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2세 아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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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II Adolf (1594년 12월 9일(그레고리역으로는 12월 19일) ~1632년 11월 6일(그레고리역으로는 11월 16일))

북방의 사자왕

근대전의 확립에 상당히 기여한 군사천재[1]

유럽최강의 기병이라 불리던 윙드 후사르를 이긴 사나이[2][3]

스웨덴의 바사 왕조 제6대 왕, 핀란드 대공(1611~1632). 영미권에서는 라틴어식 이름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로 더욱 알려졌다.

1 생애

30년 전쟁에 참여하여 신구교간의 균형에 큰 영향을 끼쳤고, 스웨덴을 향후 1세기 동안 유럽의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군주로 근대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일부 사람들은 군사적 혁신에 있어선 나폴레옹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다만 요새는 구스타프의 혁신이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단 주장도 상당하다. 참조) 나폴레옹도 7대 명장 중 한 명으로 뽑기도 했다.[4] 나폴레옹 전쟁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근대전의 토대는 이 사람이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2 근대전의 기초 확립

2.1 전술상의 혁신

그는 시대를 앞선 전술상의 혁신을 도모했는데, 한 번에 발휘할 수 있는 순간화력의 극대화를 위해 직선형 대형을 사용[5]하거나, 파이크 길이 단축, 머스킷 경량화[6], 중기병의 갑옷 간소화[7], 하카펠 기병 육성[8][9], 경량화된 소구경 대포의 도입으로 기마포 부대를 운용, 야전에서 신나게 근거리에서 대포를 쏴재끼는 등 아예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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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인액트먼트로 재현한 구스타브 2세 당시 머스킷 총병. 버디슈를 들고 허리에 레이피어를 차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아이러니한 건 정작 본인이 머스킷 소총을 경량화시켜서 총검 사용의 가능성을 연 것과는 별개로 머스킷병들이 일제사격을 하고나면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차지마냥 한손검을 들고 육탄전에 돌입하는 발도돌격을 선호했다는 거다. 스웨덴판 반자이어택?
반자이어택과 단순 비교를 한다면 스웨덴의 전술 또한 무식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관총[10]이 없던 당시 상황과 당시 머스킷 총의 연사속도가 분당 1발 내지 2발이고 유효사거리가 100m 정도였다는 것, 성인남성 100m 달리기 속도가 대략 10초대 중반 내지 20초대 초반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전술이었다. 게다가 총검돌격발도 돌격을 보면 번쩍거리는 칼날이 일으키는 심리적 충격 효과가 매우 크다.
상상해보라. 스웨덴군의 2열 일제사격과 근거리 기마포 사격으로 한순간에 픽픽 쓰러져 나가는 동료들을 보고 멘탈에 금이 가는 상황인데, 그나마 정신줄을 붙잡고 총을 장전하는 사이에 스웨덴 보병들이[11] 일제히 칼이나 버디슈 같은 냉병기를 들고 괴성에 가까운 함성을 우아아아~~~!!! 지르면서 돌격하는 장면을. 당연히 이런 상황에 처한 적들은 어어어.....하는 사이에 심리적 공포가 확산되면서 전열이 붕괴될 확률이 높았기에 더더욱 쓸 만했다.

2.2 전술 외적 혁신 : 근현대 총력전의 기초를 만들다.

전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전술 외적인 국방행정에서도 혁신을 이뤘는데, 근대적인 개념에 가까운 국민개병제와 예비군제도, 직업군인제도를 최초로 실시현대시대 총력전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거다. 어쩌고 보면 이 부분이 전술적 혁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의 스웨덴은 영토는 그럭저럭 넓지만[12] 척박한 기후와 토양 때문에 인구가 200만을 훨씬 밑도는 소국이었는데,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적은 인구에서 비롯된 군의 숙련도와 규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을 일정 규모의 행정단위로 편성해 군 간부들[13]로 하여금 단위지역별 백성들에게 주기적으로 군사훈련을 시켰고[14], 한편으로는 군의 근간을 이루는 부사관과 장교단을 상설편제로 둬서 언제든지 인구 대비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15] 덕분에 그가 이끌던 스웨덴군은 각국의 예상보다 훨씬 많고, 혁신적인 군대를 전선에 투입하면서 승승장구했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당면 전략목표까지는 달성했지만, 동시에 총사령관인 자신이 전사하면서 아이러니한 결과를 남겼다. 구스타프 아돌프 사후 스웨덴군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페인 제국테르시오에게 대파 당하면서 잠시 주춤거리지만 요한 바네르, 레나르트 토르스텐손, 악셀 옥센셰르나 같은 구스타프 생전 그와 함께 스웨덴의 국정과 전투를 수행한 명장, 명재상의 통솔 아래 다시 상승세에 돌입하며, 결국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슈트랄준트를 비롯한 포메라니아 지역과 비스마르, 브레멘 일대를 할양 받으며 성공적으로 전쟁을 끝냈다. 물론 굉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왕이라서 최후도 역시 영웅적이라고 경의를 받았다.

3 기타

한국에서는 30년 전쟁의 주요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스웨덴 국내에서는 국내 치적을 더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16]
그러나 전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죽은데다 후계자는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였다.

이 외동딸 크리스티나 여왕은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다. 구스타프 아돌프가 아들 낳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외동딸에게 남자 옷을 입혀 키웠는데 고대로 자랐는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스무살이 넘어서 까지 신하들이 결혼은 언제할꺼냐는 닥달에 결국 원래 꿈이었던 배우가 되고 가톨릭으로 개종 하려 왕위를 버리고 로마로 떠나면서 한때 유력 결혼 후보였던 사촌 동생[17]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바사 왕조는 단절된다. 그 후 퇴위할 때 왕실의 귀금속을 몽땅 들고 나갔어도 호화 사치생활을 하고 금방 탕진한데다가 금새 본국에 손을 벌려 본국에선 아버지와 달리 욕을 엄청나게 퍼먹었다고 한다. 교황청에서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크리스티나를 귀빈으로 대우했고, 사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묘소를 마련해줬다.

바사 호의 건조와 침몰 원인에 영향을 줬는데, 그의 치세 동안 유일하지만 스웨덴 역사에서 손꼽히는 실책이기에 오점이라고 할 수 있다.

4 그가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면?

구스타브 2세가 득세할 때 신교 제후들 사이에는 그를 신성 로마 황제로 추대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추가바람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스웨덴의 메탈밴드 Sabaton의 The Lion From The North는 제목에서 알수 있다시피 이 사람을 다룬 곡이다.

문명 5에서는 스웨덴의 지도자로 등장. 문명 5/등장 문명/스웨덴 항목 참조.

1419년에서 1819년까지의 역사를 다루는 게임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유로파 유니버설리스 2에도 등장한다. 군주로서의 능력치는 9, 9, 9에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치는 6/6/5/1로 동시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등 30년 전쟁의 지휘관들을 발라먹는 위엄을 자랑한다. 자국 왕이라서 능력치 좋게 만든 역설사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가나돌 NPC로 등장한다.
  1. 하술된 전술적, 전술 외적 부분 양쪽에서 실행한 방안들은 시대의 혁신인 것도 있었고, 현대전의 원류라고 해도 될 만한 것들이 있었다. 다만 요새는 구스타프의 혁신이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단 주장도 상당하다. http://egloos.zum.com/charger07/v/4070170 참조
  2. 물론 이건 후반부에야 있었던 일이고, 심지어 그 후반부인 회니히펠데 전투때도 윙드 후사르에게 스웨덴군의 보병 일부를 제외하곤 다수는 말그대로 개털렸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평화조약을 맺는다.
  3. 다만 단순히 스웨덴이 패배해서 조약을 맺은건 아니다. 상대인 폴란드도 재정적 피해가 큰데다, 중재에 나선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합스부르크 주축인 가톨릭리그의 견제를 위해 스웨덴을 끌어들일생각과 발트해 무역에 비상이 떨어졌고, 스웨덴을 재정적으로 도와주던 네덜란드 역시 두가지 이유로 조약을 권유하는둥 서로가 얽혀있는데, 원래 이시기쯤 전쟁이 동서양 말할거 없이 파고들면 국제관계가 좀 복잡하다...
  4. 나폴레옹이 꼽은 명장 나머지 6명은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카이사르, 자국의 튀렌 자작, 오스트리아의 사부아 공자 외젠,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5. 무릎쏴, 서서쏴 자세의 2열이나 서서쏴로만 1열로 쫙 서서 한꺼번에 사격했다고 한다.
  6. 10kg에 달해서 받침대 없이는 쏘지도 못할 머스킷을 절반으로 경량화 했다. 이는 훗날 총검의 도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7. 원래는 중세 말기 기사들 마냥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흉갑과 투구만으로 간소화 시켰다.
  8. 당시 기병의 대세는 권총 사격으로 치고 빠지는 카라콜이었고 총기병과 돌격기병들도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 둘을 하나로 합쳐 사격후 돌격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기병대. 기병대 병종 통합은 당시 스웨덴이 기병대를 대량으로 육성하기 힘든 환경이었던 탓도 있다.
  9. 구스타브 2세의 기병교리 혁신에는 다소 거품이 껴있다는 평도 존재한다. 당장 앙리 4세만 해도 기병의 카라콜을 금지하고 돌격전술을 중시했다.
  10. 반자이 어택을 망했어요로 만든 주범.
  11. 바이킹의 후예인 이들은 주적으로 상대했던 남부 독일계 가톨릭 영주민들이나 폴란드, 리투아니아인 등에 비해 덩치도 큰 편이었고, 이 시기 스웨덴은 아직도 혹한에서 수렵, 사냥, 어업으로 거칠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이킹 시대가 끝난지는 오래지만 바이킹스러운 생활상은 오래 유지 되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그 인상도 좀 더 지중해 중심의 '문명'에 가까웠던 가톨릭 세력의 중심인 남부 유럽의 사람들 보다 더 거칠고 험악했을 것이다. 여기에 묵묵히 아군의 사격을 루터교 기도를 낭송하면서 버티다가 갑자기 다가와서 샛노랗거나 시뻘건 수염까지 휘날리며 달려 온다고 생각해 보면...
  12. 메르카도르 도법 기반의 지도에서는 한반도의 10배 이상으로 보이지만, 극지방에서 적도로 갈수록 위도 10도당 간격이 좁아지는 특성을 고려하면 실제 면적은 한반도의 서너 배 정도다.
  13. 대체적으로 귀족들이었다.
  14. 물론, 난이도가 있던 머스킷 사격 훈련이 아니라 제식이나 파이크병 훈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5. 굳이 비교하자면 구소련군이 실시했던 제 2 편성제도가 있다.
  16. 전국에 재판소를 새우고 웁살라 대학을 다시 부흥시켰다. 또한, 네덜란드에 차관을 빌려 구리광산을 개발, 스웨덴의 무역규모를 10배 가까이 끌어올리는 동시에 대규모의 대포 주조를 가능케 해서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이 당시 대포는 내열성 때문에 청동제 대포를 썼기 때문. 사족이지만 강철 포신으로 된 대포는 19세기 독일의 크루프 사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만국박람회에서 선보였다. 참고로, 철제 주물 대포 같은 것도 있었으나 청동제 대포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고는하나 신뢰성이 낮아 초기엔 거의 해적들이나 쓰는 용도였다. 그러나 그런 주철 대포를 헨리 8세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해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아르마다를 격파하는데 쏠쏠하게 써먹으면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17. 구스타프 아돌프의 여동생의 아들. 비텔스바흐 가문 방계의 팔츠-츠바이브뤼켄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