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istiwa 13 Mei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최악의 참극
말레이시아에게 있어서 절대로 잊혀져서는 안 될, 또한 잊어버려서도 안 될 학살사건
1963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일어난 참극.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말레이인과 중국인 간의 갈등이 불러일으킨 참극이며 말레이시아 역사를 통틀어 봐도 이보다 더 잔악한 사태는 없었다. 물론 이전인 1964년에도 당시 말레이시아의 주였던 싱가포르에서 한번 유사 사태가 발생한 적은 있었으나, 오늘날 싱가포르가 축출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또한 해당 사건이 이에 비하면 굉장히 양반이라는 점을 감안하자면 그야말로 말레이시아 역사상 최악의 사태라고 봐야 한다.
1 배경
2 전개
3 결과
4 사건 이후
그야말로 막장 시대의 개막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라던가 북한의 8월 종파사건처럼 대규모 숙청사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히 이들 못지 않은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예전에는 말레이시아 내부에서 비록 인종적인 갈등이 있었으며 인종차별 정책이 일부 실시되고 있던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지금에 비하면 꽤나 민주적인 편이었으며 그렇게 극단적인 차별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총리들에 대한 우상화도 지금처럼 막장이지는 않았으며 외교적으로도 최소한의 예의나마 지켰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정부는 "민족간의 갈등 완화"를 핑계로 이른바 부미푸트라 정책이라는 인종차별 정책을 본격화했으며, 되려 타겟을 외국인으로 돌려 외부에 문을 닫고 쇄국적으로 흘러들어갔고, 오늘날 말레이시아가 외국인들에게 상당히 배타적이고 제노포비아가 만연한 사회 중 하나로 전락하였다. 또한 "우리의 자존심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는 적반하장적 공식이 생겨, 외교적으로도 추태를 부리기 시작했고 이는 국제사회가 말레이시아를 비판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총리에 대한 우상화도 본격화 되었는데, 이전에도 라만이 본인의 항영투쟁을 치적으로 삼아 우상화를 실시한 적은 있으나, 그저 "독립을 위해 투쟁하셨다"는 정도로만 다그쳤으며, 실제로도 라만이 독립을 위해 헌신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후로는 허위선전들이 판치게 되었는데, 민족간, 그리고 내외국인간의 분열을 조장한 원흉인 라작은 본인이 "민족의 단결을 위해 투쟁하셨다"는 허위선전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으며 여기저기 선전물들이 판치게 되었다. 현 총리 나집 라작 역시 유사한 방법으로 허위선전 및 경력날조를 통한 우상화를 실시하고 있으며, 오히려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말레이시아를 실질적인 일당독재체제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후 AP를 대신해서 새로 만든 국민전선(BN)은 수차례 부정선거를 통해서 현재까지 무려 60년 가까이 장기집권하고 있으며, 정권을 내놓을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교활하고 잔악하다.
그러나 여당뿐 아니라 야당조차도 막장으로 흘러가는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DAP는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PAP)과 같은 뿌리였으나 비록 독재를 하더라도 외국인들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청렴을 강조하는 PAP와는 달리 DAP는 여당보다 한술 더 뜬 막장 쇄국정당으로 흘렀으며, 이는 2008년 풀라우피낭에서 권력을 잡은 뒤 본때를 보여주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정부가 인종차별과 제노포비아 정책을 대놓고 펼치기 시작했고, 자존심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외교적 추태를 부리기 시작했으며, 이는 한마디로 말레이시아를 나치급 파쇼 국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