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사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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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ing+Ship+Vassa,+Vasa,+Wassa,+Sweden,+Museum,+Stockholm,+Warship+(4).JPG
Vasa

북방의 사자왕에게 몇 안 되는 상처를 남긴 군함

1 개요

스웨덴의 군함이자 침몰선. 침몰선들 중 목재 군함이 가장 잘 온전하게 보존된 특이한 케이스다.

2 건조 당시

1611년에 재위한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1]30년 전쟁을 바탕으로 성장한 스웨덴의 해군력을 과시하고 발트해의 제해권을 차지하기 위해 독일과 경쟁을 하며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스웨덴의 강성함과 왕실의 위엄 그리고 발트해의 안전권을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갤리온 형 전함을 만들 것을 명한다. 이에 따라 흐로테라는 상인을 통해, 독일 출신의 헨릭과 헨드릭을 데려와 함께 바사 호를 건조하기로 하였고 헨릭과는 바사 호의 건조 이후, 4년 간 스웨덴 해군의 유지보수 계약과 함께 이후 4척의 신예함 건조에 계약하게 되었다.[2] 1626년, 첫 번째 함이 건조에 들어가게 되었고 1627년 진수하여 1628년에 스웨덴 해군에 인계하게 된다.[3]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함명을 자신의 왕조 이름인 바사(Vasa)라고 지었다.

3 제원

  • 최소 배수량 1210t
  • 전장 69m
  • 폭 11.7m
  • 높이 52.2m
  • 흘수선 4.75m
  • 승무원 선원 145명, 병사 300명
  • 함포
    • 8 파운드포 48문
    • 3 파운드 8문
    • 1 파운드 2문
    • 그외 대포 6문

그외의 특징으로 당대 유래없는 2층 갑판 포열을 가진 최상의 1급 전함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함포를 2열로 배치한 최대의 중무장 전함이었다. 배의 전면에는 구스타프 아돌프를 상징하는 황금 사자상을 새겨놓았으며, 선체에는 황금으로 도금한 영웅과 병사 조각상이 천여 개나 새겨진 아주 호화로운 배였다.

4 침몰

1628년 8월 10일, 스웨덴의 스톡홀름 항에서 수많은 인파들과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폴란드로 처녀항해에 나선다. 바사호는 엄청난 환호와 함께 천천히 항구를 빠져나가 연안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바사 호는 처녀항해를 구경하로 온 이들에게 선물이라도 주는 듯, 64문 한쪽 현측의 함포를 일제사격을 하는 장관을 보여줬다.[4]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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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돌풍과 대포의 반동이 복합적인 작용으로 인해 좌현으로 기울어 졌고 곧 전복되면서 침몰했다. 그것도 출항한지 30분 만에...

이 소식을 들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통탄해하며 '대포는 건져 올려서 녹여 쓰고, 돛대는 쳐서 없애 나로 하여금 이 배를 잊게 하라'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따라 대포들은 모두 건져진다.

4.1 침몰 이유

바사 호는 당시의 선박 제조술이 총동원된 걸작품이었다. 하지만 선체 자체는 잘 만들어진 반면 하갑판과 상갑판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데다, 너무 많은 대포가. 그것도 24파운드의 중포가 탑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장식물도 너무 많았고, 구스타브 아돌프 2세가 갑작스럽게 용골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설계가 수정되었다. 이로 인해 처음과 달리 제대로 설계가 되지 않아 윗쪽은 무겁고 아랫쪽은 가벼워, 무게중심이 높아져 버렸다.[5] 다시 말해 무게가 한 쪽으로 쏠릴 때 선체가 쉽게 기울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6] [7].

게다가 32문의 대포를 더 올릴 때에 12파운드 대포로 무장하려고 했으나, 구스타프 아돌프 2세는 화력을 강화하기 위해 상갑판마저도 24파운드 대포로 무장하라고 명령했다. 비교적 협소한 공간인 상갑판에 무거운 대포가 가득 차면서 무게 중심이 위로 솟구쳐 올랐는데, 이것이 바사 호 침몰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군사법원이 그 누구에게도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고 바사 호 침몰사건을 종결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왕한테 유죄 판결 내릴 거냐.

4.2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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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해군 해양학자로 일했던 고고학자 안드레스 프란첸(Anders Franzén ,1918~1993)에 의해 1956년 8월에 선체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1961년에 완전히 발굴이 된다. 보존을 위해 배는 수십년간 염분을 제거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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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제 이 배는 복원이 되어 스웨덴 최고의 관광상품이 되었다. 또한 당시의 선박 역사를 아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5 미디어에서의 모습

한국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최후반 에피소드에 등장하여 한국에서도 그럭저럭 알려져 있다. 내용은 프랑스의 첩보전에 휘말려 회사가 망하게 된 상황[8]에서 이 배가 엎어지는 덕분[9]에 기사회생.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한 유령선인 플라잉 더치맨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기묘하게도 2001년, 동명의 바그너의 오페라, '플라잉 더치맨'의 DVD 촬영도 이 선박이 전시된 박물관 홀에서 진행되었다.

  1. 북방의 사자왕으로도 불려진 인물.
  2. 그 자신도 해군력 강화 정책을 펼치면서 군함 건조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기에 바사 호의 설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3. 이때 헨드릭은 지병으로 사망한다.
  4. 좌우 현측에 각각 32문씩 탑재를 했을테니 한쪽만 발포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좌우 현측의 함포를 모두 발포하는 경우는 없었다.
  5. 심지어 현대에 들어서도 이런 이유 때문에 쉽게 전복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특히 어느 나라는... 안전불감증은 영원하다
  6. 이 결함을 알고 있던 조선공들은 함선을 건조할 때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하갑판에 수 톤의 돌을 깔았었는데, 그조차도 상갑판과 하갑판의 균형을 맞추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7. 가장 근래에 한국사상 가장 끔찍한 해난사건을 일으켰던 세월호의 경우에도, 선실을 늘리기 위한 개조 공사로 무게중심이 더 위로 올라간데다 배가 불안정하다는 보고도 묵살하였으며, 사고가 일어났던 순간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서 전복된 것이 주요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8. 작중설정으로 프랑스는 급한 해상세력을 완성하기 위해서 바사호를 구매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만 1급 군함인 바사호를 구매한다는 정보가 잉글랜드로 흘러나가지 않기 위한 첩보 공작의 일환으로 주인공의 회사에 선박을 수주한 것이었다. 다분히 주인공 회사의 희생을 염두에 둔 공작이었다.
  9. 프랑스 측은 수주취소에 대한 조건으로 주인공의 제안대로 진수식에서 대포 발사 후 급선회기동을 스웨덴 측에 부탁하였다. 물론 역사대로 바사호는 균형을 잃고 침몰. 덕분에 구매하기로 한 바사호가 사라진 상태에서 해군력을 재건하기 위해 다시 주인공의 회사에 선박을 수주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