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PDR

(NL(정파)에서 넘어옴)

1 개요

흔히 약자인 NL로 부르는데 본래는 NLPDR, 즉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의 약자로 North Love의 약자가 아니다! 하는 짓보면 맞는거 같은데 80년대 중반 CNP 논쟁(사회구성체 논쟁, 일명 사구체 논쟁)을 통해 성립한 운동권의 정파이다. 자주파(자주대오, 자주계열), 자민통(이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주, 민주, 통일의 약어), 민족해방이라고도 하며, 자신들은 NL이라는 용어 대신 통일운동 진영, 자민통 진영 등으로 포장되어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흔히 키배에 종종 쓰이는 "좌빨"의 의미라면 모를까 이들을 좌파로 부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극우 파시즘에 가깝다.New Light 실제 이들의 조직 문화나 강령을 보면 일반적인 좌파 노선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2]

대체로 대한민국 시위의 메카라고 불리는 광화문 앞에서(광화문 자체가 유동인구도 많고, 멀지 않은 곳에 미국 대사관, 일본 대사관이 위치해 있어 NL들의 민족주의에 적대 대상들이 주변에 모여있는 셈이다.) 자주 출현하고, 시위를 한다. 미국 타도 일본 타도를 외치는 게 주요 레퍼토리.. 심지어 노동단체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꼽사리 끼어서 괴상한 플래카드를 들고 다니면서 순수한 노동시위를 종북시위로 만드는 민폐까지 저지른다. 가끔은 밤이 되면 미 대사관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동양만세' 등) 민족주의를 과시하기도 한다.

2 분파

NL도 원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NL주류'와 '자주/민주/통일'이라는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주체사상은 거부하는 비주사NL로 나뉘어있었다.[3][4] 세가 크게 위축된 지금에 와서는 그런 분류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졌지만... 대표적으로 8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의 NL은 비주사NL(소위 관악자주파)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들은 1993년 온건PD 그룹과 통합해서 21세기 진보학생연합(약칭 21세기)를 만들면서 NL에서 이탈하였다.[5]

3 역사

NL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가장 크게 세력을 키우고 위세를 떨치다가 이후부터 점점 세력이 위축되고 있다. 운동권 내에서 NL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 이유는 정권이 열심히 NL을 때려잡아서가 아니라, 사회가 민주화되고 개방되면서 북한에 대한 정보(특히 이 시기 북한의 경제난으로 탈북자들이 급증하여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기도 한다.)를 공정하게 판단할 여지가 생겼고 이에 따라 북한 체제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즉 "우리 사회(남한)가 이제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 살기 좋고 민주적인 사회다."라고 대부분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시대착오적인 NL이 꾸준히 일정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에 보수 세력의 삽질도 한 몫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NL을 잡겠다며 공안정국을 조성한다거나 북한에 대한 정보 접근을 차단하는 정책(웹사이트 접속 차단 등), 북한 체제에 대한 상호 토론을 막는 정책(북한쪽 주장을 RT했다고 체포) 등은 오히려 NL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NL을 위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 사회의 개방성과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것이다.[6] 물론 반대로 이들이 존재하기에 극우들의 색깔론과 북풍이 생명연장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NL의 역사에 관한 자세한 자료는 다음을 참고
[한국사회와 NL-1 주사파와 자주파에 대한 역사적 고찰]
[한국사회와 NL 1-1 민주화 이후 사회에 대한 다차원적 대응 결여]
[한국사회와 NL-2 변화 제안을 정치적 불온함으로 거부한 교조성]

3.1 출발

이런 NL노선은 갑툭튀라고 부를 정도로 1980년대 초중반에 학생운동권에서 돌출하였고 CNP 논쟁 속에서 논리를 정교하게 가다듬고 세를 불려나가면서 제헌의회파 CA그룹과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였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국면에서 직선제 개헌이란 아주 간단명료한 슬로건을 내세워서 폭넒은 대중성을 확보하고 CA그룹의 일부[7]까지 포괄하면서 범NL계열은 엄청난 양적팽창과 함께 학생운동의 주류가 돼서 전대협한총련을 주도한다. 이후 '애국적 사회진출' 이란 이름으로 학교를 떠나 노동운동과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다.

NL노선이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에서 돌출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바로 5.18 민주화운동이다.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사에서 광주항쟁은 반미가 중요한 명제로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까지 재야와 대학생 등 민주화 운동 세력 대다수는 미국을 박정희 정권의 폭주를 저지하는 고마운 우방으로 보았으며, "그나마 미국이 있으니 간신히 숨통이 트인다"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유신 말기의 카터 정권인권민주화를 중시하며 박정희 정부와 사이가 껄끄러웠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민주화운동세력 내에선 북한에 대해서 통일을 이루어야할 같은 민족으로 대화와 협력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동시에 호시탐탐 적화통일을 노리는 침략자 무리라는 반북, 반공 정서도 같이 존재하였다.[8] 전반적으로 언론의 자유, 공정선거, 인권, 서민층 권익 보장 같은 보편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수준으로 사실상 자유주의가 대세였다.[9] 이외에 중남미에서 유래한 종속이론 등이 보급되는 정도였다.

물론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구 좌익계와 해방 이후 진보당, 사회대중당 등 합법적인 혁신정당에서 활동하던 혁신계 잔존세력들이 존재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통일혁명당을 만들어서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거나, 혹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의 지하혁명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 계급혁명 노선을 추종하였으며, 북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였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대중적 기반이 전무해서 그 파급효과는 크지 않았으며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속에 다음 세대를 만들지 못하고 고립돼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1980년대 들면서 상황이 바뀐다. 카터 정권이 심각한 지지율 하락으로 레임덕에 시달리는 와중에 12.12 군사반란5.17 내란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신군부가 다시 정권을 틀어쥐는데,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혹은 하지 않고) 넘어가 버린 것이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은 신군부의 과잉유혈진압을 사실상 방관하였고, 카터 이후에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전두환을 미국에 초청하는 등 신군부의 집권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학생운동 그리고 재야민주화운동 내부에 반미 정서가 폭발하기 시작한다.[10][11][12]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반미운동의 무풍지대라던 대한민국에서 1982년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1985년 서울 미 문화원 점령사건에 이르기까지 반미감정이 터져나오게 된다. 이 시기 운동권에서 터트렸던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어지간하면 '반미'라는 모토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반미정서가 고양되면서 민족주의가 타오르게 된다.

평균 학력이 낮던 그 시절 배운 자의 의무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던 학생운동이 이념적, 사회주의적 성향으로 급격히 좌회전하기 시작한 것부터가 이 시기, 더 정확히는 신군부의 전횡을 막지 못한 서울역 회군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평이 유력하다. 서울역 회군 이후 기존의 학생회 지도부들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복학생 그룹이 투신자살 등을 무기로 학생운동의 전면에 부상한 것이 이 시기부터였다.

4 핵심 사상과 그들의 주장

이들의 주장은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자/민/통으로 표현된다.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불타오른 반미정서와 폭압적인 군사독재 그리고 외국차관에 의존해서 성장한 재벌(매판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상황에서 정립된 NLPDR이론은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조국통일"을 3대 목표로 설정했다.

즉 한반도 남반부를 강점하고 있는 주한미군과 미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반미자주화), 이들의 하수인 파쇼독재 정권을 타도한 후에(반파쇼민주화), 자주적 민주정부를 건설해서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달성하자(조국통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것이 NL의 모든 것이다. 따라서 모든 활동이 남한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미국과의 투쟁, 반미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세상 모든 문제를 반미냐 친미냐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수준낮은 음모론도 횡행하며, 어떻게 해서도 반미운동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문제는 그냥 무시해 버린다. -너무 단순해(...)-

일례로 NL 그룹은 한미 FTA 반대 투쟁에는 올인했지만, 그 이전 한EU FTA반대 투쟁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한중 FTA에는 아예 침묵으로 일관했다.[13] 개혁진보 성향의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운동세력들이 투자자국가제소제 등 한미FTA의 내용을 반대하고 나선 것과는 달리, NL계는 FTA의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미국하고 싸운다니까 거리로 몰려 나온 것이다. 그 덕분에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인한 촛불집회가 벌어졌을 때 일반참가자들과 대립해서 깃발논쟁이 벌어진 바가 있다.

이념이 좀 허황되지만 매우 단순하고 감성적이라서 열성적이며 운동세력의 다수를 차지한다. 물론 이론과는 관계없이 PD계가 조직력 구축에 소홀히하고 내부 토론을 하는데 바빴던데 반면(안좋게 얘기한다면 키배질), NL계는 "품성론"이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기본적인 조직력을 탄탄히 갖추었기 때문에 운동판에서 다수를 차지해왔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이론이 빈약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수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론의 발전이 거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승리적 관점이라는 이상한 시각으로 모든 행동을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승리적 관점을 요즘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정신승리. 이게 버릇이 아니라 실제 이념으로 존재한다. 우리를 대표하는 위대한 영도자(수령이든 단체장이든)가 행하는 일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단과 과정에 대한 고찰이 그만큼 부실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론적인 입장을 자주 취한다. 수직적 조직구도와 함께 PD계열이 가장 반발하는 부분이 이 항목이다. 친북은 그 차후의 문제고.

4.1 연원

NL의 뿌리는 기본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일국 사회주의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2차 세계대전 당시 '만국의 노동자의 일치 단결'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허황되었다는 전제에 기반하고 시작한다. 가령 독일의 노동자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전제 위에 개별 국가의 사회주의 혁명은 해당 국가의 노동자 계층이 스스로 달성해야한다는 공산주의 혁명 이론이다. 이 이론은 '일국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말해 스탈린주의로 정리가 되고, 민족주의국가주의의 경계가 명확하지 못한 동아시아의 중국과 한국에 전파되면서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혁명 이론으로 바뀌어나가게 되며, 현재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로 변화되게 된다. 어떻게보면 다른 민족이나 국가를 배척하고 자민족 제일주의를 내건 나치와도 상당히 닮은 셈.[14]

이와 반대되는 입장인 PD의 경우는 인민민주주의(People's Democracy) 노선으로서, 기존의 '만국의 노동자의 일치단결'을 통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사해 시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PD 노선의 경우는 남미로 옮겨가면서 독자적인 사회주의 이론(종속이론 등)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 계통의 이론을 실천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쿠바 혁명을 성공시키고, 볼리비아 정글에서 살해된 체 게바라를 들 수 있다. NL의 주장을 비교하면 양자가 엄연히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2 현실 인식

현재의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 반봉건사회(은유적 표현이 아니다)로 보고 있다. 뉴라이트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헛소리를 창안한 안병직은 뉴라이트 초기 인사가 된다.

또 대한민국 정부는 미제의 꼭두각시 정부라고 판단하여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언뜻 보면 일본의 한국사 정체성/타율성론과 비슷하게 보이나 사실은 다른 이론으로, 이들이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과 그 이후 좌파들의 논의를 검토한 결과 내린 결론이다. 물론 지금은 역사학계/사회과학계는 물론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이론이지만, 1980년대 당시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학생사회와 검열로 인한 정보부재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현상은 아니다. 이론이 말이 안 될 뿐이지. 다만 1980년대말 PD계열과의 논쟁에서 완전히 박살난 이후에는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으로 한단계 업글하였다. 소위 식반자론. 어찌하던 남한은 미제의 식민지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와 반대로 북한은 외세의 식민주의적 침략과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민족 자립국가로 보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남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북한이고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자유롭고 자주적인 국가라고 여기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다. 따라서 남과 북이 힘을 합쳐서 외세인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같은 민족끼리 자립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1960년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알던 일본 적군파의 영향을 일정부분 받았기 때문이다. 꼭 적군파만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세계적으로 북한이 사회주의 혁명의 모범 사례였다. 물론 북한의 선전활동만 믿은 것이고 현실은 시궁창이었지만. 1989년~1990년 당시 한창 남북 화해 분위기에 따라 북한에 다녀온 학생운동가와 사회운동가들이, 자신들을 환영하기 위해 오밤 중에 주민들을 깨워서 숙소 근처에 동원시켜 놓은 것을 보고 "얼굴에 피곤하다고 쓰여있는 사람들 데리고 뭐 하는 짓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적어도 남한이 북한보다는 자유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종의 임수경 쇼크의 남한버전?

NL과 PD의 혁명 이론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북한에 대한 태도와 동남아시아에 대한 태도이다. NL은 민족주의 노선으로서 북한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반면, PD는 그런 속박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정치적 자유화를 위한 투쟁에서 NL은 개별 국가의 혁명은 그들의 문제이므로 외면하는 반면, PD는 이들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게 된다.

4.3 농민운동

현재 남한사회를 봉건주의라고 보기 때문에 농민과의 연대를 중시하며 전농 등 농민단체와 친하다. (문제는 북한(김씨왕조)이 전제주의 국가라는 점에 있지만) 학생회가 NL계열이라면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농번기에 농활을 가는데, 협동봉사라는 측면도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더 강하기 때문에 한총련 지도부에서 각각의 학교에 지역할당을 해 누락되는 지역이 없도록 전국적으로 조직한다. 뭐, 그렇다고 PD 애들이 농활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의미가 좀 다르다. 실례로 어느 대학의 PD계열의 학생회에서 '학우들의 부모님을 돕자!'라는 취지로 한총련에서 내려온 할당구역을 무시하고 농사짓는 학생의 집 위주로 농활을 꾸렸다가 비판당한 일이 있었다.

4.4 외국에 대한 태도

간단히 표현하면 반미, 반일에 친중.

극단적인 반미주의 노선을 걷던 NL그룹은 2000년대 이후 중국이 미국의 대항마로 급부상하자 극단적인 친중 성격을 보여주기 시작했다.적의 적은 친구! 애초부터 반미라면 악마에게 영혼도 팔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니, 21세기 들어서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중국이 급성장하자 친중국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중국이 전세계적으로 고립된 북한의 유일한 동맹국이자 후원국인 것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례로 입만 열면 민족통일, 민족자주, 우리민족끼리 등등 민족주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민족의 역사가 훼손되고 있는 동북공정에는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다. 그외 한중간의 갈등문제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침묵을 유지하는 편이다. 북한을 절대 욕하거나 비판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거기다 NL들의 주 성향인 반일감정 또한 친중과 맞아떨어진다. 항상 미제타도, 일제타도를 외치는 NL들이 중국과 손잡자고 주장하는 건 그간의 행태를 보아하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파들이 미제의 하수인인 반통일수구세력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입장이다. 여기에 김일성의 항일독립투쟁 경력을 과대포장하면서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이념을 선전하고, 세력을 확장하는데 한국 사회에 팽배한 반일정서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자신들의 가장 큰 약점인 종북주의를 반일을 넘어선 혐일주의적인 논리로 맞대응하는게 이들의 보편적 수법이다.

간략하게 요약해서 NL그룹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북한에 유리한가? 미국에 불리한가? 딱 이것뿐이다. <해방구 북한>-<압제자 미제>-<식민지 남한> 이것이 NL운동가들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세계의 전부로, 그외의 지역과 분야에선 전혀 관심도 없고, 놀라울 정도로 무식하다! 주체사상의 민족해방이론은 오직 한반도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한반도가 이 세계의 중심으로, 한반도에서의 북-미 대결이 곧 인류 역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때문에 역사적으로 진보좌파 사상이 국제주의, 사해평등주의 성향을 띄어온 것과 다르게 NL그룹은 마치 흥선대원군 시절의 쇄국정책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립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극단적인 폐쇄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런 성향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이들이 입에 달고 사는 '우리 민족 끼리'라는 구호는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외국과의 국제협력이나, 한국군 해외파병 문제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자유주의 개혁세력 혹은 좌파그룹들이 해외파병에 대해서 '명분 없는 전쟁' 혹은 '한국의 이미지 악화가 우려'[15] 라는 의견을 내놓으며 반대할 때, NL들의 파병 반대 이유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이라서'(...) 중국이 주도하면 열광할듯 위에도 서술했듯이 똑같은 FTA인데 한-미 FTA와 나머지 국가와의 FTA를 대하는 온도차가 명백하다.

사고판단의 기준이 북한이기 때문에 북한의 유일한 동맹국 중국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며, 반미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미국과 그 동맹국들인 일본과 서방권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극단적인 반미주의, 반서방주의로 기울어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6] 역사적 사실들 중에서도 중국이 조선에게 가했던 일들은 무시한다. 이들은 조선 국토가 일본 치하, 미군정 치하에 놓인 걸 아직도 물고 늘어지지만 한국 전쟁 때 1950년에 중국이 군대를 이끌고 한국의 도시들을 점령한 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하긴 북한 편이었으니까..

한자 사용에 관해서도, 현재 일반인 사이에서는 한자 혼용은 반대하더라도 한자 교육 자체는 나쁠 게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나, NL들은 민족주의에 의거하여 한자를 배척한다. 북한 자체가 이미 그렇게 했고, 국한문혼용을 반대한다면서 그게 일재의 잔재다, 우리 한글이 우수하니 우리민족끼리 하자. 라는 주장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자 병기는 일본의 잔재라며 한자를 몰아내자는 시위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한자는 NL들이 그렇게 찬양하는 중국에서 만든건데.. 사실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여러 국가들 역시 이웃나라에게 지배 경험을 겪었다 해도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역사 문제와 별개로 현재진행형 시점에서 국제 사회에서 이웃국가와의 교류는 활발할 수밖에 없으며, 언어권도 동일하기에 한중일 3국이 뭔가의 수렴점을 찾을 수 있을 공통점이자 그 뿌리가 한자인 셈이다. 국한문혼용을 반대하더라도, 비효율성을 비판하더라도 한자에 대한 무용론을 펼치진 않는 게 보통 주장이지만, NL들의 성향 자체가 고립주의/민족주의이니..

4.5 주체사상, 친북종북

노태우 정권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NL의 리즈시절 80년대 말에는 북한의 선전 멘트에 매우 충실히 반응해 한국전쟁은 남한의 북침으로 발발했다고 믿고, 남한의 원자력 발전소는 미국이 북한을 두려워하여 준비한 핵무기라고 믿는 등 여러모로 순진한 모습을 지녔었다.

이념으로 주체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직접적으로 표방하기 힘들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다만 NL계열 단체의 강령 등에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체사상 자체가 아바이 수령 아래 대동단결이라는 굉장히 수직적인 정치 구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수의 NL단체들은 수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윗선에서 내려온 명령에 복종하며, 의문을 제기하면 대동단결을 해치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힌다. 이런 위계질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절차를 넘어선 항명은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NL은 국가보안법이 노리고 있는 메인 타겟이다. 반면 PD계열 단체들은 어지간해서는 국가보안법으로 엮기 어려운지 주로 파업 가담이나 시설물 파괴 등에 대해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식으로 잡아가는 수법이 많이 쓰인다.국가보안법보다 더 무섭잖아??

예전 안기부 시절에는 NL보다는 PD들이 주로 타겟이었다고. PD계열로 활동하던 사람이 조사받던 중에 조사관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NL은 병신이라 가만 놔둬도 한계가 있지만 PD는 미리 싹을 밟아놔야 한다라고 했다나. 80년대까지만 해도 소련이 시퍼렇게 살아있었고, 당시 ND-CA-PD로 이어지는 계통의 운동권은 소련식 현실 사회주의를 이상사회로 설정했었다. 지금에 와서야 이전에 추구했던 소련이 무너지고 그 한계를 인식함과 동시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변화하면서, 비교적 합리성이 있는 사상으로 평가되는 PD보다는 정신나간 공상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되는 NL이 경계를 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 반대였다. 더욱이 조직을 중시하고 조직적인 면이 강한 NL에 비해 PD계열은 조직 자체보다는 개인을 더 중시했고, 조직을 경시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는 무엇보다 정당이라 조직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건 민주주의일수록 더욱 부각되는 문제인데 이런 이유로 PD계열은 더욱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물론 머릿수 많은 NL이라고 딱히 뭔가를 이뤄볼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하지만 노태우 말기 이후로는 PD보다 NL이 주 타겟이 되었는데, 소련과 수교가 되고, 거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이 붕괴되면서 PD들이 힘을 얻기 힘들어진 반면에, 1993년 설립된 한총련의 주축이 된 NL들이 여러 사고를 일으켰고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이런 경향은 사라지지 않아[17] 1997년 프락치 오인 살인사건 이후 한총련 자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NL탄압에 들어갔다. 당시 전경들 말로는 PD가 그냥 좌파라면 NL은 레알 빨갱이들이라고.

5 조직

조직은 연합의 형태를 구성한다. 1990년대 NL(민족해방) 운동권들이 민족주의민주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이란 합법적 조직을 설립했을 때 지역별로 산하 단체들이 만들어졌는데 서울연합, 경기동부연합, 경기남부연합, 인천연합, 광주전남연합, 울산연합, 부산연합 등이 탄생했다. 그때 맺은 인연들이 이후에 정치적으로 구심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중에서 특히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인천연합이 가장 큰 조직적인 힘을 획득해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비록 지역이름이 붙어 있지만 특히 경기동부연합은 다른 지역 활동가와 조직에도 상당한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지역에도 경기동부연합이 50%가 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 삼대연합은 사안별로 대립하기도 하고 연합하기도 한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이들은 정파의 존재에 대해서 함구한다. 특히 일반 당원들과 외부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따라서 이들 삼대연합의 활동방식은 각종 진보적 조직과 지역위원회 활동가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고 사안에 따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인물을 조종해 전화로 지침을 내린다. 그리고 각종 공직선거와 당직선거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1990년대 초중반 학생운동권 내에서 주체사상의 해석을 둘러싸고 자주단결(주류-강경주사)과 사람사랑(비주류-온건혁신)로 분열하면서 한총련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비주사NL과 PD 등 다른 정파나 운동권 외부에서 보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맹목적인 친북성, 폐쇄적인 조직운영, 고립주의, 승리적 관점(정신승리론), 폭력성, 부정부패 등 속칭 꼴통주사로 불리던 NL그룹의 문제점은 양쪽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당시 한총련을 장악하고 있는 자주단결 그룹의 패권주의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지적하면서 등장한게 수도권의 사람사랑 그룹[18][19]인데, 그럼 이들이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어디로 갔느냐? 바로 경기동부연합이다.사실 경기동부도 처음에는 NL운동을 시대에 걸맞게 개량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여타 사회운동가들한테 세련되게 운동한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다. 운동의 모범이다같은 칭찬을 들었지만, 머릿수를 불려서 주도권을 쥐게되자 자신들이 그렇게도 비판했던 패권주의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똑같이 보여주었다. 그나마 주사파 내에서나 세상돌아가는 흐름에 아주 미세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지, 결국 시대적인 흐름, 일반 대중의 사고방식과는 몇백광년 떨어진 상돌아이 집단이었던 것이다.

비주사 NL이라는 기치의 소수파가 존재하긴 하나 이들도 기본적인 민중해방의 모토 하에 움직이기 때문에 이들도 엄연한 NL이다. 참고로 과거 범민련이나 한총련 단결파로 불리던 자주대오(주사파)에 소속된 이들은 기본적으로 민주노동당도 인정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유일한 혁명정당은 북한조선노동당이라고 보는 것이다. 흠좀무. 굳이 따지면 이들은 스스로 장악하고 있는 통합진보당 같은 당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혁명정당을 돕는 2중대이자 일회용품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5.1 학생회

대학교에서도 학생회를 애국적인 학생들로 이루어진 '조국통일의 첨병'으로 여기기 때문에 학생회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학원 자주화'가 학내 최우선 목표가 되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학생회를 장악하려 한다. 덕분에 학생회를 둘러싼 비리와 폭력사건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한총련의 꽉꽉 채워진 할당량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학내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이런 식으로 학생회 장악을 노골화 하다보니, 이미 여러 대학에서 부정투표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진보적 학생회 전부가 NL계 학생은 아닌데, NL계가 이들의 이미지를 다 깎아먹기 때문에, 최근에는 뉴라이트의 지원을 받는 학생회라든지 비운동권이 다소 강해질 정도.

5.2 단결은 얼어죽을

NL계열은 PD계열에게 '통큰단결'이라고 항상 손을 내밀며 연합하려 하지만 수직적 상명하복의 조직구조상 소수파인 PD계열은 NL계열의 머릿수 때우기로 흡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발한다. 사실 손을 몇 번 잡았다가 PD계열이 데인 경우가 꽤 많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민주노동당-진보신당, 통합진보당-진보정의당의 분당과정 자체가 PD 계열이 데이는 과정의 연속이라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NL계열은 PD계열을 통큰단결을 저해하는 종파주의자라고 깐다. 마찬가지로 PD계열은 NL계열을 북조선식 독재 정권이라고 깐다. 주변에 정의당 관련 인사가 있다면 이와 관련해 물어보자, 직접 NL PD를 언급하지 않아도 통진당 계열 인사라고 하면 학을 뗀다.

NL그룹은 매번 '적들과 싸우기 위해 통 크게 단결하자'면서 연대, 연합을 부르짖었다. 거기에 호응해서 PD나 시민운동 세력과 함께 단일조직을 만들면 상대적 다수인 것과 함께 타 계파들이 제대로 세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면서 조직을 장악하고, 조직을 장악하고 나서는 대놓고 부정을 저질러왔고 이런 부정들이 드러나면 부정행위에 대해 애써 덮어주거나 방관을 하면서 혹은 이런 부정행위들마저 옹호하면서 조직을 완전하게 타락시켜왔다. 이렇게 망가진 단체가 학생운동에서 한총련, 80~90년대 재야운동세력의 연합체였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그리고 민주노동당이다.

한총련도 초창기에는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란 슬로건하에 비록 NL이 우위이긴 하나 PD계열도 중앙조직 간부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구조였으나 1995년 모든 중앙조직을 강경주사파 NL이 싹슬이하고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로 슬로건을 바꾸더니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6년 연세대 사태로 하향세에 접어들기 시작하고 97년 들어 전경사망 사건과 프락치 오인 살인사건으로 완전히 나락으로 빠졌다. 다만 그동안 쌓아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어찌어찌 땜빵하다가 기본적인 2000년대 중반 들면서 완전히 시망했다.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등 노동운동에 기반한 구PD 계열이 창당한 민주노동당도 2001년부터 온갖 협잡과 부정, 폭력, 날치기로 각 지구당을 장악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2004년 6월 전당대회에서 지도부를 싹쓸이하고 중앙당 간부를 모조리 갈아엎고 당을 완전히 변질시켰다. 이 시기에 초창기부터 당에 헌신하면서 부유세와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했던 정책팀과 이론가들이 모조리 당을 떠나고 그야말로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다. 대표적인 게 우석훈 박사, 진중권 등이다. 결론은 다들 아시는 대로...

NL은 일본의 중핵파와도 비교해볼 수 있다. 중핵파는 일본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의 분파로. 가두 투쟁에 특화되어 있었는데, 8,90년대 한국 운동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공투 참조.

6 비판

운동권의 이미지를 제대로 깎아먹은 주 원인이기도 하다. 진정한 진보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악의 축. NL에 속하지 않은 운동권이나 진보 진영이 보기에 NL은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된다. "NL은 한국사회를 변혁시키기에는 충분히 세력이 크지 않고, 한국 진보를 망치기에는 충분히 세력이 크다"라는 말이 있다.

6.1 봉건적 태도

전통적 NL은 미국과 그들의 영향력 아래 혹은 영합한다고 보는 반통일친미수구세력과의 투쟁에만 올인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보/좌파 세력이 중요하게 여기는 노동자의 권익, 민주시민의 권리, 인권, 환경, 문화적 다양성, 소수자 보호 등에는 대단히 무관심하다. (이것에 대한 반발로 노동자 민중운동과 통일운동을 결합하지는 경기동부연합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나 결말은....) 아니 무관심을 넘어서 오히려 보수우익보다 더 봉건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딱히 반미운동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NL계는 투쟁선동의 소모성 목적용의 가치가 없으면 철저하게 무시한다.

2000년대 중반 당시 경기동부연합의 수장이었던 이용대가 성소수자 비하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07년도에 범민련 기관지에서 트랜스젠더동성애, 이주노동자가 늘어나는 현상을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까대는 무개념 논설기사를 실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한 동안 성소수자 단체, 인권단체 이주노동자 단체와 대립한바 있다. 이외에도 각종 운동단체 내 성폭력 사건 처리에서 보여준 봉건성은 차라리 한나라당을 진보정당으로 보이게 할 정도였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초창기에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위한 여성할당제를 NL계 여성간부들이 조직적으로 반대하는 코메디를 보여준 적도 있다. 당시 당내에서 여성운동가들이 당직과 공직후보자에 최소 30% 이상의 여성을 할당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자 NL계가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인데, 이유는 간단했다. NL계는 가부장적인 봉건성 때문에 그만한 숫자의 여성활동가들을 확보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6.2 정치행태

NL계열이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가입하고 장악하면서 크게 물의를 일으켰는데, 민주노동당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 A지구당의 선거에 대량으로 위장전입하여 선거권을 획득한 후 몰표를 주어 NL계열을 지구당 위원으로 당선시키고 해산하기를 반복하여 당 중추를 장악한다거나 유령회원의 입당서를 작성한 다음 투표만 시키고 탈당시킨다거나 하는 등이다.

2012년 진보계열 정당들의 선거연대인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로 조직논리를 앞세운 부적절한 경선행보를 보이고 있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태가 일어나면서, 80년대에 쓰이던 NL과 PD라는 말이 모두 나오게 되었다. 특히 PD계열의 대표적인 논객인 진중권에게 NL의 시대착오적인 모습이 다 까발려졌는데, 'NL이 학생회를 장악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악하고, 대물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국회의원이 되면 희석을 시켜야하는데, 이러한 비민주적인 방법을 국회까지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오를 했다'고 평가했다.

사실 그 동안 썼던 NL 까는 글이 이제와서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진중권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전 1980년대 후반서울대 PD계열의 이론가였던 이진경, 조국 교수와 함께 '주체사상비판'이란 책을 출판하면서 NL계를 신랄하게 비판한 과거가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들이 NL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게 반지성주의였다. 맹목적인 친북성, 상명하복식 위계질서, 가부장적인 봉건성, 조직보호의 명분하에 저지르는 각종 사건사고 등 NL계의 병폐가 대부분 반지성주의에서 파생된 문제라고 분석하고 있다. 진중권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서 2000년대 초반 조독마에서 일로 이름날리던 시절에 NL계가 민노당에 대거 입당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NL계 인사들하고 장기간 키배를 뜨기도 했다.

또한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진보의 올바른 노선은 PD이고 NL은 진보의 울타리에서 쫓아내야 한다."라고 평했다. 결국 보수의 주 타깃, 진보의 계륵이 되어버렸다.

현재 제도정치권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NL계 출신 정치인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이 자주 나온다. 2000년대 들어서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상당수 NL학생운동권 출신들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 민주당, 열린우리당을 통해서 정치권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일괄적으로 386세대로 분류되면서 한국정치의 희망으로 포장되었지만, 과거 NL주사파 시절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비판도 상당하다.

우선 보수우익으로 전향하면서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한나라당을 통해서 정계에 입문한 사람들은 과거 극단적인 친북반미 노선을 주장했던 것에 대한 컴플렉스인지 이제는 극단적인 반북친미 노선을 타고 있다. 거기에 과거 북의 독재자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던 것의 반동인지, 이제는 남의 독재자 이승만, 박정희를 영웅시하고 있다. 찬양의 대상만 정반대로 바꼇을뿐, 극단적인 흑백논리와 영웅주의, 반지성주의라는 NL주사파 시절의 습성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한편 민주당, 열린우리당을 통해서 정계에 진출한 386들은 여전한 비주류의식과 음모론적 사고방식이 자주 도마에 오른다. 무슨 일만 벌어지면 차분히 앞뒤를 살피고 상황을 분석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게 아니라 '무조건 국정원의 소행이다', '한국은 친일파가 모조리 득세했다', '정권의 음모다', '사건사고는 전부 보수우익세력이 일으킨 것이다', '넌 일베 회원 아니면 국정원 알바?' 같은 음모론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경우가 흔한데 이것도 아직 자신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세력으로서의 책임감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일단 국회의원의 되고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으면 설사 야당이라고 할지라도 엄연한 이 사회의 주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데, 과거 군사정권 시절 비판자로서 돌멩이 던지던 그 시절의 사고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폭압적인 군사독재 시절에는 모든 언론이 재갈이 물려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설사 학생운동권들이 다소 설익은 주장이나 질낮은 음모론을 주장하더라도 독재타도라는 큰 대의에 공감하는 대중들이 용인해줬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닌데 여전히 음모론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직도 친북, 종북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도 자주 제기된다. 북한 인권이나 탈북자 문제에 대한 침묵, 북미협상에서 언제나 미국의 양보만을 주장한다는 점, 대북협상시에 일관된 유화적인 태도 등이 자주 거론되며 특히 임수경 전 의원이 탈북자에게 배신자라고 쏘아붙인 사건 등이 화제가 되면서 이들이 아직도 NL운동권 시절의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거기에 비록 표를 얻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는게 정치인이라지만, 주요 선거때마다 종북성이 명백한 민주노동당, 통진당 계열과 계속 선거연대를 해왔다는 것도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다.[20]

사실 음모론적 사고는 보수진영의 NL운동권출신들한테도 흔하게 발견되는데, 이쪽은 모든게 좌파의 음모다, 종북주의자의 소행이라고 몰아붙인다.

그외에 뉴라이트나 386세대의 외곽조직이나 지지자들 중에도 여전히 그 시절의 망상에 사로 잡혀서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6.3 자정 시도

NL의 메인 브레인이었던 민경우가 2009년 출판한 <진보의 재구성>에선 현 NL 운동의 한계 및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은 미국의 정치 군사적 식민지인가?’, ‘농촌 인구가 급감한 현실에서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이 여전히 의미 있는가?’, ‘현대와 삼성은 매판자본인가?’, ‘지사적 풍모와 금욕적 생활 태도가 요즘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가?’, ‘일국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은 미제의 식민지'라는게 1980년 후반 정립된 NLPDR론의 가장 중요한 전제인데 NL이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NL운동 내부에 눈꼽만큼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으며, 얼마뒤에 민경우는 사실상 NL운동을 정리하였다.[21] 그리고 통합진보당 경선 부정부터 시작해서 NL계열인사들이 보여주고 있는 추태를 보고 있자면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당에 결합한 인천연합 출신들은 이전과는 다른 태도들을 보이고 있는데, 국민의당의 한 예비후보가 인천연합 출신 이정미 후보의 전국연합 활동을 들어 정의당이 공산주의자를 공천하였다고 공격하자, 이에 대해 이정미 후보는 "북한은 보편적인 민주주의와 인권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국가"이며, "북한의 3대 세습도 보편적 상식에서 볼 때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단 조직장악의 능력은 어디가질 않아서, 그 숫자에 비해 입김이 매우 센편이다.

7 현재

1991년 결성한 전국연합은 노동자, 농민, 학생, 도시빈민, 비판적지식인 등 각 분야별 운동단체가 정파를 초월하여 결집한 대중적인 연대조직이었다.[22] 일례로 당시 노동자계급을 대변해서 연합에 가담했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은 단병호, 심상정 등 PD계열 인사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외에 전농(농민), 전대협(대학생), 전빈련(도시빈민), 전교조 등 다수 단체가 가입하였다. 그러나 전국연합 중앙지도부는 NL계가 대다수였으며, 이들은 1992년 대선에선 민주당 김대중 후보와 95개 공동공약안에 합의하고 정책연합을 선언하였다.[23] 초창기의 전국연합은 NL계가 주도하고 있지만, 다양한 정파들이 참여하고 이념의 스펙트럼이 넒었다. 그러나 NL계가 머릿수와 조직력을 앞세워서 점점 중앙과 지방조직을 장악하면서 힘의 균형이 무너졌고, 나머지 세력들은 들러리로 전락했다가 아예 이탈해버렸다.[24] 위에서 언급한 노동자대표인 전노협도 서서히 멀어지더니, 1995년 민주노총에 참여하면서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하나둘 떠나가면서 전국연합은 Only NL계 연합체가 되었으며, 가맹단체는 NL계가 장악한 한총련과 전농만이 남았다.

90년대 중반에는 문익환 목사가 제안한 새로운통일운동체[25]를 둘러싼 노선 갈등으로 NL계 내부에서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조직이 약화되었고, 결정적으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전국연합을 이끌던 명망가들과 간부들 상당수가 대거 김대중을 따라 보수야당으로 가버리면서[26] 전국연합 중앙조직은 사실상 공중분해되었다.[27]

그리고 1997년을 기점으로 전국연합은 사실상 껍데기만 남았고, 각 지역별 조직이 독자적인 운동정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지역조직들이 훗날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으로 유명해지는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인천연합 등이다. 그외에 다른 지역 조직들은 앞의 세 조직에 사실상 흡수된다.[28]

전국연합은 껍데기만 남았지만 어찌하던 NL계열 운동가들의 연대투쟁조직으로 명맥은 이어졌으면, 매년 대의원대회도 하고 투쟁노선도 발표하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2001년 9월 군자산 대의원대회에서 전국 700여명의 NL운동가들이 모여서 발표한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이다. 일명 군자산의 결의 혹은 9월테제라고 부르는 이 문건은 6.15공동선언 이후 넒어진 합법공간을 활용해서 독자 정당으로 정권창출을 도모해야 한다는 목표아래, 빠른 시일내에 민주노동당을 장악해서 민족민주정당으로 개편하자는 실천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대의원대회 참가자와 토론의 결과물인 9월테제는 즉시 온라인, 오프라인을 통해서 공개되었다.[29] 그리고 이때부터 NL계들이 개떼처럼 민주노동당에 입당해서 3년만인 2004년 전당대회에서 중앙조직을 장악한다.너네 잡아먹는다 공개선언하고 들어오는데도, 잡아먹힌 PD의 무능함이란 도대체...

전국연합은 2006년 완전 해산하고, 새로이 <한국진보연대>를 결성하지만, 어차피 NL계열들만 모이는 단체이다. 진보연대도 활동은 유명무실하나, 형식상으로는 국내 NL계열 단체들의 총 연합체로 아래 후술하는 대부분 단체들이 대부분 가입되어 있다.

90년대 중순 학생운동의 퇴조와 함께 반미, 통일운동 위주의 기존 NL운동(아래에 서술된 범민련, 한총련 자주계열이 주도)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떨어지자, 2000년대 등록금 문제 등 학생들의 이슈를 중심으로 한총련 혁신계열이 주도하는 한대련으로 NL운동의 주도권이 넘어간다. 한대련의 2011년 반값등록금 운동은 인상적이었지만 그때가 마지막 불꽃이 아니었나 싶다. 한대련 출신들은 대부분 통합진보당 학생위원회를 통해 사회운동으로 진출하였으나,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2016년 20대 총선을 즈음해서 새로 창당된 민중연합당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 한국대학생문화연대[31] - 2016년 현재 한의계 진료모임 길벗, 약대동아리 늘픔, 스무살의 자격, 에코로드, 사실 위의 진실 IMFACT, 교양공동체 쿰(CUM), 인권더하기법률, 이공계 지식공동체 CUBE가 소속되어 있다. 2011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32] 를 받았던 '자본주의 연구회'도 이곳에 소속되어 있었다.
  • 평화나비#[33]
  • 청년하다#[34]
  • 대학희망[35]

2000년대 들어 학생회 운동이 퇴조하자 다양한 관심사별로 그룹이 조직된다. 위의 연합 동아리들의 활동은 다양한 부분에 걸쳐있어 회원들 중에는 단순히 학술, 봉사목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단체 자체를 NL 조직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각 조직의 운영진이나 이들을 지도하는 선배 라인은 대부분 NL(중에서도 경기동부연합 계열)출신으로 통합진보당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 한국청년연대 #

과거 한총련, 한대련에서 활동하던 졸업생들이 지역 활동을 위해 조직한 청년회들의 연합체. 20대 총선에서 민중연합당으로 대거 출마# [36]

  • 민주주의자주통일대학생대표자협의회(민대협)[37] (구 애국학생연대(애학련)[38]을 비롯한 서총련 일부)
  • 6.15 학생위원회
  •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위의 단체들은 소위 NL 자주계열(단결파, 주사파 등으로 불리는)의 단체들로, 최근에는 거의 활동이 미미하다. 이들은 남한의 진보정당운동에 무관심하기도 하다. 한반도의 혁명정당은 하나이기 때문에.. [39]

  •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겨레하나) [40]

8 미래

권모술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데에 그 한계가 있다. 이런 한계 때문에, 앞으로도 NL이 어떤 조직의 주도권을 잡게될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질 것이다.

우선 타 세력 입장에서는 NL에서 통 크게 단결하자고 하도 부르짖어서 단결해줬는데, 정작 NL 자기자신들은 그런 단결이 된 다음에는 우리 아니면 안된다라는 식의 통 작은 마인드 + 조직 내부의 권력투쟁에만 몰두해서 결국 조직 전체를 자기네들 판으로 만들기에만 집중할 뿐이지, '아, 우리가 이 단체를 어떻게 키워야겠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겠구나' 이런 식으로 단체에 도움이 될 유익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러니 도무지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이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조직문화가 너무 낡은데다, 개량에도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위에서 말한대로 철저히 상명하복적인 조직문화[41]는, 진보세력 내부의 주도권 쟁탈전에는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대외적으로 봤을 때 저 조직은 왜 저렇게 권위적이고 꽉 막혔느냐, 왜 저렇게 구시대적으로 노느냐는 비판만 받게 된다. 정치집단이 제 3자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도대체 집단 내부의 권력쟁탈이 무슨 소용일까? 즉,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식으로 제 살 깎아먹기만 반복해온 것이다. 결국 한국 진보 정치세력이 중소세력으로 전락하게 만든 내부의 적,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대역죄인으로 단단히 찍히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극단적인 이중잣대흑백논리에 찌들어 있으면서 스스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이들은 언제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마치 로보트처럼 상부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상명하복식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다.[42] 또한 정권을 향해선 언제나 소통하라고 외치지만, 정작 자신들은 외부의 비판에는 귀를 꽉막고 불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행태를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선민의식에 있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순수한 열정으로 민족해방, 조국통일을 위해서 싸우는 애국세력이라는 기묘한 자부심, 즉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때문에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수구꼴통, 반통일세력이라고 본다. 이때문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외부의 비판은 자신들이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반통일세력의 음모로 규정짓고 자신들이 정당한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로 여긴다. 또한 외부의 비판에 호응해서 시대변화에 맞춰서 혁신하자는 내부의 목소리는 반통일세력에 휘둘리는 변절자로 낙인찍어서 말살해버린다. 이렇듯 우리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고립적 사고방식[43]이 점점 강화되면서 내부적으론 자기들끼리의 결속력을 강화되지만, 개방화되고 지식과 정보가 공유되는 시대적 추세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외부확장은 한계에 달한 상태이다. 사실상 정치색을 띈 사이비종교의 모습이며 반지성주의의 표본이다.

이러니 이들에 대한 지지가 가면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깥의 제3자들은 물론, 진보정치세력 내부까지도.[44] 근데 어차피 운동권 자체가 망해가는 판이라 뭐...

이들의 미래는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뉴라이트처럼 소위 전향 이후에 철저하게 자기가 과거 머물렀던 이념의 반대로, 그러나 행동습성은 그대로 가는 행태[45]을 보일 수 있다. 또 하나는 지금처럼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극소수파로 지리멸렬하게 계속 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치색을 띤 사이비종교가 되는 것이다. 현실판 지구교.

그러나 그 미래가 언제가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일단 2010년대 중반 현재까지도 NL계 단체들이 그럭저럭 세는 유지하고 있다. 울산연합이 대표적인 NL계 세력인데, 울산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민중연합당계[46] 무소속 인사들이 정당을 2자리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의당 내부에서도 그들의 끼리끼리 단결력이 어디 가지는 않아서, 인천연합의 단결력은 여전하다. 민중연합당을 전위당이라는 이유로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NL계 인사들이 울산에서 지속적으로 힘을 얻고 있는 현 상황을 탐탁지 않아 하는 좌파들도 꽤 많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NL계 세력이 제법 강한 걸 보면 그 생명력이 놀라울 정도다.

더군다나 이들이 설령 사회적 압력과 제약을 통해서 극소수파에 머물지라도, 이들의 이념적 사상이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극단주의 세력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염두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독일 통일 후 특히 소외되는 동독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네오나치들의 문제에 있어서 네오나치의 사상이 어디서 나오는지 일본의 혐한/넷우익의 사상 기반이 어디서 나오는지 심지어 현재의 IS의 사례에서 그들의 사상이 어디서 나왔는지만을 보더라도 이들의 존재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대한민국의 사회통합에 있어서 참으로 암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9 참고서적

  •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 한 NL운동가의 성찰과 고백
필자는 서울 모 대학의 96학번 NL운동권 출신으로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다가 2008년 탈당한 이후에는 평범한 사무직노동자로 살고 있다. 이책에선 때묻지 않은 상태로 대학에 입학했던 새내기들이 사회정의를 갈망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해서 어떻게 골수 주사파가 되어가는지를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매우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엠팍 불펜에 올리기 시작했던 시리즈 글이었는데 딴지일보, 오유 등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화제가 되었고, 2012년 6월달에 정식 출간되었다. 때마침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으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NL주사파 그룹의 민낯이 드러나던 시기라서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엠팍 불펜에 올라왔던 글들은 출간과 동시에 삭제되었고, 딴지일보에만 내용의 일부가 남아있다. 딴지일보 게시판 연재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 전 NL 운동가의 자기고백 "주사파는 진보가 아닌 파시즘"
  • <경기동부> - 종북과 진보 사이, 잃어버린 우리들의 민주주의
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이 2014년 출간하였다. 필자는 경기동부의 근거지인 성남이 바로 철거민들의 강제이주로 벌어진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의 현장이며, 이석기를 비롯한 경기동부의 핵심인사들 상당수가 바로 성남출신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철거민 강제 이주와 공권력의 업악속에서 성장한 광주대단지키드들이 자신들만의 유대감, 그리고 외부에 대한 배타적 시선으로 경기동부를 형성해나갔다고 분석한다. 논문 발췌요약본
국민TV와의 인터뷰 - 임미리 “언론들 고립에만 초점 맞춰”

10 참고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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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념도 없는데 트롤링까지 일삼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2. 이들의 이상향인 북한도 이미 마르크스주의를 오래전에 폐기하고, 주체사상으로 대체하였다.
  3. 운동권의 흐름을 보면 1980년대 중후반 NL과 CA(제헌의회)가 대립하는 구도였다가, 1987년 6월항쟁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거치면서 CA그룹이 분열해서 다수파는 비주사NL이 되고, 소수파는 PD가 된 것이다.
  4. 1989년에 가면 'CA다수파까지 포괄하면서 엄청난 머릿수에 대중조직력이 탁월하며 자기들끼리는 무조건 뭉치는 NL' <-> '하나하나는 똑똑하고 이론에 해박하지만 조직이 분산돼있고 대중동원력이 떨어지는 PD' 구도가 성립해서 2010년 이후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노동당(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등등 모두 이 당시에 형성된 인맥구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이십몇년 전의 사고방식과 인맥에 묶여 있는 게 소위 진보진영이 계속 지리멸렬한 가장 큰 이유이다.
  5. 참고로 비주사NL이 21세기로 떨어져 나간 이후에 서울대 운동권에선 NL은 소수파로 전락했다. 총학생회 선거에선 대부분 21세기와 연대회의(PD. 현재의 전국학생행진)가 번갈아 가면서 승리하다가 2000년을 기점으로 비권이 급성장했고, NL주사 그룹은 언제나 하위권이었다.똑똑한 놈들 보기에 수령론은 레알 개소리라 전도가 안 되는 거지
  6. 극우들은 과도한 표현의 자유가 이들이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다고 헛소리를 하지만 실제로는 NL은 어정쩡한 표현의 자유를 이용하여 외부에서 그 불합리성을 지적하면 국가보안법의 뒤에 숨고, 피해자 코스프레로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7. 이들은 소위 '비주사NL'로 불리웠다.
  8. 예를 들어 재야대통령으로 불리던 장준하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고, 유신정권 당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문익환과 계훈제는 미군 통역장교 출신으로 친미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9. 참고로 1970년대까지 학생운동권들이 가장 많이 읽었다는 책이 바로 존 롤스정의론이었다.
  10.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 대장이 '한국인은 레밍' 운운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위컴 대장의 레밍발언의 내용은 '전두환 같은 독재자를 생각없이 찬양하고 떠받드는 한국인들이 있는데, 그런 인간들은 마치 레밍쥐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위컴을 인종차별주의자, 오만한 미제국주의자 등으로 까는 사람들이 많은데 명백하게 와전된 발언이다. '아메리카 트라우마'라는 문헌에서도 나오지만 위컴 대장은 개인적으로 전두환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11. 동 시기에 국무부도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을 개처럼 까고 있었지만, 냉전 상황 속에서 한반도에 친미정권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미국의 기본정책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정부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12. 사실 미 대사관을 비롯한 미 당국은 투옥된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때문에 김대중의 명줄을 잡고 있던 전두환에게 이리저리 휘둘린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찌하던 그런 속사정까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던 대학생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미국놈들도 사실 다 똑같은 놈들이었어!!"하고 외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반미가 광주이후로 터져나왔는데 어떻게 전두환은 친미정권이고 나머지 정권은 반미정권으로 생각되었단 말인지? 어폐가 좀 있고, 첨언을 하자면 그 시절 우리나라 경제성장과 민주화성장을 뒤늦게 안 미국의 잘못이 큰 점을 부정할 수 없다.
  13. 사실, NL들은 중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다. 중국이나 러시아는 강대국 파워를 가졌으면서 미국과 적대하기 때문에'. 중/러가 부당한 패권을 휘둘러도 저자세를 보이고, 중/러의 사회 체제가 아무리 봐도 독재 체제인데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중/러를 찬양하는 NL들의 행위는 너무나도 모순된다. 그저 반미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14. 그리고 밑바탕에 깔려있는 이런 극단적인 민족주의(=국수주의)가 주체사상을 사실상 파시즘으로 분류하는 근거가 된다.
  15. 친미성향의 우파 인사들 중에서도 이런 이유로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동의안 국회 표결때 한나라당 내에서도 반대표가 속출한 것도 이런 관점이다.
  16. 탈레반, 알 카에다, 다에쉬 같은 부류들.
  17. 운동권들은 민주화 운동가인 김영삼, 김대중을 지지하긴 했으나, 이 양김은 온갖 고초를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정치를 수행했다. 결국 민주주의 정권인 YS/DJ 때도 한총련 등은 결국 폭력 동반 시위를 일으켰다. 훗날이 되서야 이들은 노무현 정권 시기 힘을 얻었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대통령 중 친노 입장을 지지하며 존속한 상태이다.
  18. 사람사랑 그룹은 경기도 지역에서 특히 강세를 띄었는데 바로 경기동부 그룹이 이때부터 자신들의 후배를 지원하고 있었다. 일각에선 경기동부가 조직적으로 후배들을 포섭해서 사람사랑 그룹을 만들었다고 보기도 한다.
  19. 서울에선 고려대와 경희대가 중심이었고 2000년대 이후로는 노동자학생연대선봉대(약칭 노선대)라는 간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를 거쳐서 통진당, 현 민중연합당까지 이르고 있다.
  20. 실제 주요 선거때마다 중도층들 사이에서 야당을 찍고는 싶은데, 통진당 계열 때문에 꺼려진다는 의견이 계속해서 나왔다.
  21. 참고로 민경우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던 인물이 최근 정의당의 청년 정치인으로 각광받고 있는 조성주이다. 조성주도 학생 시절에는 주사파가 장악한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에서 활동했으나, 이후에는 NL그룹과 거리를 두고 있다.
  22. 전국연합의 전신으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있다. 전민련은 1989년 당대의 모든 재야민주화운동 세력, 사회운동 그룹이 모여서 창립했던 단체로 내부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대단히 다양했다. 전민련은 많은 활동을 하였으나 정치참여 문제를 둘러싸고 내분이 벌어져서 활동이 둔화된 상태였다. 독자 정당 창당안이 대의원 대회에서 부결되자 여기에 반발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탈한 것이다. 내부에서 비교적 이념의 색채가 옅었던 사람들, 시민운동 성향의 인물들, 그리고 명망가들이 대거 김대중계의 신민당과 노무현이 속해있던 꼬마민주당으로 이동하고, 독자정당 추친파는 민중당 창당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운동가들과 전노협(노동자), 전농(농민), 전대협(대학생), 전빈련(도시빈민) 등이 결집해서 1991년 전국연합을 창립하였다.
  23. 처음에는 100대 공약을 협상했으나, 95개만 타결되었다. 나머지 5개는 주한미군 전면철수,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 등으로 김대중이 이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단호히 거부해서 그냥 넘어갔다.
  24. 뭔가 익숙하지 않은가. 바로 한총련, 민주노동당 그리고 통합진보당 뿐만 아니라 NL계가 참여한 모든 단체들이 이렇게 망가졌다.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여러 정파들이 다함께 참여해서 공동운영하다가,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NL계가 지도부를 장악하고 패악질을 부리면서, 다른 세력들이 모두 떠나가고, 결국 대중들로부터도 고립되는...
  25. 문익환 목사는 1990년 남-북-해외 3자의 민간합의에 의해 출범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이 북의 대남공작에만 이용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또한 범민련의 친북급진 이미지 때문에 대중적인 통일운동이 힘들다고 평가하면서 범민련을 해산하고 새로운 대중적인 통일운동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서 재야와 NL계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졌는데, 정작 문익환 목사가 도중에 사망하면서 흐지부지 되버렸다. NL계 인사들은 지금도 문익환 목사를 존경하네 어쩌네 하지만 이 부분은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26. 1994년 문익환 목사가 제기한 통일운동체 논쟁과 김일성 사망, 1995년부터 이어진 고난의 행군, 1996년 연세대 사태,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 NL학생운동권의 혁신 논쟁 등이 이어지면서 NL운동과 주체사상에 대해서 회의감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다수 생겨났다. 당장 주사파의 대부인 김영환이 공개적으로 수령론을 비판하면서 주사파 활동을 포기한 것도 이 시기이다. 전국연합 간부들의 대거 이탈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한다.
  27. 당시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은 노회찬과 민주노총이 추진하던 '진보 대통령후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여기서 진보후보 권영길의 김대중 지지선언을 목표로 했으나, 잘안되니까 바로 떨어져 나가서 자신을 따르는 간부들과 함께 공개적인 김대중 지지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전국연합 중앙조직의 마지막이었다.
  28. 대표적으로 경기동부는 서울연합과 광주전남연합을 사실상 하부조직으로 거느리게 된다.
  29. 단 사전에 발표된 대의원 명단 중에 20명이 비공개였는데, 이들은 각종 공안사건으로 쫗기고 있던 수배자들로 추정된다. 특히 민주민족혁명당 사건으로 도피중이던 이석기도 명단에 있었다는 썰이 있다.
  30. 사람사랑 학생회, 노학연대선봉대(노선대)
  31. 문화운동, 계열별 학술모임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 하부 조직에서 비민주적인 운영방식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
  32. 수사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 맨 마지막 리플에 당시 사건 관련자가 달아놓은 리플이 있다.
  33.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 동아리 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이 통진당 학생위원회 출신으로 현재 민중연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건을 쉴드치던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
  34. 대표가 전 통합진보당 구청장 후보, 현 민중연합당 국회의원 후보.#
  35. 대표가 통합진보당 출신#으로 이번에 민중연합당 국회의원으로 출마#
  36.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후보들은 NL혁신이 아닌 NL자주 계열(민권연대 소속)
  37. 한총련 몰락후 한대련이 등록금 문제 등에 집중하는 것에 반발('조합주의'라고 비판)하며 한총련의 전통(?)을 지키려는 조직. 이들의 구호가 "공동선언이행, 투쟁! 반미, 투쟁!"인 것에도 한총련 강경파(소위 자주대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을 알 수 있다.
  38.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한총련 내 자주계열
  39. 취소선이 농담같지만 이게 진짜 이유다!
  40. 전형적인 통일운동 단체. 북한과의 교류, 협력 확대를 목표로 한다.#
  41. 평화/평등/표현의 자유와 같은 이야기들을 이들도 떠들지만 자기들 내부관리는 자신들 주장과 정반대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본다.
  42. 상부의 지시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제기하면 바로 조직에서 축출된다.
  43. 북한이 보여주는 행태와 똑같다.
  44. 실제로 NL계열 학생운동권은 학교나 단체에 따라서 남성우월사상이 팽배한 경우가 많다. 소송급 사건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소송방지를 위해서 개별 사안은 구글링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송방지바람
  45. 특히 NL에서 전향한 뉴라이트의 경우 숭배의 대상만 바뀐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즉 김일성 숭배하다가, 이승만, 박정희로 갈아탄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 여기에 과거에는 무조건 북한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무조건 미국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비판까지. 즉 종북반미에서 반북종미로. 세계를 폭넓게 보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좁은 시야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46. 민중연합당은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이 된 정당으로, 울산연합은 이에 크게 참여하지 않았다.