상당히 높은 득표율을 확보했지만(선거구당 13.3%) 전국적으로 출마한 것이 아닌데다가 당시 광역의원 비례대표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강원도에서 광역 1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7] 전체 득표로는 0.8%에 그쳤다. 민중당은 14대 총선과 대선에서 백기완(무소속 출마)을 내세웠는데, 거의 비슷한 1%대를 득표하며 "재야" 세력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이후 제15대 대통령 선거까지 5년간 재야, 노동세력의 존재감은 거의 사라졌다.

3.2 눈에 띄는 후보들 - 최동원과 이선희, 그리고 허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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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직할시(현 부산광역시) 시의원 선거에서 당시 갓 은퇴한 야구선수 최동원이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정치의 강속구"라는 슬로건과 함께 꼬마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지역구는 서구. 하지만 큰 표차로 낙선했다. 최동원이 상도동계와 안면이 있었고 이전에 김영삼이 직접 최동원을 섭외하려고 시도까지 한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소신 출마였던 셈. 게다가 당시 서구는 김영삼 본인의 지역구였다. 때문에 최동원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민주당계의 차기 부산 시장감으로 거론되었을지 모른다는 떡밥이 간간히 흘러나오고는 했었다.#

가수 이선희는 전성기에 민주자유당의 서울시의원(마포구)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구호는 "실천하는 마포의 딸". 하지만 야당세가 강한 전통 야당 텃밭 마포구에 일종의 인기성 저격 공천을 한 것이라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애초 민자당이 이선희의 성향과도 맞지 않아 결국 민주당으로 옮기고 임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정치계를 은퇴했다. 여담으로 그 와중에도 가수 활동은 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축지법 쓴다는 허경영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이력을 거쳐 무소속으로 서울 은평구(갈현동) 기초의원(구의원) 선거에 출마한 전력이 있다.(...) 결과는 다행히(?) 21.1%를 득표하고 3위로 낙선.# 하지만 4년 뒤 민중당으로 또 출마하는 끈기를 보여준다.
  1. 일본의 시정촌제를 본따서 군은 단체격이 없었다.
  2. 개정법이 시행되기는 했지만, 그 직전에도 정부에서 군 자치제를 도입하려고 했었다.
  3. 유서대필 사건은 사건 발생 23년 만에 강기훈 씨가 최종 무죄판결을 받으며 공안조작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다.
  4. 특히 20대 층에서 투표율이 37%로 비교적 저조하게 나온 원인도 있다. 원조 20대 개X끼론
  5.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시군구의회선거에서 정당에서 따로 공천을 하지 않았으나 각 정당에 소속된 당원들은 출마가 가능했다.
  6. 나머지 7%는 박찬종의 신정당(2%)이나 정주영통일국민당(17.4%) 등으로 흩어졌다. 14대 대선의 결과도 거의 같았는데, 결과적으로 김영삼-김대중의 득표차가 8.2%였던 상황에서 박찬종이 6.4%나 되는 득표를 올린 것을 감안하면 단일화 실패의 탓을 무시할 수 없다.
  7. 이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도 이어저 65명이 출마해 선거구별 득표율 6.5%를 획득했지만 당시엔 1인 2표제가 아니었고, 전체 득표로는 1.5%였으므로 정당 자체가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